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새 - 코가 뇌에게 전하는 말
A. S. 바위치 지음, 김홍표 옮김 / 세로북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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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 - 코가 뇌에 전하는 말

흥미로운 주제를 만났다. '후각'은 일상에서 익숙한 '냄새'를 맡는 감각을 말한다. 우리는 늘, 언제, 어디서나 냄새를 맡으며, 냄새를 구분하고, 좋은 냄새, 나쁜 냄새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험을 통해 익숙한 냄새는 기억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냄새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오래 기억으로 보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학에서 '후각'은 매력적인 주제가 아니었다. 1991년 린다 벅과 리처드 액설이 '후각 수용체 유전자'를 발견하면서 후각은 주류 분자생물학과 신경과학의 한 분야로 떠올랐다. 이 책에서 '후각'은 역사, 철학, 신경과학, 심리학을 통해 접근하고 있다. 이 책이 생물학 또는 신경과학 정도로 언급될 거라고 생각했던 예상을 깨고, 역사, 철학, 심리학이 동원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의아하면서 뜻밖이었다.
이 책을 쓴 저자의 이력도 특이한데, '냄새 감각의 형성: 후각 이론에서의 분류와 모델적 사고'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인디애나 대학교 블루밍턴 과학사 및 과학철학과 인지과학 연구소 조교수이며, 자신을 '인지과학자 그리고 과학, 기술 및 감각을 연구하는 경험 철학자이자 역사가'로 소개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조합의 학문 융합인데, 이렇게 자유롭고 폭넓은 학문 영역을 오가며 연구한 결과물이 이 책이다.
후각은 시각, 청각과 함께 감각기관의 하나이며, 감각기관은 서로 다른 매질을 통해 뇌에 신호를 전달한다. 이 책에서도 앞부분에 간략하게 도식화되어 있지만, 감각기관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이 책을 읽는데 도움이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알고 있었던 후각 또는 냄새와 관련한 정보가 이렇게 풍부하고 복잡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 책에서도 설명하고 있지만, '후각'과 '냄새'는 서로 깊은 관련이 있으면서도 분명하게 구분해서 살펴보아야 하는 개념이다. 후각은 후각 수용체가 존재하는 감각 기관이다. 즉, 동물을 물리적으로 구성하는 무수한 세포들 가운데 냄새를 맡고, 냄새의 정보를 분석해 뇌로 보내는 기관이다. '냄새'는 화학적으로 접근하면 분자의 활동이다. 냄새를 발산하는 물질의 종류에 따라 냄새가 달라지며, 거의 모든 냄새는 적게는 수십 가지, 많게는 수백 가지의 서로 다른 분자의 결합(유기화합)물로 이루어져 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후각 또는 냄새는 과학 영역에서 단지 생물학에 국한하지 않고, 발생학, 인지과학, 심리학, 철학 등의 영역으로 확대되었으며, 후각과 냄새, 뇌의 상호 작용이 완전히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고대부터 지금까지 철학, 문학, 과학에서 다루고 있는 후각과 냄새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의미 있다.

1장. 코의 역사 42
냄새를 과학적으로 접근한 역사는 서양(유럽)의 경우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냄새에 관한 최초의 가설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바탕한다. 흙, 물, 공기, 불의 네 원소는 우주를 이루는 기본 물질로 인식했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냄새가 구체적 실체를 벗어나 중간적이고 혼성적인 특징을 지녔다고 분석했다. 즉, 기본 원소인 흙, 물, 공기, 불 그 자체는 냄새가 아니며, 이들 원소가 물리적 운동을 하고, 물질적 전환을 치른 다음에 나타나는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과 감각 능력에 대해]에서 냄새가 이동하는 데 필요한 매질이 있다고 추론하고, 냄새는 파동으로 전달된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테오프라스토스는 냄새의 치료 효과를 연구했는데, 그의 저서 [식물 연구 및 냄새와 기후 징후에 관한 소론]에서 액체의 풍미를 달고, 기름지고, 시고, 아리고, 톡 쏘고, 짜고, 쓰고, 시큼한 맛으로 분류했으나 이는 정확히 말하면, 냄새와 맛 즉 후각과 미각이 혼합된 표현이고, 냄새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했다.
유럽에서 중세에는 냄새도 종교적 가치관을 부여해 선악으로 구분했다. 유쾌한 냄새와 도덕적 미덕을 나쁜 냄새 및 악덕과 대비시켰다. 냄새는 영적 질서의 명백한 신호로서 자연의 법칙을 드러낸다고 믿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포함한 다수의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냄새의 파동 이론을 믿었다. 하지만 파동이 어떻게 매개물로 작용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18세기 유럽에서 생물분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카를 폰 린네는 동식물 분류의 체계를 세웠고, 냄새도 일곱 가지로 나누었다. 스위스의 해부학자이자 현대 생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브레히트 폰 할러는 냄새 경험은 시간이 지나면 바뀔 수 있다는 데 흥미를 느꼈고, 세 가지 냄새 범주와 하위 범주를 구분했다.
네덜란드의 생리학자 헨드릭 즈바르데마케르는 [냄새의 생리학]에서 순수한 냄새, 혼합 냄새(들숨 냄새), 향미를 돋우는 냄새(날숨 냄새)로 구분하고, 냄새와 색채를 비교했다.
냄새의 근대 이론 시작은 18세기 유럽에서 말 오줌을 관찰하면서였다. 프랑스 화학자 앙투안 프랑수아 푸르크루아와 클로드 루이 베르톨레가 말 오줌을 분석해 원인 물질이 '요소'임을 밝혔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독일 과학자 프리드리히 뵐러는 무기물에서 유기물을 합성했다. 
19세기 들어서면서 합성화학의 발전은 산업화와 결합해 놀라운 성과를 보인다. 합성 화합물은 향수 제조, 식품산업에 폭넓게 쓰이기 시작했다. 20세기 이전 냄새의 과학은 냄새를 발산하는 물질에 집중되었고, 20세기 들어서면서 '후각'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적 관심이 다양한 분야에서 독립적으로 나타났다.

