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이름으로 - [할인행사]
다니엘 데이 루이스 감독, 엠마 톰슨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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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보고

 

금년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 12개 부문에 올라서 7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반면, 이 영화는 7개 부문에 올랐으나 2개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주연인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아버지역으로 나온 피터 포스톨트웨이트의 남우조연상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미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해서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

나의 왼발로 유명한 짐 쉐리던 감독 작품이고 주인공도 나의 왼발에서 주연을 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맡았다. 이 영화는 분명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보다 뛰어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영상미학적인 측면에서는 쉰들러 리스트가 앞서 있지만, 사회성이라는 면에서는 이 영화가 더 많은 점수를 받고 있음은 분명하다.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지배와 투쟁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북아일랜드인인 주인공 제리 콜론은 그저 평범하고 적당히 세상을 살아가는 젊은이다. 아버지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말썽을 일으키는 아들을 영국 런던에 보냈으나 아들은 돈이 떨어져 빌빌대다가 매춘부의 집을 털어 돈을 만든 다음 집으로 돌아온다. 그 중간에 영국에서 폭탄테러 사건이 일어나는데, 영국 경찰들은 히피들인 제리 콜론과 친구들을 잡아다가 테러범으로 몰아 구속을 시킨다. 증거는 없었지만 강요된 자백만으로 이들은 30년 형을 살게된다.

아버지도 테러지원 혐의로 잡혀들어와 아들과 한방에서 지내게 되는데,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을 느낀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법정투쟁을 계속하고 아들은 방관만 하는데, 결국 아버지는 감옥에서 숨을 거둔다. 아버지는 살아있으면서 끝까지 아들을 위해 진실이 승리할 것이라고 말한다.

감옥 안에서 진짜 테러리스트를 만나게 되고 자신들이 무죄임을 알게 되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이 아버지는 죽고 제리는 자신을 도와주는 변호사를 통해 마침내 자유와 진실을 위해 싸우겠노라고 선언한다. 물론, 변호사의 도움으로 15년을 살았던 그 감옥에서 무죄로 풀려나오게 된다.

이 영화는 1975년에 있었던 실제 사건이었다. 영국의 경찰은 무고한 아일랜드인을 잡아다가 15년 이상을 감옥에서 썩게 했다. 모든 사건을 조작했고, 진범이 잡혔음에도 이를 밝히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한 변호사의 집념에 의해 간단하게 해결되어 보인다. 물론1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기는 했지만 결정적인 문서 하나로 범죄혐의가 벗겨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문득 1894년에 벌어졌던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 생각난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우리가 늘 부딪치는 문제이다. 역사를 은폐하고 왜곡하려는 인간들은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힘있는 쪽들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안정을 위해 역사를 은폐하고 반대파를 학살하고 진실을 왜곡한다.

인간이 인간을 파괴하고 증오하며 적대적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이 바로 여기에 있다. 결코 화해하거나 용서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해하고 싶고, 용서하고 싶고, 화해하고 싶은 사람에게 먼저 칼을 들이대고, 총을 쏘고, 고문을 하고, 학살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야비하게 왜곡하고, 비웃고, 속임수를 쓰고, 뻔뻔스럽게 흉물을 떨고, 자신의 잘못을 전혀 뉘우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투쟁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약소민족을 깔아뭉개고, 약소 인종을 차별하고 학살하고, 약소국가를 비웃고 협박을 하는 제국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백인종차별(아파르트헤이트), 영국과 아일랜드의 독립투쟁, 남미의 반독재민주화투쟁, 멕시코의 원주민 민족해방투쟁, 그리고 우리나라의 반미 민주화투쟁,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의 끈을 가지고 있다.

