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욕망을 파는 집 1~2 - 전2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엘릭시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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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파는 집 - 스티븐 킹


장편소설. 1천 페이지가 넘는 긴 소설이지만,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스티븐 킹의 특징이자 장점인 인물 개개인에 대한 서사의 핍진성은 여전히 놀라운데, 작품을 관통하는 서사는 빈약한 편이다. 소설 앞부분에 릴런드 곤트가 등장하고, 그가 잡화점을 시작하면서 이 서사의 끝부분이 보이는 건 나만의 관찰력은 아닐 것이다.
스티븐 킹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 역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가 아니라, '그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 자리한 모든 종류의 부정적 감정이 주인공이다. 탐욕, 이기심, 경쟁심, 질투, 시기, 분노, 차별, 불만 같은 부정적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그런 감정은 쉽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언더 더 돔'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체스터밀이 거대한 투명 돔으로 갇히면서 발생하는 마을 주민 사이의 갈등과 폭력을 그린 소설인데, 양상이 조금 다를 뿐, 캐슬록에서 벌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폭력은 근본에서 같다.

캐슬록은 작은 시골 마을로 사람들이 조금씩은 알고 지낸다. 시골에 살면 한다리 건너 누구네 집에 사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도시처럼 익명으로 살기 어렵다. 마을 행사에도 참여해야 하고, 친하게 지내면 밥도 같이 먹게 된다. 
차라리 도시처럼 철저히 익명으로 살아가면 상대에 관해 모르고, 알고 싶지 않고 관심을 끊고 살면 사건이 발생할 확률도 낮아진다. 대신 도시에서의 삶은 고립되어 외롭고 쓸쓸한 삶이 될 확률이 높다. 어느 쪽 삶을 선택하는지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핵심은, 사람과 가까워지면 감정을 나누게 되고, 그 감정의 교류가 꼭 좋은 쪽으로만 움직이는 건 아니라는 게 이 소설의 배경이다.
인간이 모여 살면서 좋은 점도 많지만, 필연적으로 경쟁, 질투, 이기심 같은 감정이 나타났다. 이건 한 개체가 생존할 때 필요하기 때문에 발현된 것이며, 부정적 감정이지만 반드시 나쁘다고 말하기 어렵다. 경쟁, 질투, 이기심 등의 감정은 다른 개체보다 내가 더 노력하고, 성장하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이건 곧 경쟁하는 동성들 사이에서 우수하고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이성을 만날 기회가 많아지는 걸 의미한다.
즉, 진화생물학, 진화심리학에서 경쟁, 질투, 이기심, 욕망, 시기의 감정이 발생하는 배경과 원인을 말할 때, 개체 또는 집단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둔다면, 그런 감정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부정적 감정을 개체(인간)가 좋은 쪽으로만 발현하거나 활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개체와 집단 모두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부정적 감정'이라고 정의했다. '경쟁'의 경우는 꼭 부정적이지 않지만, '경쟁'하려는 의지와 행동에서 시기, 질투, 이기심 같은 부수적 감정이 나타나고, 이 바탕에 보다 본질적인 '탐욕'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캐슬록 마을에 어느 날 영업을 시작한 작은 상점 '니드풀 씽스(needful things)'가 사람들 눈에 띈다. 작은 마을이어서, 거리에 가게가 문을 열면 사람들은 호기심을 갖고 지켜본다. 어떤 상품을 파는지, 누가 주인인지, 주인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가 그 가게를 드나드는지 등등.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그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구경하는데, 신기하게도 꼭 자기가 갖고 싶었던, 원하던 물건이 눈에 띈다. 모든 사람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욕망하는 물건을 찾아주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가게 주인 릴런드 곤트는 외지에서 온 사람이다. 
여름 한 철 관광객이 잠시 머물다 가는 시골 마을에 외지에서 온 사람이 가게를 열었다는 자체도 뉴스거리가 되고, 그 사람이 파는 물건이 새 제품도 아닌, 골동품이라는 것도 신기한 소식이었다. 
사람들은 가게에 별 생각 없이 들렀다 깜짝 놀란다. 마음이 설레고, 심장이 뛸 정도로 갖고 싶은 물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물건이라는 게 너무 소박하고 값싼 것들이라 다른 사람에게는 우습게 보일 수 있다.
우리가 애착을 갖는 물건이 꼭 비싼 건 아니다. 소소하고 값싼 물건이라도 특히 집착하거나 애정을 듬뿍 담아 오래 간직하고 싶은 경우가 더 많다. '니드풀 씽스'에서 사람들은 그런 물건을 발견한다.
'니드풀 씽스'의 주인 릴런드 곤트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그들이 원하는 물건, 그들의 욕망을 충족하는 물건을 보여준다. 즉, 사람들은 자기의 호기심, 욕망을 충족해주는 사람에게 끌리며, 그런 사람의 말을 따른다고 반대로 해석할 수 있다.
작품에서도, 릴런드 곤트에게 물건을 싸게 산 사람들은 릴런드 곤트가 물건을 싸게 주는 대신 '가벼운 장난'을 하나 해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이때 '가벼운 장난'은 물건을 산 사람과 직접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심리적 부담이 크지 않아 릴런드 곤트의 제안을 수락한다.
하지만, 사람이 연못에 던진 돌멩이가 개구리에게는 목숨이 걸린 것처럼, 누군가 '가벼운 장난'으로 한 짓이, 어떤 사람에게는 목숨을 거는 행위라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가볍게 생각한다.

