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시즌 개막! 부산 아이파크 - 성남FC 개막전을 보러 새벽 4시부터 일어나서 당일치기 부산에 다녀왔다. 육전이 올라간 밀면에 대선. 부산에서 낮술. 승점1점을 챙겨왔다. #K리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

로더베익 메이으르: 스피노자의 가장 절친한 친구. 스피노자 유고집 편찬책임자. 의학박사

 

로더베익 메이으르가 쓴 <데카르트 철학원리>의 서문 중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모든 확실하고 굳건한 인식은 이미 확실하게 알려진 것으로부터만 끌어내고 도출될 수 있기 때문에, 후자의 것[이미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처음부터 견고한 토대로 놓여야 하며, 이 위에 그 이후 인간 지식의 건물 전체를 구성해야 한다. (중략) 정의 공준 공리라는 이름 아래 수학자들에게 친숙한 것이 바로 이러한 종류의 것이라는 점은 이 고귀한 학문에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사람에게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정의는 논의되는 실재를 지칭하는 용어와 이름에 대한 아주 분명한 설명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준과 공리 또는 정신의 공통 통념은 아주 명료하고 뚜렷한 까닭에 이 단어들을 올바르게 이해하기만 한다면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언표들이다.”

 

이 서문을 읽고 나서 드는 의문

1) 정의라는 것이 어떤 이름을 정확하게 설명/설정하는 것인지,

2) 더 나아가서 정의되는 사물의 본질을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인지 혹은 둘 다인지 불분명

또한 저것만 봐서는 정의-공준-공리 사이의 차이가 불분명.

- 이것은 올덴부르크와의 편지에서도 오간 이야기다.

 

*

올덴부르크: 1619년생. 스피노자보다 13살 연상. 독일 브래맨 출신. 하인리히 올덴부르크.

독일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영국으로 건너감. 영국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영국왕립학술원창립에 관여. secretary 맡음. 외국의 과학이나 철학같은 학문을 찾아서 왕래, 주선, 소개. 1660-61에 네덜란드 여행 중 이미 유명해져있던 스피노자의 명성을 듣게 된다. 당시 스피노자는 책을 내지는 않았지만 이미 저명한 학자였다. 스피노자의 집을 방문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그가 영국으로 돌아가 보낸 첫 번째 편지. “선생님을 만나고 잊을 수 없어서 편지 쓴다. 계속 편지 주고받으며 많이 배우고 싶다. 요즘 연구하시는 것들에 대해 서신으로 간간히 알려달라.”

-> 스피노자의 답장(2번째 편지/86) : 쓰고 있는 저술의 일부 소개. / 속성의 정의 언급.

 

-> 올덴부르크의 답장(3/86) : 신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신의 실존을 도출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스피노자 선생께서는 신에 대한 정의에서 실존을 바로 도출해냈다. 하지만 그 정의에서 신이 실존된다는 것이 어떻게 바로 도출될 수 있는가. 정의는 정의고 실존의 증명은 따로 해야하는 것 아닌가. 정의는, 정의되는 대상의 실제 본성이나 본질을 참되게 하는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고, 우리 정신들의 개념들만 포함하는 것 아닌가(=우리의 마음속의 자의적인 것 아닌가). 우리 정신은 실존하지 않은 많은 것을 인식하고(봐라, 우리 정신 속에서 내린 정의에는 실존하지 않는 것들도 많지 않은가. 이를테면 귀신?), 이렇게 인식된 것을 증가시키고 확대할 때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로부터 이러한 존재의 실존을 우리는 추론할 수 없다. 이 점을 성찰하게 되면 저는 어떻게 제가 신에 대해 갖고 있는 개념으로부터 신의 실존을 추론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 올덴부르크는 정의를 어떤 명칭의 뜻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 스피노자의 답(4/86) :

우리가 실존을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은 ...” 정의뿐이다. 아무 정의나 그게 가능하다고 한 말이 아니다. 어떤 정의, 대상에 대해 정의를 제시한다고 해서 실존이 반드시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다(올덴부르크도 이 말을 한 것이고). 실존은 오직 어떤 속성, 자신을 통해 인식되고 자기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정의 또는 관념으로부터만 따라 나온다. / 방금 언급된 주석에서 저는 또한, 제가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차이에 대한 근거를 명료하게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허구와 명석판명한 개념의 차이를 알고 모든 정의 또는 명석판명한 관념은 참이라는 공리의 진리성에 대해 안다고 가정되어 있는 철학자에게는 그럴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주목한다면, 저는 첫 번째 문제의 해답에 대해 무엇이 더 결여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 저는 실체를 자신을 통해 인식되고 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 곧 그 개념이 다른 것의 개념을 함축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변양 또는 우연속성은 다른 것(실체) 안에 있고, 그것이 들어있는 바로 그것(실체)을 통해 인식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실체가 자기 안에 들어있고 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과 달리, 변양이나 우연속성은 자기 안이 아닌 다른 것의 안에 들어가 있고, 그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된다)

