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 박스 - [초특가판]
제시카 랭 출연 / 미디어체인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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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뮤직박스를 보고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는 예전에 대한극장에서 한 심문과 얼마전 텔레비젼에서 한 미싱(실종)을 보았다. 정치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가브라스 감독의 작품은 언제나 설레임과 기대를 가지게 된다.

이 영화 뮤직박스도 나온지는 오래되었는데, 벼르고 있다가 지난번 텔레비젼에서 하는 것을 녹화해 놓았다가 이제 보게 되었다.

영화의 주제는 간단하다. 전범으로 기소된 아버지를 변호사인 딸인 변론을 해서 무죄를 끌어내지만 마지막에 뮤직박스에서 그 옛날 아버지가 특수부대에서 자행한 사진을 발견한 딸이 아버지를 고발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영화가 나오기까지, 그리고 우리에게 보여주기까지 그 긴 시간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유럽에서는 아직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자기 국가와 민족을 팔아먹은 전범들을 찾기 위해 전세계를 뒤지고 다닌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독립운동을 한 애국자들과 그 후손들은 배우지 못하고 끼니도 끓이지 못하는 처참한 현실이고 식민지 시대에 일본 제국주의놈들에게 아부하고 동족을 학대한 친일파놈들은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현실이다. 민족정기니 뭐니 떠들기는 하지만 아직도 이 사회가 공평하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쁜 짓을 한 놈들은 잘먹고 잘살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기 몸을 던져가며 싸운 분들은 굶주리고 고생하는 이 더러운 현실이 바로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반민특위를 해체한 이승만과 일제의 악질 경찰출신인 노덕술 등이 한 짓을 보라. 그리고 만주군 출신인 박정희는 또 어떤가. 그 뒤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의 총칼은 어떤가. 동족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대통령이 된 전두환과 그 일당들이 그렇고 그 밑에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날뛰던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이 바로 뮤직박스에서 전범자 마이클 라즐로(텔보트;전쟁때는 미쉬까)와 같은 인간들이다. 그들이 이 땅과 이 민족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도대체 기가 막히고 분노가 치밀어 영화를 보면서도 어쩔줄을 몰랐다.

그들의 파렴치함은 바로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데 있어 극치를 이룬다. 자신이 사랑한다고 맹세하는 자식들에게까지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라즐로.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체포해서 온갖 고문을 다한 이근안같은 인간들이 바로 그런 놈들이다. 자기 자식에게는 다정하고 멋있는 아버지로 보이길 원하면서도 다른 집 자식들을 물고문, 전기고문으로 잔인하게 죽이는 그런 극도의 이중성.

이땅에는 아직도 라즐로같은 인간들이 부지기수로 많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떵떵거리며 잘 살아가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함이 있는 것이다. 뮤직박스를 보면서 인간의 이중성에 치를 떨었고, 아버지를 고발하는 역사적인 장면에서 그나마 위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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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오브 원(1DISC) - [할인행사]
존 아빌드슨 감독, 모건 프리먼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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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The Power of One]을 보고

  한 사람의 힘.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이런 말을 많이 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시절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과 시대일수록 한 사람의 힘이 갖는 의미는 각별할 것이다. 우리 속담에도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열 사람이 한 숟갈’이라는 말이 있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은 별 것이 아니지만 그 작은 힘이 모여서 큰 힘을 이루는 것을 우리는 역사라고 하고, 민중의 힘이라고 한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지만 87년의 그 뜨거운 태양을 무색하게 한 울산 현대중공업의 노동자 행진을 떠올릴때마다 벅찬 가슴이 된다. 그 언덕을 넘어, 땅에서 이글거리며 올라오는 열기에 흔들리는 노동자들의 물결, 그것은 거대한 폭포보다도, 그 어떤 해일보다도 더 무서운 힘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우리는 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너무나 선량하고 쓴 소주 한잔에 눈물을 흘릴줄아는 순박한 아저씨들이라는 것을. 