릴런드 곤트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쟁, 이기심, 질투, 분노, 시기, 탐욕 같은 감정을 통제한다. 악마는 상냥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 사기꾼은 99%의 진실을 말하며, 악마는 친절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초등학생 브라이언 러스크는 귀한 야구카드를 '니드풀 씽스'에서 싼값에 산다. 그리고 릴런드 곤트에게 '가벼운 장난'을 하나 해주면 야구카드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겠노라는 말을 듣는다. 어린이의 영혼까지도 아무런 가책없이 잡아먹는 악마라는 사실을 캐슬록 사람들은 전혀 모른다.
쪽지, 편지, 애완견 살해, 돌멩이로 창문 깨기 같은, 어쩌면 사소해 보이는 '장난'이 오해와 불신과 질투와 욕망에 사로 잡힌 사람들 사이에서 뇌관이 터지는 것처럼, 어느 순간 폭발하면서 서로 죽고 죽이는 끔찍한 결과를 드러낸다.
그렇게 캐슬록 사람들은 미쳐날뛰고, 마을 행정위원장 댄포스 키턴은 아내를 살해하고, 공사장에 보관하던 다이너마이트를 곳곳에 설치해 장례식장, 시청 건물, 다리를 폭파한다. 사람들은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고, 마을은 불에 타고, 미쳐 날뛰는 사람들로 캐슬록은 아비규환, 지옥이 된다.

마을 하나를 완전히 궤멸시키고 사라지는 릴런드 곤트의 정체는 독자가 상상하는 그것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어느 정도 읽은 독자라면 작품 초반에 이미 정체를 알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보안관 앨런 팽본은 최초의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니드풀 씽스'의 주인 릴런드 곤트를 눈여겨 본다.
소설의 마지막은 앨런 팽본과 릴런드 곤트의 대결이 하이라이트지만, 인간 사이에 스며들어 인간을 파멸시키는 악마의 정체가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과연 '악마'는 외부에서 들어오는가, 아니면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부정적 감정' 그 자체인가.
사람은 쉽게 다른 사람을 오해하고, 불신한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자기 목숨을 대신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사소한 가짜 편지 한 장으로 그 사람을 증오하는 감정이 든다면, 그건 과연 누구의 책임일까. 인간의 감정은 너무 쉽고 빠르게 바뀔 수 있으며, 대부분의 인간은 어리석어서 외부의 작은 자극만으로도 사랑이 증오로 바뀔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현명한 사람은 이런 감정의 기복과 변화를 알아채고, 그 감정의 뿌리를 냉정하게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소설에서는 릴런드 곤트가 사람들의 부정적 감정을 충동해 폭력을 일으키지만, 외부의 개입이 아닌,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부정적 감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때, 가족, 이웃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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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리폼드
폴 슈레이더 감독, 에단 호크 외 출연 / 미디어룩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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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리폼드

폴 슈레이더 감독 작품. 250년 역사를 지닌 '퍼스트 리폼드 교회' 목사 톨러(에단 호크)는 일기를 쓰기로 작정한다. 그것도 꼭 12개월 동안, 노트에 직접 육필로 솔직한 기록을 남기려 한다. 그건 자신의 목소리이면서, 기도문이고, 하나님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그는 목사로 사역하지만 교회는 '기념품 가게'로 불리는 역사적 유물일 뿐, 진짜 교회는 가까운 곳에 있는 '풍성한 교회'이고, 이 교회에서 재정 지원을 받는다.
톨러 목사는 신도를 만날 일이 없고, 온 종일 교회를 지키며, 외부에서 이 교회를 구경하러 오는 방문객에게 교회 역사를 설명하고, 기념품 판매하는 일이 업무의 전부다.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가 가톨릭 신부의 이야기였다면 이 영화는 개신교 목사의 이야기로 변주한, 오마주라고 할 수 있다.
톨러 목사는 '풍성한 삶의 교회' 담임 목사인 제퍼스 목사의 도움으로 사역하지 않는 '기념품 판매' 교회인 퍼스트 리폼드 교회를 맡는다. 그의 삶에서 극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톨러 목사 또한 고요하고 담담한 일상을 보내는 걸 기꺼이 받아들인다. 심할 정도로 결벽한 그의 일상은 그러나 아주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선 톨러 목사는 건강이 좋지 않다. 위장병이 암일 가능성도 있고, 요도나 방광에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 존재를 의심한다.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지, 죽음이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걸 느낀다.

교회 신도 메리가 찾아와 남편 마이클이 상담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 톨러 목사는 메리의 집을 찾아가 마이클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마이클은 2050년이 되면 지구 환경이 매우 심각하게 붕괴되어 사람이 살기 어렵게 된다면서, 임신한 메리가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톨러 목사의 입장에서는 종교와 과학이 부닥치는 딜레마에 놓였고, 지구의 환경 파괴, 기후 위기와 같은 인간이 저지른 환경 파괴 문제와 함께, 환경 오염과 자연을 파괴하는 주범이 '자본'이라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종교인은 현실을 외면하는 비겁한 태도를 보인다.
톨러 목사는 마이클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삶과 현실이 괴리가 크다는 걸 느낀다. 종교가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 종교인이 발딛고 살아가는 사회를 향해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종교(교회)가 세속의 자본과 결탁해 사회를 구원하기는커녕 사회의 기득권에 기생하며, 진짜 구원이 필요한 가난하고 힘든 사람을 외면할 뿐아니라 그들을 핍박하고 탄압하는 현실을 보면서, 톨러 목사는 점차 비장한 마음이 된다.

