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보는 중동, 만들어진 역사 - 중동을 읽는 자가 세계를 읽는다! 만화로 보는 교양 시리즈
장피에르 필리유 지음, 다비드 베 그림, 권은하 옮김, 김재명 감수 / 다른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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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중동, 만들어진 역사
작가 : 장 피에르 필리유/디비드 베
출판 : 다른

한국(사람)은 미국과 유럽의 역사는 비교적 잘 알고 있지만, 중동, 아프리카, 남미 국가들의 역사는 잘 모르거나 배우려 하지 않는 지적(知的) 게으름을 부리고 있다. 왜 그럴까. 미국과 유럽이 강대국이고, 정치, 경제 분야에서도 세계의 흐름을 좌우하는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국과도 정치, 경제에서 긴밀한 관련이 있기때문이다.
한국은 미국에 정치,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한편으로 치우쳐 있으며,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도 '미국의 시각'으로 편중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수입하는 원유의 약 80%는 중동에서 오고 있다. 한국은 70년대 중동의 건설현장에 진출해 많은 기업과 노동자가 뜨거운 사막에서 땀흘려 일해 나라의 부를 키웠다. 한국도 강대국 틈새에서 어려운 일을 많이 겪고 있지만, 중동 지역은 유럽 열강과 미국 등 패권국가들 틈새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굴욕적 위치에 놓여 있다. 
중동이 평화롭지 못하면 그 피해는 곧바로 한국에도 영향이 미친다. 제3차 중동-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하자 원유 가격이 급등했고, 한국의 휘발유, 경유 가격이 폭등했던 전력이 있었다. 우리가 중동을 충분히 이해하고, 중동의 민주주의를 지지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원유 가격 뿐 아니라, 중동 여러 국가가 과거의 우리처럼 약소국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의 폭압 아래 36년 동안 지배당한 기억을 잊지 않듯 중동의 여러 나라도 강대국의 폭압으로 부족과 민족이 서로 갈등하고 적대 관계가 되고, 증오하도록 만든 역사가 있다. 그 역사를 올바르게 알고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가 중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강대국의 논리를 따라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그래픽노블은 3부작으로 구성했다. 추천사(김재영 프레시안 기자)에도 썼듯이 이 책의 내용은 1) 어떤 과정을 거쳐 미국이 중동지역에 개입했고, 2) 중동의 석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미국이 어떻게 중동 독재자와 손을 잡았으며, 3) 미국의 친이스라엘 일방주의가 어떤 문제와 갈등을 낳았는가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미국이 영국과 전쟁해서 독립한 직후부터 중동 지역의 분쟁에 개입해 미국의 이익을 확보하는 과정은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였다. 민중의 시각으로 역사를 서술한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에도 이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미국의 침략사는 미국이 독립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도 이 책의 중요한 미덕이다.

1부 1783~1953년, 열강이 만든 중동
1. 옛날이야기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전해지는 서사시를 다루고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로 알려진 이 오래된 이야기는 수메르의 도시 국가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의 영웅담을 그리고 있다. 길가메시는 신과 인간이 섞인 초인이다. 그는 강력하지만 백성을 억누르는 독재자였다. 이를 보고 천신 아누와 모신 아루루가 엔키두라는 강력한 인간을 만들지만, 길가메시는 엔키두와의 싸움에서 승리한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고, 삼나무 숲을 지키는 괴물 훔바바를 죽이는 원정을 떠나 마침내 훔바바를 죽이고 돌아온다.
길가메시는 여신 아슈타르의 유혹을 뿌리치자 아슈타르는 아버지 아누에게 길가메시를 징벌하기 위해 '하늘의 황소'를 내려달라고 요청한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하늘의 황소'도 죽인다. 그러자 신들이 엔키두를 죽였고, 길가메시는 충격을 받고 길을 떠나 영생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인간 우트나피시팀과 그의 아내를 찾아나서서 그들을 만나 대홍수에 대해 듣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다시 우르크로 돌아온다.
수메르의 전설은 기독교 설화에도 도입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기독교에서 '노아의 방주'로 알려진 대홍수 이야기는 수메르 전설로 알려졌으며, 내용도 거의 같다. 이라크에서 발견한 수메르 유적 가운데 석판이 있는데, '독수리 전승비'라고 불리는 이 석판의 한쪽에는 적들의 시체를 쌓아 승리를 기념하는 그림이 있는데, 2004년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미국 병사들이 이라크 정치범을 쌓아놓고 사진을 찍어 크게 문제된 적이 있었다. 역사는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2. 해적과의 싸움
15세기 이후 이슬람 진영은 유럽의 기독교 세력과 수많은 전쟁과 전투를 치르는데, 기독교 쪽에서는 이것을 '십자군 전쟁'이라고 말하고, 이슬람 쪽에서는 '지하드 전쟁'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쪽에서 '십자군 전쟁'이라고 명명한 것은 18세기에 등장하는데, 기독교(가톨릭) 집단이 이슬람 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초부터였다. '십자군 전쟁'에서 가톨릭 쪽의 내부 상황은 단지 이교도나 이단의 토벌 뿐 아니라 가톨릭 내부의 갈등과 긴장, 위협 요소를 바깥으로 돌리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여기에 귀족과 시민 계급의 불만을 무마하는 한편,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경제적 이익을 보기 위한 가톨릭과 각 나라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었다.
기독교 세계(유럽)에서는 11세기부터 16세기 르네상스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간을 '암흑시대'라고 했는데, 그 말은, 가톨릭의 위세가 너무 강해서 종교적 억압이 유럽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고, 이에 따라 과학, 문화, 예술, 경제 등 사회 모든 분야가 발달하지 못한 것을 뜻하는 말이다. 반면, 이슬람은 그리스의 발달한 과학, 수학, 철학을 받아들여 문명의 꽃을 피우던 시기였고, 영토도 확장되었다. 
십자군은 11세기 초 기독교도로 구성한 정예 군대가 출전한 것을 제외하면, 이후 15세기까지 점차 약탈을 목적으로 온갖 부랑자, 범죄자들이 병사로 나섰다. 더 이상 종교적 명분은 성립하지 않았고, 영토 확장과 약탈이 주를 이루었다.
중세 이슬람 진영과 기독교 진영은 바다에서도 격렬하게 전쟁을 했는데, 양쪽 모두 포로로 잡힌 사람들은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일을 하거나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노역을 했다. 19세기 초가 되면서 두 진영은 평화조약을 맺어 더 이상 해적이 상대 배를 침탈하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해군력이 약한 덴마크,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은 이슬람 해적에게 인질로 잡혀 몸값을 지불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미국이 독립한 직후, 영국은 미국이 영군 해군의 보호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제리에 알렸고, 알제리(이슬람 진영) 해적은 미국 상선을 나포해 막대한 몸값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미국 독립 직후에 발생했으며, 미국은 인구가 불과 300만 명에 불과한 작은 나라였다. 미국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있었다.
미국은 인질로 잡힌 미국인을 구하기 위해 영국 런던에서 트리폴리의 특사와 회담을 했다. 이때 참석한 미국 대표는 존 애덤스(영국 주재 미국대사), 토머스 제퍼슨(프랑스 주재 미국대사)였다. 하지만 이 회담은 결렬되었다. 1785년에 이어 1796년에도 이슬람 해적은 미국 선박을 나포해 선원을 노예로 삼았다.  1797년 존 애덤스가 미국대통령(제 2대)이 되자 미국 정부는 국가 전체 예산의 20%에 해당하는 돈을 이슬람 해적에게 주고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1801년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슬람 진영에서 요구하는 돈의 액수가 커지자 평화조약을 파기했다. 그리고 미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트리폴리의 파샤(지배자)를 처단하겠다며 함대를 출전했다. 미국이 세계 전쟁에 나선 시작이었다. 1803년부터 시작한 미국 함대의 트리폴리 공격은 무려 네 차례나 있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미국이 중동 지역에 자연스럽게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 권력자의 내분 때문이었다. 1793년 알리 카라만리가 죽으면서 장남 하산을 후계자로 지목했으나 셋째 아들 유스프가 맏형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한 다음 둘째 형 하메트를 추방하고 그의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 하메트는 이집트로 도망가서 미국 정부에 왕위를 찾는데 도와달라고 했다. 미국은 하메트와 함께 트리폴리로 진격했지만 유스프와 협상을 통해 평화조약을 맺고 전투를 끝냈다. 이후에도 미국 선박은 알제리 해적에게 여러 번 나포당했고, 1812년 미국과 영국이 전쟁을 시작해서 1815년 정전협정을 했다. 이후 미국은 1815년 알제리를 침략해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는다. 19세기 초부터 미국은 대륙의 서쪽으로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당시 영국령, 프랑스령, 스페인령 영토를 무력으로 빼앗거나 돈을 주고 매입하면서 땅을 확장했으며, 해군은 중동을 비롯해 유럽, 아프리카 등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아시아 진출은 1844년 청나라와 불평등 통상조약을 맺었고, 1854년 일본과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은 1866년 평양 대동강을 거슬러 온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고 미국 선원을 처형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1871년 신미양요가 발생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1871년 한국 군사작전, 미-한 전쟁, 조선 원정 등으로 부르고 있다.

