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 - 아웃케이스 없음
나홍진 감독, 김윤석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추격자’를 만든 나홍준 감독의 작품.한국 영화에서 또 하나의 걸작이 탄생했다. 전편인 ‘추격자’를 능가하는 하드보일드하고 개성있는 작품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영화 도입부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긴장을 풀 수 없는 탄탄한 스토리와 속도감이 이 영화의 수준을 말한다.

엉성한 듯 치밀한 스토리는 관객에게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만든다. 어찌보면 복잡한 듯한 구성이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사건의 발단이 얼마나 단순하게 시작되었는지, 그래서 그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함 때문에 오히려 무릎을 치게 된다.

오해라고 하지만, 영화에서는 바로 그 ‘오해’ 때문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사라지고, 자신의 아내도 아닌, 내연녀와의 불륜을 복수하기 하다 비참하게 죽는 사장을 보면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마땅히 비웃게 된다.어설픈 감정은 배제하고,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사내들의 세계는 영화적으로 과장되었을 뿐, 그것이 현실과 다르다고 누가 강변하겠는가.

넥타이를 맨 정장 안에는 웃는 얼굴로 뒷통수를 치는 거대한 자본과 이윤과 비정함이 있지 않은가. 구남은 살기 위해 죽이고, 희망을 위해 살인을 한다. 살인을 옹호하거나 정당성을 부여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적어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도 있음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영화 속 인물들은 조금씩 과장되고 정형화되었지만, 우리 내면에서 잠자고 있던 본능이 이 영화를 보면서 꿈틀거리는 걸 느끼는 건 나 혼자뿐일까.

면가의 냉혹하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도끼질, 죽음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회칼을 휘두르는 한국의 조폭들과 연변의 조폭들, 피가 솟구치고 두개골이 빠개지는 잔인함, 인간의 육체를 토막내 개먹이로 던지는 끔직함, 이런 것들이 과연 영화 속만의 이야기일까.

며칠 전, 굶어 죽은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을 보자. 그리고 자기 아버지에게 맞아 죽은 세 살짜리 아기를 보자. 영화보다 덜한가? 영화는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반영한다. 영화 속에서 아무리 쾌락을 탐한다고 해서 그것이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듯이(감각의 제국), 칼로 난도질 당하고 도끼로 뼈가 빠개지는 잔인함 뒤에는 그보다 더 흉포한 세상이 있는 것이다.그런 면에서 ‘황해’는 현실과 영화를 훌륭하게 접목한 걸작이다.

개인적으로 별 다섯개에 별 다섯개를 주는 최고 작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눈물은 조작된 이미지인가?