메리와 그의 남편 마이클은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이고, 특히 마이클은 매우 급진적 환경활동가로 일했던 사람이다. 그가 지구 환경이라는 거대 담론의 중압감으로 괴로워하는 장면은 한편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문제로 임신한 아내를 돌보지 않고, 아내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살해하겠다는 발상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2050년이 되어 설령 지구가 멸망해 어떤 생명이 살지 못한다 해도, 마이클이 자기 자식을 죽일 권리가 있을까. 톨러 목사도 그렇게 말한다. '네가 신인가? 다른 생명을 박탈할 권리를 가졌는가?' 그 물음에 마이클은 대답하지 못한다. 당연히 대답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는 물음이다.
영화는 톨러 목사를 중심으로 진행하지만, 마이클이 보여주는 행동은 어리석은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급진 환경론자인 마이클은 자기 내면에 몰입해 '객관'의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며, 거대 담론인 지구의 환경을 두고 괴로워하지만, 가장 사랑하고, 가까이 있으며,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한 아내 메리를 배려하지 못한다. 
마이클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고, 사람과 감정의 교류를 할 줄 모르는 비사회적 인물로 보인다. 이런 생각을 굳힌 결정적 사건이 바로 마이클이 자살하는 장면이다. 그는 임신한 아내를 두고 자살한다. 그가 책임져야 할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까를 생각하지 않았거나, 알면서도 외면한 건데, 이런 사람이 마치 진보적이고 정의로운 사람인양, 지구 환경 어쩌구 하면서 떠드는 것 자체가 위선이고 사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톨러 목사는 자신의 종교와 현실의 괴리를 정면으로 바라보려 노력하는 인물이다. 마이클이 자살한 이후, 톨러 목사는 곤경에 놓인 메리를 돌보는 한편 마이클이 던진 화두, 환경 파괴로 망가지는 지구와 생명들, 오로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이 환경을 망가뜨리는 뉴스를 보면서, '누군가는 무언가를 해야 돼'라고 생각한다.
톨러 목사가 부채감을 갖게 된 건 마이클이 자살하기 직전 톨러 목사에게 남긴 유언장의 내용 때문이었다. 마이클은 유서에서 톨러 목사에게 아내 메리를 돌봐달라는 부탁과 함께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이 거대 자본이고, 자본의 잔인하고 무차별적 이윤 추구로 지구 생명과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고 있다는 자료를 첨부한다. 
마이클의 유서는 자기의 신념을 끝까지 지킨 급진 환경론자의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책임감으로 아내와 아기를 돌보지 않은 건 더욱 이해하거나 용납하기 어렵다. 톨러 목사는 마이클이 남긴 유서를 보고 스스로 공부를 한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환경론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어떤 건지 살펴본다.

톨러 목사가 점차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은 단지 마이클의 유서에서 영향을 받아서만은 아니다. 톨러 목사는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사는데, 이혼한 이유는 하나뿐인 아들이 이라크로 파병나가 전사했기 때문이고,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이라크로 가는 걸 지지한 사람이 바로 톨러 목사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톨러 목사의 집안은 아버지도 군인이었고, 자신도 군종 목사였기에, 군인이 되는 걸 자연스럽고 자부심을 갖았다. 하지만 아들이 전쟁터에서 죽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서 아내와도 이혼하고 사십 대 중반의 나이에 이미 늙어버린 톨러 목사는 미래의 희망도, 나날의 즐거움도 없는 죽음같은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이다.
'퍼스트 리폼드' 교회 250주년을 맞아 행사를 준비하면서 톨러 목사는 본당 교회인 '풍성한 교회'가 대자본의 지원을 받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대자본은 환경 파괴를 하는 기업으로 유명하고, 톨러 목사가 마이클의 장례식을 주관했으며, 마이클의 친구들이 급진 환경론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톨러 목사는 그들에게 경고를 받는다.

톨러 목사에게 죽음은 두렵거나 괴로운 감정이 아니다. 그는 이미 아들 요셉이 전쟁터에서 죽었을 때 자신의 영혼도 죽었다는 걸 알고 있다. 아내가 떠나가고, 아들이 죽어 혼자 남은 톨러 목사에게 '삶'이란 허깨비같은 것이다.
게다가 마이클이 자살한 것에 톨러 목사의 책임도 일부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도 있었다. 메리가 톨러 목사를 불러 창고에서 자살 폭탄조끼를 보여주었고, 그 자살 폭탄조끼를 가져온 것이 톨러 목사였다. 마이클은 그 사실을 알고 자살했으니, 톨러 목사는 마이클에게 죄책감과 부채감을 갖게 된다.
톨러 목사는 마이클이 남긴 자살 폭탄조끼를 터뜨릴 생각을 한다. 교회 250주년 축하 행사에 주지사를 비롯해 수많은 권력자와 대자본의 임원들이 참석할 예정이어서, 자살 폭탄조끼를 입은 톨러 목사가 행사장에서 폭탄을 터뜨리면 엄청난 뉴스가 될 것이고, 마이클이 원했던 환경에 관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을 거라고 톨러 목사는 생각한다.
톨러 목사는 삶에 연연하지 않고, 언제든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그가 자살 폭탄조끼를 입고 계획을 실행하려 준비할 때, 그의 눈에 메리가 보인다. 절대 교회 행사에 참석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으나, 메리는 행사장에 참석한다. 
톨러 목사는 당황하고, 입었던 자살 폭탄조끼를 벗고, 가시 철망을 몸에 두른 채 배관청소용액을 마시고 자살하려다 메리를 만난다. 