더 많이 빼앗으려는 놈들과 지키려는 사람들의 싸움이며 폭력을 숭배하는 놈들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싸움이다. 인간을 사랑할줄 모르는 놈들과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투쟁이다. 이 싸움은 민족간의 전쟁으로, 인종간의 투쟁으로, 계급투쟁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그 형태는 모두 다르지만, 정의와 불의의 싸움임에는 틀림없다. 거짓과 진실의 싸움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르는 그런 싸움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싸움에서 정의는 한발씩 전진하고 있다. ‘진실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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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오브 조이 - [초특가판]
롤랑 조페 감독, 패트릭 스웨이지 외 출연 /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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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CITY OF JOY’를 보고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예술이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한다. 물론, 이제는 그러한 목적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만들어지는 예술작품이나 창작행위들이 훨씬 많지만, 예술의 탄생이 인간의 소망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예술은 인간의 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떠한 예술이건 그 속에서 인간적인 체취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쁘고 다행한 일이다. 실제로, 요즘의 예술이란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해체니 어쩌구 하면서 형식과 의미를 파괴하고 독선적인 행보를 하는 것이 유행이긴 하지만 인간이 추구해야 할 공통선은 있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아닐까. 어찌보면 진부한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주제이기도 하다.

이 영화 시티 오브 죠이 역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그리고 있다. 최근에 국내에서 상영된 영화 가운데 이런 종류의 주제를 다룬 영화들이 몇 편 있었다. ‘한 사람의 힘이 그렇고 사라피나가 그렇다. 사회적 관심과 정의의 실천을 그린 영화들이 대개 이런 범주에 든다고 보는데, 코스타 가브라스의 정치적 영화나 올리버 스톤의 사회성 영화들도 인간의 정의와 실천이 주제가 되고 있다. , 인간의 올바른 삶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공통점인 것이다.

줄거리를 말하는 것은 번거로울듯 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거슬리는 것은 역시 제국주의적 시각이었다. 아무리 인간의 평등과 사랑을 그린다고는 하지만, 작품의 바닥에 깔려있는 감독이나 제작자의 제국주의적 시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만큼 이 영화에는 기분나쁜 그늘이 숨어있는 것이다. ‘맥스로 대표되는 미국의 이미지는 제3세계인 인도의 땅에서 그 위력을 아낌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제국주의의 침략을 옹호하거나 미화하려고 한 흔적은 노골적으로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겉으로는 틀림없이 패트린 스웨이지가 맡은 맥스라는 미국인 의사이다. 하지만 그는 주인공일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의 연기력은 매우 평범하고 역할의 비중 또한 그리 무겁지 않았다. 만일 패트릭 스웨이지의 연기력이나 그의 유명세를 생각하고 주인공 역을 맡겼다면 그건 틀림없는 실패이다. 백인 의사역에는 무명의 백인을 아무나 시켜도 되는 그런 역이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인도인 하사리이다. 시골의 빈민인 하사리 가족이 가뭄으로 빚을 지고 도시로 무작정 상경하는 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다. 도시빈민이 되어 근근히 살아가는 모습이 마치 70년대의 우리 농촌을 보는듯 하다. 인도의 절대빈곤과 무지 속에서 민중들은 비틀리고 왜곡된 삶을 살아간다.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하사리 가족을 궁지에 몰아넣는 사기꾼도 있고 악질 자본가도 있다.

