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그램
심흥아 지음 / 새만화책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제목 : 카페 그램
작가 : 심흥아
출판 : 새만화책

'새만화책'에서 나온 만화다. 심흥아는 차분하다. 그의 그림도, 글도, 말투도 담백하고 담담하다. 이 책은 작가가 언니와 함께 '한예종' 근처에서 카페를 운영했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한예종에 입학하기 위해 무려 삼수나 했지만, 결국 그는 한예종에 입학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에게 컴플렉스로 작용할까? 아니라고 믿는다.
이 작품은 작가와 작가의 언니가 카페를 차리는 과정부터, 카페를 운영하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느낀 이야기들을 섬세하게 담고 있다. 약 3년 정도 카페를 운영하면서, 주변에 카페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 것이 불과 2-3년만에 약 10개 정도의 카페가 생기면서 경쟁도 치열해지고, 그다지 깨끗하지 않게 카페 문을 닫아야 했던 - 그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 과정까지를 담고 있다.
작가는 카페에서 빵과 케익도 구워 팔았는데, 그가 제과제빵사 자격증을 갖고 있고, 유명 제과점에서도 일을 했었던 것은 고생스럽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가 훌륭한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는 것은 온전히 작가의 능력이다. 한국에도 이렇게 젊은 작가들이 활동하고 있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 퍽 다행이고, 반갑다.

'나'는 자신의 첫번째 작품 [우리, 선화]가 출판되어 '작가'가 되었지만 현실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언니와 함께 온라인 쇼핑몰을 하고 있지만 변변치 않았다. 그런 두 딸을 보면서 아버지는 걱정한다. 작은 가게라도 해보라고 제안하고, 나는 늘 마음에 담고 있던 카페를 하기로 마음 먹고, 홍대 근처에서 카페할 곳을 찾아본다. 
하지만 홍대는 이미 카페가 너무 많았고, 임대료가 터무니없이 비쌌다. 나는 꿈에서 커다란 파랑새를 보고,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한예종 근처였다. 그곳에서 구멍가게를 보고 카페를 하겠다고 마음을 굳힌다.
나는 한예종에 씁쓸한 기억이 있는데, 한예종에 들어가려고 세 번이나 시험을 쳤지만 실패했다. '나'가 한예종 근처에서 카페를 열겠다고 생각한 건, '아련하고 씁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을까. 한예종에 입학하지 못한 미련은 아니었을까. 그 모두라고 해도 '나'는 처음부터 비주류의 삶이었고, '나'가 의식했던, 의식하지 못했던 비주류의 삶을 선택하고 있었다. 홍대 앞에서 카페를 열 수 없던 이유는 넉넉한 자본이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매출을 올리려면 사람이 많이 다니는 좋은 자리를 차지해야 하고, 임대 공간도 넓어야 하며, 내부 인테리어를 비롯해 손님이 만족할 만한 시설과 서비스를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만한 자본도 없고, 카페를 운영해 본 경험도 없으며, 큰돈을 벌겠다는 욕심도 없어 보인다. '나'가 꿈꾸는 카페는 작은 사랑방 같은, 소박하고, 아담하고, 좋은 사람들이 어울려 따뜻하게 마음을 나누는 공간이다. 물론 카페를 하는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고, 카페가 잘 되어 돈을 벌면서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꿈꾸지만, 그렇게 먼 미래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뜨거운 8월 무더위에 '나'를 비롯해 가까운 친구들과 카페를 꾸미기 시작한다. 구멍가게에 있던 물건과 가구는 모두 사라지고, 구석구석 쓸고 닦고, 빈 벽에 새롭게 페인트를 칠하고, 개업 준비를 한다.
'나'와 언니는 안산에서 신이문까지 하루 왕복 4시간 전철을 타고 다녔는데, 그 거리와 시간이 처음에는 길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힘들고 피곤한 나날이 계속되자 힘들어한다. 생각해보면, 안산도 큰 도시고, 안산에서도 카페를 할 수 있을텐데 왜 전철을 2시간이나 타고 와야 하는 신이문역 '한예종' 근처에 카페를 얻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나'는 여전히 '한예종'에 대해 이루지 못한 막연한 동경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나'와 언니는 개업 준비를 하면서 중고 가구로 실내를 채우고, 한쪽에는 쇼핑몰 할 때 판매했던 옷도 전시해 판매하고, 만화책을 비롯해 책도 준비했다. 개업날에는 이웃에 떡을 돌리고, 오는 손님들은 작은 화분을 선물로 가져왔다. 
카페 손님은 거의 대부분 한예종 학생들이었고, 이때만 해도 한예종 후문 근처에는 카페가 없어서 손님들도 꽤 있었다. 카페를 열고, 소소한 일상과 이야기가 이어진다. 카페에서 담배도 팔았는데, 이전 구멍가게에서 팔던 담배판매권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에 담배도 판매하게 되었고, 라일락 할아버지가 찾아와 과일도 주고, 샌드위치도 사 먹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보이지 않게 된 일, 카페에서 비스코티를 구워 팔기 시작하고, 아이들이 와서 가장 싼 비스코티를 사 먹는 이야기, 어느 날, 우연히 만나게 된 고양이 두 마리의 이야기 등이 이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한예종 근처에 카페가 새로 문을 연다는 소문이 들린다. 겨울이 지나고 한예종 정문 앞과 학교 안에 동시에 카페가 문을 열자 '카페 그램'에는 손님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나'는 걱정, 두려움, 원망, 분노, 서러움, 좌절의 감정을 느끼며 마음도 몸도 망가졌다. 2년이 지나면서 열 개가 넘는 카페가 생겼고, 결국 '카페 그램'은 문을 열고 3년을 넘기지 못한 채 '나'와 언니는 카페 운영을 포기했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마무리는 요란스러웠다'고 간단하게 말하고 있지만, 카페 운영과 관련해 마음 고생을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그래픽노블'에 어울리게 글과 그림이 적절하게 어울렸다. 만화지만 칸으로 구분하지 않았고, 삽화라기에는 만화의 요소가 강한 그림이 많고, '노블(이야기)'이 끌고 가고, '그래픽'이 단단하게 결합한 형태의 훌륭한 '그래픽노블'이다. 만화를 창작하고픈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칸을 그리는 수고를 하기보다, 이렇게 자유로운 글과 그림을 통해 작품을 완성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 작품은 자본이 넉넉하지 않은 자매가 원하던 카페를 열고, 운영하지만 갑자기 늘어난 경쟁 카페들 속에서 현실의 벽을 느끼고 카페 운영을 포기하는 내용이다. 카페 주인이라는 낭만적인 이미지는 월세, 운영자금, 생활비 등의 현실 앞에서 여지없이 깨지고, 청년 창업과 청년 실업의 문제가 되는 단면을 볼 수 있다. 카페가 우후죽순처럼 어지럽게 늘어나는 데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경제문제가 내재되어 있고, 이 작품의 주인공처럼, 예술가(작가)이면서도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 문화예술에 관한 대중의 낮은 인식과 정부의 소극적 지원에서 비롯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대형 프렌차이즈나 대형 카페는 살아남고, 영세한 카페는 건물주에게 월세나 바치면서 근근히 유지하다 결국 폐업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소자본창업을 할 수 있고, 별다른 기술이 없어도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카페지만, 그만큼 경쟁이 심하고, 살아남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나'와 언니도 그런 것을 모를 리 없지만, 막막한 현실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눈에 보이는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손님으로 분위기 있는 카페를 찾는다. '나'의 마음에는 카페를 정리할 때의 복잡하고 심란한 마음과 함께,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느끼는 편안함이 그립다. 어쩌면 '나'는 다시 카페를 운영할지도 모르지만, 그보다 귀농을 해서 스스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한다. 그 역시 소박한 꿈일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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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화
심흥아 지음 / 새만화책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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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 선화
작가 : 심흥아
출판 : 새만화책

심흥아 작가의 첫 번째 작품. 첫 번째 작품에 이 정도 뛰어난 수준이라면, 작가의 실력은 이미 검증된 것이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글솜씨 또한 탁월하다. 제목부터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우리, 선화'는 주인공인 쌍동이 봉우리와 봉선화를 말하지만, 독자는 선화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선화를 처지를 생각하고, 선화를 응원하게 되면서 '우리 선화'로도 읽힌다.