 한 사람의 힘을 생각할 때마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이름이 떠오른다. 바로 노동열사 ‘전태일’.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도 그렇다. 그를 역사에서 아주 작게 평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큰 물결을 이루는 원천이 되는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있다. 박종철, 이한열, 임수경, 문익환, 문규현신부, 권인숙씨, 그리고 또 많은 한 사람, 한 사람들. 
 정작 영화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나는 마음이 벅차오른다. 그들을 생각하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내 존재도 잠시 잊고 희망찬 미래를 그려보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 [The Power of One]은 어느 백인 소년의 이야기이다. 우리에게 그리 흔하지 않은, 흑백갈등과 인종차별,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이야기이다.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흑백분리주의 - 아파르트헤이트 - 를 실시하기 18년 전인 1930년, 남아프리카의 한 영국인 농장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 꼬마의 이름은 PK, 그러나 본 이름은 피터 필립 케네스이다. 피터가 어려서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그를 독일인 기숙학교에 보낸다. 그러나 그 기숙학교에서 피터는 온갖 모욕을 받으며 생활한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아프게 되고 잠시 집에 돌아와 있을 때, 흑인 유모는 어린 도련님을 위해 두려움을 이겨내는 굿을 흑인 무당에게 맡긴다. 흑인 무당은 어린 피터를 위해 토속적인 제사로 줄루족 용사의 투혼과 용기를 피터에게 불어넣어준다. 피터는 이 용기를 가지고 다시 기숙학교로 돌아가지만 곧이어 세계제 2차 대전이 발생한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고 온 유럽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자 이곳 머나먼 아프리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독일식 기숙학교에 유일한 영국인이었던 피터는 독일 학생들에게 테러를 당하고 목숨까지 잃을 위험에 처하나 선생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나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어머니마져 돌아가신 뒤였다. 
 부모를 모두 잃고 할아버지에게 간 피터. 그곳에서 그는 스승 ‘닥’을 만난다. 닥은 독일인으로 피아니스트였으며 선인장을 기르는 선량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피터는 그곳에서 부모를 잃은 슬픔을 조금씩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피묻은 발톱은 이곳까지 찾아와 독일인 선생 닥을 영국인들이 가두어 놓게되자 피터는 선생을 따라 감옥을 드나든다. 형무소 소장은 닥이 비록 독일인이지만 선량하고 재능이 있음을 알고 그를 위해 많은 편리를 제공한다. 꼬마 피터는 자유롭게 형무소를 드나들며 선인장도 키우고 음악도 배운다. 스승 닥은 피터를 위해 복싱을 가르친다. 피터의 복싱 스승은 도둑질을 한 죄로 40년간 형무소 생활을 하고 있는 흑인(이름이 생각안나네요.)이었다. 그는 간수에게 온갖 박해와 협박과 위협을 당하면서도 동족 흑인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존경받는 흑인이었다. 
 피터는 어려서부터 흑인유모와 함께 자랐기 때문에 흑인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그의 부모들도 흑인들을 노예처럼 다루지 않았고 존중해주었으며 그것은 그들이 모두 평등한 인간이라는 당연한 생각을 갖게 했다. 그러나 피터가 자라면서 환경은 더욱 나빠졌다. 백인들은 흑인을 인간취급도 안하고 마구 대했으며 짐승보다 못하게 학대했다. 
 어린 피터의 눈에도 이런 불평등은 선명하게 각인되어 갔다. 형무소 안에서 복싱을 배운 피터는 흑인들을 위해 편지도 써주고 친절하게 말도 하며 조금도 그들을 차별대우하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흑인들은 어린 피터에게 ‘레인메이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나즈막히 노래를 불렀다. 이 ‘레인메이커’는 흑인 부족들 사이에 오래된 전설인데, 그들을 이끌어줄 지도자와 같은 인물을 말하는 것이다. 피터는 흑인들이 자신을 레인메이커라고 부르는 것에 거부감과 부담을 느끼지만 흑인들은 피터를 믿고 따른다. 