2장. 현대적 의미의 후각, 갈림길에서 92
1991년 린다 벅과 리처드 액설이 '후각 수용체'를 발견한 것은 후각 연구의 새로운 역사를 연 사건이었다. 후각 수용체는 집단의 크기, 발견 방식, 실험적 역할이라는 이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수용체 유전자가 알려지면서 과학자들은 비로소 후각을 담당하는 뇌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후각계의 유전자 발현 패턴을 확인하고, 후각계의 신경 조직에 직접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3장. 코를 사유하다 128
냄새와 후각을 연구하면 여섯 가지 답이 나온다. 화학자는 분자의 냄새를 결정하는 세부 구조를, 생물학자는 유기체의 신호 기능을, 신경과학자는 냄새의 행동기능이 뇌에서 발화하는 신경 활동으로 귀결된다고, 인지심리학자는 냄새 경험에서 기억과 언어, 학습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생각해보자고, 철학자는 냄새가 종종 의식을 무의식적인 지각과 구분하는 미묘한 경계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인간에게는 후각으로 맛을 느낄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들숨 냄새와 날숨 냄새가 그것이다. 들숨 냄새는 다른 동물들이 느끼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냄새를 맡고 숨을 들이쉴 때 느끼는 감각이며, 이는 후각을 가진 포유류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반면 날숨 냄새는 인간만 가지고 있는 특이한 감각이며, 이 두 가지 방식으로 느끼는 냄새와 맛의 차이는 인류가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여러 음식에서 맛과 냄새가 다른 경우가 있는데, 좋은 점은, 냄새와 맛을 각각 다르게 구분함으로써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종류를 늘릴 수 있으며, 부패한 음식을 더 정확하게 구분해 건강을 지킬 수 있다.
유전학은 냄새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 유전체에 후각 유전자가 무척 많고 돌연변이도 흔히 발견된다. 후각의 유전적 변이가 냄새 지각의 개인차를 반영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일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거의 모든 냄새는 혼합물이다. 적게는 수십 개, 많게는 수백 개의 분자들이 섞여 우리가 맡는 냄새가 된다. 커피 향에는 약 655개, 차에는 467개의 휘발성 성분이 있고, 딸기에는 약 360개, 토마토에는 약 400개의 방향족 화합물이 존재한다. 

4장. 냄새, 기억, 행동 178
냄새는 기억 속 경험과 연결된 모든 종류의 표상에 대한 통로 역할을 한다. 다른 감각에 비해 냄새는 기억을 불러내는 힘이 크다. 냄새는 즉각적이고 물리적인 현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기억은 획일적이지 않아서 다층적인 인지와 신경 매커니즘이 작동하며 냄새 기억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냄새 자체의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냄새와 관련된 기억이다.
후각은 학습을 통해 인지되며, 태아일 때부터 후각은 학습과 경험을 통해 냄새의 기억을 저장한다. 우리 몸에서 발생하는 특정한 냄새는 특정한 질병과 관련이 있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사례가 있듯, 냄새는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사회적 단서를 전달한다.

5장. 공기를 타고, 코에서 뇌로 214
인간 및 포유류의 휴각계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양쪽 콧구멍의 호흡 속도가 달라지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인 '비주기'가 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해도, 우리의 두 콧구멍은 다른 속도로 숨쉬고 있는 것이다. 코의 한쪽은 늘 조금씩 막혀 있다. 그래서 한쪽 콧구멍은 다른 쪽 콧구멍보다 공기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조금 느리다. 공기 흐름을 변화시킴으로써 코는 무척 다양한 냄새를 감지할 수 있다.
냄새를 맡으려고 코를 킁킁거리는 행위는 뇌 영역에서 진동 리듬이 어떻게 연동되는가에 영향을 미친다. 숨을 쉴 때마다 후각계에서 재설정된 진동이 있는데, 이는 신경 활성의 시간적 조정을 일컫는다.

6장. 분자를 넘어 지각으로 242
우리는 후각계가 물리적 특성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또는 뇌가 냄새에서 어떻게 의미소를 뽑아내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예일대학의 신경과학자 찰리 그리어는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는 후각계의 화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아직도 냄새와 연관된 리간드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후각 수용체와 상호작용하는지 모르고 있다. 
다른 체성감각계, 즉 뜨거움, 차가움, 압력, 시각, 청각 등의 수용체는 잘 알고 있으며 이들은 후각 수용체보다 비교적 단순하다. 
냄새 혼합물에서, 코는 골라내고 뇌는 측정한다. 측정이라는 이 개념은 말초신경계에서 이미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다. 첫째는 후각계 보정이다. 뇌가 환경 속에서 냄새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변화량을 평가하고, 새로운 것을 감지하며, 두드러진 점을 인식할 기준이 필요하다.
둘째는, 후각계는 냄새 이미지를 재구성하기 전에, 받아들인 표본 정보를 여러 조각으로 쪼갠다. 후각계는 냄새 화합물들의 비율을 패턴 인식의 형태로 받아들인다. 

7장. 후각 망울의 정체 288
1996년 컬럼비아 대학 연구원이던 페터르 몸바르츠는 후각계가 수용체에서 무작위로 입력되는 정보를 다루기 위해 독특한 기술을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의 냄새 물질은 망울 활성의 특정한 패턴과 짝을 이루어 냄새가 다르면 패턴도 다른 양상을 보였다. 
후각 감각 신경세포의 축삭도 유전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후각 감각 신경세포는 유전적으로 미리 만들어진 지도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신경세포의 후각 수용체를 전부 없애면, 신경세포는 다른 수용체를 이용해 후각 수용체를 만든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발생학적 규명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후각 망울과 토리가 상황에 따라 가변적으로 생성되고 있다는 것만 알아낸 셈이다.

8장. 냄새를 측정하다 332
후각 자극은 환경 속에서 발생하고 구조적으로 다양하다는 면에서 예측하기 어렵다. 따라서 후각은 매우 불규칙한 자극에 노출된 채 작업 중심적으로 운영되는 시스템이다. 후각의 자극 정보는 처음엔 여러 조각으로 분해되고, 그 다음에는 각자의 비중에 따라 서로 결합되어 전체적인 감각 인상을 형성한다. 중추신경계는 이런 후각 신호의 광범위한 분포와 통합을 다중 병렬 프로세스로 구조화하고 지배한다.
후각에서 신경 표상은 개별적이다. 냄새의 정체를 드러내는 전형적인 위상 지도는 없다. 후각의 신경 표현은 고정된 표상이기보다, 개별적인 표상으로 작동한다. 후각에서 지각 공간은 경험 공간으로 연산된다. 냄새 감각은 변화하는 혼합물이라는 정황 속에서 정보를 평가하는 역동적 척도로 작용한다.