그러나 기쁨의 도시라는 이름은 도시의 변두리에 있는 빈민촌의 이름이다. 아이러니컬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을에 이런 이름이 붙은 까닭을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알게되고 다시한번 인간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기쁨의 도시를 지배하는 악질 자본가 가탁을 상대로 벌어지는 빈민들의 권리쟁취과정에서 이 영화는 허구가 아닌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인도의 계급사회는 아직도 유효하고 엄격하기로 이름이 나있다. 그만큼 세습적인 관념과 이데올로기가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인도의 현실이 당장에 모순을 극복할 수 있을만큼 쉽지않음은 분명하지만 인도 민중들의 작은 싸움을 통해서 서로 협력하고 공동체로 살아가야하는 당위성과 필요함을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극적인 구성에 있어서 하사리와 자본가의 아들인 아쇼카의 개인적 대결로 큰 싸움을 마무리하는 것이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극중에 등장하는 나병환자와 빈민들의 협동, 진료소를 중심으로 서로 협력하고 돕는 빈민촌 사람들의 건강한 삶만으로도 관객은 감동을 한다. 오히려 이방인처럼 끼어든 백인들이 이 영화를 어설프게 만들 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하사리가 딸의 결혼지참금을 벌기 위해 온몸을 던져 일을 하는 장면이다. 한 컷, 한 컷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여지는 이 하사리의 일하는 모습은 다른 어떤 장면보다도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성실한 자세는 한 인간의 고결한 인격으로 표현된다. 힘에 겨운 표정을 감추려고 고개를 돌리는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사리는 말한다. ‘인생이 왜 이렇게 살기가 힘들까하고. 그렇다. 못배우고 가난한 민중들은 모두 말한다. ‘인생이 왜 이렇게 살기가 힘들까 그러면서도 자신의 몫을 감당하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들을 짓밟는 악질 자본가 가탁 아쇼카같은 동족의 거머리들에게 피를 빨리면서도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는 그 인내가 어리석기까지 했지만, 한번 분노하면 한꺼번에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는 그 엄청난 힘을 민중들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사리는 이방인인 백인의 도움도 거절하고 자존심을 지킨다. 물론, 이방인이 모두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 영화에서는 보여주고 있지만 이 땅을 지키는 것은 결국 이 나라의 민중들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누구의 힘에 의지하기 보다는 어려워도 자신들의 힘으로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하사리의 몸부림은 인도인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 영화에서는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 잘난 사람도 없고 기상천외한 장면도 없다. 정상적인 사람들과 탐욕스럽고 잔인한 인간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 잘난척 하는 것보다 못났어도 함께 어우러져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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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둘 수는 없습니다 - 조영래변호사 남긴 글 모음
조영래 지음, 조영래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 / 창비 / 199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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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님의 진실은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를 읽었다.

나는 조영래님을 단 한번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조영래님을 마음으로 존경하게 된 것은 그가 전태일 평전 -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부터였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가운데 아직도 전태일이 누구인지 모르는 분이 있다면 당장 서점으로 가서 위의 책을 구입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서 그 탁월한 문장과 감동깊은 이야기를 읽고 난다면 아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조영래님에 대해서 많이 모른다는 사실이 많이 부끄럽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분의 글을 통해 배우고 느끼는 것이 너무나 많다. 

이 땅의 많은 지성들이 조영래님을 존경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이른 죽음을 가슴아파하는 지금, 나도 조영래님을 통해 나를 되돌아 본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무엇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가. 

그러나 시원한 답은 없다.  아니,  더없이 부끄러울 뿐이다. 아직 나이가 있다고 변명을 하지만 그것이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내가 아닌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나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결국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는 이 평범한 진리를 몸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이상,  조영래님을 존경한다는 사실까지가 부끄러울 뿐이다.  그렇다면 어떡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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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 박스 - [초특가판]
제시카 랭 출연 / 미디어체인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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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뮤직박스를 보고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는 예전에 대한극장에서 한 심문과 얼마전 텔레비젼에서 한 미싱(실종)을 보았다. 정치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가브라스 감독의 작품은 언제나 설레임과 기대를 가지게 된다.

이 영화 뮤직박스도 나온지는 오래되었는데, 벼르고 있다가 지난번 텔레비젼에서 하는 것을 녹화해 놓았다가 이제 보게 되었다.

영화의 주제는 간단하다. 전범으로 기소된 아버지를 변호사인 딸인 변론을 해서 무죄를 끌어내지만 마지막에 뮤직박스에서 그 옛날 아버지가 특수부대에서 자행한 사진을 발견한 딸이 아버지를 고발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영화가 나오기까지, 그리고 우리에게 보여주기까지 그 긴 시간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유럽에서는 아직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자기 국가와 민족을 팔아먹은 전범들을 찾기 위해 전세계를 뒤지고 다닌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독립운동을 한 애국자들과 그 후손들은 배우지 못하고 끼니도 끓이지 못하는 처참한 현실이고 식민지 시대에 일본 제국주의놈들에게 아부하고 동족을 학대한 친일파놈들은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현실이다. 민족정기니 뭐니 떠들기는 하지만 아직도 이 사회가 공평하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쁜 짓을 한 놈들은 잘먹고 잘살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기 몸을 던져가며 싸운 분들은 굶주리고 고생하는 이 더러운 현실이 바로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반민특위를 해체한 이승만과 일제의 악질 경찰출신인 노덕술 등이 한 짓을 보라. 그리고 만주군 출신인 박정희는 또 어떤가. 그 뒤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의 총칼은 어떤가. 동족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대통령이 된 전두환과 그 일당들이 그렇고 그 밑에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날뛰던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이 바로 뮤직박스에서 전범자 마이클 라즐로(텔보트;전쟁때는 미쉬까)와 같은 인간들이다. 그들이 이 땅과 이 민족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도대체 기가 막히고 분노가 치밀어 영화를 보면서도 어쩔줄을 몰랐다.

