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음 /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소년 전태일

소년 전태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아래 시 한편 읽고 시작하겠습니다.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 온 고구마가
흙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 묻은 긴 편지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 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의
물결이 딩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 오백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
기껏해야 뻐스길 삼백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신동엽의 시 ‘종로5가’


태일의 소년기도 이 무렵부터 시작됩니다. 태일의 가족이 무작정 서울로 올라오던 1954년, 불과 여섯 살 짜리 어린 태일에게 삭막한 도시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리긴 했지만, 태일의 소년기를 이때로 보는 것은, 태일의 짧은 삶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태일은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와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폐허가 된 것은 도시와 대지 뿐만이 아니었지요. 사람들의 마음도 갈갈이 찢기었고 삶의 터전도 잃었습니다. 지독한 가난과 피폐함 속에서 삶을 시작한 태일은 가난과 고통을 숙명처럼 안고 있었습니다.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난 태일은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습니다. 이미 유아기에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역사를 겪었고 대구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는 부모의 등에 업혀 사람들 속에서 부대껴야 했습니다.
곤궁하고 피폐한 삶이 어디 태일의 가족에게만 해당하는 일이었겠습니까 만은, 냉혹한 현실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태일의 부모와 가족들에게 깊고 쓰라린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고 영원히 아물지 않는 저주처럼 달라붙었습니다.
한국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해 소규모 양복 제조업을 하던 태일의 아버지는 염색을 맡긴 원단이 잘못되는 바람에 빚더미에 앉고 말았습니다. 태일의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직 몸뚱아리밖에 없는 빈민이 몸뚱이를 움직여 밥을 먹고 살아가기에 그나마 한가닥 희망이라도 기댈 수 있는 곳이 서울이었습니다. 태일의 아버지는 가지고 있는 기술도 있어서 어떻게든 밥벌이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가난한 가족은 불안 속에서 희미한 희망을 품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여섯 살짜리 어린 태일과 그보다 어린 동생 태삼, 순옥이를 업고 안고 하면서 낯선 땅, 서울역 앞에 내린 것입니다. 이때가 1954년, 전쟁이 휴전상태로 바뀌고 이 나라가 폐허로 변해 모든 것이 부족하고 막막하기만 한 상태였습니다.
전쟁은 겨우 끝났지만, 먹고 살 걱정은 더욱 절박했습니다. 태일의 가족처럼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도 많았고 마땅히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때라 태일의 아버지는 실업자로 하루 하루를 떠돌았습니다.
재봉 기술이 있었지만 취직하기가 어려웠고 평화시장이나 중부시장 등에서 그때그때 생기는 일거리를 해주고 몇 푼의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태일의 아버지가 일자리를 찾아 서울 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태일의 가족들은 서울역 앞 염천교 다리 밑에서 한댓잠을 자며 만리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동냥으로 연명을 했습니다.
그들 가족은 거지였고 더 이상 비참해질 수 없는 바닥까지 추락한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내일의 희망을 갖기에는 현실이 너무 참담했고 허우적거릴수록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공포를 느껴야 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루 세끼 밥은 커녕 죽도 먹을 수 없는 삶을 살면서 죄 많은 인생을, 한 많은 세상을 탓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일의 가족과 같은 처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던 시대라 한 가족의 불행이 특별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불행은 추상이 아니고 구체적인 삶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비바람을 맞으며 한댓잠을 자고 동냥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는 분명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주 조금의 희망이라도 그것은 큰 기쁨일 것입니다. 실업자로 전전하던 태일의 아버지가 어느날 불쑥 나타나 3천원의 거금을 태일의 어머니에게 주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번 돈인지 알 수 없었지만 태일의 아버지는 ‘죽지 말고 있으라’는 말만 남기고 다시 사라졌고, 그 돈으로 어머니는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팥죽장사, 비빔밥장사, 찹쌀떡장사 등 지게꾼을 상대로 먹는 장사를 한 것입니다. 무거운 광주리를 이고 서울시내 시장과 거리를 전전하며 하루 10원, 20원씩 남는 돈을 저축했습니다. 이렇게라도 살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한편,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며 고픈 배를 움켜쥐고 한여름에는 뜨거운 햇볕을 맞으며, 한겨울에는 터진 손이 갈라져 피를 흘리며 태일의 어머니는 작은 체구를 짓누르는 광주리를 이고 고무신을 끌며 거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모질게라도 살 수 있었던 까닭은 애처러운 자식들의 눈망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내 몸은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터져도 자식들에게 흰 쌀밥 한 술이라도 먹일 수 있다면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던 우리 어머니들, 태일의 어머니도 그런 눈물겨운 어머니였습니다.
3천원의 종자돈으로 행상을 시작한 어머니는 2년 여 동안 억척스럽게 돈을 모아 천막집과 재봉틀 한 대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이 태일의 아버지도 조금씩이나마 돈을 보태었습니다.
천막집을 짓고 재봉틀을 들여 놓자 태일의 아버지는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삯바느질부터 하청 일까지 닥치는대로 일을 해서 수입이 늘고 하루 세끼 굶지 않고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울 올라와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한 끝에 이제 겨우 안정된 가정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태일이 처음 초등공민학교에 편입해서 학교에 다니게 된 것도 이 무렵입니다. 8살이 된 태일은 배고픔과 길거리에서 먹고 자는 서러움을 겪으며 일찍부터 세상살이의 각박함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철없는 어린 아이였지만 힘겨운 세상살이는 태일에게 일찍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뜨이게 했습니다.
생활이 전보다 한결 좋아져서 학교에도 다니고 남들 부럽지 않게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게 된 태일의 가족은 더 없이 행복했습니다. 아버지는 술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도 태일과 동생들을 잘 돌봐주고 수입이 늘어 판자집을 사고 재봉틀도 몇 대 더 사서 남대문 시장 안에 있는 대도 백화점 2층에 가게까지 마련했습니다. 성실하고 기술있는 태일의 아버지는 돈버는 재미에 절로 흥이 났습니다. 미싱사도 한 명 더 고용하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태일도 학교에 다니며 하루 하루가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1956년부터 60년 초까지 태일의 가족은 가난하지만 나날이 희망과 행복으로 따뜻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갔습니다. 운명이 다시 그들을 할퀴고 갈기갈기 찢어놓기 전까지.