 어느날 형무소에 높은 사람이 방문하는 것을 계기로 형무소장은 닥에게 음악회를 열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피터의 복싱스승인 흑인이 자신들, 흑인을 위한 음악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고, 닥과 피터는 그들을 위한 음악을 만든다. 이 음악은 흑인들 모든 부족을 단결하게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었으며, 가사는 피터의 복싱스승이 한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 가사는 간수들을 빗대어 ‘이랬다 저랬다 겁장이 바보들’이라는 것이었다. 
 음악회날, 흑인들이 모이고 닥과 피터는 높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훌륭하게 음악회를 갖는다. 흑인들의 합창과 춤이 그들을 단결시키고 밝은 미래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사이에 피터의 복싱스승은 그를 노리고 있던 간수에게 걸려 맞아 죽는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피터. 그는 교내 복싱 챔피언이 되고 학장에게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 국비장학생이 되도록 추천을 받는다. 그러나 현실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복싱장에서 본 아름다운 소녀 마리아에게 반한 피터는 그가 극우파의 지도자 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까이 하고, 그녀 또한 영국인이고 고아인 피터를 좋아한다. 피터는 본격적으로 복싱을 배우기 위해 마을에 있는 전문 체육관을 찾아가서 테스트를 받고 도장에 다닌다. 그 체육관 관장을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 건강한 시민이었고 그 체육관에는 흑인들도 함께 운동을 했다. 하지만 당국의 인종차별정책은 더욱 심해지고 흑인들은 도시 변두리의 빈민가에서 아무런 혜택도 못받은 채 소외 당하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알게 된 피터는 친구들과 흑인들을 가르치기 위해 야학을 하는데, 이를 알고 있는 당국에서는 철저하게 방해한다. 이런 소동 속에서 피터가 좋아하던 마리아가 경찰에 맞아죽고 체육관은 경찰들에 의해 불에 타고 만다. 모든 것이 피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던 중, 마침내 옥스퍼드 대학 입학허가서가 나오고 그는 떠나기 전에 흑인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가 흑인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흑인 친구들의 말과 자신의 생각을 정하고 옥스퍼드 대학을 포기한다. 그럴때 경찰의 습격을 받는다. 흑인 마을이 불타고 경찰들은 마구잡이로 총질을 하며 흑인들을 학살한다. 그 가운데서 피터를 붙잡으려는 집요한 추격이 시작되고 흑인들은 피터를 살리기 위해 죽어간다. 마침내 마을을 벗어나 흑인 친구와 어디론가 떠나는 그의 뒷모습은 떠오르는 태양에 의해 검붉은 실루엣으로 사라진다. 
 영화의 줄거리를 얘기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다보니 줄거리를 쓰고 말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리차드 라이트의 소설 [막다른 골목(원제:검둥이 소년)]이 생각났다. 소재는 다르지만 흑인이 등장하고 억압 당하고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는 주제는 같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이 단순하고도 명확한 진실이 어째서 문명사회라고 하는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왜곡되고 무시 당하고 모욕 당하고 파괴 당하는지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자칫, 자칫이 아니라 매우 가능성이 많은 이야기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라스꼴리니꼬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독일의 게르만 민족이나 유대의 선민의식처럼 자신들만 잘나고 우월하다고 믿는 그 어리석음이 바로 인종차별과 같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코미디 - 아주 잔인하고 비열한 코미디 -를 연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살바도르]나 [니콰라과의 영웅들], [플래툰], [하얀전쟁], [JFK], [미싱(실종)], [미션], [뮤직박스],[Z]와 같이 인간의 역사적 범죄행위를 담은 영화들이 우리에게 말하고있는 것은 매우 단순하고 간단하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파괴자들은 바로 인간을, 민중을, 도구로 생각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간단하게 처치해버릴 수있는 소모품. 그리고 그러한 사고방식은 바로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권력. 권력을 장악하고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약육강식의 논리는 바로 짐승의 논리이지 사람의 논리는 아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모순은, 인간이 신을 만들어낼 정도로 어리석다는데 있다. 즉, 정신적 사고방식을 통해 세계를 창조하고 문명을 발달시키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한편 동물적 본능을 내세우고 동족을 학살하며 그 피를 나누어 마시는 잔인함을 보이기도 한다. 야누스니, 프랑켄쉬타인이니, 지킬박사와 하이드, 늑대인간이니 하면서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합리화를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중성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이중성이 곧바로 동족을 학살하거나 인종을 차별하거나 인간 그 자체를 도구화하는 논리는 궤변이며 학살자의 자랑일 뿐이다. 