동생인 우리에게서 따뜻한 자매애를 느끼면서, 쌍동이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선화의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담담하면서 나즈막히 가라앉은 나레이터, 선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집을 떠나 독립하려는 우리가 선화에게 준 선물, 브래지어를 하면서, 본 적도 없는 엄마가 생각난다는 말에, 울컥 눈물이 난다.
선화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만화를 그리고 싶어하지만, 제과제빵 기술을 배워 먹고 살 준비를 한다. 고생 끝에 작은 집을 마련하고, 집을 떠났던 동생 우리가 돌아오면서, 삶은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작가주의 만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톤'을 쓰지 않거나 적게 쓰는 것인데, 심흥아 작가의 작품에서도 이런 경향을 볼 수 있다. '톤'을 쓰되 그림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 정도로만 사용했다. 또한 톤을 한 가지만 사용하고 있고, 명암을 표현할 때만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인물이 하는 대사는 간결하고 많이 생략되어 있지만, 대사의 이면에 있는 풍부한 감정을 담고 있어 담백하면서도 깔끔하다. 그림의 선은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담백함이 느껴진다. 컷과 컷의 연결, 연출, 컷 하나의 디테일도 훌륭해서, 그림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이 작품에 관한 소개를 보자.
일란성 쌍둥이 자매이지만 속은 다른 봉선화와 봉우리, 그리고 할아버지라고 놀림을 받을 만큼 나이 드신 아빠, 이렇게 세 사람이 봉씨네 식구이다. 창문이 있고, 장마에 물 들어올 걱정 없고, 세탁기를 놓을 정도 크기의 화장실이 있고, 개수대가 두 개인 싱크대가 놓인 집에 살아 보는 것이 큰딸 선화의 소망일 정도로 소박한 살림살이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셋집으로 이리저리 이사를 다니던 봉씨네는 쌍둥이가 고등학교 들어갈 무렵 이사를 또 하게 된다. 마을버스 기사인 아빠가 안면 있는 승객인 스님의 제안으로 정착할 집을 마련할 때까지 절집으로 사는 곳을 옮기기로 한 것인데, 새초롬한 성격의 ‘우리’는 그 상황이 너무 못마땅하다. 그렇게 절집 사람들과 식구가 되어 3년째를 맞이한다.
선화는 자기 환경을 껴안고 견디며 진학을 포기하고 만화가가 되고자 하고, 언제고 집을 벗어나리라 마음먹고 있던 우리는 계획한 대로 상고 졸업 후 취업하자마자 독립하기 위해 집을 떠난다. 그 사이 아버지는 드디어 절집에 들어갈 때의 생각대로 온 가족이 모여 살 만한 집을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선화와 우리는 쌍동이 자매지만, 선화가 언니 노릇을 하고, 그래서인지 속이 깊다. 동생 우리는 자기 주장이 강한 편이다. 쌍동이가 아기 때 집을 나간 엄마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할아버지처럼 늙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우리가 친구들과 말다툼을 하고 나서, 학교 가는 길에 우리의 친구 언니에게 뺨을 맞는다. 자신은 '우리'가 아니라 '선화'라고 말하지만, 쌍동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그는 선화를 우리로 생각하고 동생의 복수를 한 것이다. 그 뒤로 선화는 시력이 나쁘다는 핑계를 대고 아버지에게 안경을 맞춰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가 하는 말이 퍽 인상적이다.
나는 동그란 검정테 안경을 쓰고 있다. 안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시력이지만, 눈 주위가 허전하면 알몸인 것처럼 불안하다. 정확하게는 열두 살 때부터이다.
이 문장, 선화의 독백은 청소년 시기에 안경을 쓰기 시작한 필자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안경을 쓴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외피를 덧입는 것이다. 즉, 자신의 열등한 모습, 부끄러운 모습-여기서는 선화의 한부모(어머니의 부재), 가난, 쌍동이-을 타인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심리적 도피인 것이다. 선화는 안경을 쓰면서 동생 우리와 다르게 보이고 싶었고, 동생이 동네 아이들과 싸움을 하면서 발생하는 결과에서 자신이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지만, 예민한 청소년 시기의 선화는 비록 쌍동이일지라도 자신과 우리의 존재를 하나가 아닌, 개별적 존재, 독립한 자아로 인식하고 싶은 무의식적 자각이 생긴 것이다.
가난한 선화네는 이사를 자주한다. 넓은 마루가 있던 단칸방, 계란집을 하는 방 두 칸짜리 집에서는 바퀴벌레가 많았고, 반지하 집에서는 장마철에 하수구에서 물이 역류해 바닥에 물이 들어찼다. 방 안에 또 방이 있는 집에서도 살았는데, 여러 번 이사하면서 선화는 집에 대한 몇 가지 기준을 갖게 된다. 창문이 있어야 하고, 계단이 하나 이상 있어야 하며, 화장실은 세탁기를 놓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하고, 씽크대의 개수대는 두 개여야 한다.