지난 주, 텔레비전을 보다가 우연히 연예계 소식을 전하는 방송을 보게 되었다.
조용필 씨의 부인 안진현 씨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는데, 조용필 씨의 모습이 카메라에 가깝게 보이면서 줄곧 조용필 씨의 슬픔과 회한에 대해 전하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시울과 진정으로 슬퍼하는 애닲은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조용필 씨를 좋아하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아내가 아직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사실은 분명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언론에서는 일제히 조용필 씨와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과 인생에 대해 자세하게 보도하고 깊은 애도를 표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예인, 스타이니만큼 그만한 관심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나 역시, 조용필 씨의 노래를 좋아하고, 음악에 인생을 걸고 살아 온 조용필 씨를 존경한다.
하지만, 조용필 씨 본인도 아닌, 조용필 씨 아내의 죽음에 대해 온 방송과 신문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과 지면을 할애하면서 보도한 것은, 인기 스타에 대한 예우를 넘은, ‘죽음’의 상업성은 아니었는지 진지하게 살펴볼 일이다.
지난 주에 두 사람의 사망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한 사람은 앞에서 언급한 조용필 씨의 아내에 관한 보도였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두산중공업에서 분신자살한 배달호 씨의 죽음에 관한 보도였다.
죽음 자체에 가벼움과 무거움이 따로 있을 수 없고, 죽은 이에 대한 예우도 차별이 있을 수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떤 죽음에 대해 더 많은 ‘사회적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인지는 우리가 판단해야 한다.
언론에서는 조용필 씨 부인의 사망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인간적으로 접근했다. 조용필 씨 부부의 남다른 사랑, 갑작스러운 죽음, 사별에 대한 안타까움… 모든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그래서 그 소식을 보면서 눈물까지 흘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의 죽음에 대해서는 언론이 어떻게 보도하고 있는가?
단지, 늘 발생하는 산재사고처럼, 단순한 스트레이트 기사로 취급하고 있다. 물론, 이번 배달호 씨 분신자살 사건이 앞으로 두산중공업의 노사관계와 금년의 노동운동의 방향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리라는, 너무나 당연한 기사가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배달호 씨가 왜 자살했는지, 50대의 가장인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정도로 절박한 처지에 몰린 이유는 무엇인지, 그를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의 슬픔은 어느 정도인지, 그의 사람됨은 어떠했는지 등을 보도하는 언론은 하나도 없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한겨레신문]조차도 제목으로 ‘배달호’라는 이름을 넣은 적이 없을 정도다. 노동자는 죽어서도 부속품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배달호’라는 한 인간이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죽어갈 때는, 이 땅의 모든 모순이 한꺼번에 그의 목을 조였기 때문이다. 단지 노동조합의 조합원이고, 간부 역할을 했다는 것 때문에, 월급이 가압류 당하고, 감옥에 가야 하는 처참한 현실이 21세기 한국의 모습인 것이다.
그럼에도, 언론에서는 조용필 씨 아내의 죽음에 대해서는 감동적으로 묘사를 하고 있지만, 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기술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전태일의 목소리는 이른바 ‘정보사회’라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절대적으로 강조되어야 한다.
수 백만 명의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 언제 해고당할 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빈민’(한겨레21 참고)으로 전락하고 있다.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하게 벌어지고, 빈곤의 심화는 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다.
50만 명에 이르는 외국인 노동자의 처지는 또 어떠한가? 우리나라의 천박한 문화는 바로 ‘천민자본주의’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왜곡된 자본주의가 ‘물질(돈) 만능주의’ 사회를 만들고, 물질 만능이 곧 인간의 소외를 만들고, 빈곤의 격차가 불신과 불안을 만들어내고 있다.
정당한 경제개혁이나 사회개혁조차도 ‘사회주의’로 몰고 가는 이런 천박한 구조 속에서 과연 ‘인간다움’이라는 희망이 있기나 할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 천박하고 역겨운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은 대부분 가진 자들에게 책임이 있다.
극단적인 예로, 빈부의 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빈민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고 소수의 가진 자들이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차지한다고 하자.
결국 그렇게 해서 가진 자들이 더 행복할까? 빈민 인구는 저항을 시작할테고, 그렇게 되면 나라가 불안해지고,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이후의 시나리오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남미의 현실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결국 부의 편중은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 북유럽이 잘 사는 이유는 부의 분배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작된 이미지만을 보고 살아가고 있다.
방송에서, 신문에서, 심지어는 인터넷에서도,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에게 보여지는 많은 것들은 이미 조작되고 왜곡된 이미지들이다.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해서도 언론은 이미지를 조작했다. 연예인의 결혼, 이혼, 사망 등에 관해서는 매주 많은 시간을 투여해 방송을 하고 있다. 시시콜콜하고 잡담만을 해대는 연예계의 뒷이야기며, 아침 방송에서 수다떨기와 신변잡기만을 보여주는 내용들이며, 그 모든 것들이 대중의 관심을 한쪽으로 유도하려는 의도된 내용들인 것이다.
잘 생각해보라. 방송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고작 신변잡기와 잡담과 연예인 이야기밖에 없을까?
이런 시스템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누가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하면 답은 아주 쉽게 나온다.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확대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자본’은 그 자체로 이미 ‘권력’이다. ‘권력’은 ‘자본’을 획득하기 어렵지만, ‘자본’은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 미국의 현재 상황이 바로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자본’과 ‘권력’이 두 죽음을 어떻게 갈라놓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 죽음을 바라보면서 한쪽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한쪽에서는 무관심으로 지나가버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조작된 이미지가 심겨져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녹색평론 2008년 7.8월 - 통권 101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8년 7월
품절