 민족과 인종 사이에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차별은 없어야 한다. 서양의 문명이 발달한 나라 사람들이 볼 때,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미개하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열등한 민족은 결코 아니다. 영화 속에 나오는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흑인들의 노래를 들으며, 백인들의 억압 속에서 굴종을 겪으며 그래도 낙천적이고 착한 마음을 가진 그들을 보면서, 인간은 잘나고 똑똑하고 많이 배우고 가진 것이 많고도 악한 것보다는 아무 것도 가진 것없고, 배운 것없고, 어리석어도 자연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정있는 사람들이 더 훌륭하다는 것을 배웠다. 
 문명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히틀러의 망령을 믿는 독일의 극우주의자들이 외국인을 학살하고 있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당했던 박해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더 잔인하게 행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인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다. 한 사람의 힘이 세계를 변화할 수 있다는 진리를. 인간의 싸움은 역사를 거스르는 소수의 반역자들과 그들을 이겨내고 역사를 밀고가는 다수의 민중들 사이에 있으며 남아프리카와 같이, 남미의 제3세계 국과들과 같이, 아시아의 독재국가들과 같이 억압받는 민중들이 많은 곳에서는 바로 그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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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VHS] 그대 안의 블루
알라딘(디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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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대안의 블루]를 보고

 뤼미에르에서 영화 [그대안의 블루]를 보았다. 한국 최고의 영화배우 안성기씨와 강수연씨가 주연하는 이 영화는 예전에 만들어졌던 많은 한국영화와는 몇 가지 점에서 눈길을 끈다. 팜플렛에서는 이 영화의 성격을 설명하는 글이 없었다. 다만, 이 영화가 얼마나 정성을 들여 만들어졌으며 영화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프로근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자화자찬의 목소리 뿐이었다. 이 영화의 성격을 드러내는 글은 단 두 줄, ‘모던하게, 사랑을 자극적으로, 생을 말한다!’라는 카피가 그것인데, 이 또한 너무 관념적이어서 영화의 성격을 단번에 짚어내기는 어려웠다. 
 우리가 서양영화를 보게 될 때면 신문광고나 영화간판에 써있는 광고문구만으로도 그 영화의 성격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집시의 시간]이나 [토토의 천국], 그리고 [그대안의 블루] 같은, 서로 다르지만 그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 영화들도 있기는 하다. 
 영화의 주제가 분명한 것이 좋은 이유는 관객들이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 갈등을 일으키지 않아도 좋다는 데 있다. 물론, 영화의 주제가 분명하다는 것이 곧바로 영화가 좋다라는 뜻은 아니다. 관객의 이해와 감동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는 바로 주제에 있다는 뜻이다. 최근에 국내에서 개봉된 영화 가운데 내용이 있는 영화로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한 사람의 힘(The Power of One)]을 들 수 있다. 영화를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의 의미와 무게를 충실하게 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가지는 미덕을 살리고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그대안의 블루]는 어떤가. 이 영화에는 주제가 없다. 아니, 주제는 있지만 모호하다. 이 영화를 이루는 골격은 여주인공 유림의 자아발견과 존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디스플레이어라는 직업의 두 남녀가 보여주는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애정, 일에 대한 맹목, 그리고 무엇보다 화려한 세트로 대충 넘어가려는 심미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이런 말이 있다면-의 겉치레 뿐이었다. 