가난하게 자란 사람이라면 선화가 하는 말에 깊이 공감하리라. 필자도 무허가 판자집에서 살다 홍수로 집을 잃고, 산비탈 단칸방에서 살던 경험이 있다. 집안에 수도가 없어서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지게로 물을 길어다 먹어야 했던 어릴 때 경험이 있다.
선화가 겪었던 경험은 선화 또래-선화는 80년대 초반에 출생한 걸로 그려진다-에서도 흔히 할 수 없는 경험일 것이다. 
그렇게 자주 이사하다 선화의 아버지-마을버스를 운전하는-가 우연히 마을에 있는 작은 절-이라고는 해도 평범한 단독주택이다-의 주지스님(비구니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스님의 제안으로 절(연화사)에 들어와 살라는 말을 듣고, 절에 있는 남는 방으로 이사한다. 우리는 절에서 산다는 게 몹시 마땅치 않았지만, 아버지는 딸들이 습기 차지 않는 방에서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고, 돈을 모아 나중에 집을 장만하고픈 생각으로 스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고등학생 시기에 선화와 우리는 절에서 산다. 선화는 인문계 고등학교, 우리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주지스님-절에 스님은 한 분이시다-의 배려로 따뜻한 쌀밥으로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닐 수 있었다. 절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인 부처님 오신 날에는 선화와 아버지는 등도 달고, 절에 오는 손님을 맞이하며 가족처럼 지낸다. 다만 우리는 일찌감치 독립하고픈 마음으로 실업계 고등학교를 선택했고, 주말에도 햄버거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선화는 대학시험 준비 대신 만화공모전 준비를 한다. 화실에 다니는 친구 미영이 알려준 공모전을 보고 학교 자습시간에 만화를 그려 공모한 것이 장려상을 받는다. 담임선생님은 선화를 불러 점수가 낮다고 공부를 더 하라고 말하지만, 선화는 대학 진학은 가정형편으로 어렵고, 만화를 그리겠다고 말한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우리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다니고, 선화는 아버지에게 대학에 가지 않고 만화가가 되겠다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선화를 야단친다. 선화는 서러움이 복받친다.
고등학교 졸업식이 가까워지고, 우리는 이미 취업을 해서 집을 나가 친구와 자취를 하겠다고 선언한다. 아버지도, 선화도 안쓰러운 마음이지만 우리의 각오를 막을 수는 없다. 우리는 독립하면서 가족과 절 식구들을 위해 선물을 세심하게 준비한다. 선화에게는 브래지어를 선물하고, 선화는 '기억에도 없는 엄마 생각이 났다. 가슴이 뜨겁다'는 감정이 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선화는 제빵기술을 배워 빵집에서 일하며 틈틈이 만화를 그린다. 퇴근하면서 남는 빵을 얻어와 아빠와 절의 보살님들에게 나눠드리고 함께 저녁을 먹는다. 절에는 연세 많은 김포할머니와 다른 보살님도 살고 있는데, 김포할머니가 갑자기 피를 쏟고 돌아가신다. 선화는 마당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돌아가신 김포할머니의 주검을 보고나서 깊은 생각에 잠긴다. 할머니의 죽음은 무섭거나 두려운 감정이 드는 것이 아니고, 삶이 무엇인가에 관한 깊은 고민과 연민의 마음이었다.
선화는 빵을 챙겨 친구와 자취하고 있는 우리를 찾아간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이 남자친구였다는 걸 처음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는다. 집에 돌아와 우리에게 몸을 잘 돌보라고 문자를 보내는 선화의 마음은, 어린 나이에 임신하고, 아이를 출산하게 되면 우리의 삶이 더 힘들어질 것을 걱정하고 있다.
김포할머니가 돌아가시고 49제를 치른 다음, 우연히 김보살님이 살던 집을 내놓겠다는 말을 아버지가 듣고, 그 집을 사자고 선화와 의논한다. 연립주택이지만 깨끗하고 2층에 방이 세 개나 되어 아버지와 선화는 그 집이 마음에 든다. 선화네가 절에서 이사 준비를 할 때, 주지스님은 다시 한 가족을 새로 데려오는데, 아주머니와 어린 두 딸은 쌍동이였다. 선화는 쌍동이 여자아이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인사한다. 
절을 떠나 산 집으로 이사한 선화와 아버지는 우리가 집에 들어올 것을 기다린다. 우리는 간단한 짐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고, 세 식구는 오랜만에 다시 모여 산다. 엄마가 없는 가족이지만, 아버지와 두 딸은 그렇게 무심한 듯, 하지만 서로를 애틋하게 생각하고 챙기면서 엄마의 부재와 가난을 극복하고 있다.

선화처럼, 나도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거의 50년 가까이 되었는데, 내가 국민학교 때 이미 아버지는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그래도 이 작품 속에서 선화 아버지는 마을버스 운전을 하며 집안을 이끌어 가는 능력자였지만, 내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고는 내가 어릴 때부터 백수 노릇을 했다.
선화는 엄마의 얼굴을 모르지만, 나는 어머니와 줄곧 살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내가 치렀으니, 그런 면에서는 선화보다 조금 운이 좋았다고 할까, 엄마의 그리움을 덜 느낄 정도라고 할까.
어린 선화가 성장하면서 느끼는 섬세한 감정이 녹아 있는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삶과 함께 독자의 마음까지 성장하도록 만드는 따뜻한 마음이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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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순이 내 사랑
권용득 지음 / 새만화책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제목 : 영순이 내 사랑
작가 : 권용득
출판 : 새만화책

영순이는 남자다. 게다가 무섭게 생겼다. 게다가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가난하다. 그의 친구는 미국이다. 미국이는 혼혈이고 기타를 잘 친다. 좋아하던 여자 정자는 미국이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 
월세는 밀리고, 돈을 벌 방법은 모르겠고, 세상은 답답하다. 죽는 것 조차 한심하다. 맨주먹에 열정 뿐인 젊은이들은 세상과 맞서 싸우려 하지만, 그 대상은 모호하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열심히 살려고, 뇌물까지 줘가며 애를 쓰지만 돌아오는 것 사기와 비웃음뿐.
청춘이 아름답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아니, 거짓말이지만 진짜라고 믿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더 비참하니까.
권용득의 첫 장편 만화인 이 작품은 제작지원금을 받아 창작되었고, 이 만화를 계기로 권용득은 진짜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고 작가 스스로 말한다). 
이 작품과 비슷한 수준의 외국 그래픽 노블이 한국에 소개되었다면, 아마도 이 작품보다는 훨씬 많은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외국의 그래픽 노블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으며, 오히려 뛰어난 작품성을 갖춘 작품이지만 단지 한국의 만화가라는 이유 때문에 홀대를 받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권용득 뿐 아니라 박건웅, 김한조, 앙꼬, 심흥아 등을 비롯해 많은 작가주의 만화가들이 놓인 현실이기도 하다. 