큰 키에 흰 수염이 가슴까지 자란 아버지는, 사람은 배워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던 아버지는, 발목을 다치고부터 만날 술로써 세월을 보냈다. 그래서 어머니 혼자 힘으로 아들 셋 딸 셋을 다 키우셨다. 어머니는 목장이나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일자리 얻기도 어려운 시절이라 어머니는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을 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집안을 이끌어나갔다.-219쪽

막노동판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는 밥 먹을 힘조차 없다고 했다. 씻지도 않고, 밥도 드시지 않고 그대로 쓰러져 주무시는 날이 잦아졌다. 이른 아침마다 꽁보리밥을 물에 말아 드시고는 기계처럼 벌떡 일어나 일하러 나갔다. 어머니 손은 공사장 벽돌보다 더 거칠고 단단했으며, 독한 시멘트 탓에 쩍쩍 갈라진 발은 동상에 걸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다. 양말이 귀했던 때라 겨울에도 어머니는 양말을 신고 다니지 못했다. 어릴 적에 동상 걸린 내 발도 삼십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겨울철만 되며 가끔 붓고 가렵다. 그때마다 나는 동상 걸린 어머니 발이 떠오른다. 가슴이 미어지도록…-219쪽

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깊은 병으로 다 돌아가셨다. 그렇게 젊은 나이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삼십년은 더 사셔야 할 나이였다. 아버지는 술병으로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굶어서 돌아가셨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겨울밤, 나는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어머니…" 몇 번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방문을 살며시 열어보니 어머니는 벽에 기댄 채 앉아서 주무시고 있었다. 연탄불은 꺼진 지 오래되었다. 형과 누나들은 객지로 돈 벌러 가고 없는 싸늘한 방에서, 아무도 없는 쓸쓸한 방에서 어머니는 영원히 잠든 것이었다.-219쪽

어린 자식들 먹을 양식과 일밖에 모르고 살아온 어머니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한평생 옷 한 벌 사 입지 못한 어머니였는데, 한평생 화장품 한번 바르지 못하고 파마머리 한번 하지 못한 어머니였는데… 막노동판에서 새참으로 나온 빵 한 조각 목으로 넘기지 못하고 어린 자식놈들 먹일 거라고 보물처럼 싸서 집으로 가져오시던 어머니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시집살이 떨쳐버리고 싶다고 보내온 큰누님의 편지 한 장을 장롱 밑에 숨겨두었다가 틈만 나면 꺼내서 울던 어머니였다. "이년아, 시집살이 힘들면 똥도 못 눠. 똥 잘 누는 년이 무어 고되다고 야단이냐"며 밤새 혼자서 중얼거리시며 뒤척이던 어머니였다.

녹색평론 101호, 서정홍 ‘정말 고마운 스승’-22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빅투스(invictus)
Out of the night that covers me,
Black as the Pit from pole to pole,
I thank whatever gods may be
For my unconquerable soul.

In the fell clutch of circumstance
I have not winced nor cried aloud.
Under the bludgeonings of chance
My head is bloody, but unbowed.

Beyond this place of wrath and tears
Looms but the Horror of the shade,
And yet the menace of the years
Finds and shall find me unafraid.

It matters not how strait the gate,
How charged with punishments the scroll,
I am the master of my fate:
I am the captain of my soul.

 


나를 감싸고 있는 밤은
온통 칠흑같은 암흑
억누를수 없는 내 영혼에
신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라도 감사한다

잔인한 환경의 마수에서
난 움츠리거나 소리놓아 울지 않았다.
내려치는 위험속에서
내 머리는 피투성이지만 굽히지 않았다.

분노와 눈물의 이땅을 넘어
어둠의 공포만이 어렴풋하다
그리고 오랜 재앙의 세월이 흘러도
나는 두려움에 떨지 않을 것이다

문이 얼마나 좁은지
아무리 많은 형벌이 날 기다릴지라도 중요치 않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내 영혼의 선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문]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인권연대 특강

 

방금 소개해준 분이 주최측과 나와의 약속이나 협약에 대해 오해를 했는지 강연이라고 했는데, 사실 강연이 아니고 오늘 인권연대 창립 10주년 기념행사에 나오신 많은 인권운동가들을 위해서 격려의 한 마디를 해 주면 좋겠다고 하기에 나도 짧게 격려의 말을 할 생각으로 나온 것이다.