 아마도 페미니스트로 불러주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진 남자주인공 호석과 여자는 사랑으로서 완성된다고 믿는 유림 두 사람은 모두 전문직업인으로서 프로근성을 가지고 있다. 호석의 24시간 고용제의를 받아들이는 유림은 호석을 통해 일을 배우고 자리를 잡아나가지만 호석이 가지고 있는 우울함과 늘 갈등을 겪는다. 이 스토리 역시 마지막에는 유림이 자기 자리를 찾는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지만 스토리의 진부함과는 관계없이 나는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어설픈 점을 짚어보겠다.
 이 영화가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남녀 주인공이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라는데 있다. 내가 좋아하기도 하는 이 두 남녀 배우는 그래서 연기 또한 흠잡을 곳이 없다. 그러나 두 주인공을 빼고 나머지 조연이나 액스트라로 등장하는 사람들의 연기는 정말 수준 이하였다.
 먼저, 호석의 친구이며 학원원장이 유림을 불러세울 때 대사를 보자.
 “아가씨, 디스플레이 배울래요?”
 이렇게 무식하게 말하는 원장도 있던가. 그리고 그 자세하며 억양 등은 참으로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기본이 되어있지 않았다. 대사의 촌스러움때문에 영화의 맥이 끊어지는 것같을 정도였으니까. 이런 장면은 곳곳에서 나왔다. 락 까페에서 유림이 혼자 술을 마시며 춤을 추고 있을 때, 함께 있던 젊은 남녀들의 모습은 마치 지금 영화를 찍고 있다라는 것을 거칠게 드러내고 있었다. 어색한 몸짓, 무표정, 그래서 느껴지는 촌스러움. 또한 호석의 작업실에서 누드사진을 찍던 모델여자의 단 한마디 대사는 어떤가. “더 이상 힘들어서 못올리겠어요.” 단 한마디의 대사인데도 원고를 읽는 것같은 억양과 표정이 참, 해도 너무한다 싶었다. 옷만 벗기면 대순가. 대사 한마디 제대로 연습시키지 않고 찍어대는 안일함이 보이는듯 해서 짜증이 났다.
 그리고 호석이 가지고 있는 그 비싼 매킨토시 컴퓨터는 꼭 컴퓨터가 없어도 될 정도록 간단한 작업이었다. 컴퓨터로는 아무런 작업도 하지 않으면서 무슨 대단한 기계인양 소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컴퓨터를 조금 아는 사람에게는 한심하게 보였다. 실제로 유림이가 하는 일의 거의 전부는 책상에서 이루어졌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저 근사하게 보일려고 셋트를 꾸며놓은 것이 눈에 너무 띄었다. 영화 속에서 소품들은 나름대로의 분명한 역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제작하는 사람들이 모를리 없을텐데, 그 화려하고 파격적인 실내장치와는 사뭇 달라보여서 형식미를 앞세우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영화가 포스트모던하다고 느낀 것가운데 하나가 영화 [러브스토리]를 의도적으로 베꼈다는 것으로 확인된다. [러브스토리]에 사용된 음악과 그 배우들의 행동을 유림과 유림의 애인이 그대로 흉내내고 있는데,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특징이다. 그리고 그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것도 부모가 불분명한 사생아처럼 족보에도 없는 것을 무슨 대단한 이즘인 것처럼 포장하고 선전해대는 상업주의자들의 상품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갈 것은 주인공 호석의 편집증적인 관음증에 관해서이다. 호석은 자신이 단 한번도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여성에 대해서 편견을 가질려고 하지 않았으며 유림이 곤란할 때 자신이 모두 도와주는 행동을 통해 여성을 평등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호석이 어쩐 일인지 유림이 하는 행동을 모두 비디오카메라에 담아서 보관하고 있다가 유림이가 평범한 생활로 돌아오자 그 테이프를 보냄으로써 다시 유림을 가정에서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왜일까. 