3. 석유의 시작
미국은 19세기부터 중동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에 선교사를 파견했지만, 중동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부터였다. 당시 중동과 아프리카는 유럽 여러 나라가 식민지를 만들거나 천연자원을 약탈하고, 그보다 앞서서는 아프리카에서 원주민을 폭력으로 끌고와 노예로 팔았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1939년 석유개발권을 협의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나온 원유가 최초로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복잡하고 격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1932년 '사우디 왕국'을 건국하고 이븐 사우드가 초대 국왕이 되었다. 사우디는 미국이 정권과 나라의 안위를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고 원유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1945년 2월에 수에즈 운하로 이어지는 호수에 미국 구축함 USS 머피호에서 미국대통령 루스벨트와 이븐 사우드 사우디 국왕이 비밀 회담을 벌였고, 이후 지금까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동의 여러 나라-이란, 이라크, 시리아, 터키, 리비아 등과 미국이 긴장 관계, 적대 관계를 반복했던 것과 달리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에서 가장 확고한 친미 국가로 존재한다.

4. 쿠데타가 남긴 것들
1901년 오스트리아의 사업가 윌리엄 녹스 다시는 페르시아(이란)에서 원유 탐사를 시작했고, 영국의 지원을 받아 '앵글로 페르시아 석유회사(APOC)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이후 영국 국영 석유회사(BPC)가 된다. 1914년 영국 정부는 APOC 지분의 51%를 확보했다. 영국은 이란의 남쪽, 쏘련은 이란의 북쪽 지역을 점령해서 각각 채굴권을 확보했다. 이란 왕은 채굴권을 팔아 돈을 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란에는 영국, 쏘련, 미국 등 강대국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주둔했다.
이란의 민족주의자 모사데크가 총리로 등장하면서 원유 개발을 국유화했다. 그러자 외세(영국, 미국 등)는 모사데크를 축출하려 했지만 두 번이나 실패하자 미국은 이란의 왕에게 접근해 모사데크를 해임하라고 압력을 넣지만 샤가 회피하자 이란 내부 분열을 일으키는 공작을 벌인다. 이 사태로 이란은 심각한 분열이 발생하고, 나라는 폭동이 일어나고 내전이 발발하는 사태에 이른다. 미국은 정보기관과 군대를 동원해 이란의 정부를 전복했고, 마침내 모사데크를 몰아냈다. 

2부 1953~1984년, 미국이 만든 중동
5. 6일 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과 쏘련은 연합군이었다. 쏘련은 독일의 침략에 맞서 제2차 세계대전의 방향을 바꾸는 가장 영웅적인 전투를 치렀고, 독일군을 궤멸했다. 전투는 쏘련이 치렀고, 전쟁물자는 미국이 상당 부분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가 재편되면서, 미국은 강대국 쏘련이 중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우려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쏘련이 중동 여러 나라들과 협력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중동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집트의 가말 나세르는 1952년 쿠데타를 일으켜 군주제를 폐지하고 아랍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대통령이 되었다. 아랍 민족주의는 요르단, 시리아 등에서 지지를 받았지만 영국과 미국은 반 나세르 세력을 지원해 각 나라에서 쿠데타가 발생하거나 내전이 일어났다. 
미국 석유회사와 유대인은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를 강하게 반대했고, 나세르는 쏘련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945년 이후 유대인 시오니스트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일부에 '이스라엘' 국가를 세웠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적극 지원했지만 한편으로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프랑스에서 핵무기를 도입했다.
1967년에 미국은 이스라엘에 막대한 전쟁무기를 제공했고, 이스라엘은 중동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집트를 선제 공격했다. 이스라엘군은 전투기로 이집트를 급습해 이집트 전투기 대부분을 폭격했고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의 공군도 공격했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공격했고, 불과 6일만에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쏘련이 이스라엘에 최후 통첩을 보내고서야 겨우 전쟁은 끝났다.

6. 두 전쟁 사이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요르단에서 점령한 땅에 살던 주민을 쫓아내고 자신들이 차지했다. 프랑스와 영국, 미국은 여전히 이집트가 쏘련과 가깝게 지낼 것이라 판단해 이집트의 영향력을 줄이고, 중동에서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지원했다. 이집트의 나세르가 죽고 사다트가 대통령이 되고, 시리아에서 알 아사드가 권력을 잡아 반 이스라엘 전선을 구축했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했고, 미국의 닉슨은 이집트에 휴전을 제안했지만 사다트가 거부하자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했다. 쏘련도 이집트와 시리아에 무기와 탄약을 공급했다. 중동의 전쟁 상황과 미국, 쏘련의 개입을 두고 보던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왕은 미국에 석유를 공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다른 중동 여러 나라들도 석유 수출을 중단했다. 이로 인해 세계는 심각한 석유 파동을 겪게 된다.
유엔은 이스라엘에 휴전하라고 요구했지만, 이스라엘은 전쟁을 계속할 의지를 보였다. 그러자 쏘련이 무장하기 시작했고, 핵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을 보였다. 미국은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스라엘을 강하게 압박했고, 이스라엘은 휴전 협정을 맺었다.

7. 1979년
미국은 이미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쓰라린 기억이 있었고, 중동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중동의 평화가 유지되길 원했다. 이 시기에 미국대통령은 지미 카터로 그는 이집트의 사다트와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를 미국으로 불러 비밀협상을 벌였고,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하지만 이란에서는 호메이니가 주도하는 혁명이 발발했다. 호메이니는 시아파 종교지도자로, 팔레비에 반대했다 쫓겨나 터키로 망명했으며 외국에서도 계속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이란으로 들여보내 이란 혁명을 일으켰다. 호메이니를 추종하는 학생들이 이란의 미국대사관을 습격해 미국인 인질 66명을 붙잡아 행진했다. 미국 정부는 미국에 있는 이란 자산을 동결하고, 이란에서 석유 수입을 중단했다. 인질들은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하는 날 풀려났다.
이 해에 여러 이유로 쏘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다. 쏘련은 아프가니스탄의 권력자를 교체했지만, 반 쏘련을 외치는 민족주의 성향의 반란군(지하드)이 등장했다. 미국은 이 반란군을 지원했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부호 빈 라덴이 이때 파키스탄에 들어와 아프가니스탄 반란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8. 레바논 내전
레바논은 중동에서도 특이하게 이슬람보다 기독교 세력이 큰 지역이다. 여기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는 원래 레바논 땅보다 더 넓은 지역-시리아 땅을 포함한-을 국경으로 설정했는데, 이것이 내전의 원인 가운데 한 요소로 작용했다.
여기에 초기에는 기독교도가 51%였던 지역이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30% 정도로 줄어들게 된다. 이슬람교도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종교적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1975년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베이루트의 교회를 습격해 기독교도를 살해하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앞세워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게릴라, 레바논까지 공격하도록 했다. 이스라엘,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전쟁을 두고 미국, 프랑스, 쏘련이 협상을 벌였고, 1982년 전투는 멈췄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지원했고, 레이건은 이스라엘이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을 공격하길 희망했다. 이스라엘은 베이루트의 난민촌을 습격해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후에도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원해 중동 지역을 분쟁과 전쟁 지역으로 만들었고, 쏘련도 시리아 뒤에서 반미, 반이스라엘 투쟁을 하는 아랍 민족주의 집단을 지원했다.

