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디지팩양장본 한정판
씨넥서스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겨울 바람이 매섭게 울며 지나갑니다. 난로 하나 없는 현장에서 오늘도 방독 마스크를 쓰고 황산과 크롬의 독한 냄새를 맡으며 잔업을 하고 있겠지요. 지난번 정기검진에서도 코뼈에 구멍이 뚫리는 직업병 판정을 받은 동료들이 여러 명 나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형도 건강에 유의하세요.

형과 헤어진지도 벌써 7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동안 세상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형은 그사이에 결혼을 했고 예쁜 딸도 하나 얻었다는 소식은 친구를 통해 들었습니다. 뒤늦게나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형의 결혼이야말로 형을 아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형수님과 조카도 보고 싶습니다. 형수님이 미인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형처럼 숫기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미인을 사로잡았는지 알 수 없다고 하더군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형수님이 형을 발견한 것같아요. 형의 생활, 형의 내면을 이해할 정도의 여성이라면 정말 괜찮은 여성 아니겠어요? 보나마나 형은 슬슬 뒷걸음질 쳤을테니까 말이에요.

 

이제 우리들의 시대는 갔다고 말합니다. 형도 그렇게 생각하시겠지요. 90년대 이후, 세상은 참 너무 많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정보화 시대 신세대’, ‘X세대 문화라고 하면서 새로운 사고방식과 행동, 가치관들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혼란에 가까운 사회현상 속에서 가끔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하고 나에게 물어보곤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나의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나의 게으름과 망각의 편리함 때문에 일상에 함몰되어 살아가면서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허리가 굵어지고 아랫배가 나오면서 건강을 걱정하고 전철요금이 오르는 것에 분개하고 사람들 눈치를 보면서 주택복권을 구입하며 하루하루 벅차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젊음은 그 자체로 특권이라고 합니다만, 거리에 나서면 현란하고 자유분방한 젊음의 활기찬 모습을 보면서 슬그머니 주눅도 들고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저런 젊음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나는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불과 10년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너무나 다른 환경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기 때문인가 봅니다. 형도 생각나지요? 1987년의 그 가슴 벅차오르던 감동과 환희의 행진,노동자 군대말이에요. , 그때 형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울다가 웃다가 어쩔줄을 몰라했었지요.

요즘 후배들에게 이런 말하면 그저 고개만 끄덕거릴뿐 우리처럼 뼈저린 감동을 느끼지는 못할거에요. 형과 나, 우리 직장 동료들이 일주일에 사흘씩 철야를 하면서도 잔업없는 날은 형의 자취방에 모여서 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소모임을 갖기 시작한 것이 1984년이었지요. 기억이 새롭습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들었어요.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의 그 책은 내 삶을 의미를 바꾸어놓을만큼 나의 내부에서 사라지지 않을 자국으로 남았습니다. 소모임을 갖게 되면서 우리 동료들은 모두 이 책을 읽었고 근로기준법부터 노동조합설립에 이르기까지 조심스럽게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그때 읽은 책으로 어느 돌멩이의 외침 공장의 불빛이 생각납니다. 모두 70년대에 노동운동을 하던 선배들의 수기였지요.

, 형이나 나나 비슷하게 도시빈민으로 생활하면서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못꾸었고 공장에서 공장으로 공장에서 공사장 노동자로, 날품팔이에서 노점장사로 전전하는 생활로 70년대를 보냈습니다. 내가 형을 정말로 친형보다 더, 내 가족보다 더 가깝게 여기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형이 누구보다 나를 진정으로 아껴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오랫동안 헤어져 있지만 형에 대한 내 존경과 사랑은 여전히 변함이 없답니다. 내가 형을 만나기 전까지 형과 나는 서로 전혀 다른 곳에서 생활하면서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는 것에 신기해했었지요.