*** 실체= 자신을 통해 인식되고 자신 안에 있는 것= 실체에 대한 정의 또는 관념으로부터그 실존이 따라 나온다(오직 자신을 통해서”. 다른 것의 개념을 함축하지 않는).

*** 우연속성은 실체를 통해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

시몬 드 프리스: 스피노자와 가까웠던 친구. 네덜란드의 부유한 상인. 1살 어리지만 10년 먼저 사망했다. 급진적인 개혁 교회에 소속. “스피노자 서클중에 한 사람이었다. 일종의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를 공부하던 서클. 스피노자가 에티카의 초안을 보내주면 그걸로 공부하고 의문이 생기면 편지하고 스피노자가 답변하는 식으로. 스피노자의 열혈한 예찬자였다. 돈이 많아서 거액의 연금을 주겠다고도 제안했지만 스피노자가 거절. 그렇게 돈이 많으면 공부 외의 다른 것에 관심 가질 것 같아서 안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심지어 유산을 스피노자에게 상속하겠다고도 제안. 하지만 그것마저도 스피노자는 거절했다.

 

시몬 드 프리스의 편지(8/86) : 동시대 수학자(유클리드 기하학 원론)의 예를 통해서 질문.

1) 보렐리(<유클리드 기하학 이론> 편찬자) : 직선이 두 공간을 에워쌀 수 없다. 곡선이면 가능하지만. 보렐리가 이 예를 든 것은 누군가 도형에 대해 (허구적으로) ‘직선- 두 공간을 에워싼다는 정의를 내린다면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 이건 참된 정의가 아니라는 것. 메이으르가 쓴 <데카르트 철학원리> 서문에 나온 말과 비슷하다

2) 클라비우스(<유클리드 기하학 이론> 편찬자/ 마테우리치의 스승/ 2의 유클리드라고 불리울 정도) : 자의적인 용어다. 어떤 목적을 위해 임의로 설정한 용어가 정의다. 그러므로 이게 자연 안에 제대로 존재하는 것을 잘 표현하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


*** 요약해서 정리해보면

- 보렐리: 증명의 전제이기 때문에 정의는 명징해야 한다! (증명의 전제= 명징한 지식= 그러면 이건 공리’. 보렐리의 설명으로는 정의와 공리 사이에 차이가 없다)

- 클라비우스: 정의는 전문용어기 때문이 실재와 합치 안해도 된다! 물론 합치할 수도 있지! ! ‘증명을 통해서.

- 스피노자 선생님의 정의는 보렐리랑도 다르고 클라비우스하고도 다른데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다.

 

-> 스피노자의 답(9/86) :

1) 선생이 어려움에 빠진 이유는 상이한 종류의 정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정의에는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다.

- 실재적 정의: “본질만이 문제가 되고 있고 유일한 의문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되는 정의

명목적 정의: “단지 검토를 위해 제안되는 정의” (클라비우스의 전문적 용어로서의 정의)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규정된 대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참된 것이어야 하는 반면, 후자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2) 스피노자가 머릿속에서 그리는 사원에 대한 정의

가령 어떤 사람이 나에게 솔로몬 사원(규정된 대상)에 대해 참된 묘사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면, 제가 그에게 무의미한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 한, 저는 그에게 그 사원에 대한 참된 묘사를 제시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제가 제 마음 속에 제가 짓고 싶어하는 어떤 사원을 미리 그려봤고, 이 사원에 대한 묘사를 한다면(중략)”

솔로몬 사원에 대한 정의 실재적 정의

머릿속의 사원에 대한 정의- 실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다. 명목적 정의

- 만약 누군가 정의를 실재로 존재하는 정의만을 정의라고 한다!”라고 생각한다면 나의 머릿속 정의를 그르다고 말하겠지. 이 두 가지를 혼동하면 사람들은 후자는 정의가 아니라고 주장할 텐데 이 두 가지를 혼동하지 않는다면 후자도 정의다!

 

*** 정의 VS 공리

- 정의: 어떤 사물의 본질을 제시해주는 것. 그렇다면 정의는 보편적인 것일까요? No! 특정한 사물의 본질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Singular. 개별적

- 공리: 보편적. (ex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 1+1=2. AA. A=A) 이런 관점에서 공리. 어떤 특정한 사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 “영원진리까지 확장될 수 있는 참된 지식.

 

문단띠로 사각형입니다.

  


249P.

 

정의 1. 자기원인

 

1) 정의

나는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것, 곧 그 본성이 실존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것을 자기원인으로 이해한다.

 

*** 함축 involvere involve: ”AB의 개념을 함축한다고 말하는 것 = A, B없이는 인식될 수 없다. (2부 정리 49. 80P) , 실존 없이는 본질을 인식할 수 없다/ 실존 없이는 본질이 성립될 수 없다./ 실존하지 않는다 -> 그러면 본질이 성립되지 않는다.