9장. 지각의 기술 366
다른 감각과 비교할 때 후각은 지각 편차가 큰 편이다. 후각 지각의 편차는 냄새 암호화(수용체 수준) 원리와 신호 통합(중추신경계 처리 과정)의 연산 방식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후각에서의 지각 편차는 주관적 왜곡이라고 얼렁뚱당 넘어갈 그런 종류의 일탈이 아니다. 그것은 후각계 기능의 독특한 특징일 뿐이다. 
냄새가 다의적인 것은 의도된 것이다. 후각 자극은 다양한 냄새 물질과 여러 가지 느낌을 의미하는 신호로 작용한다. 후각에서의 개념적 군집화는 본질적으로 비선형적이다. 그것은 물질 분류와 지각 범주가 근저에서부터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런 측면에서, 후각 기준은 서로 교차되기도 하며 모호하다. 다시 말해, 선형적이지 않다.

  • 이 리뷰는 세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으로 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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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마음
이두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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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마음 - 이두온

한국소설, 특히 최근 발간한 소설은 퍽 오랜만에 읽는다. 나도 소설을 쓰는 자칭 3류 소설가지만, 한국소설에 희망이 있을까,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나이 든 사람이라면, 과거의 작품(1920년대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의 한국문학)에 익숙해 있어서 현대문학 즉 20대, 30대 작가의 작품이 낯설 수밖에 없다. 그 낯섦을 긍정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면 좋겠지만, 그런 면을 발견할 수도 있고, 자신의 기준으로 봐서 부족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나 역시 예전의 작품을 많이 읽었고, 익숙하며, 그 문학에서 배웠다. 문학은 시대를 드러내는 수단이자 표현이며,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는 당대 사회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80년대 문학을 시작했고, 그 시기는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였다. 한국문학은 시대별로 해방문학, 전쟁문학, 분단문학, 개발문학, 노동문학 등의 분류들이 있고, 어느 시기에 활동한 작가인가에 따라 작품의 성향이 드러났다. 
90년대 이후 나타난 작가들은 과거보다 훨씬 자유로운 상상을 바탕으로 창작물을 내놓기 시작했고, 탈이념, 탈권위, 탈민족, 탈집단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났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상황이지만, 작가의 자유와 창작의 무제한, 상상의 확대는 90년대 이후에서야 겨우 자리잡기 시작했다. 
창작의 자유가 확대되고, 작가의 상상력이 극대화하며, 모든 억압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작가의 창작물이 높은 수준을 보이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나는 과거의 문학이 거둔 성과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문학 작품에서 한국현대문학의 최고 작품을 손꼽을 수 있다고 믿지만, 40대 이하, 청년들이 보는 한국현대문학의 기준은 다를 것으로 본다. 이런 기준으로 이두온의 작품을 읽었다.

나는 스티븐 킹의 작품을 대부분 좋아한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며, 인간의 다면성, 혼재성, 다중성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고, 독자로 하여금 감동하고, 감정 이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스티븐 킹의 작품에 등장하는 악인의 내면은 공포와 악으로 가득하지만, 이걸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 등으로 분석하면 우리 인간이 겪고 있는 수많은 정신적 문제의 다면성이 드러난다. 즉, 작품에서 인물의 행동에는 반드시 정신적 활동의 결과이며, 정신적 활동의 내면에는 그가 살면서 겪은 깊은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다는 걸 독자는 알게 된다.
이두온의 작품은 과거의 기준으로 보면 '장르 소설'이다. 이런 분류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가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런 분류를 유지했던 과거 문학의 기준은 오늘날 비판하고 극복해야 한다. 과거 '순수문학'이나 '참여문학'으로 나누고, SF소설, 스릴러소설, 탐정소설, 추리소설 등은 소설의 주류로 인정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 문학평론가들도 이런 작품들을 평론하지 않았고, '주류문학'을 주도하는 계간지에서도 '장르문학'에 해당하는 작품은 취급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철저히 소외당해왔다.
반면, 일본에서는 추리소설, 스릴러소설이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추리소설, 스릴러소설, 하드보일드소설 등이 편견 없이 독자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었다. 이런 외국 작품들이 번역되어 출간되면서 한국독자는 문학의 다양성을 누릴 수 있고, '장르문학'이 결코 변두리, 주변부 문학이 아닌, 본격 문학 작품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세계문학을 봐도 셰익스피어가 높게 평가되고 있지만,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의 작품 역시 역사적 의미를 가진 작품이며, 과학 소설을 쓴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들은 문학 뿐아니라 영화, 과학 분야까지 폭넓은 영향을 끼치는 작품이다. 한국처럼 문학을 협소하게 규정하는 나라는 없을 듯하다. 한국문학에서 장르문학을 차별하는 건 문단 내부의 권위적 태도와 권력 관계, 차별을 통해 권력과 권위를 유지하려는 편협하고 이기적인 태도의 결과다.

이두온의 작품-타오르는 마음-의 배경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작품 속 세계가 모호한 것은 작가의 의도한 것이며, 그것은 구체적 세계와 유리되어 있음을 뜻한다. 현실세계에 구축하는 작품과 비현실세계에 구축하는 작품은 장단점이 분명한데, 모호한 세계는 그곳,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즉, 장소나 세계보다는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의 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등장인물의 이름도 국적을 알 수 없는 이름이다. 위도, 밴나, 나조, 오기 같은 이름은 국적이 불분명하다. 이름의 모호함 역시 그 개인의 정체성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이들은 세상에 있는 누구를 대치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결국 작품 속 세계는 지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작은 마을과 그 마을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을 뜻한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호함'은 보편성이라는 장점도 있지만, 개별성,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한계를 갖는다. 이 작품의 많은 장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언급했고, 알고 있으니 내가 느끼는 단점과 아쉬움을 중심으로 보자면, 무엇보다 인물의 개성, 정체성의 핍진함이 부족하다.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 행동이 극단적일수록 이유는 더욱 선명하고 확실한 증거가 되어야 한다. 인물이 현재 보여주는 행동은 과거의 원인으로 인해 아주 느리게 변화하다가 어느 순간 질적 변화가 발생하는 순간이 있으며, 그 계기를 통해 이전과 이후 인물의 존재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이때 작가는 인물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련의 흐름이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해 온 것이라는 걸 독자에게 보여주고 설명해야 한다. 그 과정이 장황하지 않아도, 독자가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스티븐 킹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독자의 공감을 충분히 끌어낸다. 즉, 개인 서사의 축적과 중첩을 통해 독자의 기억을 속이는 것이다.

