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수경 씨는 오늘 아침, 특별한 마음으로 정대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별러오던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여~ 좋은 아침, 미스 차도 안녕?” 언제나 변함없이 오늘도 정대리는 어김없이 하루의 일과를 순서대로 시작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서 가방을 책상 옆에 내려놓고 구두를 벗은 다음, 슬리퍼로 갈아신고 아침에 배달된 종합지, 경제지, 스포츠 신문을 펼쳐놓은 정대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아있는 차수경 씨를 보며, 아니 정확하게는 책상 밑으로 나와있는 차수경 씨의 다리를 쳐다보며 말을 건넨다.

“미스 차, 좋은 아침이야. 커피 한 잔 빼다주겠어? 그런데 오늘도 치마를 안 입고 왔구먼. 그리고 옷은 왜 그렇게 촌스럽게 입고 다녀. 미스 차도 이제는 화장도 좀 하고 그래야지.”

차수경 씨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다가 정대리의 책상에 놓았다. 예전같으면 마지못해 했던 일이었다. 정대리가 싱글싱글 웃으며 은근한 말투로 차수경 씨를 불렀다.

“미스 차. 이번 일요일에 나하고 연극 구경갈까? 내가 표는 이미 예매를 해놓았다구. 저녁은 근사한 부페에서 사줄께.”

정대리의 농담섞인 데이트 신청에 차수경 씨는 기다렸다는 듯 “좋아요”하고 대답을 했다. 날마다 하는 말이어서 정대리는 오늘도 차수경 씨가 ‘흥’하고 콧방귀를 뀌며 돌아설 줄 알았다가 ‘좋아요’라고 말하자 눈이 둥그렇게 떠지고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았다. “침이나 닦으세요” 차수경 씨가 돌아서며 한마디 했다.

부탁하는 것처럼 하면서도 사실은 명령이나 다름없는 정대리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고 있는 차수경 씨는 이제 입사 3개월의 신참이기도 하거니와 나이도 어려서 막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처지였다.

예쁘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귀염성 있는 얼굴에 성격도 활달한 차수경 씨는 정대리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늘 심부름을 해주었다. 정대리의 하는 짓이 밉기는 하지만, 정대리가 그에게 입사 초기부터 친절하게 잘 대해 주었고 자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에는 차수경 씨 말고도 여직원이 세 명이나 더 있는데, 유독 정대리는 차수경 씨에게만 온갖 심부름을 다 시키고 있었다. 가장 막내이기 때문이라는 명분은 있지만 그래도 차수경 씨는 가끔 짜증이 났다. 차수경 씨도 정대리가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대리가 자기를 어린애 취급하거나 여자라고 무시하는 태도가 못마땅했다. 특히 자신을 ‘차수경 씨’라고 부르지 않고 늘 ‘미스 차’라고 부르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사실, 나이도 어릴 뿐더러 사회 초년생인 차수경 씨는 사무실 선배 언니들이 하고 다니는 것처럼 화장도 진하게 하지 않고 옷도 카드 할부로 구입한 비싼 메이커 옷은 입을 형편이 못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늘 수수하고 조금은 촌티나게 하고 다니는 것이 남보기에 부끄러울 때도 있었다.

정대리는 그런 차수경 씨를 보면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놀려대는 것이다.

“미스 차, 미스 차는 왜 치마를 한 번도 안입는거야? 혹시 다리에 흉터가 있는거 아니야? 그러면 시집가는 데 지장이 많을텐데… 아니면 다리가 무우 처럼 생겨서? 그것도 아니면 다리에 알통이 박혀서 그런가?”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정대리의 뺨을 찰싹 때려주고 싶지만, 그렇게는 못하고 속이 상해서 점심을 굶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도 정대리는 아침부터 차수경 씨의 속을 뒤집어놓고 있었다. 사무실의 선배 여직원들은 차수경 씨에게 격려와 꾸중이 섞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얘, 수경아. 너 정대리에게 잘 해주는 것은 좋지만 정신차려. 정대리가 너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것들이 바로 성차별이라는거야. 정대리가 너를 좋아하기 때문인줄은 알지만 정대리의 성차별 의식을 고쳐놓지 않으면 앞으로 결혼한 다음에 문제가 많을걸.”

