녹색평론 2008년 7.8월 - 통권 101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8년 7월
품절


큰 키에 흰 수염이 가슴까지 자란 아버지는, 사람은 배워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던 아버지는, 발목을 다치고부터 만날 술로써 세월을 보냈다. 그래서 어머니 혼자 힘으로 아들 셋 딸 셋을 다 키우셨다. 어머니는 목장이나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일자리 얻기도 어려운 시절이라 어머니는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을 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집안을 이끌어나갔다.-219쪽

막노동판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는 밥 먹을 힘조차 없다고 했다. 씻지도 않고, 밥도 드시지 않고 그대로 쓰러져 주무시는 날이 잦아졌다. 이른 아침마다 꽁보리밥을 물에 말아 드시고는 기계처럼 벌떡 일어나 일하러 나갔다. 어머니 손은 공사장 벽돌보다 더 거칠고 단단했으며, 독한 시멘트 탓에 쩍쩍 갈라진 발은 동상에 걸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다. 양말이 귀했던 때라 겨울에도 어머니는 양말을 신고 다니지 못했다. 어릴 적에 동상 걸린 내 발도 삼십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겨울철만 되며 가끔 붓고 가렵다. 그때마다 나는 동상 걸린 어머니 발이 떠오른다. 가슴이 미어지도록…-219쪽

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깊은 병으로 다 돌아가셨다. 그렇게 젊은 나이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삼십년은 더 사셔야 할 나이였다. 아버지는 술병으로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굶어서 돌아가셨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겨울밤, 나는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어머니…" 몇 번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방문을 살며시 열어보니 어머니는 벽에 기댄 채 앉아서 주무시고 있었다. 연탄불은 꺼진 지 오래되었다. 형과 누나들은 객지로 돈 벌러 가고 없는 싸늘한 방에서, 아무도 없는 쓸쓸한 방에서 어머니는 영원히 잠든 것이었다.-219쪽

어린 자식들 먹을 양식과 일밖에 모르고 살아온 어머니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한평생 옷 한 벌 사 입지 못한 어머니였는데, 한평생 화장품 한번 바르지 못하고 파마머리 한번 하지 못한 어머니였는데… 막노동판에서 새참으로 나온 빵 한 조각 목으로 넘기지 못하고 어린 자식놈들 먹일 거라고 보물처럼 싸서 집으로 가져오시던 어머니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시집살이 떨쳐버리고 싶다고 보내온 큰누님의 편지 한 장을 장롱 밑에 숨겨두었다가 틈만 나면 꺼내서 울던 어머니였다. "이년아, 시집살이 힘들면 똥도 못 눠. 똥 잘 누는 년이 무어 고되다고 야단이냐"며 밤새 혼자서 중얼거리시며 뒤척이던 어머니였다.

녹색평론 101호, 서정홍 ‘정말 고마운 스승’-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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