역사의 격동이 한 가정을 어떻게 흔들어 놓는 지 우리는 태일의 가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란했던 가정을, 가난하지만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평범한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뿌리 뽑아버리는 역사의 물결은 거역할 수 없는 물결이었지만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의 물결이기도 했습니다.
1960년 초에 태일은 남대문 국민학교에 편입하여 4학년이 되었습니다. 12살이 된 태일은 소년으로 성장했고, 집안의 어려움과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학교에 다니던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겨우 2년 여의 행복을 끝으로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4.19 혁명 직전에 학생복을 단체로 주문받은 태일의 아버지는 여기 저기서 빚을 얻어 원단을 구입하고 제품을 만들어 납품을 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4.19 혁명이 일어나자 주문을 받아온 브로커가 중간에서 대금을 가지고 사라져버려 태일의 아버지는 빚더미에 앉게 된 것입니다.
가지고 있던 전재산, 판잣집, 재봉틀, 가게 보증금 등으로 빚을 청산하고 하루 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어 다시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장사하면서 알게된 원단 가게 주인과 친구들이 셋방을 얻어주어 노숙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낙담한 아버지는 다시 술에 취해 난폭해지고 어머니는 정신이상이 될 정도로 충격을 받아 생활이 엉망이었습니다. 한 순간에 평온했던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고 소박한 희망도 잔인하게 꺾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린 네 명의 자식을 돌봐야 하는 가장은 술에 취해 세상을 원망하며 가족을 괴롭히고 어머니는 정신적인 충격으로 생활이 곤란한 상태여서 당장 생계가 막막한 상태였습니다. 버는 사람은 없고, 목구멍은 포도청이고, 삶의 의지도 꺾인 가장은 자포자기로 행동하고, 도와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먹는 때보다 굶는 때가 많은 나날을 보내던 태일은 신문팔이를 시작합니다. 12살 소년 태일은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신문도 팔고 구두도 닦으면서 가난한 살림에 보탬이 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신문을 팔기 시작했으나 차츰 신문을 팔아야 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절박함이 태일이 학교에 다닐 수 없도록 만든 것입니다. 결국 4학년 초에 태일은 학교를 중퇴하고 생계를 위한 노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가족의 생계를 떠안은 12살짜리 어린 태일은 10살짜리 동생 태삼을 데리고 동대문 시장에 나가 삼발이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삼발이, 솔, 조리, 방빗자루, 적쇠 등을 위탁판매소에서 받아다 물건을 팔고 원금을 돌려주는 방식으로 밑천없이 시작할 수 있는 장사였습니다.
어린 형제는 ‘솔 사려! 조리, 방비, 적쇠요! 쓰레받기나 삼발이요! ......긴긴 여름날을 이렇게 외치며 아침부터 씨레이션 박스에 솔, 조리 등을 담고 시내 여러 골목과 시장들을 해가 지고 밤이 늦도록까지 헤매었’습니다. ‘그 길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환경에 적응하는 일, 병중에서 완쾌를 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그들의 부친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주린 배를 참으며 하루 하루를 살았습니다.
힘겨운 나날은 어린 형제를 지치게 했고 부족한 수입으로 원금에서 가족들이 먹을 국수를 사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물건값을 입금시키지 못하게 되면서 어린 태일의 가슴은 불안과 초조함으로 찌들기 시작했습니다. 
몇 달을 행상으로 떠돌면서 발이 부르트고 목이 쉬도록 일했지만 태일에게 돌아온 것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집안형편과 원금을 입금하지 못해 늘어난 빚이었습니다. 
1961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날 무렵, 태일은 위탁받은 물건을 손수레 보관소에 맡겨놓고 서울을 떠났습니다. 가출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태일을 짓누르는 것은 가난, 바로 가난이었습니다. 
집을 떠난 태일은 수원까지 걸었습니다. 도로에는 땡땡거리며 전철이 지나가고 길가에는 납작한 판잣집들이 쓰러질 듯 누워있고, 가끔 번듯한 건물과 자동차도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은 표정없이 오고가고, 태일과 같은 어린 소년들이 깡통을 들고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수심이 가득한 태일은 하루 종일 걸어 수원까지 와서 밤을 도와 수원역에서 무임승차를 해 대구까지 갔습니다. 대구에는 큰집이 있어서 태일을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그저 놀러온 것으로 생각한 큰댁에서는 며칠 묵게 하고 차비를 주어 서울로 돌려보냈습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태일은 그러나 다시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삼발이 위탁판매소에 빚진 것 때문이기도 했고, 아버지가 그냥 두지 않을 거라는 불안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집에 들어가지 못하다가 신문팔이도 하고 구두닦이도 하면서 1년이 되도록 서울에서 돌아다니며 집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같은 하늘 아래 가족이 있었지만 만나지 못하고 하루 세 끼도 변변히 얻어먹지 못하면서 찬이슬과 별을 보며 시장바닥에서, 지하도에서, 골목길에서 웅크린 채 잠을 자는 생활을 1년 동안 한 것입니다.
서울에서 떠돌며 생활한 지 1년만에 태일은 다시 부산으로 무임승차한 열차를 타고 내려갑니다. 부산에 어떤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었습니다. 아무런 목적도, 희망도 없이 그저 예전에 부산에 살았던 기억만으로 가족들이 함께 살았던 영도섬을 찾은 것입니다.
철지난 학생복은 찌들고 더러워져 악취를 내뿜고 세수도 못한 얼굴과 머리는 꾀죄죄하고 더러웠습니다. 어깨에는 구두통이 있었지만 부산에 도착해서 역 앞의 구두닦이들에게 빼앗기고 몰매까지 맞았습니다.
영도섬 방파제 끝에 선 태일은 무엇을 생각할 기운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며칠을 굶은 배는 감각이 없어지고, 머리 속은 텅 비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던 태일은 물에 떠 있는 배추 꼬갱이를 보았습니다. 그리곤 앞뒤 가리지 않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물 속에 뛰어든 태일은 죽음의 공포가 온 몸을 휩싸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리자 해변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죽음의 저편에 발을 들여놓은 것을 가까이 있던 어부가 살려놓은 것입니다.