 그리고 호석이 가지고 있는 비밀, 바로 엑스에게서 자주 오는 메세지의 비밀을 이 영화에서는 끝까지 밝히지 않고 있다. 유림이 호석에게 콘돔을 쥐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이 성립된다면 정말 그것은 비밀이 아니라 호석의 매매춘을 보여주는 행동을 확인하는 것이나 아닌지. 
 이 영화는 페미니즘을 그린 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문직업인의 치열한 삶을 그린 것도 아니다. 그저 두 남녀가 만나서 감각적으로 사랑하고 헤어지는 통속적인 내용을 포장만 그럴듯하게 해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영화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영화상의 기법이나 편집, 제작진들의 디자인, 촬영기법 등 일반인들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내용들뿐이고 모호한 주제와 어수선한 영화를 아름답게 포장한 영화에는 속지말아야 한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두 배우가 나온 영화임에도 이렇게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영화가 다양한 장르와 제작기법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해서가 아니다. 현대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성 상실에 대해서 영상적 미학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까지도 알겠는데, 과연 그런 효과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아직 리얼리즘에 충실한 작품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현재의 수준에서 너무 앞서가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관객들이 이런 내용을 충분히 수용하고 있다면 분명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관객들도 이 영화가 어렵고 뭐가뭔지 모르겠다고 한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욕심이 있고, 또 그런 의욕이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분명하지만 관객의 감성을 서둘러 끌어당기려는 노력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것은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고 안하고의 차이와는 별개의 것이다. 아주 좋은 영화도 흥행에 실패할 때도 있고, 그저 그런 영화도 흥행에서는 성공할 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제작자가 시대의 흐름과 동시대 사람의 의식, 사회의 모순, 갈등구조 등을 보다 사실적으로 풀어나가는 데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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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턴 애비뉴 - 초특가판
네오센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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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웨스턴 에비뉴를 보고

 

한국인의 이민은 100년전부터 있어왔다. 최초의 서양이민은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장 노동자였으며 조선민족의 비참한 역사적 현실과 맞물리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특히 70년대의 이민 붐은 팍스아메리카나를 꿈꾸는 미국인들과 그들에게서 무조건적인 희망을 느끼며 비판없이 받아들였던 양키문화에 이끌린 환상의 이민이었다. 무조건 미국에만 가면 한밑천 잡고 잘 살 수 있다는 허황한 꿈을 가지고 너도나도 미국으로 건너갔다. 가난한 조국보다는 배부른 거지로라도 외국에서 살고싶은 그 참담한 현실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분단된 조국, 가난한 제3세계인 한국의 실정은 이민을 생존의 도피처로 삼을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을 만들었던 것이다. 바로 그 시기에 이민한 한 가족의 이야기가 바로 웨스턴 에비뉴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자란 매리언(수지)과 그 형제들은 자신들을 잘 키우기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부모님들의 뜻에 따르지 않고 미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스스로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부모들은 한국적(유교적) 사고방식으로 자식들을 간섭하고 갈등을 일으키며 돌이킬 수 없는 이질감을 느낀다.

동양인으로 인종적 차별이 심한 미국인 사회에서 어떻게든 완벽한 미국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이민 2세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완벽한 미국인이 될 수는 없다. 매리언은 다니던 의과대학을 포기하고 드라마공부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딸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들과의 갈등으로 매리언은 집을 나오고 만다.

미국인과 동거를 하며 스스로 자립을 하려던 매리언은 결국 실패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가운데 두순자사건과 로드니킹 사건이 서로 연결되면서 로스엔젤레스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고, 한국인과 흑인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대결이 벌어진다.