지난 10년 가까이에 내 신병으로 말미암아 일체 집필이나 이런 장소에서의 발언을 중단하고 신병 치료와 요양에만 전념하면서 그 전과 같이 국가와 사회의 현실에 대한 관심도 그렇게 밀접하게, 치열하게, 정열적으로 갖질 않고 일부러 오로지 살아가는 병을 고치는 일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온몸을 던져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인간의 인격적 기본 권리인 인권과 현대 사회, 조직사회에 있어서 민권과 공민권에 관련되는 그러한 권리의 범주에 있어서 그런 차원의 이야기들을 구체적으로 소상히 현실감을 가지고 알지는 못한다. 다만 한 국민으로서 시민으로서 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관심에서 보면 여기 오신 연령대 분들의 치열한 지난날의 싸움과 정열적인 의지를 저는 몸으로 뜨겁게 느끼고 있다. 참 용감했고 감사하다.

대체로 지금 여기에 오신 분들이 연령대가 평균적으로 30~40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인권의 사회사적 견지에서 말한다면 여러분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사회의 인권사적 측면에서 제4대에 속해 있는 분들이고, 제3대까지 투쟁해 온 분들이라고 나는 규정하고 있다. 무엇이냐 하면 우리처럼 이승만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에게는 그 시기의 인권운동, 인권문제라는 것은 제1세대적인 적대관계였다. 그 이승만 12년 통치하에서 우리는 나름으로 인간다운 권리와 생존을 위한 노력을 했고, 그것이 1세대적인 투쟁이다. 다음은 28년간의 군인독재, 폭력의 시대에서 많은 목숨을 잃어버렸고 인권과 시민으로서의 공민권을 찾기 위해 싸워온 투쟁이 제2기가 될 것이다. 인권을 억압한 그 지배자의 폭력의 내용에도 차이가 있었고 그 폭력적인 권력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자로서의 국민과 우리 시민들과 이 땅의 인간들의 생존양식이나 의식에 있어서도 일정한 발전이 있으면서 차이가 있었다. 다행히도 그러한 긴 역사의 인권투쟁을 보면 적지 않은 기간에 이루어진 우리들의 희생과 눈물과 슬픔과 그것을 견뎌온 노력으로 해서 이른바 제3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일정한 열매를 거두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대를 합친 10년 동안이 충분하지는 않고 완전하다기에는 아직도 먼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그 전 30여년 동안의 상태에 비한다면 놀랄 만큼 향상되고 발전하고 훌륭한 열매로서 성숙한 인권의 시기였다. 그러던 것이 이제 지난 1년 반 동안 변화에 의해서 이명박 대통령 통치 시대, 그리고 지배집단의 성격적, 성향적, 정책적, 철학적 차원에서 말한다면 비인간적이고 오로지 물질주의적, 인권이 존재하지 않는, 인권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그런 파시즘 시대의 초기에 들어서 있다. 제4기가 되겠다. 제1세대로 말하면 이승만 시대에는, 대부분이 모르겠지만, 이 땅에 사는 개개인 개체의 지식과 의식과 감각 속에 인권이라는 범주의 사상이 있지 않았다. 흔히 인권이라는 것을 양도할 수 없는 침해당할 수 없는 최고의 권리라고 공식적으로 교과서적으로 미화하고 그렇게 믿기를 원해서 운동하는 것이지만 소위 그 인권이라는 권리는 역사적인·사회적인 부분이 본래적인 천부의 양도할 수 없는 부분보다 훨씬 많다.