메리는 남편이 자살했고, 이제 막 아이를 낳았으니 고통과 기쁨, 슬픔과 환희를 동시에 간직한 인물이다. 그는 어려울 때마다 톨러 목사를 찾아 도움을 구한다. 톨러 목사는 기꺼이 메리를 돌봐주고, 메리가 요구하는 건 거절하지 (못)않고 들어준다. 메리는 마음의 안정을 위해 톨러 목사의 몸 위에 업드려 코끝을 맞대고 싶다고 말한다. 톨러 목사는 당황스럽지만 메리의 요구를 들어준다.
두 사람의 몸이 밀착하고, 교회 마루바닥이 사라지면서 지구의 아름다운 자연 위로 두 사람이 몸을 밀착한 채 공중을 날아다닌다. 이런 환상은 두 사람의 감정적 유대감을 증폭하고, 톨러 목사가 자살하기 직전, 메리를 만나면서 두 사람이 격렬한 키스를 하게 되는 동력이 된다.
영화는 두 사람의 격렬한 키스 장면으로 끝나고, 톨러 목사는 자살하지 않을 걸로 본다. 세상이 무너져도 오직 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은 살아갈만 하다는 걸 폴 슈레이더 감독은 말하고 있다. 톨러 목사는 자기의 인생은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만, 메리가 나타나면서 그가 가진 과거의 고통과 괴로움의 자아와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하는 현재의 자아가 끊임없이 내면에서 갈등을 일으키면서 살아갈 것이다. 오욕칠정, 생로병사를 알면서도 살아가는 게 인생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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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rious Artists / Universal Studio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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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슈라이더 감독, 마틴 스콜세지 기획. '아메리칸 지골로'의 감독이기도 하면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연출한 걸작 영화 '택시 드라이버', '레이징 불',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시나리오를 쓴 작가이자, 탁월한 영화평론가가 폴 슈라이더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
이 영화의 시작에 나오는 내레이션과 분위기만 봐도, 이 영화가 심상한 영화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영화가 심심하고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관객도 분명 있을테고,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영화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드보일드'한 영화이고,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주인공 윌리엄 텔(오스카 아이작)은 도박장을 돌아다니며 도박으로 돈을 벌어 생활하는 전문 도박사다. 하지만 그는 큰돈을 따려하지 않고,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만 도박에서 이기는 걸로 만족한다. 호텔에서 호텔로 전전하며 작은 가방 하나만 가지고 다니는 그의 삶은 떠돌이로 정처 없다.
그런 윌리엄에게 두 가지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다. 하나는 그가 다니던 도박장(호텔)에서 보안 컨퍼런스를 발견하고, 강사 가운데 '존 고도'가 있음을 알게 된다. 존 고도는 윌리엄과 깊은 인연이 있는 인물이고, 그로 인해 윌리엄은 감옥에서 몇 년을 갇혀 있다 나와야 했다.
하지만 윌리엄은 존 고도에게 복수의 감정을 갖지 않는다.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걸 자신도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 생각이 바뀌는 건 그 컨퍼런스에서 서크(타이 셰리던)를 만난 이후 달라진다. 서크는 존 고도가 있던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에서 존 고도의 부하로 일하던 사람이고, 윌리엄의 동료이기도 했다.
서크는 윌리엄을 알아보고 전화번호를 건넨다. 두 사람이 만나고, 서크는 윌리엄에게 존 고도를 살해할 거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는 서크에게 윌리엄은 '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너도 어쩔 수 없었을 거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윌리엄은 서크를 데리고 다니면서 용돈을 주고, 보살펴준다.

다른 사건은 윌리엄이 도박장을 전전하면서 알게 된 라 린다(티파니 해디시)로 인해 금액이 큰 도박판에 들어간 것이다. 라 린다는 일종의 투자 브로커로, 이길 확률이 높은 도박사에게 투자해서 돈을 따면, 돈을 댄 주인에게 일정한 수익을 돌려주고, 커미션을 받는 역할을 한다.
윌리엄은 다른 사람의 돈으로 도박을 하는 건 빚더미에 앉은 사람의 심정과 같다면서도 라 린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윌리엄이 돈을 조금 빨리, 많이 벌려는 목적은 서크를 위한 거였다. 
하지만, 실제 겉으로 보이는 윌리엄의 생활, 도박사의 일상은 그의 삶에서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관객은 시간이 흘러서 알게 되고, 사실을 알게 되면서 윌리엄을 다시 보게 된다. 그가 가방 하나만 들고 다니며, 이 호텔, 저 호텔로 전전하는 이유도 납득할 수 있고, '생활'이 아니라 '생존'하고 있으며, 그의 삶이 늘 불안하고, 불안정한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도 알게 된다.

이 영화는 화려한 호텔 도박장-라스베거스-을 보여주고, 환락과 쾌락, 도박이라는 궁극의 쾌락을 전시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그 환락과 쾌락이 얼마나 공허한가를 오히려 강조하는 내용이다. 윌리엄은 호텔 객실에 들어오면 그가 가방에 넣고 다니는 회색 시트로 객실의 모든 물건을 덮고, 끈으로 묶는다. 객실은 마치 하나의 색으로 보이며, 사물은 사라지고, 소리까지 사라지는 느낌이다. 즉, 이 풍경은 관타나모 포로수용소나 그가 견뎠던 감옥의 독방 같은 풍경을 상징한다.
윌리엄은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했다. 거기에 존 고도 소령이 책임자로 있었고, 존 고도는 나중에 전역해서 '보안전문가'로 행세하며 보안 컨퍼런스에서 강연도 하고, 유명인사가 된다. 하지만 존 고도의 지휘 아래 복무했던 서크의 아버지나 윌리엄 같은 사람들은 그곳에서의 생활로 평생 자기를 괴롭히는 트라우마가 발생하고, 서크의 아버지는 결국 자살했다.