3부 1984~2013년, 새로운 질서와 싸움
1990년 이라크의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미국은 이라크가 사우디아라비아도 침공할 것을 두려워했고, 곧바로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 공격했다. 미국의 개입으로 중동 지역의 여러 나라가 반발하고,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에 맞서 이라크를 지원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연합국을 결성했는데, 중동지역에서는 시리아, 모로코, 이집트가 미국 편을 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는 후세인을 반서구, 반미에 맞서는 영웅으로 칭송했다.
미국은 50만 명의 군인을 이라크에 투입했고, 그 전에 공중 폭격으로 이라크 전역을 폭격했다. 이라크군은 궤멸당했고, 후세인은 휴전협정에 싸인했다. 후세인은 전쟁에서 졌지만, 이라크에서는 반란군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미국에 끝까지 저항하자는 결의를 다진 강경파 집단이 반란을 주도했다. 하지만 후세인의 정부군이 반란군을 진압했고, 이때 많은 쿠르드족이 터키로 도망했다. 쿠르드족은 자기 민족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미국을 도왔다.
19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정부는 오슬로에서 비밀 회담을 열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인정하는 협약을 했다. 하지만 하마스(팔레스타인 이슬람 저항운동단체)는 이 협약을 거부하고, 대 이스라엘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했고, 수단에서는 빈 라덴이 알카에다를 구축하고 있었다.
1998년 8월 빈 라덴은 케냐와 탄자니아에 있는 미국대사관을 공격했다. 이슬람 무장세력 탈레반도 빈 라덴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미국 본토를 공격하자는 결의를 다졌다. 미국의 클린턴은 성추문이 터지자 여론을 이라크로 돌렸다. 
2001년 미국에서 9.11 폭탄 테러가 발생했고, 미국은 빈 라덴이 배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빈 라덴을 쫓는 한편,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며 이라크를 침공해 후세인을 체포, 처형했다. 이후 오바마 정부에서 빈 라덴을 추격해 끝내 빈 라덴도 사살했다. 
중동 지역의 분쟁과 내전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조장한 면이 많다. 여기에 중동 지역의 복잡한 상황-종교, 인종, 국경 문제 등-이 겹치면서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석유가 나오는 지역이라는 특수성까지 결합해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금도 시리아는 내전을 치르고 있으며, 같은 종교인 이슬람교도임에도 교파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학살하고 있다. 종교적 극단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내전이라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터키, 러시아, 이스라엘 등 주변 국가들까지 끼어든 상황이다.
중동 지역에 언제 평화가 정착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너무 오랫동안 분쟁 지역이었고, 강대국의 먹이로 버려진 약소국가의 고통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지금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도 '한국전쟁'이라는 참담한 경험을 이미 했으니,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은 막아야 한다는 것을 이 그래픽노블을 통해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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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0-01-04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마루프레스 2020-01-06 18:3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자꾸 생각나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송아람 지음 / 미메시스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제목 : 자꾸 생각나
작가 : 송아람
출판 : 미메시스

미메시스의 그래픽 노블. 만화책을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만화가 예전과는 다른 갈래가 나왔다는 것을 말한다. 만화는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며 창작물이지만, 그동안은 수준이 낮은 장르로 여겨왔다. 이것은 만화에만 국한한 것은 아니다. 소설도 흔히 삼류소설이라는 말이 있듯이 수준이 낮은 모든 창작물은 비주류로 묶여 천대받아왔다.
그러던 만화가 언젠가부터 '그래픽 노블'로 분류되면서 당당하게 고급한 예술작품으로 팔리고 있다. 같은 만화임에 분명하지만 소위 말하는 '대본소 만화'나 '공장 만화'가 아니라 '작가주의' 만화를 지향하기 때문이고, 그만큼 예술적 성취를 이루고 있는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그래픽 노블은 특히 유럽에서 창작이 활발하다. 미국여행 때, 서점에 들러서 그래픽 노블을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기대보다' 종류가 많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오히려 한국에서 유럽과 한국, 중동, 미국 등 세계 여러나라의 그래픽 노블을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어서, 나처럼 그래픽 노블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 좋은 환경이 아닐까 한다.

그래픽 노블의 장점은 소설과 만화의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설(이야기)의 구조와 만화(그림)의 수준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수준이 낮으면 그래픽 노블의 자격을 잃게 된다. 모든 만화가 다 '그래픽 노블'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야기와 그림의 수준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픽 노블에서 핵심은 '그래픽' 즉 그림이다. 그림과 이야기가 모두 훌륭해야 하지만, 그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두 말이 필요없다. 그래픽 노블 작가는 만화가와 소설가를 섞어 놓은 듯한, 그 둘의 장점을 모두 갖춘 부러운 존재들이다.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그래픽 노블 작가로 활동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들의 능력이 퍽 부럽다.