위도가 사불을 보는 것이나 밴나가 오기를 보는 것은 그들의 트라우마가 그만큼 깊다는 뜻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작은 마을에서 발견된 여섯 구의 시체와 이들을 죽인 연쇄살인마가 중요하게 등장하지만, 연쇄살인마를 찾는 것은 일종의 맥거핀이다. 이 작품은 위도와 밴나의 싸움이 핵심인 듯 보이다가 어느 순간 마을의 거대한 음모가 드러난다. 이 구조는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틀이다. 그렇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이 진자' 또는 윤태호의 '이끼'에서 볼 수 있었던 구조와 비슷하다. 서사의 핍진함과 개인 서사의 축적이 균형을 이루며 완벽한 조화로 성장하는 것이 가장 좋은 작품이라면, 이두온의 작품에서 인물의 성장은 핍진성이 떨어진다. 조금 악의적으로 해석하면, 등장인물들은 뒷부분의 사건을 위해 소모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위도나 밴나는 캐릭터 자체로 매력적인데, 이들 인물의 서사를 핍진하게 축적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또한 주변 인물로만 드러나는 밴나의 아버지나 고모부 등의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더 많이 드러내고, 삶의 구체성을 띄어야만 마지막 부분에서 마을 전체의 음모가 설득력이 생길 것으로 보는데, 마을 전체의 욕망은 드러내지만, 주민 개개인의 욕망이나 탐욕, 갈등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건 서사의 축적이 부족했다는 걸 의미한다.

내가 생각하는 단점들은 이 작품의 장점에 비하면 지극히 지엽적이고 부분적이다. 한국문학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다는 걸 이 작품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나도 데뷔작은 노동소설이었지만, 첫 장편은 인터넷 해커를 다룬 작품이었으며, 그 뒤로도 '장르소설'로 불리는 소설을 쓰고 있다. 이제 이런 구분에서 자유롭고, 독자들이 이런 장르를 구분하지 않으며, 재미있는 작품을 찾는다는 건 바람직하다. 다만, 작가는 재미있는 작품을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한편으로 '문학'의 본령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좀 억지스러운 비유를 들자면, 같은 나체를 찍거나 그릴 때, 그것을 바라보고 표현하는 작가의 세게관, 철학에 의해 예술작품이 될 수도 있고, 포르노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문학'이라는 것 역시 작가의 세계관, 철학에 따라 '문학'이 될 수도 있고, '쓰레기'가 될 수도 있다.
이 소설은 내가 생각하는 예전의 문학 작품과는 분명 다르지만, 한국문학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고, 젊은 작가의 창작욕구를 자극할 것으로 기대한다. 문학의 낯선 형식은 위험한 도전이지만,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길을 만든다는 점에서 충분히 긍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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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장철수 감독, 박정학 외 출연 / 디에스미디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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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몇년 전, 이 영화를 보고 꽤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리뷰를 쓰지 않고 지나갔다. 엊그제 '다스뵈이다'에서 김어준 총수가 이 영화를 다시 언급했고,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분명 낮게 평가된 영화라서, 더 많은 사람이 이 영화의 진가를 알아보길 바라는 마음이다.
'김복남...'은 김기영 영화 세계의 영역에 속한다. 이 영화를 만든 장철수 감독이 김기영 사단에서 조연출로 오래 일했고, '김복남..'으로 장편 데뷔를 했으니, 장철수 감독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영화이면서, 그가 배운 김기영 영화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영화이기도 하다.
'김복남...'은 여성주의 영화, 여성영화, 페미니즘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근본으로 보면 이 영화는 '스팔타쿠스'와 같다. 폭력과 억압, 차별에 저항하는 노예의 반란처럼, 억눌리고 고통당하는 자의 분노가 마침내 권력자 - 이 영화에서는 남성들, 시고모, 동네 할머니들 - 의 피를 부르는 내용이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영화의 함의는 다양하다. 주인공 복남은 섬에서 태어나 평생을 섬에서 살아 온 여성이다. 반면 해원은 어려서 고향 섬을 떠나 서울로 이주해 세련된 도시 여성으로 성장한다. 두 여성은 어려서 가장 가까운 동무로 함께 시간을 보냈으며, 30년 넘게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이기도 하다. 물론 해원은 복남의 편지를 무시하고, 고향에 관한 기억도 그리 애틋하지 않지만, 자신의 처지가 곤란하게 되면서 복남의 호소에 응답한다.
해원은 금융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처지지만 고용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이 곧 드러난다. 해원이 문자 한 통으로 해고되는 상황은 한국노동자의 열악한 고용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자, 비정규직 노동자이면서 여성노동자로서의 해원이 곧바로 사회적 약자임을 드러낸다.
하지만, 해원이 해고당하는 원인이 되는 사건을 보면, 해원은 자신보다 더 약한 사람에게 냉정하고 모질게 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해원은 사람에 대한 애정과 겸손함, 이해가 부족한 사람으로 보인다. 이것은 해원과 복남의 어린 시절 모습이 교차 편집되면서 보여주는 장면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어려서의 해원은 복남과 사이좋은 친구이고, 서로에게 따뜻한 동무였다. 하지만 서울에서 살고 있는 성인 해원은 쌀쌀하고 냉정한 인물이다. 그는 전세금을 대출받으러 온 할머니 - 폐지 수레를 끌고 온 것으로 보아 혼자 가난하게 사는 할머니다 - 에게 3천만원이 아닌, 2천만원까지만 대출이 된다고 냉정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지만, 해원의 옆자리에 있던 후배가 할머니가 바라는대로 3천만원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해원은 자존심이 상한다. 여기에 화장실에서 누군가 문을 잠그고 나가서 해원은 몹시 고생하며 화장실을 탈출하는데, 해원은 후배의 뺨을 때리지만, 정작 범인은 청소부 아주머니였다. 해원이 같은 여성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건, 그녀 자신에게 문제가 있지만, 해원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가 도시에서 가까이 지내는 사람 없이 홀로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원은 여성이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운전하다 보게 되는데, 사건의 목격자로 경찰서에서 용의자를 지목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는 피해 여성이 남성 폭력배들에게 잔인하게 폭행당해 결국 살해당한 사진을 보면서도 끔찍해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목격자로 지목된 것을 귀찮아 하고, 이런 사건에 엮이게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경찰의 잘못으로 해원은 범인들에게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고, 협박을 받게 되면서 불안은 더욱 커진다. 그런 점에서 해원도 피해자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해원은 복남이 바라는대로 고향을 방문한다. 회사에서 사고를 친(?) 것 때문에 강제로 휴직을 하게 되고, 폭력배들이 찾아와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걱정도 많이 되었기에, 한동안 서울을 떠나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을 것이다. 해원의 고향인 '무도'는 작은 섬이다. 하루에 배가 한 번만 들어오는 곳이고, 섬에 사는 사람도 몇 명 되지 않는다. 섬 사람들은 대개 노인들이며 복남의 딸 연희가 유일한 어린이다.
무도로 들어가는 유일한 배를 모는 선장도 알고 보니 해원의 어릴 때 친구였다. 해원과 복남의 고향이 '섬'이라는 건 그 자체로 상징이다. '섬'은 육지에서 떨어져 있고, 고립되어 있는 지리적 조건이며, 심리적, 정신적으로도 고립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해원은 어려서 섬을 떠난 뒤, 처음 섬으로 돌아오는데, 시간으로 보면 약 20년 이상이 흐른 뒤로 보인다. 그럼에도 마을에 사는 노인 할머니들은 해원의 방문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 섬에는 여섯 명 정도의 할머니와 복남, 복남의 딸 연희, 복남의 남편 만종, 시동생 철종, 노인 할아버지가 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섬이고, 섬 사람들의 일상이지만, 이 섬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복남에게 지옥이다. 모든 사람들이 복남을 괴롭히고, 착취하며,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긴다. 복남의 남편은 만종이지만, 만종이 외출하면 시동생 철종이 복남을 성폭행하고, 육지에서 성매매 여성을 데려온 만종은 복남 앞에서 성관계를 하는 막장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야기가 진행하면서 드러나는 복남의 과거는 더욱 잔혹하다. 복남은 10년 전에 섬의 남자들 몇 명에게 윤간을 당하고, 연희를 낳았다. 따라서 연희가 어떤 남자의 딸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복남의 남편 만종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복남이 매우 필요한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 척 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만종은 복남을 아내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노예이자 인간이 아닌 소유물로 생각한다. 만종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남을 폭행하고, 욕설과 무시를 드러내놓고 한다. 게다가 딸 연희가 자기 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만종은 딸까지도 성추행을 하고, 복남은 이걸 알고는 연희와 함께 섬을 탈출할 결심을 굳힌다.
서울에서 온 해원도 남성들의 성적 대상이 된다. 복남의 시동생 철종은 끊임없이 해원을 강간하려 한다. 섬의 남자들은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 여성을 오로지 성적 대상으로 보거나, 동등한 인간이 아닌, 2등 인간, 하인, 노예, 불가촉천민으로 대하며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예이자 성적 욕구를 충족하는 대상으로만 상대한다.
복남은 딸 연희를 데리고 섬을 탈출하려 하지만, 배의 주인도 섬의 남자들과 한편이며, 과거 복남을 윤간한 남자 가운데 한 명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복남에게서 돈을 받고도 시간을 끌어 결국 복남이 만종에게 끌려가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드려 맞고, 딸 연희는 만종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살해한다. 연희의 죽음을 두고도 사건을 조사하러 온 경찰도 섬사람들과 친한 사람이고, 만종이 연희가 죽였다고 모함하면서 뇌물을 주고 사건을 수습한다.
복남은 사랑하는 딸 연희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걸 지켜봤고, 남편을 비롯해 섬의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며 복남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경찰은 그런 섬사람들에게 뇌물을 받고 사건을 무마하는 걸 지켜보면서, 거짓과 위선,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의 행위에 절망하고 치를 떤다.