만화를 그려 배를 곯지 않는 것이 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화를 그려서 갑부가 되는 일본처럼까지는 아니어도, 직장인들보다는 수입이 많아야 할 것이고, 그런 사회가 '문화'를 존중하는 사회이며, 바람직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권용득은 이 작품에서 '톤'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만화가라면 누구나 쉽게 톤의 유혹을 받을 것이고, 그것이 작업도 빠르고, 보기에도 좋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용득은 펜만을 사용했다. 무수히 많은 선이 들어가는 작업에도 펜으로만 작업했기에 드러나는 손맛이 보인다.
공장 만화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작가주의 만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한국은 만화를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지만, 이렇게 좋은 작가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어 감사하다.

이 작품은 2부로 구성되었으며, 1부 3편, 2부 5편으로 모두 8편의 단편 연작으로 구성하고 있다. 1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영순이가 편의점 아르바이트에서 해고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순이는 인상이 험악하다. 머리는 빡빡 밀었고, 체격도 크다. 사람들은 영순이가 말하면 경계하고, 겁을 먹는다. 그건 영순이가 바라는 바가 전혀 아니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영순이를 무서운 사람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영순이의 인상이 험악하다며 영순이를 해고하는 편의점 사장의 인상도 결코 만만치 않다. 그렇게 일자리를 잃고,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지만 그것도 욕을 먹는다. 월세가 밀려서 쫓겨나기 직전이고, 사귀던 정자는 헤어지자고 말한다. 영순이에게는 총체적 난국이 닥쳤다. 길에서 할머니 젖가슴을 훔쳐봤다는 누명을 쓰고 할머니에게 얻어 맞기까지 하면서, 영순이라는 인물을 소개한다. 
1부의 시작만으로도 이 만화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작가의 펜선의 핍진함과 굉장한 밀도는 인물의 대사-말풍선-뿐 아니라 그림 자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는 힘이 있다. 이별하자는 정자는 머리를 모히칸 머리로 깎았고, 입고 있는 티셔츠에 PISS라고 새겨 있다. 이 단어는 '오줌'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이 단어가 들어가는 용법으로 pissed off,  piss someone off, piss off 등으로 쓰는데, '빡치다', '빡치게 하다', '꺼져' 같은 의미를 갖는다. 작가가 정자의 티셔츠를 클로즈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단순한 풍자일 수 있고, 정자가 좋아한 사람이 정작 영순이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면, 이 단어는 영순이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보인다.
2화 '외계인 등장'에서 영순이는 치매를 앓고 있는 할아버지와 친구 미국이와 함께 살고 있다. 영순이는 할아버지를 '우리 용득이'라고 부른다. 어린아이같은 할아버지는 밥 달라고 칭얼거리고, 기저귀에 똥을 싼다. 영락 없는 아기다. 영순이는 미국이를 찾다가 옷장에서 벌거벗은 미국이와 정자를 발견한다. 영순이는 충격을 받아 집을 뛰쳐나가고, 어느 건물 옥상에 올라가 자살하려 하는데, 그때 자신을 영희라고 불러달라는 외계인을 만난다. 그 외계인은 평범한 여자로 보이고, 영순이가 가수라는 걸 알아주고, 응원한다. 영순이는 조금 전 죽겠다는 마음이 사라지고,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 펴라'고 노래한다.
3화 '영순이와 미국이'는 집을 뛰쳐나간 영순이를 걱정하며 미국이와 정자가 헤어지고, 미국이가 과거를 회상한다. 영순이 애인이었던 정자를 처음 만났을 때, 셋이 항상 어울려 다니며 놀지만, 어느 날, 정자는 머리를 모히칸처럼 깎고 나타나 미국이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둘은 섹스를 하다 영순이가 집에 돌아오는 소리를 듣고 옷장 속으로 숨는다.
정자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미국이는 골목 담벼락에 서 있는 영순이를 만나고, 영순이도 자신이 질투심 때문이었다는 걸 인정한다. 두 사람은 다시 친구로 돌아오고, 마침 첫눈이 나린다.
2부에서는 본격 사건이 펼쳐진다. 1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월세가 밀린 영순이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편지를 써놓고 나간다. 영순이와 미국이는 고부장이 소개한 '벌떼촌 성인 나이트클럽'을 찾아가 오디션을 보지만, 락과 펑크도 구분 못하는 클럽 부장에게 쫓겨난다. 실망한 두 사람은 터덜거리며 거리로 나서고, 미국이는 기타를 영순이에게 맡기고 어디를 다녀오겠다고 하고, 영순이는 월세 걱정을 하며 집에 돌아오는데, 정작 주인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준다. 월세는 이미 영순이 애인이 다 냈다고 하면서. 영순이는 애인이라면 정자가? 하면서 방으로 들어오는데, 거기에는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말한 영희가 할아버지를 돌보고 있었다.
여기부터 미국이가 고부장을 찾아가서 벌어지는 사건과 영희가 영순이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하고, 영순이가 라디오헤드의 Creep을 미국이의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장면이 몽타주 기법으로 펼쳐진다. 미국이는 자신들을 속이고 비웃는 고부장을 패죽이고 싶었지만 참는다. 그러다 고부장에게 변기뚜껑으로 맞아 쓰러지고, 영순이는 노래를 절절하게 부르고, 영희는 사라진다. 영순이가 부른 노래 Creep은 노래 가사가 자신의 처지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어서, 이 가사를 음미하는 것은, 영순이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네가 내게 다가왔을 때
너의 눈을 볼 수 없었어
너는 마치 천사같아
너의 살결은 날 눈물짓게 해
넌 깃털처럼 떠다니지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내가 특별했으면 좋았을텐데
너는 특별해
하지만 난 병신이지
난 이상한 놈이야
내가 지금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지?
난 이곳이 어울리지 않아
상처가 된다해도 상관없어
자제를 할 수 있엇으면 좋겠어
난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어
난 완벽한 영혼을 갖고 싶어
네가 알아챘으면 좋겠어
내가 주변에 없더라도 
넌 정말 특별해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하지만 난 병신이야
난 이상한 놈이야
내가 지금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지?
난 이곳이 어울리지 않아
그녀가 도망친다
그녀가 또 도망치고 있어
그녀는 도망가네
널 웃음짓게 하는 모든 것
넌 정말 특별해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하지만 난 이상한 놈이야
난 병신이야

노래 가사는 영순이의 처지와 심리를 정확하게 반영한다. 영순이는 영희가 외계인이라는 걸 알지만, 그녀는 아름답고, 자신을 이해하는 영희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지만, 감히 말을 꺼낼 처지가 아니다. 자신은 외모도 험상궂고, 가진 것도 없으며,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한심한 백수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영희와 자신의 거리가 너무 멀어 마음이 아프다. 절절하게 부르는 영순이의 노래는 독자의 마음을 아프게 움직인다.