*** 어떤 것이 자기 원인이다라고 하면, 그 속성상 실존할 수밖에 없다!

*** 어떤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초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스피노자적 자기원인 개념으로는 데카르트가 시초라고 한다. 저 위의 이야기도 데카르트에 나오는 이야기다.

*** 하지만 스피노자의 자기 원인의 독창성: 다른 중세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책을 살펴보면 항상 자기원인의 개념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에 쓰인다. 예를 들면, 누군가 이게 왜 존재하냐? A 때문에. 그럼 A는 왜 존재하냐? B 때문에. 그럼 B? 이런 식으로 무한히 나갈 수 있다 <- 무한소급. 이것의 문제점은 철학적으로 볼 때 우리가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콜라 철학자들은 신이야말로 이 모든 무한소급을 막아주고 답이 되는”. 그럼 왜 신이냐? 하면 답이 신은 그 자체로 자기원인적이기 때문이다라는, 신이 없이는 이 세상의 근거를 설명할 수 없다는 식으로 쓰여왔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자기 원인개념을 신과 분리시킴!

 

2) 자기원인 개념의 통상적인 의미

어떤 개체가 자기 자신의 존재 및 활동의 원인이 된다는 것. 그런데 이는 결과로서의 개체가 존재하기 이전에 원인으로서의 개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 따라서 자기모순적. - 니체 <선악을 넘어서> 41P

*** , 자기가 자기 자신에 선행된다= 이것이 통상적인 의미의 자기원인(앞에서 본 의 예 같은 것이 통상적인 의미의 자기원인이었다) <- 스피노자는 이것을 말이 안 된다고 부정. 니체도 바로 저 통상적인 의미의 자기원인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통상적인 의미대로 사용하면, (신처럼)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원인이 되려면, ‘자기가 선행되어야 하는데(=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의 시간적인 앞섬) 이건 말이 안 된다 (둘로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니체는 더 나아가서, 신은 죽었다. 신이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우리를 속여 왔다고 주장. (니체는 스피노자에서 약간 늘 오바하는... 크크)

 

3) 스피노자 철학의 고유한 의미 (=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자기 원인을 왜 에티카 1부 첫 번째 정의로 썼을까?)

 

) 초월성에 대한 비판

자기원인은 일차적으로 자연의 자족성을 가리킴. 곧 자연인 자기 이외의 다른 원인에 의거하지 않는다는 것. 자연은 실존하기 위해서나 작용하기 위해서 신이라는 초월적인 원인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 신 자신이 자연의 일부. 신즉자연. “자기원인이 윤리학 1부 첫 번째 정의로 제시된 것은 초월성에 대한 근원적 비판과 배제를 뜻함. , 자연을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 창조론 비판. 신 비판.

- “무로부터의 창조유대교에서는 신이 전지전능하며 초월적이고 자연을 주관한다고 하는데 스피노자는 자기원인을 들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시간적으로 신이 결과이면서 동시에 원인일 수 있는가)

 

- 예전에는 중세철학하면 기독교적 의미의 라틴스콜라를 많이 이야기했는데, 그 라틴스콜라를 확립시킨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낸 Etienne Gilson 에티엔 질송(1884-1978)의 초기업적 중 데카르트와 라틴 스콜라 용어를 비교해서 인덱스로 만든 것이 있었다. 그전에 사람들은 데카르트가 중세철학과 아무런 연관 없이 새로운 철학을 연, 근대철학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질송이 보니까 데카르트의 철학에 중세철학 이론도 나와 있고 중세철학에 굉장히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 이 작업을 했고, 데카르트-는 중세철학 사이의 연계를 최초로 보여줌. 이 사람은 중세철학의 가장 기본을 세운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주장. -> 근데 몇 십년 후에 연구방향이 바뀌어서 중세철학은 아랍/유대 스콜라 철학이 영향을 끼친 것이 굉장히 크다는 것이 밝혀짐. 아랍/유대 철학은 유럽라틴 스콜라와는 매우 다른 사상이다. 이 아랍/유대 철학은 근대철학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아베로에스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중세에 전했다. 창조론이라기보다 우주/자연의 영원성을 강조한 철학. 그런면에서 스피노자 철학은 아베로에스 주의에 가깝다.

 

) 역동적인 장으로서의 자연

자기원인은 자연이 원인라는 것, 곧 실재들을 생산하는 무한한 역량이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음.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연은 실재들의 생산과 소멸, 성장과 쇠락, 변화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인과연관들의 체계라고 할 수 있음 자연은 정태적이거나 활동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 소멸, 운동으로 가득한 곳이다.

 

) 비재귀적 원인으로서 자기원인

 

*** 비재귀적: 자연을 주체로 이해. 주체로서의 자연이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만들어내고. 마치 사람이 계획해서 뭔가를 행하듯이, 자연도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그리고 여기까지가 바로 재귀적” self), 스피노자는 그것과는 좀 다르다고 말한다(비재귀적) , 자연이라는 것은 인간적인 주체와 같지 않다.