이 만화는 송아람 작가의 장편 그래픽 노블이다. 웹툰으로 연재한 것을 책으로 묶었는데, 그래서인지 만화의 특징인 네모칸이 없다. 게다가 무려 600쪽이 넘는 분량이어서 만화지만 읽기가 만만찮다. 내용은 청춘남녀의 연애 이야기를 다룬 것인데, 주인공들이 만화가라는 점에서 자전적 요소가 있어 보인다.
주인공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하고 진지한 시간들이겠지만, 시간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독자인 내 눈에는 찌질해 보인다. 청춘의 찌질함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리려 했다. 생각해보면, 청춘의 지난 날은 아름답기도 했지만, 어리석고 찌질한 부분도 많지 않던가. 자의식 과잉과 편견, 심각한 자기애, 오해와 독단 등의 감정이 분출되었고, 감정적으로 미숙했던 시기의 이야기를 보는 것은 우습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출판사의 책 소개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작품은 영화를 만드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보인다. 즉 솔직한 감정 표현들이 민망하고 불편하지만 그런 감정과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청춘들에게는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이 작품에는 여섯 명의 청년이 등장한다. 만화가 최도일, 백승태, 만화가를 지망하는 장미래, 최도일의 애인 유명지, 장미래의 애인 정상인, 백승태를 좋아하는 김겨자가 그들이다.
주인공은 장미래와 최도일로 두 사람의 만남과 감정의 얽힘, 헤어지고 만남의 반복이 드라마의 중심을 이룬다. 장미래와 최도일 모두 애인이 있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린다. 장미래의 애인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으로, 건실하고 모범적인 청년이다. 장미래가 최도일에게 끌리는 마음을 들여다보면, 지금의 애인 정상인과 비교했을 때, 성격과 태도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최도일은 미래가 불안정한 만화가지만, 장미래에게는 자기 작품을 출간한 '작가'이고, 만화가를 꿈꾸는 장미래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최도일은 건실하거나 모범적인 정상인과는 사뭇 다르다.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연애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최도일과 유명지는 같은 집에서 산다. 최도일은 자기가 살던 집과 작업실의 보증금을 까먹고 유명지의 집으로 들어와 월세를 부담하며 살고 있는데, 유명지와는 초등학교 동창이자 고등학교 이후 사귀기 시작한 '오래된 커플'이다. 유명지는 최도일과 결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최도일의 변심에 충격 받는다. 
만화가를 지망하는 장미래가 최도일 블로그에 댓글을 남기고, 최도일이 장미래에게 비밀 메시지를 보내면서 두 사람이 만나는데, 장미래를 만나는 자리에 최도일의 후배 백승태가 나타나면서, 세 사람의 관계가 살짝 복잡해지지만, 백승태가 장미래에게 집적거리는 건 연애를 시작하는 젊은 남성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미시적이고 디테일한 개인의 생활과 감정을 깊이 천착하고 있어 독자가 공감하고, 감정이입하기 좋은 작품이다. 독자의 시각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말과 태도는 독자 자신의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것이 보기 좋거나, 바람직하다기 보다, 숨기고 싶고, 답답하고, 짜증나고, 감추고 싶은 이야기일 수 있다. 창작에 몰입하는 이유는, 이렇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작품과 창작물은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의 위치, 시각, 가치관, 세계관으로 해석하고 감정이입하게 된다. 
이 작품이 청춘남녀의 연애 이야기를 담고 있어, 연애를 하는 청춘남녀라면 보편적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조금 더 사회적 맥락을 생각하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청년, 미래가 불투명한 청년, 사회적 입지를 다지지 못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청년들이 한편으로 복잡한 연애감정을 드러내거나 감추면서, 존재의 불안과 삶의 고민, 자아의 분열과 타자를 의식해야 하는 분열적 감정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열린 결말로 끝나는 것은, 주인공들이 가진 불안과 불투명한 삶, 미래를 보여준다. 이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것이다. 바닥이 흔들리던 청년의 삶도 나이가 들면서 점차 단단해지고, 생활인으로 변해가는 자신을 보며 한편으로 안도하고, 한편으로 삶의 단조로움, 삶의 지겨움, 삶이 구질구질함을 떠올리며 한숨 쉴 때도 있을테다. 
어떤 사람은 성공할 것이고, 누구는 여전히 단조로움 삶과 생활의 무게에 짓눌려 있을 것이며,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단칸방 월세에서 전세로, 아파트로 옮겨가며 중산층이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런 '멀지 않은 미래'가 다가오기 직전의 삶을 살고 있는 청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들은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자본주의'를 숨쉬고 있고, 자신의 예술행위를 '경제적 가치'로 인정받아야 하는 삶을 살지만, 그것을 의식하지는 못한다. 모든 문제는 '개인적'이며,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개인주의'는 '민주주의'와 같은 정도로 중요하며, 이 순간만큼은 체제나 구조보다 '개인의 삶'이 더 중요한 시기라고 여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Sur-reslism)'의 면모를 보인다. 청춘은 이루지 못할 꿈을 꾸며, 구체적 현실을 감각하지 않고, 이상과 꿈을 좇아 달리는 추상적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물론 육체는 물리적 공간과 시간에 갇혀 있지만, 청춘의 이상과 꿈은 비현실의 세계에 머문다. 작가는 리얼리즘을 구현하려 했으나, 작품 속 세계는 현실을 초월하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주인공들은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며, 작가와 결별하는 지점을 건너간다. 훌륭한 작품일수록 작품의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데, 이 작품에서 작가는 주인공들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기 전에 작품을 끝낸다. 이제 주인공들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고, 결정할 것이다. 이 작품의 결말이 열려 있는 상태로 끝나는 것은 작가가 만든 주인공들의 운명에 더 이상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미래는 최도일을 만나기 전의 모습과 최도일과 연애를 하면서 달라지는 모습에서 내면의 성장이 보인다. 질투와 초조함으로 자기 중심을 잃었던 과거와는 달리 최도일과의 관계가 삐걱거리면서 오히려 스스로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출간한 작가'라는 이름으로 외부에서 자기를 찾으려던 장미래가 멀고 먼 길을 돌아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할 때, 장미래는 성장한다. 이제 장미래는 연애 또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성 작가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뿌리를 내린다는 점에서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의 존재가 자기정체성을 찾아나서는 새로운 길에 서는 모습을 보인다. 독자는 장미래가 걸어갈 미래를 응원하고, 희망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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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 아트?
엘리너 데이비스 지음, 신혜빈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제목 : 와이 아트?
작가 : 엘리너 데이비스
출판 : 밝은세상

독특한 이야기 구조를 보여주는 그래픽노블이다. 제목부터 독자에게 질문한다. '왜 예술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도 아니고, '왜 예술인가?'라고 묻는데, 독자는 당연히 이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 미셀 푸코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두고 작은 제목으로 작은 책 한 권 분량의 비평을 썼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파이프 그림 아래 필기체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 있는데, 그림보다 이 글씨가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실제로 푸코도 그림으로의 '파이프'보다는 텍스트로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 주목하고 있다. 여기서 텍스트는 이미지 기호로 작동하는가, 아니면 문자 기호로 작동하는가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 작품(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파이프 그림과 글씨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기호이며, 둘 사이의 관계는 실제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푸코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분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이러니와 알레고리에 관한 철학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미지로써 파이프는 관객에게 '파이프'라는 시각적 판단을 내리도록 유도한다. 관습과 경험에 따라 관객은 그 이미지를 '파이프'라고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파이프'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파이프'가 더 이상 '파이프'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익숙한 사물은 낯설어지고, 기존의 상식과 개념은 파괴된다.

이 책(와이 아트?)도 시작이 난해하다. '왜 예술인가'에 답하기 전에 예술 작품의 종류를 알아보자고 하면서, '색상'을 말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림은 흑백이다. 분명 주황색, 파란색, 주황&파란색을 말하지만 실제 그림은 흑백이다. 이것은 역설(irony)이다. 
뒤이어 크기에 따른 작품, 가면, 가면, 거울, 먹는 것, 감추기, 끔찍함 등에 관한 설명이 나오고, 아홉 명의 예술가가 등장한다. 돌로레스, 리처드, 마이크, 주롱, 소피아, 마케일라, 트와이스투, 제니퍼, 호세는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 작품을 만들고 있는데, 퍼포먼스를 하는 돌로레스는 사람들에게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관객은 그 말에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하는 관객들이 생기고, 작품의 진실성이 사라진다고 생각한 돌로레스는 관객을 피해 여행을 떠나고, 상어에게 한쪽 팔을 잃지만, 다시 상어를 쫓아가 잡아먹자 팔이 자라고, 상어이빨이 생긴다. 이것은 분명한 은유(metaphor)다. 돌로레스의 팔을 뜯어 먹는 상어는 '예술'을 상징하며, 잃어버린 팔은 '예술성' 또는 작가의 창작욕, 상상력이다. 돌로레스가 상어를 잡아먹자 팔이 자라고, 상어이빨이 생겼다는 것은, 고갈된 작가의 창작성과 상상력을 되찾았다는 의미다.
아홉 명의 작가가 모였을 때, 이들은 전시 준비를 한다. 하지만 비가 쏟아지고, 전시장의 작품은 망가진다. 지붕과 벽이 바람에 날아가고, 하늘에서 거대한 손이 내려와 집을 들어올린다. 모두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할 때, 마이크가 작은 섀도박스를 들여다보고, 이들은 극적으로 구출된다. 안전하고 쾌적한 곳에 도착한 그들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돌로레스는 작은 인형을 만들기 시작하고, 다른 작가들도 작은 집 안에 들어가는 인형과 물건을 만들어 넣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었던 전시장의 작품을 작게 만들어 배치한다. 그 작은 인형-작가 자신의 아바타-들은 스스로 움직이며 더 나은 작품을 만들고, 바람직한 세상을 만들어 간다. 
이때, 돌로레스가 갑자기 그 작은 집의 지붕을 열고, 바람을 일으키고, 물을 뿌리고, 작은 집을 들어서 흔든다. 그리고는 작은 인형들을 향해 '용기가 무엇인지 보여줘'라고 말한다.