윌리엄은 존 고도를 살해하겠다는 서크를 달래며, 그에게 큰돈을 마련해주고, 엄마를 찾아가 화해하고, 빚진 학자금을 갚고, 대학에 복학해 평범한 삶을 살아가라고 충고한다. 윌리엄은 서크가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거나 시달리지 않기를 바라고, 자기처럼 불행한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큰돈을 벌고자 서크를 위해 도박을 한 것이다.
서크는 윌리엄의 마음을 이해하고, 윌리엄이 준 돈을 받아 엄마를 찾아가 돈을 건네고, 화해하는 영상을 찍어 윌리엄에게 보낸다. 그렇게 윌리엄의 뜻대로 서크가 원만하게 행동했다면 영화는 좀 시시하게 끝났을텐데, 서크는 결국 윌리엄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존 고도를 살해하려다 오히려 존 고도에게 죽임을 당한다.
방송을 보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윌리엄은 자신이 하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행동을 한다. 서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서크가 존 고도를 살해하려 하지 않았다면, 서크가 존 고도의 손에 죽지 않았다면, 윌리엄 역시 지금 같은 삶을 살다, 또 다른 삶을 선택하면서 조금씩 과거에서 멀어졌겠지만, 결국 윌리엄은 과거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윌리엄은 존 고도를 찾아가고, 그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안정효의 소설 '하얀 전쟁'에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돌아온 한국인 병사 변진수가 극심한 전쟁 트라우마를 겪으며 결국 한기주에게 권총을 주고 자기를 쏴 죽이라며 애걸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서도 베트남 참전 군인 트래비스가 전쟁의 트라우마로 불면증에 시달리고, 심야 택시운전을 하면서 뉴욕의 밤거리에서 일어나는 온갖 범죄와 타락한 현장을 보고, 그것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 어린 창녀를 구하려 포주를 살해하고 영웅이 되는 장면도 윌리엄이 겪는 트라우마와 같은 성질이라고 볼 수 있다.
윌리엄은 그동안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경험으로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라고 있었고, 그것을 배출할 기회를 갖지 못했으나 서크가 나타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자기 의지와 상관 없이 끔찍한 기억은 자동 재생된다.

윌리엄이 존 고도를 끔찍하게 살해하고 - 가져간 총으로 한 발만 쏘면 간단하게 죽일 수 있었지만, 윌리엄은 총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마치 잔인하게 고문하듯 죽인다. 이건 그가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에서 미군들이 잡혀온 포로(그들이 죄가 있고 없고는 별개의 문제다)를 어떻게 고문했는가를 드러내는 중요한 상징이다 -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경찰에 자수하는 장면은, 그의 내면에 있던 트라우마가 겉으로 드러나면서,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 피를 뒤집어 쓰는 건 일종의 제의에 해당한다 - 장면이다.
그렇게 윌리엄은 다시 감옥에 갇히고, 그는 감옥 생활이 자기에게 잘 맞을 줄 몰랐다고 독백한다. 윌리엄이 보여주는 일련의 행동에 대해 연민이나 동정의 감정 없이,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카메라와 자기 삶을 관조하는 윌리엄의 태도는 과장 없는 하드보일드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감정을 격렬하게 드러내지 않으며 - 윌리엄이 딱 한 번 서크에게 말할 때만 빼고 - 심지어 존 고도를 죽일 때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해치운다.
이런 영화가 좋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한꺼풀 아래 덮인 진짜 이야기가 있는 영화. 무엇보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하고픈 말이 많아지는 영화,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그건 영화 뿐아니라 소설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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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서머스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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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서머스 - 스티븐 킹
스티븐 킹의 소설을 나름 읽었고, 그의 작품에 대해 어느 정도 말할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어 원문이 아니어서, 그의 농담과 재치를 전부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말로 번역한 소설만으로도 스티븐 킹의 속내는 어지간히 알아서 짐작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스티븐 킹의 '글쓰기'에 관해 꽤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그의 다른 소설과 달리 '스티븐 킹의 글쓰기'라는 형식에 관해서 특히 잘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지금까지 그의 소설들에서 소설의 내용 즉 '서사'와 인물에 흥미와 관심을 두었다면, 이 소설은 작가의 글쓰기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이 작품에서 스티븐 킹은 주인공 빌리가 해야 하는 살인청부 암살, 암살 준비 과정에서 위장을 위한 작가의 삶, 작가 흉내를 내려다 진짜 작가처럼 글을 쓰면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빌리, 우연한 사건으로 알게 된 앨리스와의 만남, 암살 이후 벌어지는 진짜 이야기 등 모두 다섯 가지 에피소드를 순차적으로 하나로 묶으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예전에는 거의 느끼지 못했거나, 약하게 느낀 정도였으나 이 작품에서는 스티븐 킹이 소설의 얼개를 짜는 방식이 눈에 훤하게 보였다. 그건 나를 포함한 독자를 완벽하게 속이지 못했다는 뜻이다. 즉, 이 작품의 얼개는 다른 작품보다 인위적이고, 도식적이라는 비판을 할 수 있다.