 

*** 1부 정리11 신 존재증명 과정 모든 사물에 대해, 그것이 실존한다는 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도 원인 또는 이유가 존재해야 한다.” (반대로 왜 실체가 실존하는가에 대한 이유는 실체의 본성만으로부터 따라나오는데, 이는 곧 그것이 실존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정리7 실체의 본성에는 실존함이 속한다)) = 존재하지 않는

 

*** 라이프니츠 <자연과 은총의 원리 Principle de la Nature et de la Grace> 7.

왜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 이 라이프니츠의 말이 유명해진 것은 하이데거 <형이상학 입문(1935)>. 1935년이라는 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하이데거는 1933년에 대학 총장이 됨. 1933년은 나치스가 정권을 잡은 해다. 하이데거가 나치스당에 가입하면서 프라이부르크 대학총장이 된다(이 해에 법학총장으로 임명되는 사람은 칼 슈미트다 크크) 하이데거와 칼 슈미트가 의기투합! 하지만 2년을 버티지 못하고 이 동맹은 깨졌다. 둘 다 권력경쟁에서 밀려난 것이다. 칼 슈미트는 나치의 개완 법학자로 나치를 법적으로 정당화시키기 위해 엄청 글 써댐. 뉘른베르크전범재판에서 유죄. 하이데거/ 칼 슈미트 둘 다 전쟁 후 학계에 복귀하지 못했다. 하이데거 말에 따르면 나치스에 실망했다. 입당할 때 보니 대단한 줄 알았는데 시시하더라. 아메리카주의, 볼셰비키 혁명에 맞서 제국의 문명을 수호하기 위해 입당했는데 실망해서 탈당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나치당원증을 (고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2년 전 나온 책 하이데거의 <검은 노트>. 이 노트를 보면 그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했다고. 독일에서는 하이데거 전공하면 취직도 안 된다고. 그의 책 <형이상학 입문>은 나치스를 철학적으로 정당화시키며 쓴 책이다. 그 책에서 첫 번째 화두로 삼고 있는 문장이 바로 저것.

 

-> 라이프니츠 문장은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 자연(넓은 의미의 자연/ 존재하는 것 모두, 실재하는 것 모두)

- 은총(즉 실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걸 넘어서!)

형이상학이라면 실재를 초월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실재를 창조한 것에 대한 질문. 신학적 질문. 이프니츠 입장에서 존재만이 질문의 대상이 되는 건 너무 납작했다. “도 질문이 돼야한다. 형이상학적인 ”. 아무것도 없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와 대등한 것. (그 말은 반대로 말해서)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것/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질문이 뜻하는 바는 왜 존재하는가. 이 우연은 누가 가능하게 했냐”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신... 그분....) 저 질문 자체만 듣고 너무 멋있었는데 추론해나가며 답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깼다ㅋㅋ

 

------------------!!!!!!!!!!!!!!!!!!!!!!!!!!!!!!!!!!!!!!!!!!!!!!!!!!!!!!!!!!!!------------------------

*** 스피노자의 말과는 매우 대조적 개념.

 

* 스피노자: 무는 이미 있다가 없어진 것(“시간의 개념으로 놓았다?) 그러니 왜 실존하지 않는지 밝혀야 한다(왜 실존하지 않는가? VS 왜 실존하는가). 실존하지 않는 것에는 원인 또는 이유가 존재할 테니까. 당연히 없는 게 아니라-> 우연적으로 없는 게 아니라-> 어떤 이유로 없는 것이다. 그 존재하지 않는 어떤 이유를 밝히자!

 

* 스피노자는 무와 실존을 동등한 두 개의 항으로 정립하지 않고, 비실존/”를 이미 실존의 한 양태로 포섭하고 있는 것이다(실존의 양태 중에 없음상태로 실존). 이는 첫째, 스피노자에게 는 실재성을 지닌 사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실존이나 마찬가지니까). 둘째 이것은 논리적 근거나 인과성 원리는 항상 이미 일어난 존재함이라는 사태 이후에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 ( 1) “는 이미 존재로 포괄되니까 2) “는 이미 일어난 존재함이 없어진, 그러니까 그 이후의 상태인 것. , “이미 일어난 존재함이라는 사태 이후!)

 

* 스피노자에게 자기원인은 이러저러한 존재자 또는 실재의 필연적 실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이미 필연적 실존 그 자체를 의미하고 있다. 곧 이는 누구에게 귀속되기 이전의, 누구의 실존으로 존재하기 이전의 있음이라는 사태 자체를 의미.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에서 그 본성이 실존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는이라는 규정, “그것말고 달리~ 일 수 없음라는 규정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 (스피노자에게 존재(실존)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필연적인 것이므로 왜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이미 저 스피노자의 문장에 필연으로써그 이유, 왜에 대한 답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니 실존할 수 밖에 없다고 필연성을 이미 잔뜩 부과했는데 거기에 뭘 물어!)