소설 형식에 '액자 소설'이 있다.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이 액자소설로 알려졌는데, 액자 소설은 보통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 가운데서도 이 작품처럼 이야기가 순환구조로 되어 있는 것은 '순환적 액자소설'로, 이야기가 무한반복할 수 있는 구조다. 순환구조를 갖는 이야기는 주로 '시간'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시간 이동(time slip)을 통해 같은 환경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작가가 앞에서 '왜 예술인가?'를 말하면서 작품의 분야와 종류를 설명했는데, 작품 속 아홉 명의 작가가 경험하는 것은 자신들도 알 수 없는 운명이었고, 자기 작품을 망친 거대한 힘이 사실은 바로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창조와 파괴가 서로 다르지 않은 일련의 창작 행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출판사에서 책을 보내주었다. 아무 연락 없이 책이 도착해서 조금 의아했는데, 내가 그래픽노블 비평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출판사에서 알았나보다. 좋은 책을 읽는 즐거움에 대한 최소한의 답례로 리뷰를 쓴다. 이런 기회는 얼마든지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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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은 개뿔
신혜원.이은홍 지음 / 사계절 / 2019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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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평등은 개뿔
작가 : 신혜원, 이은홍
출판 : 사계절

이 책을 읽고 나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은, 이 '만화책'이 페미니즘 교과서로 채택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이 '만화책'으로 기초, 기본수업하고, 좀 더 깊이 있는 내용은 요즘 페미니즘 책들이 많이 나와 있으니 교재가 부족할 걱정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을 리뷰하기 위해서 책을 따로 인용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 책에 얼마나 공감하는가를 잘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다. 이 책의 작가 두 사람은 나와 같은 세대-몇 살 적다-를 살아온 사람이어서 내가 페미니즘을 배운 경로와 경험이 두 사람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봐도 좋겠다.
작가 부부는 결혼하기 전부터 이미 진보적 삶을 살고 있었고, 한국사회에서는 0.1%에 속하는 부자, 아니 '평등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들은 대학에서 '운동권'이었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진보, 합리, 이성의 태도를 갖춘 청년이었다. 그들이 결혼하고도 이런 태도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 다짐하지만, 현실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남성인 이은홍은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진보적인 삶을 산다고 자부하지만, 알고보니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사회의 관습에 길들여져 기득권의 공기를 숨쉬며 살아온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나도 80년대 중반-군대에서 전역하고-부터 선배들과 함께 사회과학 공부를 했다. 그때 정치경제학, 유물론철학, 민중사학 등을 깊게 배웠지만 '페미니즘'은 따로 공부하지 못했다. 지금도 소위 '386 운동권 세대'가 비판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독재정권 타도와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투쟁했지만, 정작 그들의 의식은 여전히 가부장, 남성우월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내 선배들도 그랬다. 그들은 누구보다 진보적인 사람들이었고, '언드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그래서 경찰의 수배를 당해 하루가 멀다하고 도망다니던 투사들이었지만, 그들이 나중에 결혼해서 보여준 태도를 보면서, 나는 그들이 얼마나 전근대적 사고방식에 매몰된 사람들인가를 알게 되었다. 물론 그들도 이론적으로는 남녀평등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해하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 체화하지 못했다. 일상에 녹아들지 못하는 이론이나 주장은 오히려 독이 된다. 
80년대에는 '페미니즘'을 배우고 싶어도 마땅한 교재도 부족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선명하게 기억하는 책이 바로 아우구스트 베벨의 '여성론'이었다. 이 책은 진보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였지만, 아마 읽지 않은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마르크스, 레닌의 저작을 읽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고, 여력이 없던 때였으니, '여성론'을 읽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 '여성론'을 읽고 페미니즘의 기초를 배웠으며, 이후 페미니즘 이론을 스스로 공부했다. 그때만 해도 '페미니즘'이라고 부르지 않고, '여성이론'이나 '여성학'이라고도 했는데, 어떤 이름이든 남녀평등에 관한 저서나 논문들이 발표되기 시작했고, 케이트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 같은 책도 번역되어 나오고 있었다.

남성으로서 페미니즘 이론을 배우는 것이 '진보적 태도'라고 한다면, 나는 이론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삶에서 '페미니즘'을 체득했다. 내게는 누나가 있는데, 처음에는 한 명이었다가 내가 결혼하고 나서 누나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매우 복잡한 집안 사정으로, 내게는 세 명의 배다른 형과 두 명의 누나가 있는데, 부모가 살아계시고,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 가족을 돌보고, 살 수 있도록 온갖 힘을 쓴 건 누나였다. 큰 누나는 나와 13년 차이가 나는데, 실질적으로 '엄마' 노릇을 했다. 
나는 자라면서 늘 엄마와 누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았고, 남자로, 장남으로 아쉬움 없이 생활했다. 우리집은 매우 가난했음에도, 나는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의무가 없었다. 밥하고, 반찬 만들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온갖 시시콜콜한 집안 일에서 해방된 상태로 지낸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큰 특혜였는지 전혀 몰랐다.
어머니가 계실 때는 어머니가 모든 집안일을 했고, 어머니는 내가 50살이 될 때까지 비교적 건강하게 살다 돌아가셨다. 결혼을 하고도 집안일은 어머니 차지였다. 아내는 결혼 전부터 직장을 다녔고, 지금도 다닌다. 반면 나는 결혼 전부터 프리랜서였고, 결혼하고 나서 직장에 취직했다가, 그마져도 몇 년 지나서 다시 백수가 되어 집안 일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직장에 다니지 않는 내가 집안일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나 역시 무려 50년을 어머니의 그늘에서 살며, 온갖 혜택만 받고, 살림은 해본 적이 없어서 서툴렀다. 게다가 내 의식에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은 남자가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고,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먹고 사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여성문제 일반에 관해서는 비교적 평등하고 진보적 태도를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의 생활에서는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성우월주의자, 가부장사회의 기득권을 누리는 남성이었다. 
다행히 아내는 나를 이해해주었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아내가, 집안일을 비롯한 자질구레한 일은 내가 맡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역할이 나뉘었다. 내가 지금도 늘 마음에서 누나들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것은, 누나들이 동생인 내게 베푼 것에 아무런 보답을 못하고 있는 것 때문이다. 누나들은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사회적 존재로 인해 집안에서도, 사회에서도 이중, 삼중의 억압과 불평등, 착취를 당하며 살았다. 내 아내도 여성이면서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 역할을 하고 있는데, 나는 어머니, 누나, 아내의 삶을 보면서, 세상을 실제로 이끌어 가는 것은 여성인데, 여성이 사회적으로 억압당하고, 불평등한 위치에 있으며, 남성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놓여야 하는가 의문을 갖게 되었다.

페미니즘을 성(sex) 대결로 몰고가려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다. 특히 청년 남성들이 여성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에서 학교교육이 근본에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교육이라면, 어릴 때부터 생물학적 성(sex)과  사회적 성으로서의 '젠더'를 구분해서 가르쳐야 하고, 성과 제더에 관한 어떠한 편견과 차별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한다.
이 현상-여성혐오-을 좀 더 본질에서 들여다보면, 이것은 사회구성원을 분리하고, 경쟁과 대립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세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대가족제도를 해체하고, 여성의 사회참여-이 문제는 여성의 삶에 있어 장단점이 다 있다-라는 명목으로 여성의 노동력을 사회화하면서 노동자의 평균 임금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은 값싼 노동력을 사용하는 것이며, 대가족에서 핵가족, 1인 가구로 이어지는 해체의 과정은, 노동자의 개별화, 파편화를 통해 결집하지 못하도록 하고, 실업예비군(실업자)을 유지하면서 노동자 서로가 경쟁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남녀의 성(sex) 대결이 아니라, 남녀가 평등함을 지향하고, 서로 연대하며,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놓고 토론하고, 남녀의 문제보다 더 절박한 계급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적이 여성해방을 통한 인간해방이라는 점에서, 노동해방을 통한 인간해방을 부르짖는 계급운동과 본질에서 같다. 다만 (노동자)여성은, 같은 노동계급 내부에서도 남성에게 차별당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은 노동계급 내부에서 여전히 유효하며, 계급의 단결을 목표로 할 때, 페미니즘은 남녀평등과 계급평등을 함께 달성해야 하는 막대한 임무를 띄게 된다.
여전히, 페미니스트 내부에서는 '페미니즘'에 관한 전선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페미니즘의 스펙트럼은 무지개보다 더 다양해서, 최초 페미니즘이 백인여성의 인권을 향상하는 것으로 시작한 것처럼, 여성 내부에서도 계급, 인종, 민족에 따른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남녀평등은 물론 인종, 민족의 차별이 없는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착취-자본가의 착취든 남성에 의한 여성의 착취든- 없는 세상에 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맞서야 할 상대는 거대한 적인 '자본(가)'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남성은 사회구조의 기득권자로 분류되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남성도 자신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여성은 남성이라는 기득권세력과도 맞서야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런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착취구조인 자본의 억압과도 싸워야 하는 이중의 고난을 겪고 있다. 많은 남성이 여성의 동지로 함께 싸우고 있지만, 강력한 체제권력(자본)을 움직이는 세력은 여전히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의 수호를 위해 법과 제도를 악용하고 있으며, 현실을 호도하고, 일부 남성을 끌어들여 여성을 적으로 만들고 있다.
봉건시대에는 '유교'라는 지배논리를 통해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를 옹호, 유지해 왔으며, 자본시대에는 형식적으로 남녀평등을 말하면서도 제도와 의식은 여전히 봉건제에 머물러 있는 남성들로 인해 여성은 현대 민주주의체제에 살면서도 실질적 삶은 봉건제적 억압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 만화는 한국 현실에 맞는 페미니즘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적어도 유럽이나 북아메리카 나라에 사는 부부들과는 다른 인식을 갖고 있을 것이고, 그것이 '한국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덜 '개인주의적'이며, 덜 '민주주의적'이고, 집단주의와 유교의 찌꺼기가 여성을 억압하는 것은 물론, 남성까지도 자유롭지 못하게 옭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만화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부부, 남녀의 평등을 가로 막는 체제의 힘은 곧 남성지배권력과 '자본'의 결합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남녀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곧바로 거대한 남성지배권력과 '자본'에 대항하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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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진화, 신의 출현 - 초기 인류와 종교의 기원
E. 풀러 토리 지음, 유나영 옮김 / 갈마바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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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진화, 신의 출현