죽어도 서울에 가서 죽어야겠다고 생각을 한 태일은 다시 서울로 가기 위해 기차를 훔쳐 타고 좌석 밑에 숨었습니다. 한참을 달려간 기차가 멈춘 곳은 영천이었습니다. 영천에서 내린 태일은 정거장 대합실 벤치에 누워 대구행 기차를 기다렸습니다.
맞은 편에는 갓난 아이를 가슴에 품은 젊은 여인이 아이를 어르고 있었는데, 잠시 아이 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 자리에 있던 사과를 훔쳤습니다. 훔친 사과를 들고 벤치 밑으로 기어들어가 허겁지겁 먹어치운 태일이 막 기어나오는 순간, 바닥에 떨어진 돈다발을 발견했습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돈다발을 움켜쥔 태일은 역 앞 음식점에 들어가 떡 두 접시를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고 역에서 멀리 걸어나왔습니다. 배가 부르자 돈 임자가 생각났고, 갓난 아이와 그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마음 속에서는 갈등과 양심의 가책이 일어 몹시 괴로웠지만 지금까지 굶주림에 시달린 생각과 돈이 없으면 당장 굶주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천에서 대구가는 기차를 탄 태일은 대구에 있는 외가집을 찾아갔습니다. 대구역 근처에는 큰집이 있었지만 들르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서울에 계신 부모님이 태일이 들르면 잡아놓으라고 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주운 돈으로 깨끗한 반바지와 셔츠를 사 입고 운동화도 사 신었습니다.
밤 늦어 외가집에 도착하자 외할머니가 태일을 끌어안으며 서러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는 태일의 부모와 동생들이 대구에 산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외할머니에게 가족의 소식을 듣게 되자 태일은 너무 기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그동안 더욱 고생하셨을 어머니와 동생들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다음날, 태일은 부모님과 동생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심하게 꾸중하실 줄 알았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태일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어머니는 비쩍 마른 아들의 모습이 안쓰러워 눈물만 흘렸습니다.
지난 1년 동안 태일이 서울에서 노숙을 하며 고생하고 있을 때, 가족은 대구의 작은집 도움을 받아 재봉틀을 들여 놓고 다시 삯바느질을 시작했습니다. 다시 술을 끊은 아버지는 착실하게 일을 했고 서울에서 고생하던 것보다 조금 나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족과 다시 만난 태일은 아버지를 도와 일을 했습니다. 가을, 겨울이 지날 때까지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하는 것으로 시간은 지나갔습니다. 생활은 여전히 곤궁하고 근근했지만 여섯 식구가 굶지는 않고 살았습니다.
태일이 열 다섯 살이 되던 1963년 봄에 그의 생애에서 가장 기쁜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청옥고등공민학교’. 정식 학교도 아니었지만,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 태일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8개월도 채 안되는 이 짧은 기간이 태일의 기억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빛나는 시기였습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아버지의 재봉일을 도와주고 저녁에 학교에서 공부하는 일과가 피곤했지만 그런 어려움은 태일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태일이 짧은 학교 생활 속에서 운동회를 마치고 느낀 감정을 적은 수기를 보면, 그가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홉번째 서브까지 성공시키고 게임이 끝났습니다. 시합장엔 요란한 박수갈채와 승리의 개가가 퍼지고 나는 일약 오늘 이 게임에서 마스코트가 되었습니다.
맑은 가을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깊었으며, 그늘과 그늘로 옮겨다니면서 자라온 나는 한없는 행복감과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서로간의 기쁨과 사랑을 마음껏 음미할 때 내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며 내가 살아 있는 인간임을 어렴풋이나마 진심으로 조물주에게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행복했던 시절도 얼마 가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더 이상 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학교에 다니지 말고 집에서 아버지를 도와 제품일을 계속하라는 것은 온식구가 매달려야 겨우 먹고 살 정도로 힘겨운 환경이기도 했고 더 이상 가르칠 여력도 없었으며 이제 공부해야 성공하기는 틀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태일은 모처럼 찾아온 배움의 행복한 생활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거역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폭언과 주먹질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태일이 학교를 그만두고 일이나 배우라고 하고, 어머니는 태일이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맞서고, 태일도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했습니다.