 

*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것이라는 규정은 라이프니츠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가능태인 본질에서 현실태인 실존으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이 스피노자에게는 부재함을 가리킨다(왜냐면 이미 본질 안에 실존이 들어가 있는데, AB가 들어가 있는데 어떻게 A에서 B로 움직일 수가 있나!). 본질은 항상 이미, 영원하게 실존을 함축하고 있으며 실존은 항상 이미 본질의 행위, 현행적인 본질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자기원인 개념은 암묵적으로 자연의 외부나 자연 이전에 성립하는 형이상학적 무를 가정하는 궁극적 근거에 관한 문제설정과 무관하며, 근본적으로는 부정이나 결핍, 무를 포함하지 않는 존재, 있음의 순수한 실정성을 가리킨다!

(형이상학적 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창조론을 너무나 뒷받침해주는 것이니까! 스피노자에게 이 세계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가 나타나는 기원따위는 없다)

 

*** 스피노자 주장: 형이상학적인 무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다. 무의미한 말. 라이프니츠는 있지도 않은 것을 만들어서 혹세무민 하고 있다 VS 라이프니츠의 주장: 스피노자는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

 

->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는 철학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 그전 철학에는 절대자개념이 없음. 기독교가 들여온 개념. 절대자= 무로부터 창조(를 가능하게 만듦). 기독교적인 게 없었다면 철학에서 절대성이라는 것은 없었을 것. 철학의 지평을 엄청나게 확장했다.

-> 라이프니츠가 나중에 스피노자를 찾아갔다고. 그러나 스피노자는 그런 라이프니츠를 매우 경계했다고 한다. 나중에 슐러라는 사람을 통해 질문도 많이 던지고 스피노자 사후 슐러가 스피노자 에티카도 구해주고. 스피노자가 오래 살았다면 둘이 재미있는 논쟁을 많이 하지 않았을까.

 

 

정의 2. 유한

 

1) 정의

동일한 본성의 다른 실재(res/thing)에 의해 한정될 수 있는 실재를 자신의 유(genre)안에서 유한하다고 한다. 예컨대 하나의 물체는 유한한데,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그 물체보다 더 큰 물체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유/생각은 다른 생각에 의해 한정될 수 있다. 하지만 한 물체는 한 사유에 의해 한정되지 않으며, 사유 역시 물체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다.”

 

*** 앞으로 내가 부를 실재는 “res”. thing보다 범위가 넓은. 왜냐면 신도 하나의 res

신을 포함해서 인간도 res 무생물 생물 다 res.

*** 여기서 더 크다는 말은 제한/ 한정/ 제약할 수 있다 : 물체는 다른 물체에 의해 한정된다/ 관념은 다른 관념에 의해 한정된다/ 사고는 다른 사고에 의해 한정된다. <- 동일한 본성은 동일한 본성에 의해 한정된다 (다른 본성끼리는 안 된다)

*** 여기서 본성이 다른 것”= 속성이 다른 것. 속성이 다른 것끼리는 서로가 서로를 한정지을 수 없다= 인과도 성립하지 않는다. , 스피노자에게 인과관계는 같은 속성끼리만 가능한 것이다! (<- 2/3부의 중요한 전제) => 우리의 정신(사고)과 신체(물체)는 상호작용할 수 없다/ 신체가 정신을 움직일 수 없다/ 정신이 신체를 움직일 수 없다.

*** 속성 Attribution

속성은 스피노자에게서 2가지. 우리가 쓰는 의미의 속성과는 매우 다름!

1) 사유속성 thought : 심리적인 세계 전체. (물리적 세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2) 연장속성 extension : 우주전체.

우리의 신체를 비롯한 모든 물체는 연장속성

우리의 정신을 비롯한 모든 사고는 사유속성

=> 저 두 가지 속성은 그 안에서 서로만 인과를 맺지 상호인과를 맺을 수 없다!

 

2) 왜 유한이 두 번째 정의로 나올까?

*** 이 두 가지를 주장하기 위하여

유한한 것은 실체가 될 수 없다. 그럼 유한한 것은 (실체가 아니고) 뭐냐? 양태

정신과 물체는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 정리1~ 정리8까지 살펴보자

*** 데카르트의 유한 실체개념에 대한 비판 함축. 데카르트는 실체를 유한 실체, 무한 실체로 나눈다. =무한 실체/ 정신이나 물체= 유한 실체. 그런데 데카르트에 따르면 실체는 실존하게 위해서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PP 1 51 <- <철학의 원리> 151)”이며, 여기에 따르면 유한 실체라는 용어는 모순. 왜냐하면 신을 제외한 나머지 실체들은, 가령 정신이나 물체는 실존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고유한 의미의 실체는 신이 유일하지만 유한한 실재 역시 신을 제외한다면(구차하다..) 실존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역시 실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실체 개념을 모호하게 사용한다고 비판, 좀 더 일관되고 합리적인 실체 개념을 제시하게 위해 먼저 유한에 대한 정의를 제시.

 

 

정의 3. 실체 substance

 

1) 정의

나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 곧 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실체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나는 실체로 파악한다.”