2화 'Raging 영순'에서 영순은 영자가 달려와 미국이가 응급실에 있다고 알려주고, 둘은 미국이가 입원한 응급실로 달려간다. 미국이가 혼수상태인 걸 본 영순이는 고부장을 찾아가고, 그 자리에 조사장과 함께 있는 고부장에게, 미국이에게 사과하라고 말하지만, 고부장은 비웃기만 한다. 배경 설명은 없지만, 이 자리에 고부장, 조사장과 함께 강회장 심부름꾼도 등장하는데, 뒷부분으로 가면서 이들의 존재감과 역할이 커진다. 영순이는 화가 치솟고, 고부장을 창밖으로 밀어버린다. 사건이 본격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화 '외계인의 행방(1)' 미국이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다. 영순이가 갔던 나이트클럽에서는 여러 명이 죽은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형사는 CCTV를 보면서 영순이가 여러 명과 싸우는 장면을 보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영순이는 미국이와 영자를 만나 고부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영순이 마음은 고부장을 죽이고 싶었지만, 그때 불쑥 나타난 영희가 영순이의 살기를 잠재운다. 실제 고부장을 죽인건 강회장 심부름꾼이라는 해결사였다.
4화 '외계인의 행방(2)' 경찰은 영순이 집을 찾아와 치매 할아버지와 실랑이를 하다 결국 영순이를 체포한다. 경찰은 강회장을 찾아가 고부장이 횡령한 장부를 보여준다. 강회장은 해결사에게 전화해 사건을 마무리하라고 명령한다. 경찰에 잡혀가던 영순을 구한 건 미국이었다. 미국이는 꾀병을 부려 영순이를 구하고, 영순이는 현장 목격자인 영희를 찾으러 나선다.
5화 '다시, 사노라면' 영희를 찾아다니던 영순은 경찰을 만나고, 경찰의 설득으로 함께 경찰서로 가려는 순간, 해결사가 나타나 경찰을 때려눕히고 영순과 싸운다. 칼을 든 해결사와 죽음의 사투를 벌인 영순은 해결사를 쓰러뜨리고 자신도 정신을 잃는다. 영순은 영희를 만나고, 잘 참고 살아온 영순을 격려하고 떠난다.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영순은 진범을 잡고 사건이 해결된 것을 알게 된다. 밀린 월세를 내준 것도 영자였고, 두 사람은 '사노라면'을 부르며 새로운 날, 그러나 달리 바뀔 것이 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영순이와 미국이는 안정된 직업을 갖지 못한 청년들이다. 그들이 술집에서 노래를 하는 것도 직업이라고 보긴 어렵다. 영순이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어도 인상이 험상궂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당한다. 20대 청년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갈지 그들 자신도 알 수 없겠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매우 불평등하고, 자본의 착취가 격렬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청년들이 집단으로 사회에 저항하고,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청년의 권리를 쟁취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하지만, 그건 나이 먹은 사람의 바람일 뿐, 변화는 청년 내부에서 일어나 시작해야 하고,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영순이와 미국이, 영자의 삶은 어떻게 바뀔까,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닥친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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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여자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권용득 지음 / 미메시스 / 2014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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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쁜 여자
작가 : 권용득
출판 : 미메시스

권용득의 만화는 처음이다. 너무 늦게 만난 것 같아 미안하고 그래서 더 반갑다. 
만화를 읽다 보면,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 같다. 세밀한 묘사와 감정의 선을 그려나가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순간, 영화감독 홍상수와 그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권용득 작가가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만화와 영화에서 각자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으니 이해할 거라 생각한다.
홍상수의 영화를 만화로 그린다면 권용득의 만화가 되고, 권용득의 만화를 영화로 만들면 홍상수의 작품이 된다.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대화, 어색하고 기분 나쁜 상황에서 대처하는 모습, 소심함과 비겁함 따위의 사사로운 감정 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민낯의 얼굴이 많이 닮았다.
짧은 단편들은 모두 작가의 1인칭 주관적 시점의 경험담을 그리고 있고, 고향을 방문하고, 결혼식에 참석하고, 친구와 동기, 선후배를 만나고, 예전의 짝사랑했던 여자를 만나고, 그렇게 다시 이야기가 얽히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런 찌질함은 어찌보면 20대, 30대 남자들의 특권(병신짓도 특권이라면 특권이다)임에 틀림 없다. 이 나이의 여자들은 절대로 이런 짓을 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권용득의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기들이 찌질이라는 것을 모른다. 모두들 자기 잘난 맛에 살고, 다른 사람을 흉보고, 욕하고, 비웃는다. 하지만 그런 모욕은 모두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시간이 지난 다음에서야 깨닫게 된다.
시간이 흘르고 나이가 들어 어느날, 잠자리에 들었을 때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발로 이불을 차고 싶도록 스스로가 쪽팔리고 한심했던 때가 있을 것이다. 없다고? 당신은 인생을 헛살았다.
얼굴이 화끈하도록 쪽팔림을 느낀다면, 당신은 성장한 것이다. 어리석은 찌질이에서, 세상을 조금은 알게 된 어른으로. 그러니 괜찮다. 이 만화를 보고 씁쓸하게 웃는다면 당신은 그때보다는 조금쯤 나아졌다는 것을.
마지막 단편 '예쁜 여자'를 보고 울었다. 누구에게나 힘들고 어려운 시절은 있을 것이고, 그것을 헤쳐나가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앞길이 막막할 때, 어디에고 기대고 싶을 때가 있고 그 시기를 겪으면서 사람은 자란다. 엄마와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미워할 수 없는 가족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해와 공감은 사랑의 기본 조건이다. 