그들의 파렴치함은 바로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데 있어 극치를 이룬다. 자신이 사랑한다고 맹세하는 자식들에게까지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라즐로.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체포해서 온갖 고문을 다한 이근안같은 인간들이 바로 그런 놈들이다. 자기 자식에게는 다정하고 멋있는 아버지로 보이길 원하면서도 다른 집 자식들을 물고문, 전기고문으로 잔인하게 죽이는 그런 극도의 이중성.

이땅에는 아직도 라즐로같은 인간들이 부지기수로 많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떵떵거리며 잘 살아가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함이 있는 것이다. 뮤직박스를 보면서 인간의 이중성에 치를 떨었고, 아버지를 고발하는 역사적인 장면에서 그나마 위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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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오브 원(1DISC) - [할인행사]
존 아빌드슨 감독, 모건 프리먼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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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The Power of One]을 보고

  한 사람의 힘.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이런 말을 많이 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시절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과 시대일수록 한 사람의 힘이 갖는 의미는 각별할 것이다. 우리 속담에도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열 사람이 한 숟갈’이라는 말이 있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은 별 것이 아니지만 그 작은 힘이 모여서 큰 힘을 이루는 것을 우리는 역사라고 하고, 민중의 힘이라고 한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지만 87년의 그 뜨거운 태양을 무색하게 한 울산 현대중공업의 노동자 행진을 떠올릴때마다 벅찬 가슴이 된다. 그 언덕을 넘어, 땅에서 이글거리며 올라오는 열기에 흔들리는 노동자들의 물결, 그것은 거대한 폭포보다도, 그 어떤 해일보다도 더 무서운 힘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우리는 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너무나 선량하고 쓴 소주 한잔에 눈물을 흘릴줄아는 순박한 아저씨들이라는 것을. 
 한 사람의 힘을 생각할 때마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이름이 떠오른다. 바로 노동열사 ‘전태일’.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도 그렇다. 그를 역사에서 아주 작게 평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큰 물결을 이루는 원천이 되는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있다. 박종철, 이한열, 임수경, 문익환, 문규현신부, 권인숙씨, 그리고 또 많은 한 사람, 한 사람들. 
 정작 영화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나는 마음이 벅차오른다. 그들을 생각하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내 존재도 잠시 잊고 희망찬 미래를 그려보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 [The Power of One]은 어느 백인 소년의 이야기이다. 우리에게 그리 흔하지 않은, 흑백갈등과 인종차별,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이야기이다.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흑백분리주의 - 아파르트헤이트 - 를 실시하기 18년 전인 1930년, 남아프리카의 한 영국인 농장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 꼬마의 이름은 PK, 그러나 본 이름은 피터 필립 케네스이다. 피터가 어려서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그를 독일인 기숙학교에 보낸다. 그러나 그 기숙학교에서 피터는 온갖 모욕을 받으며 생활한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아프게 되고 잠시 집에 돌아와 있을 때, 흑인 유모는 어린 도련님을 위해 두려움을 이겨내는 굿을 흑인 무당에게 맡긴다. 흑인 무당은 어린 피터를 위해 토속적인 제사로 줄루족 용사의 투혼과 용기를 피터에게 불어넣어준다. 피터는 이 용기를 가지고 다시 기숙학교로 돌아가지만 곧이어 세계제 2차 대전이 발생한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고 온 유럽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자 이곳 머나먼 아프리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독일식 기숙학교에 유일한 영국인이었던 피터는 독일 학생들에게 테러를 당하고 목숨까지 잃을 위험에 처하나 선생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나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어머니마져 돌아가신 뒤였다. 