영화 후반으로 가면서, 복남이 변하는 순간이 있다. 이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매우 훌륭하고 대단한 내용이 펼쳐진다. 뜨거운 한여름, 감자를 캐는 시기니까 '하지감자'라고 하면 6월 말에 해당한다. 햇볕이 뜨겁고, 온도도 높아서 그늘 없는 밭에서 일하다보면 탈진해서 쓰러질 지경인데, 마을 할머니들은 그늘에 앉아 쉬는데, 복남이는 혼자 감자를 부지런히 캔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새하얗게 이글거리는 태양을 바라본다. 그리고 천천히 조선낫을 집어들고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 할머니들에게 다가간다. 복남은 '해를 바라봤는데, 해가 말을 한다'고 혼잣말을 한다. 그리고 낫으로 할머니들을 찍어 살해한다. 복남이는 미친 것일까. 복남은 시고모를 벼랑으로 몰아 스스로 떨어져 죽게 만들고, 시동생 철종의 목을 잘라 나무에 얹어놓고, 육지에서 돌아온 만종과 배의 주인 득수를 차례로 살해한다. 해원은 겨우 육지로 탈출해 경찰을 찾아가는데, 복남이 배를 불러 육지로 해원을 따라온다. 흰색 원피스를 입고 화장까지 한 복남은 미친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이 멀쩡하다. 복남이 해원을 끝까지 쫓아가 죽이려는 것은, 그렇게 믿었던 해원이 복남을 배신하고, 무시했으며, 섬사람들과 같은 입장에서 바라봤기 때문이다. 즉, 해원은 도시에서는 피해자였지만, 섬에서는 가해자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것도 한때 가장 가깝게 지냈던 친구 복남조차도 이기적인 태도로 외면한 것이다.
복남은 섬에 찾아왔던 경찰을 살해하고, 경찰서에 있던 해원까지 죽이려 한다. 이 과정에서 복남은 정신을 차린 경찰이 쏜 총을 맞고, 해원과 몸싸움을 하다 부러진 리코더에 목이 찔려 죽는다. 리코더는 해원과 복남을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물로, 어렸을 때 해원과 복남은 리코더를 불며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해원이 리코더를 더 잘 불었다. 리코더가 부러진 것, 부러진 리코더가 무기가 되어 결국 복남이 죽는 것은, 해원과 복남의 우정과 운명이 엇갈리는 것을 상징한다. 
해원도 마음 속에 늘 잊지 않고 있는 사건이 있는데, 복남이 여러 남자에게 윤간을 당하게 된 원인이 자기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 죄의식이 있었다. 해원과 복남이 섬에서 생활할 때,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몰려다니며 해원을 성추행하고, 복남이 해원을 지키려고 남자아이들과 싸우는 틈에 해원은 혼자 도망한다. 그리고 다시 복남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보게 되는 장면은, 남자아이들이 복남이를 건드리는 장면이었고, 이 사건 이후 해원은 서울로 떠나지만, 시간이 지나서 복남은 결국 그 남자아이들에게 윤간을 당하게 된 것이다.
복남은 단 한번도 해원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으며, 오직 자신이 섬을 떠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수십 통의 편지를 보내도 외면하고 무시했던 해원이었지만, 섬을 찾아온 해원을 반갑게 맞이한 복남은, 해원을 여전히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해원은 복남이와의 추억은 있지만, 복남처럼 애틋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릴적 친구가 죽이고 싶은 대상으로 바뀌고, 처절한 몸싸움 끝에 한 친구가 죽는 결말을 보면, 이 영화는 '여성영화'나 '페미니즘영화'로 보기는 어렵다. 파국으로 치닫는 결말은, 전형적인 스릴러의 서사를 보여주며, 주인공이 여성인 것은, 여성이 사회적 약자이면서 남성에 비해 육체적으로도 약하기에 극에서 처절한 설정을 이끌어가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적 존재로서 여성이 학대당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관객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단지 '영화'에 한정하지 않고, 사회, 정치적 범위로 확대할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며 그런 면에서 '여성영화'로 봐도 좋다.