*** “자신 안에 있다”: 공간적 표현으로 되어있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다른 근거에 의지하지 않는다/ 전제하지 않는다는 말 = 자기원인적인 것을 다르게 풀어서 한 말.

*** “자신에 의해 인식된다”: 리가 그냥 말하는 인식과는 또 다름. = 설명의 근거가 자기 자신에게 있다= 자신보다 상위에 논리적인 근거가 없다= 자기 자신 이외에, 그것 바깥에 다른 원리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다.

*** 그렇다면 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실체의 개념이 필요한 경우는?

-> 실체가 아님 -> 양태임

*** 정의5의 양태와 대조적

실체: 자신 안에 있는 것. 자립적. 자기근거적.

양태: 다른 것들 안에 있는 것. 다른 것에 근거를 두고, 다른 것에 원인이 있고.

*** 연장/ 운동 설명

운동: 자기 자신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다.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됨. 운동하려면 연장. 연장에 의해 인식됨. , 운동은 연장의 하위 개념이다.

연장: 그것보다 상위에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 그러니 자기 자신에 의해 인식. 최상위의 원리.

 

2) 실체에 대한 전통적 정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는 개별적 실체 ex) 소크라테스는 작다

데카르트의 실체

스피노자의 실체는 오직오직 2가지? 우리가 1부를 읽으면 몇 개의 실체가 있는지 확인하는 때가 올 것이다.


정의4. 속성

 

1) 정의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파악한다.”

***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을 속성으로 파악한다라고 했으면 간단했을 텐데 저 정의로 가면 복잡해진다, 바로 이 부분에서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이때의 지성이라는 것을 어떤 주석가들은 인간 지성으로 이해. 속성이라는 것은 실재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지성이 그렇다고 지각하는 것이다.

 

2) 속성에 대한 데카르트의 정의

데카르트: 주요 속성/ 성질로서의 속성으로 구분. 하지만 후자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음.

칸트: “속성이란 물자체. 하지만 우리는 물 자체를 알 수 없다. 현상만 알 수 있다를 참고하면, 우리는 속성을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인간 지성이 지각하는대로만 이해할 수 있다. , 속성이란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지성이 주관적으로 투사하는 것 <- 속성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론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생각했는데 20세기 와서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속성을 객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 근데 최근에는 여기에 대한 반론이 나와서, 주관주의적 해석론을 복원시키자는 움직이기 일어서 다시 논쟁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 인상적이었던 것

1. 스피노자의 생애. 성깔 있고 신념으로 점철된!

2. 편지가 왔다갔다하면서 깊이 있는 학문을 논하는 분위기

3. 어떻게 해야 자신이 갖고 있는 철학사상을 최대한 진리의 소실 없이 전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스피노자의 고민. 그리고 그 고민의 결과 기하학적 방식을 선택한 스피노자의 결정.

4.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이거 익명으로 썼는데 누가 썼는지 결국 다 알았다고ㅋㅋ)

5. 정의-공리-공준의 개념.

6. 주석에 대한 들뢰즈의 주장

7. 굉장히 어려운 한 세계를 열어젖히는, 신대륙 앞에 선 나의 마음

 

4.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성경에 관한 분석. 특히 구약. 힌디어. 유대 전통이라는 것이 보통 구약성경이 바탕이니까. 히브리어로 구약성경을 읽지 않고 라틴어로 읽는 사람들은 원래 갖고 있는 뉘앙스들을 제대로 못 읽고 애매한 비유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특히 자연적 사실이 해석되는 과정에서 기적으로 해석되고 그래서 그는 현재 기독교에서 받아들이는 기적/예언들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이건 다 왜곡이다! 잘못됐다! 구약 성경을 deconstruction.

당시 신학 권력자들에게 매우 위험한 책. 자신의 권력의 기반인 상징체계를 허물어버리니까. 구약성경은 심오한 어떤 것이 아니다. 히브리 민족의 역사서일 뿐이다. 구약성경의 각 권들은 필자가 다 다르다. 만들어진 이유도 간단. 대부분이 문맹인 히브리 민족에게 도덕적 교훈을 가르치려고 쓴 것. 저 교훈들은 매우 간단하지. 신숭배하고 이웃이랑 잘 지내 같은 류. 그냥 그 정도의 내용을 놀랍고 심오한 진리를 가진 책처럼 포장한다 -> 성경을 자신의 권력독점으로 이용 <- 스피노자가 이것을 격파. 신비로운 척 하는 구절들은 사실이거 그냥 평범한 사실을 비유적으로 이렇게 적어놓은 거야!의 해설서.

그래서 스피노자가 이 책을 이름을 쓰지 않고 출판했다. 유령출판사. 독일출판사 이름을 찍어놨지만 사실은 네덜란드 출판사(<- 에티카도 출판한 곳) 하지만 책이 나온지 얼마 안 돼서 사람들이 다 스피노자가 썼다는 것을 알아냈다. 1674년에는 금서 처분을 받음. 이때가 에티카 원고를 스피노자가 출판사에 넘긴 직후인데 금서 처분 이후 그는 스스로 출판사에 인쇄 중단을 요청했다.