 부모를 모두 잃고 할아버지에게 간 피터. 그곳에서 그는 스승 ‘닥’을 만난다. 닥은 독일인으로 피아니스트였으며 선인장을 기르는 선량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피터는 그곳에서 부모를 잃은 슬픔을 조금씩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피묻은 발톱은 이곳까지 찾아와 독일인 선생 닥을 영국인들이 가두어 놓게되자 피터는 선생을 따라 감옥을 드나든다. 형무소 소장은 닥이 비록 독일인이지만 선량하고 재능이 있음을 알고 그를 위해 많은 편리를 제공한다. 꼬마 피터는 자유롭게 형무소를 드나들며 선인장도 키우고 음악도 배운다. 스승 닥은 피터를 위해 복싱을 가르친다. 피터의 복싱 스승은 도둑질을 한 죄로 40년간 형무소 생활을 하고 있는 흑인(이름이 생각안나네요.)이었다. 그는 간수에게 온갖 박해와 협박과 위협을 당하면서도 동족 흑인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존경받는 흑인이었다. 
 피터는 어려서부터 흑인유모와 함께 자랐기 때문에 흑인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그의 부모들도 흑인들을 노예처럼 다루지 않았고 존중해주었으며 그것은 그들이 모두 평등한 인간이라는 당연한 생각을 갖게 했다. 그러나 피터가 자라면서 환경은 더욱 나빠졌다. 백인들은 흑인을 인간취급도 안하고 마구 대했으며 짐승보다 못하게 학대했다. 
 어린 피터의 눈에도 이런 불평등은 선명하게 각인되어 갔다. 형무소 안에서 복싱을 배운 피터는 흑인들을 위해 편지도 써주고 친절하게 말도 하며 조금도 그들을 차별대우하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흑인들은 어린 피터에게 ‘레인메이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나즈막히 노래를 불렀다. 이 ‘레인메이커’는 흑인 부족들 사이에 오래된 전설인데, 그들을 이끌어줄 지도자와 같은 인물을 말하는 것이다. 피터는 흑인들이 자신을 레인메이커라고 부르는 것에 거부감과 부담을 느끼지만 흑인들은 피터를 믿고 따른다. 
 어느날 형무소에 높은 사람이 방문하는 것을 계기로 형무소장은 닥에게 음악회를 열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피터의 복싱스승인 흑인이 자신들, 흑인을 위한 음악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고, 닥과 피터는 그들을 위한 음악을 만든다. 이 음악은 흑인들 모든 부족을 단결하게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었으며, 가사는 피터의 복싱스승이 한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 가사는 간수들을 빗대어 ‘이랬다 저랬다 겁장이 바보들’이라는 것이었다. 
 음악회날, 흑인들이 모이고 닥과 피터는 높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훌륭하게 음악회를 갖는다. 흑인들의 합창과 춤이 그들을 단결시키고 밝은 미래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사이에 피터의 복싱스승은 그를 노리고 있던 간수에게 걸려 맞아 죽는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피터. 그는 교내 복싱 챔피언이 되고 학장에게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 국비장학생이 되도록 추천을 받는다. 그러나 현실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복싱장에서 본 아름다운 소녀 마리아에게 반한 피터는 그가 극우파의 지도자 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까이 하고, 그녀 또한 영국인이고 고아인 피터를 좋아한다. 피터는 본격적으로 복싱을 배우기 위해 마을에 있는 전문 체육관을 찾아가서 테스트를 받고 도장에 다닌다. 그 체육관 관장을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 건강한 시민이었고 그 체육관에는 흑인들도 함께 운동을 했다. 하지만 당국의 인종차별정책은 더욱 심해지고 흑인들은 도시 변두리의 빈민가에서 아무런 혜택도 못받은 채 소외 당하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알게 된 피터는 친구들과 흑인들을 가르치기 위해 야학을 하는데, 이를 알고 있는 당국에서는 철저하게 방해한다. 이런 소동 속에서 피터가 좋아하던 마리아가 경찰에 맞아죽고 체육관은 경찰들에 의해 불에 타고 만다. 모든 것이 피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던 중, 마침내 옥스퍼드 대학 입학허가서가 나오고 그는 떠나기 전에 흑인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가 흑인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흑인 친구들의 말과 자신의 생각을 정하고 옥스퍼드 대학을 포기한다. 그럴때 경찰의 습격을 받는다. 흑인 마을이 불타고 경찰들은 마구잡이로 총질을 하며 흑인들을 학살한다. 그 가운데서 피터를 붙잡으려는 집요한 추격이 시작되고 흑인들은 피터를 살리기 위해 죽어간다. 마침내 마을을 벗어나 흑인 친구와 어디론가 떠나는 그의 뒷모습은 떠오르는 태양에 의해 검붉은 실루엣으로 사라진다. 