결국 매리언의 둘째 오빠와 매리언의 흑인남자친구가 총에 맞아죽고 사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 영화는 미국에 이민온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이민 1세와 이민 2세가 미국에서 각각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가는가를 나름대로 충실하게 보여주고는 있지만,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영화는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영화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상태로 진행되는 점에서 그러한데, 앞부분은 매리언의 방황과 갈등과 고통스러운 적응과정과 그 실패가 드러나는 부분이고 뒷부분은 집으로 돌아와 평온을 되찾는 매리언보다는 로스엔젤레스에서 벌어진 폭동과정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이 두 가지 상황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 관객에게 인식되고 있다. 특히 앞부분에서 지루할 정도로 계속되는 매리언의 일상사와 정사장면은 뒷부분에서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으므로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이민 2세가 미국사회에서 적응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다가 결국 실패한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서로 뿔뿔히 흩어졌던 가족들이 마침내 하나로 만나서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과정으로서의 방황인지가 분명치 않고 스토리전개에 무리가 따르고 있다.

감독이 무슨 말을 할려는지 그 의도는 짐작하겠지만, 미국사회에서 한국인들이 적응해가는 방법과 흑인들과의 갈등이 생기게 된 원인,한국인의 잘못된 점들을 보다 현실적이고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한국인과 흑인과의 갈등 부분이다. 하지만 흑인의 폭력적인 모습에 비해 한국인들이 평소에 흑인들에게 어떻게 대해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흑인들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과 유치한 인종감정도 분명 잘못된 면이지만 한국인들은 그런 흑인들에 대해 마치 백인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영화 속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매리언이 미국계 중국인 남자와 정사하는 모습이다. 이 장면의 신이 매우 길기도 하였지만 또한 적나라해서 미성년자 불가라는 딱지가 붙었던 걸로 안다. 하지만 감독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는 이 신에서도 분명하지가 않다. 핑크 프로이드의 ‘THE WALL’ 뮤직비디오가 화면에 나오고 음악이 흐른다. 그 화면에 나오는 장면은 매우 선정적인 에니메이션인데,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장면을 매우 상징적으로 느꼈는데, 미국 사회의 단면과 함께 미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동양인들의 심정도 드러내고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정사장면이 필요이상으로 길었던 것은 사실이다. 자칫하면 이 장면이 상업주의적 선정주의로 오해받을 수도 있을듯 하다. 장길수 감독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감각적인 연출기법이 이 영화에서도 가끔 등장하는데, 영화 뒷부분의 무게와 역사적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다큐멘타리 기법 - 영화의 장면에 등장하는 실제 텔레비전 장면 - 을 본다면 앞부분은 너무 가볍고 개인사적 관심에 가깝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물론, 매리언의 방황과 갈등과 고통이 반드시 개인적이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주제에 비해 가볍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가지는 의미는 작품 자체의 완성도보다는 미국의 한국인들이 어떻게 미국인화되어가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변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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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 SE
임권택 감독, 김명곤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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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화 서편제를 보고

 한 평생을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의 곡절과 구비구비가 어쩌면 그렇게도 서럽고 한스러울 수가 있을까. 가을 낙엽을 휘몰아가는 찬바람같기도 하도 새벽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같기도 하고 한겨울 문살을 흔들고 지나가는 긴 한숨같기도 한 이야기.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사람사는 모습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의 설레임으로 눈물을 삼키며 지켜봐야 했던 서편제. 복받쳐오르는 한을 삼키며 다시 인생의 숲으로 들어가는 동호와 송화의 만남과 이별을 지켜보면서 인생이, 삶이 참으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남도 판소리를 지켜가는 소리꾼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참으로 오랫만에 만난 보기드문 한국영화의 전형이다. 해방 전 식민지 시대부터 전쟁이 끝나고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까지의 역사적 배경을 깔고 판소리를 생명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한 가족의 서러운 삶의 이야기이다. 스승의 애첩과 사랑을 했다는 이유로 파문을 당한 유봉은 지방으로 떠돌며 소리를 해서 먹고 산다. 그에게는 오가는 길에 주워온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소리를 가르치기 위해 데리고 다닌다. 유봉은 어느 고을에서 어린 사내아이를 기르고 있던 과부와 눈이 맞아 달아나지만 아이를 낳다가 과부는 죽고 만다. 그후 두 아이를 키우며 소리를 가르치는 유봉에게는 오직 판소리만이 그의 삶에 있어 전부이고 최고이며 마지막 가치이자 의미있는 일이었다. 