빌리는 우연히 살인청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놨지만, 그가 매우 탁월한 솜씨를 보이면서 점차 몸값이 비싸진다. 그는 이제 살인청부의 세계에서 은퇴를 할 생각이었으나 일감을 주는 닉을 통해 이번 한 번만 하고 은퇴하라는 말을 듣는다. 마지막 한 번이고, 금액이 매우 커서 빌리는 내키지 않지만 일을 맡기로 결정한다.
빌리가 노리는 타겟이 법원 계단에 나타날 때까지 몇 달의 시간이 남아 있어서, 빌리는 그 주변에서 평범한 이웃들과 어울려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는 사무용 건물 한 칸을 임대해 그곳에서 글을 쓰고, 먹고 자는 집을 임대해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며 생활인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스티븐 킹은 왜 빌리가 '작가'로 모습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빌리가 '작가'의 모습으로 위장하게 되는 과정과 내용은 어쩌면 필연으로 보인다. 법원이 보이는 사무용 건물을 써야 하는데, 그 빌딩에 입주한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눠야 할 때, 빌리가 다른 전문직으로 일한 적이 없으므로, 가장 만만한 직업이 '작가'라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렇게 빌리를 '작가'로 위장한 다음, 스티븐 킹은 빌리가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쓰도록 만든다. 그래서 독자는 주인공 빌리가 스스로 쓰는 자전적 이야기를 읽는다. 즉, 작가인 스티븐 킹이 빌리의 과거를 말하지 않고, 작중 인물인 빌리가 직접 자기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형식이다.

빌리는 책은 꾸준히 읽는 사람이지만, 글은 한번도 써본 적 없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이야기를 써보자는 생각을 떠올린다. 그리고 아득히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글쓰기는 정신 치료에서 매우 긍정적 효과를 내는 방식이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식은 여럿 있지만, 글쓰기의 힘은 스스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빌리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글을 쓰지만, 그는 자전적 소설을 쓰면서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있던 트라우마를 건드린다. 즉, 스티븐 킹은 주인공 빌리를 통해 빌리가 스스로 글을 쓰면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려 하고, 그건 성공한다. 
빌리의 과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행했다. 빌리는 아버지 없이 자라는데, 그건 스티븐 킹의 어린 시절과 같다. 엄마는 남자 친구를 자주 바꾸고, 품성이 나쁜 남자 친구를 만나 삶이 시궁창 같으면서도 더 나은 삶을 살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빌리의 여동생 캐시가 엄마의 남자 친구에게 맞아 죽는 장면을 보았고, 그가 불과 아홉 살에 여동생을 죽인 남자를 총으로 쏴죽인다.
엄마는 술을 마시고, 질 나쁜 남자를 만나 결국 마약가지 하면서, 빌리는 위탁 가정에 맡겨지고, 그는 그곳에서 줄곧 생활하다 해병대 입대한다. 빌리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고, 불행한 기억만이 남았으며, 가족과의 행복, 즐거운 추억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빌리의 자전적 소설은 작품이 거의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그가 쓴 소설은 대부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썼으며, 다만 실존하는 인물의 이름을 바꿨을 뿐이다. 빌리가 자전적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까지는 이해하지만, 글을 써본 적 없는 빌리가 꽤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는 건 너무 작위적이지 않을까?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빌리는 학교도 거의 다니지 않았고,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가 꾸준히 책을 읽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는 늘 책을 갖고 다니며, 시간을 내서 책을 읽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읽고 있던 책은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이었다. 이 책은 박찬욱 감독이 '박쥐'를 만들 때 모티프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빌리가 작품 속에서 자전적 소설을 쓸 때, 그 문장은 스티븐 킹의 문장이 아니라 빌리의 문장이므로 당연히 어설프고 미흡한 내용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우연히 만난 앨리스는 빌리가 쓴 소설을 읽고 재미있다고 말하고, 좋아한다. 그건 적어도 빌리가 자기의 지난 삶을 거짓 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문장력이 부족해도 진솔함이 보이는 문장이라면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 책은 400페이지 두 권인데, 1권에서 암살 사건이 끝나면서, 진짜 이야기는 암살이 아니라는 걸 독자는 알게 된다. 그렇다면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는 2권에서는 암살 이후의 이야기가 펼쳐질 거라는 것도 짐작한다. 빌리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자전적 이야기는 1권에서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에 이어 해병대 입대, 이라크 파병과 전투 장면들이 등장한다. 그가 저격수로 발탁되는 에피소드도 나온다.
2권에서는 이라크에서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전우들이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내용들이 나오는데, 빌리는 어릴 때는 물론, 전쟁 트라우마까지 겪으면서 용케 사회 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우연한 사건으로 스무 살 아가씨 앨리스와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의 만남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서사이자, 빌리의 삶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빌리는 앨리스가 성폭행을 당하고 죽기 직전에 그녀를 구하는데,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앨리스가 참혹하게 죽은 여동생 캐시와 동일시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즉, 앨리스를 지키는 것이 죽은 여동생 캐시를 지키지 못한 자기의 나약함에 대한 보상이라고 무의식에서 반응하는 것이다.

계획한대로 암살은 성공했지만, 빌리는 자기에게 일감을 준 사람들의 계획을 따르지 않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혼자만의 탈출 계획을 만들어 탈출한다. 빌리가 암살한 사람은 범죄자로, '죽어 마땅한' 놈이었지만, 그의 죽음 이후 빌리 역시 다른 암살자와 조직의 타겟이 되어 쫓기는 몸이 된다.
자기 목에 60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는 걸 알게 되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거래선을 추적해 누가, 왜 자기를 죽이려는지 알아내는 것이 2권에서 중요한 내용으로 전개된다. 이때 이 모든 과정을 우연히 만난 앨리스와 함께 하면서, 빌리와 앨리스의 우정은 깊어지고, 앨리스를 지키려는 빌리의 마음은 오빠나 아버지 같은 심정이 된다.
책 표지에 '하드보일드 누아르 스릴러'라고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살인청부를 하는 빌리는 '나쁜 놈만 죽인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고, '누아르'라고 할 만한 내용은 빌리가 죽인 범죄자와 관련 있는 언론 재벌 클라크와 그의 아들에 관한 내용 뿐이다. 빌리는 '하드보일드'하지도 않고, 작품의 내용은 '스릴러'하고도 거리가 있다.