진화론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다윈부터였고, 다윈은 신학을 깊이 공부하기도 했지만, 진화론을 공부하고, 나이가 들면서 자발적으로 무신론자가 되었다. 이후 수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생물학은 물론 물리학, 천문학에서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들을 무수히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신을 믿는 사람들은 여전히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주장하고, 과학이 제기한 문제와 증거를 부정한다.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한 진화론자들의 책을 읽어보면 신의 존재가 없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신-특히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은 과학과 진화론에 관한 책을 읽지 않거나 알려진 진화의 증거를 부정한다.
이 책은 그동안 수없이 발표된 진화이론에서도 특히 뇌의 진화에 초점을 맞추어 인류의 진화에서 뇌의 역할을 다루고 있다. 뇌의 진화와 신의 출현은 인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한데, 신의 존재와 창조를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책의 모든 근거를 부정할 것이지만, 신을 믿는 사람들이 부정한다고 해서 객관적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을 믿으며 과학의 증거를 부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고 거짓과 위선과 왜곡의 암흑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불행할 뿐이다. 
이 책은 뇌의 진화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인류의 진화에서 뇌의 역할은 어떠한지, 뇌의 발달과 함께 이성(지각)과 자기객관화, 시공간의 감각, 죽음의 인식, 죽은 조상에 관한 제사와 예식의 발달, 조상신의 등장, 토테이즘의 발달, 절대신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인류의 뇌는 지금도 진화를 계속하고 있으며, 인류의 뇌 발달과 이성의 발달은 결국 존재하지 않지만, 과거에 인류가 만든 '신'의 존재를 스스로 사라지게 만들 것임을 예고한다.

1부 신이 만들어지기까지

1. 호모하빌리스: 더 영리한 자아
읽은 내용을 시간의 순서대로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포유류는 지금부터 약 2억년 전에 지구에 나타났다. 그 뒤로 1억4천만년 동안 큰 변화가 없었으며, 이 시기는 백악기, 쥐라기 같은 거대 파충류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그러다 지금부터 약 6천5백만년 전, 지구 바깥에서 날아온 소행성이 충돌하면서 거대 파충류는 절멸하고, 작은 체구의 포유류가 급격하게 진화하기 시작한다.
포유류는 다양하게 분화했고, 약 6천만년 전에 최초의 영장류가 출현했다. 이후 영장류는 수백 종으로 늘어나고 현재도 235종이 존재하고 있다. 약 3천만년 전에 신대륙원숭이라고 알려진 집단이 독자적인 진화의 길을 걸었고, 약 2천5백만년 전에는 구대륙원숭이가 같은 길을 걸었다. 인류와 가장 가까운 대형 유인원은 오랑우탄, 고릴라가 독자적으로 진화하면서 약 1천8백만년 전부터 분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약 6백만년 전에 우리와 가장 가까운 조상이 침팬지에서 갈라져 나왔다.
인류의 직접 조상인 호모하빌리스는 약 230-140만년 사이에 살았다고 하는데, 이들의 뇌용량은 그 전의 유인원보다 약 50% 더 컸다고 한다. 최초의 유인원 조상이 등장해서 약 4백만년이 흐르고 등장한 이들은 정교한 깬석기를 만들 줄 알았으며, 집단생활을 했다. 뇌 크기의 변화는 집단생활과 변증법적으로 진화한 것으로 보이며, 호모하빌리스의 초기에 소수의 집단생활을 통해 협업이 발생하고, 생존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수명이 늘어나고, 먹거리의 확보도 독자적 활동보다는 소수집단의 활동이 유리한 것이 경험으로 축적되어 집단생활이 쭉 이어지면서 집단생활에 필요한 뇌 활동이 뇌의 크기를 크게 만들었을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인류의 뇌가 왜 갑자기 커졌는지 분명한 원인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 시기의 인류는 다른 유인원보다 똑똑했지만, '자기 의식'을 갖지 못했기에 이성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2. 호모에렉투스: 인식하는 자아
호모에렉투스는 약 180만년 전부터 30만년 전까지 150만년 정도 존재한 인류다. 이 시기에 약 50만년 정도 호모하빌리스와 공존하던 기간이 있었고, 호모하빌리스, 호모에렉투스를 비롯해 다른 인종이 더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호모에렉투스의 가장 큰 특징은 최초로 불을 사용한 인류라는 점이다. 불의 사용은 약 79만년 전부터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으며 40만년 전에는 인류가 불을 보편적으로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다. 이런 증거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호모에렉투스가 불을 사용했으며, 이것은 인류의 진화에서 매우 획기적이고 중요한 분기점에 해당한다.
호모에렉투스는 호모하빌리스보다 뇌의 크기가 더 컸고, 도구를 다루는 솜씨도 더 정교했다. 이들은 돌의 양쪽에 날을 세우는 돌도끼를 만들었으며, 나무창과 돌촉을 만들어 사냥했다. 이들이 집단생활을 했다는 것은 명확한 증거가 있고, 돌도끼, 돌창의 사용은 인류보다 큰 동물-들소, 야생마, 사슴, 곰, 코끼리 등-을 사냥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대형 동물의 사냥과 불을 연결하면, 이들이 동물의 고기를 불에 익혀 먹었음을 알 수 있고, 동물의 가족과 뼈를 이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익힌 고기를 먹으면 소화가 더 잘 되고, 체중이 늘어난다. 과학자들의 실험에 의하면, 날고기만 먹인 쥐보다 익힌 고기를 먹은 쥐는 몸무게가 평균 29% 더 증가했다고 한다. 불에 익힌 고기는 세균과 기생충을 죽이고, 먹기 편하며, 맛도 더 좋았기 때문에 호모에렉투스의 체구는 이전 인류보다 더 컸다. 
불은 인류가 추운 곳에서 견딜 수 있도록 했고, 다른 동물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으며, 음식을 익혀 먹어 건강에 도움이 되어 생존력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들판이나 동굴에서 불을 밝히면서 깨어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노동하는 시간도 함께 늘어났다. 이들은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사냥에 필요한 도구는 물론, 동물의 뼈를 가공해 작은 바늘까지 만들 정도로 점차 손의 기능이 섬세하게 진화한다.
불을 사용하면서 호모에렉투스는 아프리카를 떠나 북쪽으로 이동하는데, 이들이 '북경원인'과 '자바원인'이다. 이들이 집단생활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대륙 이동인데, 집단으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아프리카보다 추운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불로 어둠을 밝히며, 음식을 조리해 먹으며 북쪽으로 이동했다.
집단생활을 했다는 것은 이들이 '자아 인식' 단계에서 임계점을 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즉,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자아 인식' 단계가 있어야만 '나'와 '너'를 인지하고, 협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집단이 사냥을 할 때, 먹이를 나눌 때, 여느 동물처럼 '나'만을 생각한다면 집단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이미 다른 동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도구를 사용하고, 불을 사용할 줄 아는 인류였기에 집단생활을 하는 단계에서는 이미 '자기 인식'이 어느 정도 뇌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3. 옛 호모사피엔스(네안데르탈인): 공감하는 자아
호모에렉투스가 존재하던 시기인 약 70만년 전에 인류는 다시 여러 종으로 진화했고, 이들이 지역에 따라 '호모하이델베르겐시스', '호모네안데르탈렌시스', '호모로테시엔시스', '호모플로렌시스', '데니소바인' 등으로 명명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네안데르탈인'은 약 23만년 전부터 4만년 전까지 존재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들은 이전 인류인 호모에렉투스보다 뇌 용량이 훨씬 컸으며-1480입방센티미터-이 크기는 현생 인류보다 크다. 체격도 커서 키는 평균 165센티미터, 몸무게는 약 84킬로미터로 당당했다. 유럽 지역에 살던 이들은 추위를 견뎌야했기에 불을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주로 동굴에서 살았다. 이들은 동물의 털가죽으로 보온하고 집단사냥을 했으며 물고기와 새도 잡아먹었다.
네안데르탈인은 뇌와 체격이 커지긴 했지만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이전 인류보다 월등하게 발달하지는 못했다. 다만 이들이 이전 인류와 다른 점은 집단생활을 하면서 함께 생활하는 동료를 돌보는 행동을 했으며, 죽은 동료를 매장하는 관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만의 생존이 아닌, 함께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나 아닌' 동료의 상태를 돌보고, 주검을 매장한다는 의미는, '타인과의 공감 능력'이 있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이런 공감은 '자이인식이 발달하지 않고서는 타인에 대한 인식이 발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미 이들은 자아인식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동발달 단계에서도 2세에 자아를 인식하고, 4세가 되면 타인에 대한 인식이 생긴다고 한다. 타인에 대한 인식은 '내가 나와 타인을 생각하는 인지공감'을 타인도 나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동물들은 무리를 짓되,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고 공감하는 능력은 없다. 오로지 인류만이 '자아와 타인의 자아'를 공감한다.
타인의 마음을 공감하는 정서가 발달하면서 '신'의 존재를 만들어내는 심리적 싹이 트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미 인류는 무수히 많은 자연현상을 보면서 살았지만, 그것이 왜,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으므로, 그런 현상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설명하고,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알 수 없는 절대적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시기에는 '신'의 존재는 어떤 형태로도 나타나지 않았다.