이 작품집은 여덟 편의 단편을 모은 것이다. 작가의 말에도 있듯이 이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사랑'이다. 하지만 작가도 '사랑이 뭘까요?'라고 묻고 있듯이, 사랑이 무언지 답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나머지의 진실]에서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문자를 받는다. 그것을 본 여자는 그 여자가 누구냐고 다그친다. 친구 결혼식장에서 만난, 문자를 보낸 그 여자(이기쁨)는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였고, 두 사람은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헤어진다. 택시를 타고 떠나는 여자의 표정이 좋지 않다. 짜증이 났거나, 기분 나쁜 표정이다. 조금 전까지 술을 마시면서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여자의 마음이 상한 이유는 뭘까. 남자에게 온 전화를 남자는 받지 않았고, 그것은 당연히 남자의 애인일 거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자가 이 남자와 사귀던 때에도 남자의 핸드폰이 울렸고, 남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옛날 애인을 만난 남자를 보면서 여자가 울고, 남자는 '들키지 않도록 조심할게'라며 말한다. 이런 무신경과 뻔뻔함은 남자만의 전유물일까, 아니면 극히 일부 '멍청한' 남자들의 특수한 경우일까, 궁금하다. 옛날 애인을 '후배'라고 속이는 것도, 앞으로 들키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도 뻔한 거짓말인데, 남자는 뻔뻔해서 그렇다해도 여자는 왜 속아주는 척하는 걸까,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단편 속 한 컷에는 권용득 작가의 아내이자 작가인 송아람의 작품 '자꾸 생각나'를 홍보하는 컷이 있다. 제목 위에 팔을 걸치고 있는 남자는 역시 작가이자 '새만화책' 대표인 김대중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이 단편이 2005년 7월 [계간만화]에 실렸던 것을 고려하면, '자꾸 생각나'가 레진코믹스에 연재하고 있을 때로 추정한다.
두번째 작품 [영원히 안녕]는 애인과 다투고 졸업한 학교의 축제에 온 남자가 옛날 애인 민주를 만나 '어쩌다' 함께 밤을 보내고 헤어진다. 남자는 여전히 옛날 애인 민주에게 마음이 있고, 그녀와 결혼하고픈 마음도 있지만, 지금 애인도 포기한 건 아니다. 남자의 마음은 갈대처럼 움직이고,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구분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고, 옛날 애인 민주가 찾아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고 말한다. 남자는 민주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하고, 민주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그리고 다시 다퉈서 잠시 헤어진 애인에게 전화한다. 남자는 민주의 결혼식장에서도 마지막까지 농담처럼, '나에게 시집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남자의 분열적 감정이 담겨 있는데,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에 대한 질투와 원망이 담겨 있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두고 비아냥과 투정을 하는 것이다. 그건 퍽 유치하고 감상적인 심리로, 남자가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와나카의 추억]은 남자가 잠시 뉴질랜드 와나카에서 지낼 때 있었던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다. 남자는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엄마와 전화를 하면서 알게 된다-친구가 있는 뉴질랜드로 간다. 그곳에서 한동안 지내지만, 딱히 할 일도, 하고픈 일도 없는 남자는 바에서 늙은 주민을 만나 서로 빗나가는 대화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공항에서 남자는 바에서 만난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가 구입한 낚시면허증을 주려하지만, 통화는 실패로 끝난다.
바에서 만난 늙수그레한 주민은 결혼도 한 적이 없는 듯하고, 살고 있는 와나카 바깥을 나가본 적도 없다고 말한다. 뉴질랜드가 천국이라고 말하지만, 그곳도 사람이 살고, 외롭고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으며, 세상 어디나 사람 사는 건 비슷하다는 걸 남자는 깨닫는다.
[그만한 돈]은 만화가 용득권과 김응응이 만나 술을 마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원고료를 조금 더 달라는 용득권은 잡지사의 변명이 불쾌하고 짜증난다. 두 사람은 대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김응응은 '자갈마당'에 가자고 말하며, 용득권에게 '자갈마당'에 가봤는냐고 묻는다. 용득권은 두 번 가봤으며, 우연히 같은 여자를 만났다고 말한다. 여자가 있는 곳은 여관처럼 낯설고 지저분한 곳이 아니라, 여자가 생활하는 공간이었고, 여자의 일생 속으로 들어간 용득권은 낯설지만 편안한 감정을 느끼면서, 여자에게 돈을 주고 섹스를 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여자는 용득권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다시 찾아오라고 하지만, 용득권은 다음에 한 번 더 갔을 뿐, 더 이상 여자를 찾아가지 않는다. 이유는 죄책감이 들어서라고, 용득권은 말한다. 
그가 성매매 산업의 구조적 모순과 희생물로 전락한 성매매 여성의 처지를 얼마나 깊이 아는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그가 막연하게 느낀 죄책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를 생각하면, 많은 남성들이 본능적으로 여성의 성상품화, 성매매에 대해 죄의식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지금 상황-자본주의 체제와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 체제-에서 남성은 '남자다움'과 체화된 가부장제 의식으로 여성의 성상품화, 성매매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똑똑똑]은 친구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수도관이 얼지 않도록 틀어놓은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의미하지만, 더 내밀한 곳에서는 엄마에 대한 안부인사와 방석집에서 만난 동향의 여자의 마음을 두드리는 소리로 들린다.
'나'는 옥탑방에 누워 꼼짝하지 않는데, 안부전화를 한 엄마와 다투고 기분이 좋지 않다. 그때 친구가 찾아오고, 멀리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 마지막으로 술을 마신다. 가진 돈을 다 쓰려고 친구는 '좋은 데'를 가자고 택시기사에게 말하고, 그들은 철거 직전의 허름한 방석집에서 옷을 모두 벗고 '맥주와 섹스'를 두당 10만원에 거래한다.
그곳에서 만난 여자는 '나'와 동향이고, 무엇이든 만화로 그린다는 말을 들은 여자는 이런 장면은 그리지 말라고 부탁하지만, 독자는 그렇게 말하는 내용까지를 포함해 그곳에서 오간 대화를 '관음'한다. 그렇게 친구는 쓰던 밥솥을 남기고 떠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섹스를 한 술집여자와 엄마를 생각한다. 그리고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슬퍼서 약간 눈물을 흘리는데, 그건 '나'의 복잡하고도 서글픈 마음을 드러내는 진심으로 보인다.
[막차]는 막차 시간을 다르게 알려준 여자 후배와 얽힌 이야기다. 서울에 살던 영수는 월세로 살던 집에서 월세가 밀려 보증금까지 날리고 잠시 고향집으로 내려온다. 그는 만화를 그리고 있지만, 형편이 좋지 않다. 학교 후배인 정태와 어울리며 졸업한 대학도서관에서 만화 작업을 하는데, 우연히 후배 선미를 만난다. 공대에서 여학생이 드물기도 하지만, 선미는 미인이라 인기가 많다.
세 사람은 자주 어울리며 밥도 먹고, 술도 마시는데, 하루는 정태가 엄마와 함께 외갓집에 가고, 영수와 선미는 술을 마신다. 막차는 밤 11시라고 선미가 알려주고, 그 시간에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려도 막차 버스가 오지 않자 두 사람은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간다. 영수는 선미에게 키스를 하지만 선미는 거절하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정태는 영수가 선미와 술을 마셨다는 걸 알고 '형은 씨발놈'이라고 욕하고 싸운다. 