 영화의 줄거리를 얘기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다보니 줄거리를 쓰고 말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리차드 라이트의 소설 [막다른 골목(원제:검둥이 소년)]이 생각났다. 소재는 다르지만 흑인이 등장하고 억압 당하고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는 주제는 같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이 단순하고도 명확한 진실이 어째서 문명사회라고 하는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왜곡되고 무시 당하고 모욕 당하고 파괴 당하는지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자칫, 자칫이 아니라 매우 가능성이 많은 이야기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라스꼴리니꼬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독일의 게르만 민족이나 유대의 선민의식처럼 자신들만 잘나고 우월하다고 믿는 그 어리석음이 바로 인종차별과 같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코미디 - 아주 잔인하고 비열한 코미디 -를 연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살바도르]나 [니콰라과의 영웅들], [플래툰], [하얀전쟁], [JFK], [미싱(실종)], [미션], [뮤직박스],[Z]와 같이 인간의 역사적 범죄행위를 담은 영화들이 우리에게 말하고있는 것은 매우 단순하고 간단하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파괴자들은 바로 인간을, 민중을, 도구로 생각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간단하게 처치해버릴 수있는 소모품. 그리고 그러한 사고방식은 바로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권력. 권력을 장악하고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약육강식의 논리는 바로 짐승의 논리이지 사람의 논리는 아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모순은, 인간이 신을 만들어낼 정도로 어리석다는데 있다. 즉, 정신적 사고방식을 통해 세계를 창조하고 문명을 발달시키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한편 동물적 본능을 내세우고 동족을 학살하며 그 피를 나누어 마시는 잔인함을 보이기도 한다. 야누스니, 프랑켄쉬타인이니, 지킬박사와 하이드, 늑대인간이니 하면서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합리화를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중성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이중성이 곧바로 동족을 학살하거나 인종을 차별하거나 인간 그 자체를 도구화하는 논리는 궤변이며 학살자의 자랑일 뿐이다. 
 민족과 인종 사이에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차별은 없어야 한다. 서양의 문명이 발달한 나라 사람들이 볼 때,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미개하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열등한 민족은 결코 아니다. 영화 속에 나오는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흑인들의 노래를 들으며, 백인들의 억압 속에서 굴종을 겪으며 그래도 낙천적이고 착한 마음을 가진 그들을 보면서, 인간은 잘나고 똑똑하고 많이 배우고 가진 것이 많고도 악한 것보다는 아무 것도 가진 것없고, 배운 것없고, 어리석어도 자연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정있는 사람들이 더 훌륭하다는 것을 배웠다. 
 문명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히틀러의 망령을 믿는 독일의 극우주의자들이 외국인을 학살하고 있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당했던 박해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더 잔인하게 행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인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다. 한 사람의 힘이 세계를 변화할 수 있다는 진리를. 인간의 싸움은 역사를 거스르는 소수의 반역자들과 그들을 이겨내고 역사를 밀고가는 다수의 민중들 사이에 있으며 남아프리카와 같이, 남미의 제3세계 국과들과 같이, 아시아의 독재국가들과 같이 억압받는 민중들이 많은 곳에서는 바로 그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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