4. 초기 호모사피엔스: 성찰하는 자아
10만년 전부터 인류는 구멍 뚫린 조개껍데기 목걸이로 치장할 줄 알았고, 불에 달군 다음 떼어낸 세련된 석기와 깬석기가 아닌 간석기(돌을 갈아서 날카롭게 만든 무기나 도구)를 만들었으며, 활과 화살도 만들어 사용했다.
초기 호모사피엔스는 아프리카를 떠나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지구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이 아프리카를 떠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화산 폭발이 원인의 하나로 꼽힌다. 이들은 오만, 이란, 파키스탄, 인도를 거쳐 말레이반도로 내려가서 미얀마, 태국, 말레이시아를 거쳐 인도네시아로 들어갔고, 여기서 배를 만들어 파푸아뉴기니,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진출했다. 이때가 약 5만년 전이었으며 해안선을 따라간 집단과 또 다른 집단은 북쪽으로 올라가 러시아 쪽으로 가서 유럽과 아시아로 다시 나뉘어 진출했다.
이들은 세련된 도구, 구멍 뚫린 조개껍데기, 몸에 맞춘 의복, 적토에 새긴 음각, 동물과 비슷하게 조형한 바위, 배를 이용한 바다 항해를 할 정도로 지능이 높아졌고, 조직적인 집단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인류는 '자기객관화' 즉 현대심리학용어로 '이차 순위 마음심리' 상태에 도달한다. '나'를 '나'로 인식하는 것이 일차 순위 마음심리라면, '나'를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아동발달에서도 6살 정도가 되어야 가능하다. 자기를 객관화한다는 것은 자기성찰을 할 수 있음을 뜻한다. 
자기성찰과 언어의 관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인류가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면 자기성찰, 자기객관화가 이루어진 이후라는 것은 분명하다. 언어의 발달 역시 더디게 이루어지므로, 약 5만년 전부터 인류의 이성이 자기성찰을 시작했다면, 이 시기에 언어도 원시적 상태로 등장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자기 성찰은 '단지 아는 것을 넘어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것, 단지 아는 것을 넘어서 자기가 안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초기 호모사피엔스는 6살 아이 정도의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인류는 무생물이나 자연현상에 인격을 부여해 의인화하는 성향을 보여왔다. 초자연현상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다고 생각했고, 동료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자연의 형태와 현상에는 저마다 생명이 있다고 믿는 토테미즘의 탄생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아직 '신'은 인류의 뇌에서 출현하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으며, 인류가 더 높은 차원으로 진화해야 가능한 영역이었다.

5. 현생 호모사피엔스: 시간 속의 자아
이제 우리 인류의 직접 조상인 현생 호모사피엔스가 등장한다. 약 6만년 전, 아프리카에 존재한 그들은 동쪽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파푸아뉴기니, 서쪽으로는 유럽까지 퍼져나갔다. 이들이 바로 직전의 인류와 다른 점은 돌로 만든 도구가 아닌, 동물의 뼈로 만든 도구를 썼다는 점이다. 동물의 뼈는 돌보다 훨씬 가공하기 어렵지만, 세밀하게 가공할 수 있었고, 작은 도구를 만들 수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시기의 인류는 바느질을 해서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낚시바늘, 밧줄, 그물, 바구니 등을 만들었고, 램프를 만들어 불을 켜 사용했다.
몸을 치장하는 장신구가 매우 발달했고, 무덤에 넣는 부장품의 종류와 형태도 세련되었으며 다양했다. 또한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예술활동을 꼽는다. 동굴의 채색벽화가 가장 유명하지만, 판화, 점토모형, 조각 등 여러 종류의 예술품이 발견되었다. 4만년-1만5천년 사이에 인류는 매우 다양한 형태의 예술행위를 기록했고, 이 시기에 인류는 '자전적 기억'을 갖게 된다. 이것은 과거의 기억을 통해 미래 행동을 예상, 예측, 계획하는 능력으로, 삶의 지평이 엄청나게 확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집단 사냥은 더욱 계획적으로 바뀌어 치밀한 전략으로 동물을 사냥할 수 있었고, 사냥의 성공 확률도 높아졌다. 인류는 더 많은 집단이 모여 큰 무리를 이루며 살기 시작했고, 그 바탕에는 성공 확률이 높은 사냥 덕분에 먹거리가 충분히 확보된 것과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다음에 더 나은 방식으로 먹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자기 성찰과 자전적 기억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이해하게 되면서, 가장 구체적으로 맞닥뜨린 경험은 '죽음'이었다. 죽음은 그동안 인류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으며,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지금의 인간도 그렇지만 '죽음에 대한 불안은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보편적이며 피할 수 없는 불안'이다. 특히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현생 인류는 몹시 당혹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죽은 사람은 움직이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부패한다. 그 전에는 방치한 주검이 동물에게 먹혔지만, 자기와 타인을 구분하면서 동료의 죽음을 방치하지 않고 매장을 했으며,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죽음과 꿈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현생 인류는 꿈에 의미를 부여할 능력이 생겼다. 이미 훨씬 전의 인류도 꿈을 꾸었겠지만, 꿈을 인지하고 해석할 능력이 없었던데 반해, 현생 인류는 자각과 성찰, 자전적 기억을 통해 꿈을 해석할 수 있게 되고, 이는 곧 다른 사람의 죽음과 꿈을 연결해 해석하는 방식으로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나타났다.
꿈은 죽은 사람과 만나는 통로였으며, 이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영혼이 존재하고, 영혼의 존재는 곧 신의 등장을 예고한다.