영수는 치킨집을 처분한 엄마에게서 돈을 받아 다시 서울로 올라오고, 가끔 선미에게 연락하지만 선미에게서는 답이 없다. 영수는 선미를 사랑한 걸까, 아니면 선미의 육체만 원한 걸까. 남자는 사랑과 섹스를 동일하게 생각하는 성향이 있다. 또는 일시적인 충동을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정태의 말대로, 영수는 서울에 애인이 있으면서도 선미를 집적대는 것이다. 이건 사랑이라고 할 수 없고, 선미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선미는 그걸 느꼈고, 다시는 영수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국화차와 소주] 만화가 영수는 여자친구가 있지만, 우연히 블로그를 방문한 팬이라는 여성 구외영을 알게 되고, 출판사에서 일하는 구외영은 영수에게 일을 부탁한다. 두 사람은 인사동에서 만나 국화차를 마시고, 술을 마신 다음, 구외영의 집에서 술과 함께 섹스를 하려 하지만, 구외영이 사귀는 남자와 전화를 하는 사이 영수는 집으로 돌아온다. 영수의 여자친구는 연락이 닿지 않던 영수를 추궁하고, 구외영과 있었던 일을 미루어 짐작한다.
영수의 친구가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 영수는 오래 전 사귀었던 첫사랑 민주를 떠올리고, 민주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것을 두고 배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다시 구외영에게서 전화가 오고, 혼자 다짐했던 마음과는 달리 택시를 타고 구외영을 만나러 간다.
두 사람은 섹스를 하고, 영수는 지금의 애인과 구외영과 구외영이 만난다는 유부남을 떠올리며 자괴감에 빠진다. 애인 앞에서도 비루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영수는 친구 결혼식에 가는 길에 첫사랑 민주의 연락을 받는다. 자기는 참석하지 못하니 대신 축의금을 내달라는 말이었다. 결혼식에서도 영수는 구외영에게 연락을 하지만, 끝내 구외영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고, 첫사랑 민주 이름으로 한 축의금을 돌려받지 못했으며, 그의 애인과는 결혼을 했고, 이 모든 일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미화하지 않은 영수의 일상은 창작이자 고백이다. 독자는 물론 영수의 이야기를 픽션으로 받아들이고, 작가 역시 영수의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고, 배신감을 느끼고, 헤어지고, 사랑하는 감정, 미워하는 감정이 냉온탕처럼 오가는 것은 욕망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 욕망은 비단 나이가 젊기 때문은 아니다. 마영신 작가의 [엄마들]을 보면, 50대의 엄마들이 보여주는 적나라한 욕망의 퍼레이드는 나이와 아무 관련이 없음을 알게 된다.
[예쁜 여자]는 구외영의 시각이다. 모텔에서 몰래 빠져나간 영수를 모른 체하는 구외영은 출판사에서 기획회의를 하며 편집장과 대립한다. 편집장은 유부남이고, 그와 내연관계지만, 남자를 사랑하는 건 아니다. 어렵게 대학을 마치고, 출판사에 임시직으로 들어갔다가 정식 사원이 된 것도 편집장의 배려였고, 편집장은 출판사 사장의 아들이며, 그 남자는 다른 남자와 달라보였다. 그건 물론 구외영의 착각이지만, 구외영은 자신을 합리화한다.
갑자기 병원에 입원한 엄마를 만나러 고향으로 내려간 구외영은 집에서 숨겨놓은 엄마의 일기를 발견하고, 과거를 떠올린다. 자기만의 방이 없었던 어린 시절, 제멋대로 사는 아버지와 자기 몸을 더듬던 오빠의 손길, 늘 고생하는 엄마의 삶이 지겨워 집을 떠나 서울로 왔지만, 그 역시 삶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평생을 고생하며 살아온 엄마의 인생, 유부남인 편집장의 노리개처럼 전락한 자신의 삶이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비참한 숙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극복할 의지도, 최소한의 디딤돌로 없는 구외영으로서는 슬픔과 비애만을 느낄 뿐이다.
다시 서울로 올라온 구외영은 출판사에 사직서를 내고, 스스로 살아갈 길을 찾기로 결심한다. 부모의 삶도, 자신의 삶도 비난하거나 비난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누구의 삶도 소중하다는 것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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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유디트 바니스텐달 지음, 이원경 옮김 / 미메시스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제목 :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
작가 : 유디트 바니스텐달
출판 : 미메시스

가족이 겪는 아픔과 슬픔을 잔잔하면서도 감동 있게 그려낸 그래픽노블. 한 가족의 구성원이 아버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가를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작품이 시작하기 전에 가족 관계도를 보여준다. 이 관계도를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는, 이 가족이 어떻게 맺어졌는가를 독자가 미리 알기를 바라는 것이고, 이 작품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작품에는 모두 다섯 명의 가족 구성원이 나오지만, 작품에서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는 사람은 네 명이다. 루이즈는 너무 어려서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귀여운 아기로만 등장한다.
주인공 다비드는 1946년생으로, 여행서적 전문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이혼한 전처 율리아와는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지만 둘 사이에서 낳은 미리암과는 가깝게 지낸다. 다비드는 파울라와 재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나이 차이가 열일곱 살이어서 딸 미리암과 새엄마는 불과 열세 살 차이여서 엄마라기보다는 언니 같은 느낌이다.
미리암은 혼자 아이를 출산하는데, 미리암의 딸 루이즈가 2000년 생인데, 다비드와 파울라의 딸 타마르는 1992년으로 불과 여덟 살 차이나는 이모와 조카 사이가 된다. 미리암과 타마르는 이복 자매면서 열여섯 살 차이가 난다. 이런 가족 관계를 바탕으로, 작품은 네 사람의 시선으로 펼쳐진다. 
다비드는 친구인 의사 조르지 앞에서 자신이 후두암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아직 어린 딸 타마르였다. 어린 딸을 두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다비드는 진한 슬픔이 차오른다. 다비드를 위로해 주는 사람은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유모였다. 유모는 쓰러진 다비드에게 나타나 용기를 주고, 희망을 심장에 넣어준다.

미리암
미리암은 2000년 4월,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하인에서 혼자 아이를 출산한다. 따뜻한 물이 가득한 욕조에서 루이즈를 낳는다. 미리암의 출산 방식은 한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데, 산부인과에서 자연분만 또는 제왕절개술로 출산하는 것이 대부분인 것을 보면, 미리암의 자연분만, 그것도 물속에서 아이를 낳는 방식은 특별하면서 아름답게 보인다.
아빠와 새엄마, 이복동생은 모두 미리암이 아기를 낳은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아이를 낳고 미리암은 루이의 전화를 받는다. 루이즈의 아빠이기도 한 루이는 미리암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만났다. 그때 이미 루이는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미리암도 사랑한다고 했고, 두 사람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사랑을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은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걷는데, 루이는 목수로 일을 하는데, 나무가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고 했다. 미리암은 보도사진 작가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코소보 전쟁에 종군기자로 갔었다. 