영화는 극단으로 치닫지만, 우리 사회에서 '복남'은 어디에나 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수많은 복남이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가부장, 남성우월주의, 남성들의 폭력과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 성적 대상화로 상처받다가 어느 날, 태양을 바라보고, 태양이 말을 하는 걸 듣게 되는 순간, 가해자 남성들은 시퍼런 낫에 목이 잘릴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 가까이 있는 '복남'이 고통당하고 있는지, 무엇때문에 괴로워하는지 눈여겨 찾아보고, 귀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다.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가 '복남'을 만들고, 결국 남성들 자신의 목을 따게 만드는 역겨운 제도라는 걸 눈치채고 바꿔야 한다. 이 영화는 젠더의 문제이자 권력의 문제를 다룬 영화로, 정치적 함의를 충분히 내재한 영화로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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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매드 픽션 클럽
도널드 레이 폴록 지음, 최필원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원작과 영화

수많은 영화가 소설 또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소설과 만화는 영화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지닌 예술 장르이고, 이미 검증된 서사의 깊이가 두텁게 펼쳐져 있어, 영화의 소재로 매우 훌륭하기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끊이지 않는 샘물과도 같다.
좋은 영화는 순수한 창작이든,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든 훌륭하지만, 문학에서 가져 온 서사를 다듬는 것이 보다 좋은 영화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원작을 직접 가져오지 않아도, 영화감독을 비롯한 제작자들은 이미 수많은 예술 분야에서 영감을 받기 마련이며, 이런 폭넓은 확장이 영화 예술의 외연과 철학을 단단하게 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 그 자체만 즐기는 경우가 많지만, 영화가 어떤 원작에 기대고 있을 때, 그 원작을 일부러 찾아보는 것은 나름 재미와 의미가 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영화 '쇼생크 탈출'이나 '대부'는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다. 스티븐 킹의 소설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을 바탕으로 영화가 만들어졌고, 이 영화는 불멸의 명작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부' 역시 미국 마피아의 내부를 깊숙이 취재해 쓴 마리오 푸조의 소설로, 이 영화는 후속 영화를 생각하지 않고 만들었지만, 영화가 크게 흥행하면서 2부, 3부까지 이어지게 된다. 
영화를 볼 때, 원작이 있는 경우, 원작 소설이나 만화를 먼저 보고 영화를 보는 경우는 드물다. 영화가 재미있어서 살펴보니 원작 소설, 만화가 있다면 그것을 나중에 찾아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가 그렇다.
또한,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언급한 책을 일부러 찾아보는 사람도 있을텐데, 최근에 본 영화 '더 이퀄라이저 2'에서 주인공 로버트(덴젤 워싱턴)가 읽는 책이 '세상과 나 사이'라는 에세이인데, 미국의 흑인 작가 타네히시 코츠가 쓴 책으로, 미국에서 살아가는 흑인의 정체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를 보고, 원작 소설이 있는지 찾아봤더니, 마침 한국에서 번역 출판한 책이었고, 곧바로 책을 주문해 도착하자마자 읽었다.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도 원작의 내용과 다를 수밖에 없다. 소설이나 만화를 드라마로 만들기 위해서는 전체의 구성과 서사를 완전히 해체한 다음, 다시 조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서사의 일부는 삭제되고, 일부는 의도적으로 왜곡하며, 인물은 사라지거나 새롭게 해석된다. 
장편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장편소설 한 권에 들어 있는 서사의 폭과 깊이는 물론, 인물의 복합적이고 다층적 존재감을 영화에서 온전하게 전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극히 제한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를 볼 때,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오히려 재미가 덜하다고 느낄 확률이 높다. 그것은 소설만이 가능한 서사의 풍성함, 핍진성, 다층적, 중의적 해석, 상상력 등이 영화에서는 극히 일부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도 나오지만, 소설에서 시간의 흐름은 무려 20년에 이른다. 1945년, 오하이오 미드 시외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윌러드 러셀은 고향인 웨스트 버지니아의 콜크리트로 가는 길에, 중간 기착점에서 잠깐 쉬어가는 중이었다. 그는 버스정류장 근처에 있는 우스스푼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샬럿을 처음 보고 반한다.
영화는 원작 소설의 흐름을 가능한 따라가고 있어서, 관객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시간의 흐름과 이야기의 전개를 놓칠 수 있고, 인물들의 현재와 과거가 뒤섞을 수 있으니 조금 복잡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은 이런 시간의 뒤바뀜과 인물의 등장과 퇴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영화에서는 배경으로만 잠깐씩 보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이 사는 지역이 어떤 곳인지 관객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오하이오주의 녹켐스티프와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콜크리트가 어떤 곳인지 훨씬 자세하게 이해하게 되면서, 이 서사의 배경을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구글 지도로 소설의 무대를 찾아봤다. 오하이오주의 남부에 있는 녹켐스티프는 대도시인 콜롬버스에서 남쪽으로 약 80km 떨어진 시골이다. 윌러드가 샬럿과 결혼해 살기 시작한 1950년대에 마을 인구가 고작 400명 정도에 불과했고, 전기도 아직 들어오지 않았던 곳이었다.
이런 사정은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콜크리크도 마찬가지여서, 석탄 탄광인 지역이어서 주민 남성 대부분이 탄광에서 일하는 이곳은 오하이오주, 켄터키주, 버지니아주, 웨스트버지니아주의 경계에 있는 깡촌이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교육 수준이 낮고, 매우 가난하며, 백인이든 흑인이든 자신의 삶이 늘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이들이 가장 가까운 대도시에 나가는 경우는 평생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사건'이고, 떠나고 싶어도 수중에 가진 돈이 없어 떠날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윌러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 군복을 입고 귀향하는 도중, 오하이오주 미드 시외버스 정류장에 내렸다가, 우드스푼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샬럿을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는 잠깐 고향인 콜크리크에 와서 어머니와 외삼촌을 만난 다음, 다시 미드로 돌아가 샬럿에게 청혼하고, 두 사람은 결혼한 다음, 녹켐스티프에 정착한다.
윌러드가 고향에 갔을 때, 그의 어머니 에마는 윌러드의 신부감을 점찍어 두었는데,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헬렌이었다. 헬렌의 가족은 집에 불이 나서 모두 사망하고 헬렌만 살아남았다. 하지만 헬렌은 못생겼고, 윌러드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우연이지만, 교회의 부흥사로 나타난 로이에게 반한 헬렌은 로이와 결혼한다. 
윌러드와 샬럿은 사내아이를 갖게 되고 - 이 아이가 바로 주인공 '아빈'이다. 아빈은 1948년생 - 아빈이 아홉 살 되던 1957년, 샬럿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윌러드도 샬럿을 따라 자살한다. 아빈은 결국 윌러드의 고향집, 할머니와 외삼촌이 사는 콜크리트로 가게 된다.
콜크리트에서도 헬렌은 교회부흥사 로이와 결혼해 딸을 하나 낳는데, 이 딸, 레노라를 아빈의 할머니 에마에게 맡기고 남편 로이와 데이트를 하러 나갔다가 로이에게 살해당한다. 로이는 왜 아름다운 자기 아내를 죽였을까. 영화에서는 단지 로이가 미치광이로 나오지만, 소설에서는 로이의 사촌이자 하반신 불구인 시어도어의 역할이 매우 크게 드러난다. 시어도어는 로이와 헬렌의 사이를 질투하고, 로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시기했으며, 행복한 사람들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비틀린 인물이지만, 영화에서는 매우 수동적으로만 그려진다.
로이 역시 제정신이 아닌 인물이고, 종교에 집착한 나머지 정신이 돌아 자기가 죽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시어도어의 충동질로 로이는 아내 헬렌을 죽인 다음 되살릴 거라고 장담하지만, 현실은 단지 그들이 살인자로 쫓기게 된다.