2부 신의 출현

6. 조상과 농경: 영적인 자아
약 1만2천년 전부터 인류는 새로운 도약을 한다. 수렵채집에서 정착생활과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농사를 짓는 건 필연적으로 한 곳에 모여 정착생활을 했다는 증거다. 이 무렵에는 이미 대규모 주거집단이 형성되었고, 늑대를 길들여 개로 키우기 시작했고, 다른 동물도 가축화해서 기르고 있었다. 주거가 안정되고, 집단 거주시설이 늘어나 공동체 생활을 영위할 때 가장 필요한 건 서로간의 의사소통이었다. 이때 이미 기초적인 언어 사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원시적 종교형태인 토템이 등장했다.
종교의 시작은 조상숭배일 것으로 추정하며, 죽음의 공포를 넘어, 죽은 조상의 영혼이 자신을 지켜준다는 믿음을 간직하기 시작했고, 그런 믿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주술과 종교행위가 시작되었다. 조상숭배는 이동 생활을 할 때는 무덤을 만들거나 죽음을 기억할 만한 동기가 부족해서 불가능한 행위였지만, 정착생활을 하고, 농사를 짓고, 농업생산성이 높아져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면서, 먹고 사는 문제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게 된 인류가 꿈과 결합한 죽은 선조의 영혼을 받들기 시작하고, 죽은 자를 매장하면서 많은 부장품을 넣고, 집단의 우두머리가 죽으면 특별히 돌을 높여(고인돌) 쌓아 추모하는 방식으로 이어지다 마침내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기 시작한다.
약 8천년 전, 원래 인간이었던 집단의 존경받는 사람이 죽자 사람들은 그의 훌륭한 점을 기리기 시작한다. 농사를 잘 짓거나, 사냥을 잘 하는 그 선조는 후세의 존경을 받으며 서서히 신격화한다. 자연현상도 마찬가지로 비나 바람, 천둥, 태풍 등도 인격화를 거쳐 신격화한다.
조상의 혼령과 신은 초기에 정확히 구분되지 않았고, 초자연현상과 신의 결합도 미미한 정도였다. 원시부족이 혼령을 구분하는 방식은 다양했으며, 좋은 혼령과 나쁜 혼령을 구분했고, 좋은 혼령은 조상의 혼령이며, 나쁜 혼령은 주로 불길한 자연현상에 대입했다.
잉여 농산물이 발생하면서, 집단 내부에서는 위계질서가 발생했고, 이것이 계급의 시작인 것은 마르크스가 밝혔다. 이때 가장 높은 계급은 제사장으로, 조상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었다. 제사장은 잉여 농산물을 공물로 받아 생활하므로 노동을 하지 않는 최초의 인류였고, 조상신들 가운데서도 위계를 만들어 가장 높은 조상의 혼령이 곧 '신'이 되었다.

7. 정부와 신들: 유신론적 자아
현재 과학이 밝힌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신'의 존재는 6천5백년 전 메소포타미아에 존재한 물의 신 '엔키'다. 인류가 문자를 발명해 기록한 최초의 신이기도 하다. 메소포타미아는 인류 최초의 문명이 탄생한 곳으로 알려졌고, 한 지역에 최대 3만5천 명이 거주할 만큼 큰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이 지역은 물이 가장 귀해서 최초의 신이 '물의 신'인 것은 필연적이다.
이 시기에는 '물의 신' 외에도 '풍요의 신', '죽음의 신'처럼 다양한 신이 존재했고 이들을 위한 사당이 있었다. 이때는 이미 농업을 비롯해 다양한 직업이 나타났고, 경제 활동이 활발했다. 넓은 지역을 지배하는 집단의 우두머리(왕)는 권력과 재물을 독차지했고, 이들은 거대한 신전을 지어 조상을 신처럼 숭배했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을 신으로 승격시키기도 했다.
이들이 만든 신들은 그리스 신의 모델이었으며, 온전히 인격체를 가진 '인격신'이었다. 신을 모시는 사원과 제사장은 권위를 가졌고, 이들은 넓은 땅을 소유해 그곳에서 많은 잉여 농산물을 거뒀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사원 주변에 사는 농민들이었으며, 이들은 사원에 종속되었다. 메소포타미아처럼 스스로 문명을 일으킨 곳이 바로 이집트와 중국 등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거의 동시에 문명이 발생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충분한 고고학적 자료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다.
이집트에서도 수 많은 신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농업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다른 지역도 농업이 문명의 시작이었으므로, 신의 발명은 농사와 관련이 관련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농사와 함께 인류에게 가장 큰 문제는 죽음을 해석하는 방식이었다. 죽음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기에 가장 신비하고 두려운 현상이었다. 이것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매개자가 필요했고, 죽음을 초월하는 존재 즉 신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부족국가에서 도시국가로, 다시 더 큰 규모의 집단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전쟁이 발발했고, 전쟁으로 사라진 집단과 승리한 집단에서는 신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지거나 더 위대해졌다. 인구는 꾸준히 늘어나고, 거대한 도시가 발생하며, 지배자들은 예전보다 훨씬 강력한 신의 존재가 필요했다. 권력자는 신의 대리인으로 행세하며, 권력을 휘두르고, 신의 이름으로 집단을 지배했다. 2천8백년 전에서 2천2백년 사이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종교가 탄생했다. 유교, 힌두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가 나왔고, 유대교는 이후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나뉜다. 
종교가 발달하는 원인은 다섯 가지 측면이 있는데, 1) 죽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2) 심리적 지원, 물리적 보호, 사회복지, 일자리, 경제적 향상의 기회를 제공하며, 3) 정치적 지배와 연계하고, 4) 추종자들의 경제, 정치, 군사적 성공에 의해 결정되며, 5) 오래된 종교의 신들과 신학을 차용해서 일어난다.
유대-기독교의 '인류 창조', '대홍수', '바벨탑' 등은 메소포타미아 종교에서 가져 온 것이다. 또한 '유일신'과 '동정녀'는 조로아스터교에서 차용한 것이다. 
8. 신의 기원에 대한 다른 이론들
찰스 다윈은 '만물에 스며든 영적 힘에 대한 믿음은 보편적인 것으로 보이며, 영적 힘에 대한 믿음은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쉽게 이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추론하기까지 인류의 추론 능력에 상당한 진보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약 1만년 전이고, 이후 인류는 급격하게 신을 만들었다. 
농업과 정착생활로 삶이 안정되면서 조상숭배가 발생하고, 인류의 인지 능력과 자각의 발달로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되자,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조상의 영혼을 신격화했다. 또한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신도 늘어나고, 전쟁을 통해 신의 존재는 사라지거나 통합되거나 더 큰 힘을 갖게 되었다.
뇌 과학에서 밝힌 이런 일련의 진화 과정 이외에도 몇 가지 이론들이 있는데, 사회적 이론으로 에밀 뒤르켐은 신과 종교의 기원이 사회구조와 제도에 있다고 했다. '친사회적 행동 이론'은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으니 선한 행동을 한다는 것으로, 마음이론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심리적 이론과 위안 이론'은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가 제시했다. 심리적 위안을 얻고자 하는 욕구에서 신과 종교가 발생했다는 주장이다. '패턴 추구 이론'은 지적, 인지적 위안을 준다. 종교는 체계적인 의인화, 즉 인간이 아닌 사물이나 사건에 인간적 특징을 부여하는 것으로, 의인화는 종교적 경험의 핵심이라는 주장이다.
'신경학적 이론'은 종교나 신을 믿는 것이 뇌의 특정한 활동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 뇌의 특정부위를 자극하면 유체 이탈 경험을 비롯해 다양한 비현실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 증명되었다. '유전적 이론'은 신과 종교를 믿는 것이 유전적 요인에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이론은 너무 쉽게 반박당했다. 
신은 진화의 산물일까, 부산물일까를 놓고 학자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인류의 진화에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적응하는 것이 생존할 확률이 더 높다고 한다. 반면 신은 인류 진화와 뇌 진화의 부산물이라는 주장에서, 신이 자전적 기억 획득의 부산물이며, 신의 출현 이후 인구가 증가하고 사회가 조직화되면서 종교가 뒤따랐다는 입장이다.
어떤 이론이든, '신'이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 인류가 믿는 신은 고작해야 지구 전체도 아니고, 자기 부족의 삶에만 있었다는 것을 보면, '신'은 분명 인류가 창조한 것이 맞다. 또한 어떤 신이든 '인격신'인 것을 보면, 인류가 신을 닮은 것이 아니라, 인류가 자신을 닮은 신을 만든 것도 분명하다. 이 책을 읽으면, 신은 뇌의 발달을 포함한 인류의 진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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