여기서 잠깐, 미리암이 갔던 코소보 전쟁에 관해 간략하게 알아보자. 코소보 전쟁은 내전의 성격이었지만 미군과 나토군이 개입하면서 국제전쟁으로 확산한 전쟁이다. 1998년 2월에 시작해 1999년 6월에 끝난 전쟁으로 알바니아계 준군사조직인 코소보해방군과 유고슬라비아연방공화국 정부군이 상대였다. 코소보는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발상지로 세르비아 영토였으나 오스만 제국에게 전쟁에서 패하고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무슬림계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에 살기 시작하면서 알바니아인 비율이 높아졌고, 1974년 유고의 티토 대통령이 유고연방 내 자치주로 승격했다.
1980년, 티토가 죽고나서 1989년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세르비아 공화국에서 집권하자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의 성지라는 이유로 코소보의 자치를 박탈한다. 이 조치에 분노한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분리독립을 주장하고, 1995년 코소보해방군을 결성해 무장투쟁을 시작한다. 
1998년 3월, 코소보해방군이 먼저 지역을 순찰하던 세르비아 경찰을 사살했고, 세르비아가 주세력이었던 유고연방은 정부군을 코소보로 파견해 코소보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미리암은 이 전쟁에 종군기자로 들어갔지만, 아이까지도 잔혹하게 학살하는 장면을 보면서 트라우마가 생겼고, 더 이상 전쟁 사진을 찍지 않게 된다.  
미리암이 루이즈를 낳고 집으로 돌아와 아빠 다비드를 만났을 때,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빠에게 그 말을 듣는 미리암의 손이 떨리고, 자러 들어갔던 타마르도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울면서 나온다. 미리암은 새엄마 파울라에게 아버지의 암 이야기를 꺼내지만, 파울라는 미리암에게 화를 낸다. 남편 다비드나 미리암 모두 너무 과묵해서 마음을 나누지 않는 것에 화가 난 것이다. 바싹 마른 아버지의 모습에서 해골이 된 아버지의 환영을 보고, 죽음의 사신과 춤을 추는 꿈을 꾼다.

타마르
타마르는 아빠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5일 동안의 여행이지만 옆집 친구 맥스와 헤어지는 건 더 오랜 시간처럼 느껴진다. 타마르의 엄마 파울라는 남편에게 왜 같은 장소로만 여행을 하느냐고 묻지만 다비드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마 지난 5년의 세월이 다비드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행복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 시기에 지금의 아내 파울라를 만났고, 둘 사이에 타마르가 태어났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기 그 여행지에서 보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다비드가 딸 타마르와 단 둘이 그 여행지로 떠나는 것도, 어린 딸에게 추억을 남겨주고 싶은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소박한 소망은 아닐까 생각한다.
호수에 도착해 다비드는 낚시를 하고, 타마르는 수영을 한다. 물속으로 잠수한 타마르는 인어를 만난다. 타마르는 인어에게 멀리서 낚시하고 있는 아빠를 보여주며, 자기를 낳아준 사람이라고, 하지만 곧 죽게 될 거라고 말한다. 타마르는 아빠와 장을 보러 가고, 배를 타고 낚시로 물고기를 낚아 배에서 직접 구워 먹는 소소한 일상을 누린다.
맥스가 쓴 편지를 파울라가 풍선에 묶어 보내면, 호수 여행지에 있는 다비드가 받아서 요트 돛대 기둥에 묶어 놓고 타마르에게 편지가 왔다고 알려준다. 물론 진짜 편지는 우편을 통해서 오지만, 아이들의 꿈을 살려주는 어른들의 다정한 모습을 보는 것도 정겹다.
타마르가 잠든 밤, 다비드는 선착장에 홀로 앉아 유모가 심어준 희망을 조금씩 꺼내보면서 기운을 잃지 않으려 하지만, 어린 딸을 생각하면 암으로 아픈 것보다 더 마음이 아리다.
타마르는 아빠와 둘이 배에서 잠을 자며, 별들이 쏟아질 것같은 하늘을 바라보다 묻는다. '영원하다'가 무슨 뜻이냐고. 세상은 모두 죽는다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모두. 타마르는 호수의 인어와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와 맥스를 만난다.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맥스와 놀고 있던 타마르는 아빠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는다. 타마르는 작업실에 있던 엄마를 부르고, 구급차에 실려 다비드는 병원 응급실로 실려간다.

파울라
병원에 입원한 다비드의 상태를 보던 파울라는 주치의이자 다비드의 친구인 의사 조르지에게 남편의 상태에 관한 설명을 듣는다. 다비드의 후두암은 이미 온몸으로 퍼져 있었고, 앞으로 남은 기간이 길어야 6개월이라는 말을 듣는다. 
퇴원한 다비드를 돌보며 자기 일-패브릭 디자이너-을 하는 파울라는 헬싱키에서 닷새간 객원 강사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다비드나 옆집 맥스 엄마는 걱정하지 말라며 헬싱키에 다녀오라고 말하지만, 남편이 언제 죽을까 애태우는 파울라는 다비드에게도, 맥스 엄마에게도 화를 낸다. 그는 슬프면 화가 난다고 했다. 다비드가 죽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미쳐버릴 것 같은 파울라는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채 헬싱키로 떠난다. 그는 호텔에 도착해 호수가 있는 곳으로 산책을 나왔다가 우연히 만난 노인에게 남편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노인에게서 건강했을 때 남편에게서 맡았던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파울라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타마르는 이제 아홉살이 되었다. 파울라가 작업실에서 잠깐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가족이 모두 사라졌다. 맥스 엄마는 모두 병원에 갔다고 말한다. 파울라가 병원에 도착해 다비드 병실에 들어섰을 때, 타마르 홀로 아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파울라는 다비드의 마지막 순간이 머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다비드
몸 상태가 조금 좋아질 때면 딸 타마르와 놀아주지만 그보다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약에 취해 깊이 잠들거나 통증으로 괴로워한다. 다비드는 이제 헛것을 본다. 딸 미리암이 헤어진 아내 율리아로 보인다. 다비드와 미리암의 대화를 들어보면, 다비드의 전 아내 율리아도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암 종양이 식도를 누르자 조르지는 후두를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후두를 제거하고, 말을 할 수 없는 다비드는 종이에 연필로 필담을 한다. 통증으로 몹시 괴로워하는 다비드. 마지막으로 가족 모두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다비드는 친구 조르지에게 자신의 삶을 끝내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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