 두 아이들이 자라면서 누이 송화는 아버지 유봉의 뜻을 잘따라 소리를 배우고 동호는 고수로 성장하지만 늘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 전쟁도 끝나고 급속하게 밀려들어오는 외세의 문화에 우리의 전통문화는 사라지고 판소리도 그 자리를 잃게 된다. 동호는 마음 속으로 사랑하는 이복누이 송화와 자신을 학대하는 아버지를 미워하다가 마침내 떠나가고 송화는 동호와의 이별로 충격을 받아 소리공부를 그만둔다. 그러나 유봉은 송화의 눈을 멀게해 다시 소리를 하도록 하고 점차 늙어가고 쇠락해가는 시대 속에서 유봉은 송화를 남기고 죽고만다. 송화는 자신의 눈을 멀게 한 것이 바로 아버지 유봉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조금도 내색을 하지않고 소리공부에만 전념한다. 유봉은 죽어가면서 이런 사실을 모두 알고, 마지막으로 서편제, 동편제를 뛰어 넘는 득음의 경지까지 이르라고 송화에게 당부한다.
 동호는 자리를 잡고 누이 송화를 찾아나서고, 구석진 산골마을 주막에서 만난 두 오누이는 소리와 북으로 서로 어우러져 그동안의 한을 푼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아름다움은 바로 우리의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것, 말로는 늘 하고 있지만 정작 무엇이 우리의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있는지는 크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형편에서 판소리의 전승을 담은 이 영화는 우리의 전통문화와 민중의 한이 어우러진 수준있는 영화였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주인공 동호가 누이인 송화를 찾아나선 것으로 이어져 마침내 서로 만나 회한을 풀어내는 것으로 끝나는데, 그 사이에 가족사이며 판소리의 흐름, 한 인간의 서럽고 기구한 삶의 궤적들이 등장한다. 특히 송화의 삶은 영화의 중간에서부터 관객의 기대와 호기심을 유발하며 계속적인 긴장과 감정의 충만함을 가져온다. 송화가 살아가는 그 참담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에 모두들 눈물을 삼키게 되고 만다. 또한 사계절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이 강산과 흐드러지는 판소리 가락이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내 마음속의 정서에 물결을 일으켰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동호와 송화의 이야기가 마치 지금의 현실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고 말았다. 지금도 송화는 저 남도의 어느 시골주막에서 자신의 소리를 듣고싶은 사람에게 한을 넘는 소리를 들려주고 있을 것만 같다. 나와 그들을 일체화시키는 이 감정은 그만큼 영화 속 주인공들의 삶이 절실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때 우리의 전통문화가 가치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버림받고 외국의 근본없는 쓰레기 문화들이 비싸게 대접받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 현상은 여전하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 우리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자리매김은 반가운 일이다. 이 영화는 판소리로 대표되는 우리 문화의 쇄락과 민중의 고통스러운 삶을 그려내고 있다. 비록 가족사적 성격을 띄고는 있지만 많은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드러내기에는 가족사만큼 전형적인 방법도 없다. 마지막에 동호와 송화가 만나고 서로 한을 풀어내는 모습 속에서 성숙한 우리 전통문화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인생은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것임을 깨닫게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영화 한편을 보고나서 그 느낌만큼 절실하게 적지 못하는 이 천박한 글솜씨가 안타까울 뿐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던가. 꼭 가서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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