가정은 다시 분란에 휩싸여 아버지는 다시 술을 마시고 폭언, 구타, 울음소리로 고통스럽고 괴로운 나날이 되풀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자니 집안이 엉망이 되고 그렇다고 학교를 포기할 수는 없었던 태일은 다시 가출하기로 결심합니다. 서울에 가서 고학을 하면서라도 학교 공부는 마칠 생각이었습니다. 
동생 태삼을 데리고 집에 있는 제품 잠바 몇 장을 들고 서울로 몰래 떠나왔습니다.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 당장 오갈곳 없던 두 형제는 들고 나온 잠바를 헐값에 팔아 그 돈으로 겨우 사흘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 사흘동안 태일은 구두닦이, 신문팔이를 하며 동생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동생 태삼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면서 집에 계신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태일은 동생들과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꿈이 여기서 끝나게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여전히 술에 취해 있었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들과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방세를 내지 못해 셋방에서 쫓겨나 더 허름한 토막방으로 이사를 하고, 어머니가 서문시장 근처 노점에서 남의 물건을 팔아주고 받은 몇 십원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술주정과 행패로 가족을 괴롭히는 아버지, 가난, 구타와 폭언, 절망적인 상황. 이 당시의 태일이 겪고 있는 괴로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마침내 어머니가 서울로 돈을 벌러 떠나고 집에는 아버지와 태일, 동생들만 남았습니다. 
날마다 태일을 때리고 집안 살림을 팔아 술마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태일은 어머니를 찾아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등에는 막내 순덕이를 업고 어디에 계시는지도 모르는 어머니를 찾아 무작정 올라온 것입니다.
배고프다고 울며 보채는 동생 순덕이를 차마 보다 못해 사회시설에 맡겨야만 했고, 혼자 1년 여동안 노숙을 하며 남대문 시장에서 리어카 뒤밀이를 하며 끼니를 이어 갔습니다. 그 후에는 구두도 닦고 신문도 팔고, 새벽에는 담배꽁초를 주워 팔며 하루 하루를 근근히 살았습니다.
그러다 서울 거리에서 거지로 변해 있는 동생 태삼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어머니의 친구분을 통해 어머니가 있는 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만난 태일과 태삼은 방을 얻지 못해 함께 살지 못하다가 조금씩 벌어 판잣집에 사글세방을 얻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안 있더 태일이 다시 서울에서 동생 순옥이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순옥이는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오면서 가족들이 하나 둘 따라 올라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흩어졌던 가족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태일의 아버지도 이때는 술주정하는 버릇을 끊고 중부시장에서 제품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회시설에 맡겼던 막내 순덕이를 데려오고 나서야 가족이 전부 모여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이미 태일은 새벽부터 여관을 돌아다니며 구두를 닦고 낮에는 평화시장, 남대문시장, 중부시장 등에서 시다나 미싱보조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태일의 나이 열 여섯 살이 되었고, 숱한 우여곡절과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겪으며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랐습니다. 그는 같은 또래의 소년보다 많은 경험을 했고 세상의 변화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애정을 몸으로 체득했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했으며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고 동감했습니다.