빌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일어난 과거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것이 스티븐 킹이 가장 잘 하는 묘사인데, 그가 우연히 만난 앨리스에게 자기의 모든 걸 주는 과정에서, 스티븐 킹이 늘 보여주는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입장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빌리는 아동성폭행, 아동성매매, 여성에 대한 성폭행, 성추행에 관해서는 일말의 용서가 없다. 그의 작품에서 이런 내용이 나오면 반드시 철저하게 응징, 복수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불행한 여성이 자기의 현실을 극복하고, 용기를 갖게 되는 장면, 여성이지만, 세상의 편견과 억압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당당하게 독립하려는 당찬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스티븐 킹의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빌리는 자기의 과거를 스스로 지움으로써, 앨리스가 새롭게 출발하는 삶을 응원한다. 빌리가 쓴 자전적 소설은 빌리의 부재(不在)를 대신하는 그의 실체이며, 앨리스는 빌리가 쓴 소설을 이어받아 자기 이야기를 써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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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워크
스티븐 킹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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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워크 – 리처드 바크만

이제 막 마흔 살이 지난 도스는 세탁물 공장의 중간관리자로 일하는 백인이다. 그는 평범한 사람으로, 지금까지 성실하게 살았다. 스무 살에 아내 매리를 만나 결혼했고, 부부 사이는 원만하며, 도시 외곽에 ‘내 집’을 갖고 있는 백인 중산층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사는 배경은 1973년과 1974년으로, 이때 미국은 몇 가지 중요한 외부적 사건으로 미국 사회가 시끄러운 상황이다. 이미 베트남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미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진흙탕에서 허우적거리는 꼴이었고, 의미 없는 전쟁에 미국 젊은이들을 끌어들여 개죽음을 시킨다는 비판 여론이 폭발하고 있었다.
이런 시국에 1972년 11월 7일, 미국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닉슨이 선거에서 이겨 미국대통령이 되었다. 이때 닉슨은 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재선이었으며, 1974년 8월 9일 대통령 자리에서 자진 사임하는 것으로 불명예 퇴진한다.
‘워터게이트’로 알려진 이 사건은 닉슨의 측근들이 꾸민 ‘재선 공작’의 일부가 들통나면서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미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정치 사건이었다.
또한 1973년에서 1974년 기간에 중동에서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 세계적으로 ‘제1차 오일쇼크’가 발생했다. 이 전쟁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뺐긴 이집트의 시나이반도와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되찾는 전쟁이었지만 결론은 다시 이스라엘이 이긴 전쟁이 되었다.
이스라엘 뒤에는 미국이 있었고, 이스라엘과 전쟁하는 중동 국가들(이집트, 시리아) 뒤에는 쏘련, 북한, 동독, 파키스탄, 레바논 등이 지원했다. 전쟁의 수단 가운데 하나로, 원유 가격을 인상하고, 원유 생산량을 줄이겠다는 중동 국가들(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OPEC 가입 국가)의 결의로 오일 쇼크가 시작되었고, 원유 가격은 약 3배 정도 폭등했다.
‘오일 쇼크’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는 미국과 유럽이었으며, 이 작품에서도 미국 사회에서 주유소에 휘발유와 경유가 제때 공급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내용이 나온다.

도스의 삶이 뒤틀리기 시작한 건 그가 사는 마을이 새로 공사하는 고속도로에 편입되면서 사라질 처지가 되면서다. 주 정부는 동쪽에서 서쪽을 잇는 고속도로를 새로 건설하면서 도스가 사는 마을,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의 크지 않은 마을을 밀어버리고, 그 위로 고속도로가 지나가도록 설계했다.
이미 마을 주민 대부분은 보상금을 받고 마을을 떠났으며, 도스를 포함해 몇 집만 남았고, 그들도 곧 마을을 떠날 예정이었다. 오직 도스만이 마을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도스의 아내는 당연히 보상금을 받고 다른 마을에 집을 매입해 떠나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도스는 사랑하는 아내마저도 속인다.
고속도로 신설 공사는 도스의 마을은 물론 그가 다니는 직장까지 영향을 끼치는데, 세탁 공장도 고속도로 공사 범위에 있어 철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도스는 다른 지역에 있는 공장부지를 알아보고, 매입 결정을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공장부지 매입 계약을 하지 않으면서 결국 스스로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20년을 애정을 갖고 다닌 회사를 스스로 떠난다.