정권에 따라서 지배집단의 성격과 철학과 행동, 이해관계에 따라서 지배받는 개체들, 인간들의 권리의 내용도 차이가 생긴다. 이승만 때 우리는 권리라는 것을 한 가지밖에 규정 못했다. 국가와 국민 사이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그런 의무의 정부였다. 병역, 납세의 의무 등 헌법적인 의무이지만 상하의 관계에서 명령과 요구에 복종하는 그것이 사회를 체계적으로 존재하고 운영케하는 그럼으로서 지배체제하에 있는 개개인이 따라야 할 의무로서의 자기 존재, 그것이 정부였다. 그렇지 않고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인권 범주에서의 권리의식은 거의 없었다. 일제하에서 긴 식민지 생활에서 길들여진 박탈된 인간성 탓이기도 하고 정치적 탄압의 결과이기도 하다. 권리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이어서 28년간의 군인들의 폭력하에서 보다 더 노골적이고 보다 더 악질적인 일체의 인간적인 가치와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오로지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밑에서 그들의 지배집단의 요구와 계획과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체제의 명령에 따르는 그런 집단주의적인 토탈리안리즘이 있었다. 인디비주얼 즉, 한 개인으로서의 가치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그런 사회였다. 역시 또 이승만 사회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의 대상으로서의 개인밖에 아니었다. 이승만 때는 그래도 민간통치의 체제였기 때문에 때로 군인 폭력 통치에 비한다면 약간의 느슨한 데도 있었고 어느 정도는 스스로 인간이라는 것을 주장하고자 하는 약간의 여유가 없진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 전두환에 들어와서는 그것조차 완전히 말살되어 버렸다.

여러분들은 그 시대를 제1, 2세대적 무인권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분들로서 간접적으로 들은 바 많을 것이고 읽기도 했을 것이고 하지만 직접적으로 몸으로 견뎌나가고 그것을 그 폭력을 그 무서운 반인간적인 폭력 밑에서 자기를 인간으로서 꾸준히 보전해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고난에 찬 것인가 하는 것을 그 동안 많은 인권 자의식이 있었던 많은 민주화 운동 선배들이 죽어갔고 병신이 되고 한 사실을 생각하면 간접적으로 이해가 갈 것이다. 사실 그 때만 해도 박정희나 전두환 시대에는 나 개인의 경험으로 말한다면 하도 인간성을 박탈당하는 모욕과 치욕과 서러움과 자기환멸과 이런 것들 때문에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인간을 부정당하는, 너는 인간이 아니다 하는 식의, 인권을 박탈당하기 이전에 인간임을 부정당하는 그런 상태가 지속될 때 비로소 자살한 사람들의 심정을 나의 심정으로 이입해서 생각할 수가 있었다. 아, 이렇게 해서 자살하는구나 하고. 본래 자살하는 사람들이 나에게는 좀 더 의미있는 일을 하고..(죽었으면) 전두환이나 박정희를 권총으로 쏴서.. 일대일로… 그런 생각도 했지만 집단적인 힘으로 자신이 비인간화되면, 인간의 근원적 존재의 본질 자체가 부정을 당할 때는 아 이제 나는 죽어야겠구나 하는 자살의 동기와 자살의 목적과 이런 것들을 나의 것으로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여기서는 인권이라는 것은 2차적인 문제가 된다.

그 후 10년 동안 그런 결과로 이루어진 상당히 민주화된 대한민국에서 인권이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가치와 중요성과 그 인권이 있어야 할 마땅한 모습과 어떻게 유지해 나갈 것인가 하는 집단적인 개개인의 의욕도 운동도 생겨났다. 비로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사람들이 인간이 된 것은 지난 10년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승만, 박정희, 노태우 시대에는 이땅의 생을 받아서 생존했던 생명체·개체는 현대적인 인권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이 아니었다. 동물이었다. 다행히도 그 속에서 투쟁한 많은 선구자, 선배들의 목숨의 대가로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부족하나마 인간다운 개체로서 되살아났고 생존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더욱 충실하게 복된 인간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 개인과 우리 사회 전체의 집단적인 사회적인 향상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가운데에 선 사람들이 여러분 중에 상당히 계실 것이다.