 


청년 전태일


떠돌이 생활을 전전하던 태일이 안정된 직장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배운 미싱 기술 덕분이었습니다.
안정된 직장이라고는 하지만 하루 일당이 50원에 불과한, 말할 수 없이 불평등하고 일방적인 착취의 대상이 되는 자리였습니다. 다방에서 차 한잔 값이 50원이었으니 하루 14시간을 힘겹게 일한 대가가 일반 사람들이 차 한잔 마시는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태일이 이렇게 싼 임금을 감수하며 ‘시다’로 취직을 한 것은, 당장의 생계보다는 기술을 배워 안정된 가정을 꾸려나가려는 나름대로의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동안 떠돌이에 행상으로 전전했던 생활을 마치고 저임금이지만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길을 택함으로써 태일의 삶이 또 한번 바뀌게 되었습니다. 태일의 나이 17살이 되던 1965년, 그는 평화시장의 삼일사에 취직합니다. 학생복 맞춤집인 이곳에 시다로 첫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그가 받는 일당 50원으로는 생계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여관에서 손님들의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아서 수입을 늘려야 했습니다. 하루 14시간의 노동으로도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잠자는 몇 시간을 제외하고 태일은 항상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뼈가 휘는 고된 나날이었지만, 기술을 배운다는 희망과 서울의 지붕 아래서 이 불효자식의 고집 때문에 고생하실 어머니 생각과 배가 고파 울고 있을지도 모르는 막내동생을 생각할 땐 나의 피곤함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태일의 수기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뼈가 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와 힘을 합쳐 셋방을 얻고, 어머니가 행상을 하면서 태일이 구두닦이와 행상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태일은 그것이 몇 배나 편한 생활이었다고 했습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이미 미싱 기술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던 태일은 일을 빨리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시다에서 미싱보조로 직급이 높아지고 월급도 3천원으로 대폭 올랐습니다. 하숙집과 공장을 오가며 오로지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 볼 수 없었던 것이 이때의 태일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비롯해 모든 가족이 함께 모여서 살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습니다. 이제 흩어졌던 가족도 다시 모이고, 어머니도 행상을 해서 돈을 벌고 태일도 매달 적은 돈이지만 월급을 받아오게 되어 가난한 가정에도 작은 희망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삼일사에서 미싱보조로 미싱일을 배운 태일은 1966년 가을에 통일사에 미싱사로 전직을 합니다. 이제 태일은 열심히 일해서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고 자신도 포기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꿈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화시장에 발을 들여놓은지 1년여 동안 태일은 많은 것을 보고 경험했습니다. 처음 그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것 저것 가리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곳, 평화시장.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나이 어린 여공,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 그것은 바로 태일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경제학 이론, 정치경제학, 칼 막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잉여가치론 등 고도의 이론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자신이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날카로운 이론은 아니지만 그의 가슴 속에 뜨겁게 타오르는 인간에 대한 사랑, 자신의 처지를 돌이켜 남을 또 다른 나로 생각하는 바로 그 순수하고 애틋한 연민과 사랑이 평화시장의 어린 노동자들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통일사에서 미싱사로 일하면서 태일은 어렴풋이나마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적 관계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14시간 이상 일을 하고도 월급은 거의 평상 임금 정도에 불과한 것이 공장 주인의 착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단순히 ‘억울하다’는 감정을 가졌지만 이 원시적인 감정이 전태일이 가지고 있던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깔린 