“아니, 언니는 그렇게 심한 말을… 내가 언제 정대리와 결혼한다고 했나…”

“그래, 정대리가 아니라도 좋지만, 어쨌거나 남성들에게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으면 안되는거야.”

그런 이야기를 듣고 차수경 씨의 마음 속에서는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대리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차수경씨는 회사의 여직원 모임인 ‘진달래회’에 늘 참석하고 있어서 여직원 모임을 통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진달래’는 해마다 불우이웃돕기 바자회도 하고 정기적으로 양로원이나 고아원을 찾아가서 외로운 사람들을 돕는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체 교육을 통해 여성문제도 토론을 하고는 했던 것이다.

토요일 퇴근 시간에 정대리는 차수경 씨에게 다시한번 다짐을 하고 일요일 점심시간에 대학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미스 차. 내일 나올 때는 화장도 좀 하고 멋있게 하고 나오라구. 다른 여자들하고 비교되면 괜히 쪽팔리잖아.”

은근히 무시하는 정대리의 말을 들으면서 차수경 씨는 마음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 내일 한번 보자구요.’

일요일. 점심시간 무렵, 문예회관 앞은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선남 선녀들이 하나같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성이며 상대를 기다리고 있는데, 약속시간보다 10분이나 늦은 정대리는 두리번 거리며 차수경 씨를 찾았다.

‘분명 나왔을텐데… 그렇게 촌스럽게 하고 있으면 금방 눈에 띌텐데, 아직 안나왔나?’

마음 속으로 비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정대리는 시계를 보았다. 약속시간에서 30분이나 지난 것이다. 조금씩 짜증이 나는 정대리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연극을 보고, 저녁에는 분위기 있는 까페에서 술을 마시며 미스 차의 마음을 사로잡아 보겠다고 별렀던 계획들이 머리 속을 지나갔다. 10분만 더 기다리다 안오면 가버리겠다고 화를 내던 정대리의 앞으로 어떤 여자가 다가왔다. 엷게 물결치는 머리칼과 산뜻한 투피스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매력적인 여성이 살폿한 웃음을 머금고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정대리는 ‘그래, 닭대신 꿩이다. 차라리 미스 차가 안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넥타이를 고쳐 맸다. 그 여자는 정대리의 앞에 서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저 모르시겠어요?”

정대리가 다시 한번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 생각도 못하고 넋을 놓고 말았다. 정대리는 더듬거리며

“그…그…미스… 차…”

사무실에서 본 것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차수경 씨의 변신으로 정대리는 넋이 나가고 말았다. 그렇게 촌스럽게 하고 다니던 미스 차가 이렇게 아름답고 예쁠 수가 있었단 말인가. 정대리는 금방 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40분이나 늦은 것도 아무렇지 않았고 오직 눈앞에는 미스 차의 예쁜 모습만이 어른거렸다.

“미스 차. 오늘 너무 예쁜데. 이렇게 예쁜줄은 정말 몰랐어.”

정대리는 흐믓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정대리의 귀에 들려온 목소리는 아주 냉정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정명구씨. 제 이름은 미스 차가 아니고 차수경이에요. 앞으로 ‘차수경 씨’라고 불러주세요.”

찬바람이 쌩쌩 도는 차수경 씨의 말에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놀란 정대리는 다시 한번 차수경 씨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차수경 씨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정대리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어서 정대리는 비루먹은 개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차수경 씨. 점심 식사 하러 가시지요.”

월요일 아침. 어느날보다 일찍 출근한 정대리는 수수한 옷차림으로 앉아있는 차수경 씨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수경 씨, 커피 한 잔 하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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