그러던 것이 1년 반만에 사회가 또 하나의 역사적 역전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파시즘의 시대에 들어갔다. 그러길래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진 열매 위에 또 하나의 큰 열매가 열리고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우리가 정신만 늦추면 언제든지 역전하는 그런 가능성을 내포하면서 진행해 나가는 것이 우리 인류사의 역사이다. 이 이명박 현재 이 정권의 오로지 물질밖에 모르는, 모든 인간을 생존을 지향하고 목적하고 숭배하여야 할 가치는 돈밖에 모르는 그것을 신격화하는 그리고 인간이라는 것의 존재가치가 말살되어 가는, 이러한 체제를 정권을 우리 그 많은 40년의 고생끝에 받아들인 것도 우리 자신들의 책임이다. 우리 자신들이 한 일이다. 우리의 실수이고 개개인의 판단착오이고 역사의식의 잘못이다. 이런 것이 현실화 된 것이다. 누구를 탓할 수가 없다. 정말로 한심한 일이지만 앞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 체제, 이 정권, 이 국가적 이념 그 지배자들의 철학, 이해관계를 우리 개개인의 인권과 한때 10년이지만 짧은 10년이지만 이룩했던 공민으로서의 권리, 인권과 결부해서 되찾기 위한 필사적인 그리고 슬기로운, 불퇴전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지금의 일은 아니지만, 그 전의 일이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그리고 사회는 인권이라는 인간 존재의 기본적, 인격적 가치라는 점에서 160년의 낙후된 원시사회로 늘 생각해 왔다. 남한, 우리 한국사회를 160년 전과 같은 민권, 공권, 마땅히 인간답게 누려야 하고 허용되어야 하는 상황이 갖춰져야 할 정부라고 볼 때 160년 전의 낙후된 원시사회라고 본다. 나는 우리 사회를 문화적 사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난 지금도 대한민국 사회가 문화, 민주, 인권이니 하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가치를 지닌 집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심각한 것이 아니다. 아무 재미난 에피소드 때문에 그렇다. 몇 차례 형무소를 들어가면서 나는 젊었을 때부터 1950년대 말부터 영어보다 프랑스어가 나아서 불어소설 읽는 것으로 소일했다. 레미제라블 같은 것들. 그전에도 읽었고 다음에 들어갔을 때도 차입을 해서 읽었는데 두 번째인가 세번째 읽는데 이런 대목이 있었다. 장발장이 코제트라는 소녀와 함께 자베의 추격에 쫓기고 있었다. 장발장을 체포하려고 한 자베르는 그 오랜기간 동안에서 철저하게 체제적, 우익적인 인간이었다. 나름으로 우익적 인텔리전트가 있는 사람이다. 부패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열심히 하려고 하는 엄격한 법률숭배자. 인간의 눈물이라는 것은 일체 용납할 수 없는, 자기도 자신과 절대 타협하지 않는 우익적인 인간이다. 사실 우익은 비인간적인 철학이고 사상이다. 이 자를 체포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고 숨어다니고 어느날 포위망이 좁혀오니까 수녀원에서 코제트의 손을 잡고 수녀원의 높은 담을 넘어서 도망하려고 했다. 도망치다가 파리의 어느 다리 한 중간쯤 오니까 벌써 자베르가 미리 알고서 부하들을 다리 저쪽 끝과 이쪽 끝 양쪽 끝에 배치해놓고 있었다. 장발장과 코제트는 다리에서 갈 곳이 없었다. 강으로 떨어지지 않는 한. 오도가도 못하게 된 상태에서 그대로 끌려가게 된 상태다. 진퇴양난인데. 결국은 눈 앞에서 닥친 것이다. 그리고 심문이 시작됐다. 너 장발장이지. 그러자 장발장은 묵비권 행사하고 아무 말도 안 했다. 부하들은 시간 끌 거 있냐며 체포합시다 라고 자베르에게 말했다. 끌고 가면 우리는 1계급 승진하고 공 세우고 얼마나 좋습니까. 끌고 가려고 하니까 한참 자베르가 생각하더니 가만있으라고 했다. 부하들이 “10여년 온갖 고생을 해서 추격하고 겨우 주머니 속의 쥐 마냥 덜미를 잡았는데 왜 손을 놓으라고 하느냐”고 했다. 자베르를 원망했다. 이제 놓치면 또 얼마나 쫓아다녀야 하나. 자베르는 현대적으로 보면 우익적 철학, 사상, 사회관을 가진 국가에 충실한 인물인데, 인간적 눈물이 없는 사람인데, 사실 좌익도 극단으로 가면 같아지는 것이지만… 그 엄격한 자베르가 쥐를 발톱에 물고 있는 형국인데 놔 주라고 했다. 자베르가 하는 말이.. 거기서 놀랐다. 한국이란 나라. 그 장면이 1830년대 프랑스 현실을 쓴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180년 전이 되는 것인데, 내가 그때 읽을 때는 한 160년 전이었다. 자베르가 부하들에게 손을 놓으라, 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실수했다며 체포영장을 떼어 오지 않았다고 했다. 체포영장을 받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만약에 체포영장 없이 장발장을 체포해 가면 반드시 파리의 신문들이 굉장히 장발장의 사건 컸으니까 국가범이었으니까 자베르 경시가 10년만에 체포했다고 대서특필할 것이다. 그러면 동시에 영장없이 끌고 왔다, 폭력으로 끌고 왔다고 하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신문기자들이 결국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내가 합법적인 범죄인 체포의 법적 필요수단인 체포영장을 끊지 않고 폭력으로 끌고왔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무장관이 의회에서 그 문제가 되어 불신임안을 당할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내무장관직을 관둬야 할 것이다. 내각이 붕괴할 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해. 그러면서 돌아가자고. 오늘은 돌아가고 내일 영장을 청구해서 받아서 다시 나오자고 했다. 물론 다시 나오면 장발장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런 대목이 12줄에 걸쳐 나왔다. 그때 내가 느낀 감동, 쇼크가 말할 수 없었다.