직관이었고 머지 않아 그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생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막연하지만, 뭔가 끌어당기는 것을 태일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당시에는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선명하게 드러나는 모습은 바로 자기 자신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수많은 평화시장의 어린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열 두세살의 어린 소녀들이 일당 70원을 받으며 점심도 굶은 채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태일의 가슴 속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회오리가 일었습니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건강을 해치는 열악한 환경, 최소한의 보호장치도 없는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일방적으로 착취 당하고 있는 이들 어린 여공들이야말로 지금까지 그늘에서 그늘로 전전했던 태일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었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태일은 자신이 놓인 환경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태일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평화시장에서 고통스럽게 일하는 어린 여공들의 비참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내부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던 ‘인간에 대한 자각’이었던 것입니다.

태일이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일을 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미싱사로 일하면서 매달 7천원의 월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태일이 받는 월급으로 여섯 식구가 근근히 끼니를 이어갈 수 있었는데, 태일은 월급이 3천원으로 깎이는 것을 감수하면서 재단보조로 다시 취직을 했습니다.
평화시장에서 재단사가 된다는 것은 많은 월급과 미싱사를 거느릴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일시적으로 월급이 깎이는 것을 감수하면서 태일이 재단사가 되려고 했던 것이 미래의 많은 월급과 힘을 갖는 것 때문이었을까요?
태일의 일기와 수기를 통해서 볼 때,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태일은 이미 이때부터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조금이라도 개선해 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태일이 재단사가 되려고 했던 것은, 현재의 노동운동이 가지고 있는 ‘조직’과는 다른, 인정적인 측면이 많았지만, 어쨌거나 공장 주인들에게 착취 당하고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어린 여공들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재단사라는 위치에 오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966년 가을에 한미사 재단보조로 들어간 태일은 미싱사와 시다를 하는 여공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자신의 차비로 풀빵을 사서 점심시간에 나눠주곤 했습니다. 정작 자신은 차비가 없어 몇 시간씩 걸어 집으로 돌아오거나 파출소에 잡혀 새벽에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하루 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 일하는 여공들의 처지가 애처롭고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고달프고 괴로운 것보다 정신적으로 더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자신의 처지로 받아들이는 그의 여린 심성 때문이기도 했고, 고생한 것에 비해 대우가 너무 형편없었던 평화시장의 노동 환경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재단 보조로 일을 시작한지 채 일년이 안되어 태일은 재단사가 되었습니다. 함께 일하던 재단사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태일이 그 자리를 물려받은 것입니다. 재단사가 되기는 했지만 고생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의 일기에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끝날이 인생의 종점이겠지.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정말 죽고 싶다. ......육체적 고통이 나에게 죽음을 생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 없어도 좋겠다.
미싱 6대에 시다가 여섯 명. 그 사람들이 할 걸 나 혼자서 다 해주어야 하니. 다른 집 같으면 재단사, 보조, 시아게 잘 하는 사람 3명이 해야 할 일을 나 혼자 하니 정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언제나 이 괴로움이 다 없어지나.