 

5. 정의-공리-공준의 개념

 

1) 정의

- 실재적 정의 real definition : 본질을 표현

- 명목적 정의 nominal definition : 용어의 뜻을 설명

=> 기하학의 영역에서는 양자가 동일하다. 하지만 기하학이 아닌 현실의 실재에 대한 정의에서는 이러한 일치가 자동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정의가 사물의 본질을 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의로부터 여러 가지 속성들이 도출될 수 있다. ) 삼각형의 경우 -> 세 각, 세 변

 

2) 공리: 수학/철학에서 자명한 진리를 뜻함. 1부에서 제시되고 있는 7개의 공리들은 증명 필요 없이 참진리라고 제시되는 것.

3) 요청= 공준: 공리에 준한다. 공리와 마찬가지로 올바르다고 참이라고 전제되어 있는 명제들. 차이라면 공리는 모든 학문에 공통적으로 적용, 공준은 특정한 분야에만 적용

51~55P 공리1부터 요청6까지. 쓰던 논리전개가 잠시 중단되고 보론처럼 들어간다. 자연에 관한 철학적인 고찰= 갈릴레이 뉴턴 이전에 주로 아리스토텔레스 적인 자연에 관한 철학적인 논의 논의. 이 자연학 이야기가 6개의 요청으로 끝나고 있다. 6개의 요청= 특정한 분야인 인간 신체에 대한 내용.

또 요청이 나오는 곳. 387-88P 요청이 두 개가 나온다. 여기의 주어도 인간 신체

, 2부 정리 12, 정리 14 사이의 6개의 요청. 3부 앞부분의 2개의 요청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제시하는 8개의 요청은 모두 인간신체. ? 자기가 만약 논의할 수 있는 여유가 더 있다면, 자기가 윤리학이 아니라 자연학이라는 책을 썼다면 증명을 했어야만 하는 것들인데 이건 윤리학이고 난 시간도 없고 그러니까 이것들은 일단 참이라고 하고 넘어가자. 증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참이라고 하자고 요청/가정된 곳들.

 

 

6. 주석에 대한 들뢰즈의 주장

주석이 에티카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들뢰즈가 첫 주장

 

* 들뢰즈- 스피노자가 에티카에 쓴 내용을 보면 에티카는 사실 2권으로 되어있다.

1- 엄밀한 논증으로 되어있는 연역의 윤리학. 정리/공리/증명. 단조롭고 건조한 문장들. 냉정하고 엄격하고.

2- 저것과 구분되는 윤리학이 또 있다. 주석/부록/서문 그리고 서술방식도 차이가 있다. 서문같은 경우 너무나 인간적이고 풍자, 조롱, 비판, 격렬한 논쟁 이런 것들이 전개되고.

그러므로 이건 2권이다! 상이한 수사법, 상이한 논조로 구성된 2가지의 에티카.

들뢰즈의 매우 중요한 발견! ‘주석에 독자적인 기능이 있다는 것에 대한!

 

* 1993. 들뢰즈가 죽기 직전에 쓴 글에서는 아니다, 다시 보니 3가지의 에티카다.

옛날에는 2개라고 생각했는데 3개더라. 3번째 윤리학은 뭐냐? 윤리학 5부가 3번째다.

1,2,3,4와 다른 5. 1~4까지는 스피노자가 상대적인 속도로 진행을 한다.

5부에서는 절대적인 속도로 진행을 한다.

윤리학 5부를 특히 주석까지 포함해서 어려워한다. 이상한 표현도 많이 나오고 4부의 내용과도 안 맞음. 4부까지는 신은 자연이다, 신즉자연. 근데 5부는 마치... 신학이 다시 도입되는 것처럼 스피노자가 말한다. 신의 사랑, 영광에 대해 말하고. 갑자기 왜 이런 말이 쏟아지지? 싶은 것들. 논의도 급격하고. 그래서 들뢰즈가 그렇게 말함. (근데 그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들뢰즈가 조금 오래 살았더라면 더 깊은 논의가 되었을 텐데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