1830년에 불란서에서는 그 국가범, 국가사범과 같은 대사건의 범인 장발장을 10여년 추격끝에 잡았는데 그것을 연행 안 하고 영장 안 가져왔다고 가슴이 터질듯한 생각에도 방면하고 돌아가서 영장을 다시 가져오려고 했다. 그걸 했다면 신문기자가 쓰고 내무장관이 모가지 날아가고, 그럼 의회가 해산할 것이다. 그런, 민주사회에 있어서의 제반절차, 중요한 한 사람의 범인을 체포하는 일, 사실 영장 없이 잡아도 장발장 정도면 눈 감을 수 있을 텐데도 법 절차를 고려해 놓아준 그 대목을 읽으면서 이것이 프랑스 혁명을 거친 프랑스의 법률이고 경찰이고 사회이고 인간존중이고 이 모든 가치관이 거기에 포함되어서 표시되더라 이거다. 그래서 정말 나는 그때 계산하니까 광주형무소에 들어간 것이 영장 없이 끌려간 것이었다. 2년 동안을 형무소 살이를 했다.

2000년도에 가까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헌법에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완벽하게 되어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180년 전 프랑스, 우리가 보기엔 당나라 때의 옛날 얘기 같은데 벌써 프랑스에서는 그러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인권에 관해서 공민권에 대해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한국에 있는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비인간의 동물의 법적 대우를 받고 있는가. 완전히 인간성을, 자존심을, 자주성을 민주적 독립성을 몽땅 부정 당하고 있는데… 1980년의 대한민국에서… 그러나 180년 전 프랑스에서는 그랬다는 것을 알고 그때 민권, 민주주의의 중요성, 법적질서, 준법정신 등 모든 분야의 인간생존, 인간이 인간다워야 할 민주사회의 공인으로서의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 어떡해야 하는 것을 생각했다.

두 가지 인권이 있다. 하나는 공식적으로 주장하는 양도할 수 없는 침범당할 수 없는 권리, 천부의 권리로서 인간으로서 본래는 그렇다는 것. 하지만 역사적, 사회적 권리로서, 집단 체제에서 부여되는, 권리는 천부의 양도할 수 없는 불가침의 권리는 아니다. 그 양면에 있어서 인간 존재적 인격의 근원적 권리로서의 인간의 권리는 일차적으로 물론 당연히 주장해야 하고 보호해야 하고 획득해야 하고 우리가 모두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 집단적으로 생존하는 과정에서 합의에 의해서, 계약에 의해서 법률에 의해서 주어지는 권리… 사회적, 정치적, 공민적 권리는 반드시 정부에 양도할 수 없는 불가침의 권리는 아니다. 제도에 의해, 역사발전의 단계에 의해서 우리가 쟁취하는 권리다. 그 성격은 차이가 있지만 우리가 그 둘을 다 그 성격을 인식하면서 확보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다 갖추어진 인간으로서 민주 시민으로서 생존과 존재가치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여태까지 그렇게 노력해 온, 투쟁해 온 데에 대해서 깊이깊이 감사드리고 험악해진 이 새로운 우리의 현실적 상황 변화 속에서 불굴의 인권정신을 가지고 싸워 줄 것으로 믿는 여러분들의 성공이 있기를 간절히 빌면서 오늘 격려의 인사를 마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