그 자신이 겪고 있던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또한 날마다 차비며 생활비 때문에 받는 고통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박봉으로 많은 식구가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절박함 때문에 하루 하루 차비며 먹거리를 사는 일이 어려웠던 것입니다.
태일이 겪는 고통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짐이 그의 어깨에 얹혀지고 있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작업 환경, 생계에 필요한 돈, 그리고 바라보기에도 애처러운 평화시장의 여공들.
그 무렵, 함께 일하던 미싱사 여공이 피를 토해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폐병 때문에 각혈을 하게 된 것입니다. 태일이 병원에 데려가 검사를 해보니 이미 폐병 3기라고 했습니다. 평화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업병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업주는 그 여공을 해고시켜버렸습니다. 직업병은 커녕 최소한의 책임도 지지 않은 채, 간단하게 내쫓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렇듯 크고 작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면서 태일의 내면에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시다와 미싱사를 위해 작은 일들을 도와주던 태일은 업주에게 미움을 받아 그 자신도 해고를 당하게 됩니다. 자본의 이익 앞에서는 최소한의 동정과 연민 조차도 방해가 되었던 것입니다.
태일이 생각했던 것처럼, 재단사가 되어 시다와 미싱사들에게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임금도 잘 받게 해주겠다는 소박한 생각은 한낮 꿈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고, 뭔가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태일의 나이 스무살이 되던 1968년. 한미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에서 재단사로 일을 하던 태일은 주변에서 일하는 다른 재단사를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의 태일의 의식이 바뀌는 중요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지난날 노동운동에 대한 경험담을 듣고 노동법이라는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동안 노동법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지냈고, 노동자가 노동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전혀 모르던 태일에게 아버지의 경험담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때부터 태일은 평화시장 재단사를 주축으로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모임을 만드는 준비를 차근 차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지내는 재단사들을 통해 사람을 모으고 다방에서 친목과 근로개선을 위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갔습니다.
1969년 6월에 태일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 여 준비를 해왔던 바보회의 창립총회는 태일의 집에서 치루어졌습니다. 이 모임은 평화시장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노동자들의 모임이었고, 외부의 도움없이 자생적으로 발생한 노동자 모임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근로조건을 개선하려는 모임이 처음부터 순조롭게 출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도 그렇고 태일이 죽는 순간까지도 모임의 구성원들은 소극적이고 방관적인 입장을 취하는 회원들 때문에 조직의 결속력이 강하지 못했습니다.
태일은 새로운 회원을 만들기 위해서, 또는 기존의 회원을 설득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비용, 노력을 들여 회원들과 가깝게 지내야 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좌절과 실의를 느끼기도 했겠지요.
태일은 근로기준법 해설책을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운 한문이 많았지만 읽고 또 읽고 정 모르는 한문은 옆동네에 사는 나이든 대학생에게 찾아가 물어보면서 근로기준법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바보회 회원들과 평화시장의 여공들에게 알려주며 현재의 노동조건이 얼마나 부당하고 억울한 것인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이런 사실들이 조금씩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태일은 같은 노동자들에게도 ‘이상한 사람’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알려지기 시작했고 사업주들에게는 ‘위험한 인물’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기 힘들어지자 태일은 남대문, 동대문, 구로동 등으로 전전하면서 일당을 받으며 피복 계통의 일을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임시로 하다보니 수입도 여의치 않고 바보회의 일을 계속하면서 지출이 늘어나기만 했습니다.
바보회에서 한 최초의 일은 평화시장 내 노동실태조사를 한 것입니다. 설문지를 만들어 사업주들이 모르게 노동자들에게 설문 내용을 받았습니다. 약 300매를 인쇄해서 바보회 회원 서너 명이 돌렸는데, 비밀이 지켜지지 않아 설문지를 빼앗기거나 찢겨서 30매 정도만 걷히고 200매는 채 돌리지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태일이 이 설문지를 근거로 시청 근로감독관실을 찾아갔지만 그곳에서 참혹한 냉대와 무시를 당하는 경험을 하고 나서 그의 좌절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노동청을 찾아갔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태일은 말할 수 없는 충격과 절망을 안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던 것인지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회의 벽이 얼마나 두껍고 높은지 알게 되자 그 자신의 처지는 물론, 바보회, 평화시장의 노동자들, 뼈저린 가난이 한꺼번에 그의 가슴을 내리눌렀습니다.
못 배우고 가난한 자들을 내리 누르는 것은 다만 평화시장의 사업주 뿐이 아니라 근로감독관, 노동청, 정부까지 하나같이 뭉쳐서 가난한 사람들을 더 쥐어짜고 내리눌러 그 피로 살찌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평화시장에서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되자 태일은 공사판을 전전하는 막노동을 한동안 하다가 1970년 4월부터 5개월동안 공사장 잡역부로 일을 했습니다. 공사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평화시장으로 돌아갈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970년 8월 9일 일기를 보면 그가 고뇌한 흔적이 뚜렷이 배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1970년 9월에 태일은 다시 평화시장에 나타났습니다. 한동안 그를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은 태일의 모습을 보고 큰집에 다녀왔다고 숙덕거리기도 했습니다. 태일은 재단사로 취직을 했고, 다시 예전의 바보회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모임은 바보회에서 삼동친목회로 바뀌었고 바보회보다 한 단계 발전한 노동조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동회는 첫 사업으로 평화시장 노동실태를 조사하는 설문지를 다시 돌려 분석, 집계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해 만들어두었던 설문지를 다시 돌려 126장의 설문지를 성공적으로 돌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노동청에 진정서를 내기 위해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서명을 받는 일을 동시에 진행해 90명의 서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이 내용이 경향신문에 커다랗게 기사화 되었습니다.