영화에서 삭제된 내용 가운데, 윌러드의 자살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윌러드가 사는 집의 주인은 변호사인 핸리 던랩인데, 그의 아내 이디스는 마치 창녀처럼 아무 남자나 집으로 끌어들여 섹스를 한다. 이미 그 지역에서 이디스는 창녀로 소문이 파다했고, 핸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한다. 매월 월세를 내러 사무실로 오는 윌러드에게 핸리는 제안한다. 지금 살고 있는 집과 집 뒤쪽의 5만평 땅을 다 주겠다고. 정확한 제안 내용을 말하지 않았기에 윌러드는 오히려 핸리를 의심하고, 마침내 핸리를 살해한다.
핸리의 주검이 발견되고, 핸리 살인범으로 그의 아내 이디스와 흑인 정원사가 범인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이 사건이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윌러드의 아내 샬럿이 암으로 사망하자 윌러드도 자살하는데, 이는 샬럿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기가 저지른 살인에 대한 죄책감도 크게 작용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어린 아빈은 알 리가 없었다.

콜크리크에서 아빈과 레노라가 할머니 에마와 외삼촌 어스켈의 보호 아래 생활하던 시기는 아빈의 아버지가 자살한 1958년 이후 계속되었다. 아빈과 레노라는 마치 남매처럼 살았는데, 아빈은 레노라를 잘 보호해주고 있었다. 
에마와 러스켈, 아빈, 레노라는 마을 교회에 열심히 출석했고,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살았다. 교회 목사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병이 들어 요양원에 입원을 해야 했고, 목사의 조카가 대신 목회를 볼 것이라고 설명한다. 새로 부임한 프레스턴 티가딘은 목사가 아니었다. 그는 전도사였으며 어린 여자 신도를 유혹해 섹스를 하는 섹스광이자 사악한 인물이었다.
순진한 레노라가 프레스턴의 그루밍에 넘어가 노리개가 되었고, 결국 임신하게 된다. 프레스턴은 레노라 뿐아니라 다른 어린 여자들도 그루밍으로 유혹해 자신의 성노리개로 삼았다. 레노라는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 프레스턴을 찾아가 애원하지만 프레스턴은 자기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레노라가 자살하자, 아빈은 프레스턴의 뒤를 오래 추적하며 증거를 찾는다. 그리고 마침내 프레스턴을 살해하고 고향을 떠난다.
아빈은 어렸을 때 살았던 오하이오주 녹켐스티프를 찾아가는데, 중간에 차가 고장나 팔아버리고 히치하이킹을 한다. 이 과정에서 사진 찍는 연쇄살인마 부부 칼 핸더슨과 샌디 핸더슨을 만난다. 이 두 사람은 우연이지만, 샌디가 우드스푼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잠깐 일할 때 만났다. 그리고 샌디의 오빠는 미드에서 부보안관으로 일하고 있는 리 보데커였다.
칼 핸더슨은 타고난 싸이코패스였으며, 그가 아빈의 손에 죽을 때까지 무려 26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기도 하다. 이 사실은 칼과 샌디가 살해당하고, 리 보데커가 그들(칼과 샌디)의 집을 찾아가 집안을 수색하다 발견한 사진들을 보면서 알게 된다.
칼과 샌디의 '모델' - 제물이 되는 사람 -로 찍힌 사람 가운데 운이 좋아서 살아난 사람이 바로 '로이'다. 자기 아내 헬렌을 죽이고 시어도어와 함께 남쪽 플로리다로 도망한 로이는 시어도어가 병으로 죽자 딸 레로라가 보고 싶고, 자기가 아내 헬렌을 죽인 것을 참회하고 자수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히치하이킹을 하다 우연히 칼과 샌디의 차를 타게 된 것이다.