이 소설은 나에게 매우 ‘개인적인’ 작품이다. 작품의 내용에 감정을 이입하게 하는 장치가 있는데, 도스가 자기 집에 집착하면서 집을 떠나지 않으려는 심리, 자기 집이 철거회사에 의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이 무허가 건물이라고 시에서 파견한 용역들에게 허무하게 무너지는 걸 보면서 느낀 슬픔과 분노가 되살아났다.
도스는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간다. 그는 보상금을 받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해 평범하게 살 수 있었으며, 다니던 직장에서도 다른 지역에 있는 공장부지를 매입해 중간관리자로 일하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도스의 내면에서 그를 파멸로 이끄는 힘이 있었고, 그 정체가 정확히 무언지 알지 못하지만, 지금의 상태에서 앞으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막연한 느낌을 갖는다.
도스는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의 삶에 발목을 잡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도스가 스스로 파멸의 길을 선택한 것도, 그가 지키고 싶은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과거의 추억이 된 슬픔과 아픔이지만.
도스의 삶을 이해하려면 그의 과거를 들여다봐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 별문제 없이 살아가는 도스와 매리 부부지만, 그들의 과거에는 자식을 잃은 깊은 슬픔과 아픔이 있었다. 도스의 행동이 때론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도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의 내면이 붕괴되는 과정을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도스의 일방적 행동으로 삶의 기반이 무너지면서 매리는 도스를 떠나고, 결국 이혼하게 되는데, 이것 역시 도스가 계획한 일련의 과정이라고 본다. 매리는 아직 삼십대 후반의 매력있는 여성이고, 훨씬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도스는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을 떠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 바라는 마음으로, 도스는 매리를 실망시키고, 매리가 자기를 떠나도록 ‘연기’한다. 물론, 도스는 매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지만, 도스 스스로 파멸의 길을 선택한 만큼, 매리를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하는 갈등을 감수한다.

집을 철거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공사업체에서 보낸 변호사가 최후 통첩을 하러 방문한다. 도스는 보상금을 받겠다고 말하고, 그 돈을 받아 절반은 이혼했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아내 매리에게 보내고, 절반은 자선 단체와 그가 우연히 만나 하룻밤을 보낸 젊은 여성 올리비아에게 보낸다.
도스가 스스로 파멸을 선택한 심리적 배경에는 어린 아들을 잃은 슬픔말고도, 그가 20년을 일한 회사가 주인이 바뀌면서 달라진 환경에도 있었다. 도스는 스무 살 무렵부터 이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고, 그때는 이 세탁 공장이 가족기업으로, 사장인 타킹턴 씨가 운영했으며, 나중에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회사를 운영했다.
도스는 이 회사에 다니며, 회사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대학 공부를 했고,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회사에 복귀해서 관리자가 되었다. 도스에게 이 회사는 단순한 ‘직장’의 의미를 넘어, 하나의 ‘가족’으로 여겨지는 존재였다.
도스의 마음을 흔든 또 하나의 사건은, 그와 오래 함께 일한 조지 워커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이었다. 좋은 동료를 잃은 슬픔도 깊었지만, 조지 워커의 형도 자살하고 말았다. 여기에 또 하나의 우연이지만, 도스가 쇼핑몰에서 본 한 여성이 갑작스러운 발작으로 눈앞에서 사망하는 장면을 보았다.
이런 일련의 상황이 도스가 파멸을 선택하는데 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즉, 도스의 마지막 행동까지는 매우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그의 행동을 이끌어낸 계기들은 어린 아들의 죽음, 아들과 추억이 얽힌 집의 철거, 서로 인사하며 지내던 이웃과 헤어짐, 회사의 이주와 경영진의 냉정함, 형제처럼 친한 동료의 죽음 등 여러 요인이 복합되어 나타난 결과다.

이 소설은 공포, 호러, 스릴러 장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도스의 내면에서 들리는 또 다른 목소리가 도스의 분열적 정신상태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도스의 정신은 멀쩡하고, 자신이 지금 하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도스가 파멸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자체가 공포이며, 평범한 한 사람이 맞닥뜨리는 현실과 삶의 과정에서 겪는 슬픔과 고통이 바로 공포라는 걸 소설은 말하고 있다.
누구나 살면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가 있다. 옳지 않은 일을 보면서 모른체하며 넘어갈 수도 있지만, 도스처럼 옳지 않은 일을 바로 잡으려 자기 목숨을 던지는 사람도 드물지만 있다.
도스는 마을을 파괴하고 지나가는 고속도로 현장을 테러한다. 화염병을 만들어 장비와 컨테이너에 불을 지르고, 자기 집에 폭탄을 설치하고 경찰과 대치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으려 한다.
이런 시도는 성공하고, 언론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지만, 결과가 바뀌지는 않는다. 고속도로를 만들기로 결정한 건 주 정부였고, 국가(주 정부)권력은 늘 개인을 압도하고, 개인의 삶을 파괴해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소설을 쓴 작가 리처드 바크만은 미국 소설가로 다섯 권의 장편소설을 펴냈는데, 미국 문단과 독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한 서점 직원 스티브 브라운이 스티븐 킹의 소설 Voives와 리처드 바크만의 소설 Thinner에서 비슷한 점을 발견하고, ‘리처드 바크만’이 ‘스티븐 킹’일 거라는 강한 의심을 한다. 스티브는 리처드 바크만과 스티븐 킹의 저작권 대리인 같다는 걸 확인하고 리처드 바크만의 책을 펴낸 출판사에 확인해 결국 리처드 바크만이 스티븐 킹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밝힌다.
이 소설의 배경인 1973년, 1974년은 스티븐 킹의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던 때와 같아서, 스티븐 킹은 ‘인간의 고통’, ‘개인의 고통’에 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였고, 이런 생각을 구현한 작품이 ‘로드워크’다.
스티븐 킹 소설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인데, 지나칠 정도로 구체적이며 정밀한 묘사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를 표현하는 심리 묘사가 그것이다. 이 두 방식은 픽션에 개연성을 부여하고, 현실감을 증폭하며, 독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을 발휘한다. 마치 그런 일이 실제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실성, 인물이 가진 개성과 자연스러운 심리의 변화를 이해하고 긍정하는 힘을 갖게 하는 심리 묘사에서 한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하고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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