 

 


열사 전태일

태일이 자신의 생명을 던짐으로써 한국노동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던 노동운동이 조금씩 싹을 틔우기 시작했고, 태일의 죽음으로 시작된 노동운동의 발달은 70년대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합법성 쟁취와 민주노동운동의 발달에 있어 근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지식인들이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민중의 삶과 투쟁이 역사의 전면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기폭제가 되었으며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피끓는 고통의 결과였지만 그 고통을 넘어 모든 노동자와 민중은 진정한 인간다운 삶과 민주주의를 향해 한걸음 더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 1970년을 분기점으로 노동운동의 양상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시대에 노동운동은 민족해방운동과 맞물려 민족주의적이면서 사회주의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방 후 좌우익의 대결 속에서는 전평으로 대표되는 좌익 노동운동이 대세를 이루다가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에 의해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산업화가 본격 시작된 1960년대부터 노동자와 노동운동은 단지 ‘산업역군’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되면서 군부독재의 지독한 탄압을 받게 됩니다. 
전태일 열사가 증언했던 것처럼, 평화시장의 상황은 결코 이곳만의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국 노동자가 처한 보편적인 노동조건이며 생존의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 이후,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 위기를 맞아 71년에 ‘국가비상상태’를 선포하고 72년에 10월 유신과 긴급조치를 선포하면서 공포정치로 민중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자각하기 시작한 노동자의 투쟁은 더욱 가열차게 불타올라 70년는 가장 격렬하고 뜨거운 투쟁이 타올랐던 시기였습니다. 70년대에 약 2,500개가 넘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70년 11월 청계피복노조, 73년 신진자동차(현 대우자동차), 원풍모방, 아세아자동차 노동조합 등 대기업 민주노조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들이 속속 발생했습니다.
특히 78년 원풍모방과 79년 YH 무역 노조의 투쟁은 노동운동이 역사를 바꾸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80년, 전두환, 노태우 일당의 군부쿠데타 이후, 노동운동은 다시 가혹한 탄압 속에서 잠시 활동이 멎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83년부터 시작된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의 민주화 투쟁, 대규모 노동조합의 결성, 대학과 연계한 현장 투쟁 등 다양한 방법과 발전된 운동 방식으로 노동운동의 비약적인 도약이 있었습니다.
특히, 노동운동이 노동조합적인 내용에 머무르지 않고, 미국을 겨냥한 반제국주의, 반독재, 반자본의 성격을 확실하게 띄었으며 노동자의 계급적 각성을 통해 노동자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습니다.

87년 6월 항쟁이후 불붙기 시작한 노동운동은 7-9월의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전 산업의 모든 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들이 일치 단결하는 계기가 되었고 노동자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감동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모든 투쟁과 승리의 역사를 이루는 근간에는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있습니다. 한 노동자의 죽음으로 노동운동이 꽃피고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전태일 열사를 이어 산화한 수 많은 노동 열사와 민주 열사의 명목을 빌며,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룰 때까지 노동자의 전진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

이 글은 현재 '전태일 기념사업회' 전태일의 삶에 일부 게재되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