아빈은 자기를 죽이려던 칼과 샌디를 정당방위로 죽이고, 그가 어릴 때 살았던 녹켐스티프를 찾는다. 샌디의 오빠이자 부보안관 리 보데커는 콜크리트의 경찰에게서 전도사 프레스턴이 살해당했으며, 그를 죽인 용의자가 아빈일 거라고 알려준다. 리 보데커는 아빈을 잡기 위해 예전 아빈의 집으로 찾아가고, 그곳에서 아빈을 만나지만 아빈의 총에 맞아 죽는다.
리 보데커는 이미 부패한 경찰이며, 미드의 포주 테이터 브라운에게 돈을 받고 다른 사람을 청부살해한 경험이 있는 인물이다. 즉, 리 보데커는 경찰로서 하면 안 되는 범죄를 저지른 인물이기에, 그가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된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모든 사건의 배경에 짙게 깔리는 것은 '종교'와 '살인'이다. 모든 인물은 교회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고, 이들에게 '하나님' 또는 '목사'는 절대 존재로 군림한다. 윌러드도 신을 믿지 않았지만, 아내 샬럿이 암에 걸리자 종교에 집착하고 광기를 보인다. 그는 짐승을 잡아 자기가 만든 제단에 피를 뿌리고, 짐승을 제물로 바쳐 아내의 병이 낫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런 행위가 마치 원시종교의 주술처럼 보이지만, 윌러드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종교 또는 교회와 관련해 이들은 맹목이며, 절대 권위에 복종하는 어리석은 존재들이다. 전도사 프레스턴 티가딘이 자기 아내를 비롯해 모두 어린 여성들을 그루밍으로 정복해 성노리개로 삼는 것을 보면, 이들의 타락은 본질적으로 종교 자체에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여기에 싸이코패스에 연쇄살인마 칼 핸더슨과 그의 아내 샌디의 행동은 보통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성향이다. 성도착자이자 살인광 칼 핸더슨은 그러나 자기 어머니가 오랜 투병으로 사망할 때까지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카메라에 담기는 피사체가 특별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사람을 살해하기 직전과 직후의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면서 오르가즘을 느끼는 인물이다.

두 곳의 시골을 배경으로, 주인공 아빈의 행적을 따라가면, 아빈은 오하이오주 미드의 녹켐스티프에서 태어나 자랐고, 소년이 된 이후 아버지의 고향인 웨스트버지니아주 콜크리크에서 성장했으며, 그곳에서 전도사를 살해하고 다시 고향인 녹켐스티프로 돌아오는 과정을 거친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서로에게 조금씩 인연이 있지만, 그 인연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들 자기의 삶을 살아가기에도 바쁘고, 모든 일들은 마치 우연처럼 일어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마지막 장면에 아빈이 다시 히치하이킹을 하고, 차 안에서 조는 장면이 보이는데, 이때 운전을 하는 사람이 그 악명 높은 찰스 맨슨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는 장면이지만, 찰스 맨슨은 감옥에 있다가 1967년에 석방되는데, 그의 고향이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라는 것, 아빈이 마지막에 신시내티로 간다고 말하는 것에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본 사람이라면, 소설을 꼭 읽기를 권한다. 영화에서는 알 수 없는 서사의 핍진함이 훨씬 재미있고, 인물의 성격과 그들이 행동하는 배경을 이해할 수 있으며, 작가의 문장이 하드보일드 스릴러라는 걸 알 수 있다. 더구나 작가 도널드 레이 플록은 이 작품이 첫번째 장편소설이고, 단편집까지 해봐야 겨우 두 권째 소설인데, 이미 세계적 작가로 명성을 얻고 있다. 그것도 무려 57세의 나이임에도. 그러니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 나이를 생각할 이유는 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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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이재명 -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습니다
김용민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2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제목을 참 잘 지었다. '마이너리티 이재명'.
인권변호사, 성남시장, 경기도지사 정도면 주류에서도 메인프레임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재명의 삶을 들여다보면 분명 '마이너'한 사람이다. 생각해보면, 한국사회를 변화, 발전시켜가는 사람은 대개 '마이너'한 사람들이었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나와 군인으로 결국 쿠데타에 성공해 권력을 획득했다. 그 뒤를 전두환이 이었고, 그 역시 육사 출신이다. 반면 시골 외딴 섬에서 태어난 김대중은 목포상업학교를 나와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고,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부산상업고등학교를 나와 인권변호사, 국회의원, 대통령이 되었다.
문재인대통령 역시 대학을 졸업했지만, 당시 민주화투쟁으로 제적당하고, 처음부터 인권변호사로 시작해 지금 대통령이 되었다.
박정희, 전두환은 당시 주류였고,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은 비주류였다. 그러니 지금 서울대, 전교1등 따위를 운운하는 것들이 주류일 수는 있어도 그들이 우리 사회를 변화, 발전시키지는 못하고 있는 것을 똑똑하게 보고 있다. 오히려 그것들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개혁을 가로 막는 적폐인 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이재명은 '마이너'한 사람이어서 가능성이 많다. 우연이지만, 이재명의 삶과 내 삶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억지로 끼워 넣자면, 나도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공장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공장의 단순한 작업이 너무 지겹고, 일당이 너무나 적어 '노가다'(건축공사장)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정고시로 학력을 만들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독학으로만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 이재명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그의 철학과 삶을 지지한다.
이재명은 공장에서 팔을 다쳐 지금도 한쪽 팔이 온전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죽을 각오를 하고 공부해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했으며, 자신이 힘들고, 괴로운 삶을 살았기에, 우리 사회에서 억울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이재명을 욕하는 사람도 있지만, 적어도 이 책을 정독하고, 이재명의 진심을 이해했으면 한다. 끝까지 이해하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이재명은 권력욕, 탐욕, 이해를 따지는 그런 얄팍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 뛰어난 행정가이며, 한국사회의 적폐를 깨끗하게 청소할 최적의 인물이다. 진정 한국사회의 개혁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재명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그가 시원시원하게 적폐를 청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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