형이 처음 전태일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내가 형을 만나면서 가졌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전태일이라는 사람도 형이나 나와 비슷하구나, 하는 것이었지요. 못배우고 가난한 청년이 같은 처지의 동료들을 위해 애쓰다가 결국 철벽같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몸을 불태울 수밖에 없었던 그 처절한 상황이 80년대의 군사독재정권 상황 속에서 노조를 설립하려던 우리들로서는 결코 남의 일로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처음 전태일을 알게 되면서 어렵게 구한 그의 흑백사진을 틀에 넣어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은 지금도 변함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사진 속의 전태일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그의 사진틀을 보이지 않는 곳에 넣어두기도 했습니다. ‘전태일을 바라볼 때면 그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나를 너무 의식하지마라. 내가 너에게 부담이 되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나는 나와 같은 노동자들이 나를 영웅이 아니라 함부로 부르는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 모두가 나처럼 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이제는 노동자 혼자가 아니라 전체가 살아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전태일은 내 마음의 거울이었고 내 의지와 양심과 도덕성의 저울이었습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전태일을 존경하고 높이 평가하는 것을 보면 학식과 인격, 물질과 도덕성은 결코 비례하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위대한 87년 투쟁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한 이후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나는 그후 형과 헤어져 이렇게 낯선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형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형은 뚝심 하나로 노조를 지켜왔고 많은 사람들이 형의 그 견결하고 강고한 의지를 보면서 놀라기도 하고 힘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형이야말로 진짜 노동자입니다. 현장에서 20년 넘게 쇳가루와 독가스를 마시며 부당한 노동조건과 열악한 환경에 맞서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노조를 위해 지금까지 투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노동운동은 힘겹고 어려운 투쟁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요즘 아주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알고 계시지요? ‘전태일에 관한 영화말입니다.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영화로 만들었다고 여기저기서 뻐근하게 떠들썩하더군요.

 

정말 세상 좋아졌나봅니다. 경찰이 불법노조로 탄압하던 청계피복노조를 찾아 격려하고 투지를 불태우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전태일 자도 꺼내지 못하게 하던 시절이었잖아요? 이소선 어머니도 경찰에 맞아서 온몸에 멍이 들곤 했었지요. 나는 그때 전태일의 어머니를 처음 뵈었어요. ‘전태일이 무슨 과거의 영웅이나 전설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이 땅의 현실이라는 것을 이소선 어머니를 뵈면서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후 가끔 이소선 어머니를 뵈올 수 있었습니다. 참 기분이 묘하더군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전태일이 살아있었다면 형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형뻘이었습니다. ‘전태일은 결코 역사나 전설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물론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역사가 되겠지요만, 적어도 90년대에는 아닙니다.

 

그래서 전태일 95년에 다시 부활했습니다. 50년대의 빈곤과 60년대의 개발독재와 70년대의 공포정치와 80년대의 학살정치를 지나 90년대에 비로서 자신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낸 것입니다. ‘전태일이 살아왔던 바로 그 시절들이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웠던 삶의 연속이 아니었습니까? 그 고통스러운 삶을 상징하는 전태일의 삶과 죽음이 이제 90년대의 민중들에게 거울이 되어 비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루에도 몇 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숨지고 있고 수 십명, 수 백명의 노동자가 직업병과 산재로 현장을 떠나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은 끊임없고 정부의 노동정책은 노동자를 울리고 있습니다. ‘전태일이 불꽃이 되어 산화한지 벌써 25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천만 노동자는 크게 나아지지 않은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전태일이 다시 부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금년은 민주노총이 출범하는 해이기도 합니다. 형의 감회가 남달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87년 대투쟁이후 한동안 침참했던 노동운동이 이제 새로운 조직과 힘으로 밝은 미래를 향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뜨거운 가슴과 눈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전태일도 민주노총의 출범을 가슴 벅차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바라던 것이 바로 이런 민주노총의 모습이었을테니까 말입니다.

민주노총의 출범과 전태일의 부활. 정말 너무나 감격적이고 아름다운 조화입니다. 며칠 전에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보았습니다. 색채를 없앤 70년의 청계천 평화시장과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적셨습니다. ‘전태일의 분신에 이어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을 들고 지나가는 한 청년의 뒤돌아보는 모습을 보면서 숨막히는 감동으로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바로 형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아주 잘 만들어졌고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만큼 큰 감동을 준 것이 바로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제작자들의 이름이었습니다. 7천 명이 넘는 국민들이 저마다 성금을 내어 후원을 했습니다. 나는 그 자막을 끝까지 보았습니다. 부끄럽지만 나도 적은 힘을 보탰거든요. 내 이름이 나오는 것도 대견했지만 자막에서 형이 다니는 회사의 노동조합을 보았습니다.

형도 보셨지요? 형의 회사 노조가 자막에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나는 정말 전태일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천만 노동자, 성실하게 살아가는 민중들이 바로 전태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형의 노조에서도 단체관람을 하셨지요? 형은 분명 형수님과 조카까지 다 데리고가서 보셨을줄 압니다. 형수와 조카가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말이에요.

형은 눈물이 너무 많아서 탈이에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이 바로 형의 그런 모습이니 어쩌면 좋아요. . 건강하세요. ‘전태일은 우리의 마음 속에 언제나 살아있습니다. 형의 모습으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노동자의 모습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