오늘도 저녁에 빈야사 요가를 하고 왔다. 요가를 시작한 첫주, 둘째주는 오히려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얼마든지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에 비해 셋째주, 넷째주는 한결 요가가 더 어렵게 느껴졌다. 전자 때는 요가를 호흡과 동작 따라가는 정도로 익혔고(계속 이렇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후자 때는 지금 하고 있는 호흡과 동작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더, 좀 더, 더더더, 하면서 최대치로 몸을 늘리거나 써야할 근육을 쓰거나 버틸대로 버텨보거나 하다보니 생긴 일인 것 같다. 요가가 참 재미있는게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동작을 하고 있어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천차만별로 다를 수 있다. 누군가는 최대의 힘을 뽑아내서 헉헉거리며 풀가동하고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힘을 아끼고 덜 쓰고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이미 숙련자라 필요한 힘만 딱 쓰면서 수월하게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셋째주의 어느 시간부터 더더더를 향해 몸이 알아서 힘을 주기 시작했고, 넷째주의 어느 시간부터 힘을 줘야할 곳에 힘을 주고 힘을 빼야할 곳에 힘을 빼는 것에 신경을 쓰게 됐다. 앞으로도 하나둘씩 몸이 느끼는 것들이 다이나믹하게 변하겠지? 한결 힘들어졌지만 한결 재미있어졌다다. 3월부터는 요가 선생님이 한번 해봐도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 아쉬탕가에 도전해볼 생각이다. 안 그래도 가장 궁금했던 요가라 좀 설렌다. 


*

페미니즘을 전혀 몰랐던 때로, 아니, 아무 것도 몰랐던 때로 돌아가고 싶은 어린애 같은 욕망을 강하게 느꼈던 2월이었다. 스피노자가 들으면 기절할 이야기지만 1종의 인식에 머무른채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는 환상이 영원히 깨지지 않는다면 그게 가장 행복한 삶 아닐까. 1종에서 2종으로 넘어가며 좀 더 정교하게 세상을 알 뿐인데도 이렇게 많은 세상의 삐뚤어지고 썪은 부분들이 눈에 보이고 마음을 다치게 하는데 말이다. 3종의 인식으로까지 넘어가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걸까. 겨울소풍 때 만났던 친구들이 "요즘 같은 세상에 가장 유해한 건, 못된 폭군도 아니고 해맑고 순박하고 착한 나이브한 사람들이야!"라며 몸서리를 쳤는데 나도 거기에 너무나도 동의하면서도, 사실 나는 그런 해맑고 순박하고 착한 나이브한 사람들이 부럽다. 아무 것도 모르고 가부장제 안에서 자본주의 안에서 마냥 행복하고 즐거울 수만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광신도들. 이도저도 아닐 바에는 분열을 그만 겪고 그냥 그런 선의의 방관자로 세상에 해악을 끼치든 말든 행복하게 살면 좋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페미니즘적 시각이나 젠더감수성이 결여된 채 세상을 분석하고 세상을 공부하고 세상을 다 안다는 양 목소리 내는 사람들에게는 화가 난다. 그렇게 아무리 공부해봐야 젠더이슈를 빼놓고는 1종의 인식에 그칠 수 밖에 없을 거라고.


*

마음이 무척 힘들어 무기력하게 보냈는데 그래도 세로토닌의 그 날 이후 다시 좀 평온을 찾았다. 오늘은 2주 동안 열지 않았던 파일을 다시 열어서 원고도 썼어! 


*

홍대에 살 때는 맛있는 원두가 떨어질 사이가 없었는데 이사 온 동네는 다 좋은데 맛있는 원두를 파는 곳이 없다. 겨울소풍 때 친구가 내가 너무 좋아하는 카페 동경에서 원두를 사다줘서 기뻤어ㅠㅠ 그 기념으로 달초에 ㅎㅇ님께 선물받았던 아이코닉 세이렌 머그를 꺼냈다. 내가 불매를 하려고 노력하는 곳들- 대표적으로 남양, 농심, 삼성 등등(하지만 최근에 파격 할인에 넘어가서 노트북을 삼성에서 사고야 말았지ㅠㅠ)-이 몇 군데 있는데 스타벅스만큼은 참 그게 안 된다. 기프티콘이나 굿즈 선물 받을 일이 많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한국에 아직 스타벅스가 들어오기도 전에 미국에서 공부할 때 가장 위안이 되었던 장소라서 세이렌만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걸 어쩔 수가 없다. 





*

3월은 3월대로 바쁠 예정이다. 몇 시간 후면 3월이네. 3월은 즐겁게, 무엇보다 단단하게 보낼 수 있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원래도 김어준과 김어준 패거리들에 질색해왔지만 그전까지 양아치들이라고 생각해왔다면 요 며칠은 인간인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해일 몰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 정서에서 아무런 발전도 없으며, 나꼼수 때도 보여준 젠더 감수성 제로(그 끔찍했던 "정봉주 감옥에서 요즘 성욕감퇴제 먹고 있으니 응원차원에서 가슴사진 좀..."으로 시작된 가슴 응원, 아 씨 지금도 욕나오네ㅋㅋ)에서도 발전이 없고, 솔직히 성폭력적 문화를 '' 혹은 '솔직한 담론'으로 미화시키며 빠르게 전파하는 데에 딴지일보가 그 초석을 화려하게 깔아준 것에 대해 책임 역시 매우 큰 사람들이 저런 소리나 하고 있다 진짜. 나도 저런 태도는 결국에는 '의지박약'이라고 생각하며, 더 나아가서는 찔려서? 나꼼수 부리고 있는 건 아닌지도 의심된다. 그렇게 정치적 공작에 이용될까 우려되면 니들끼리 자정해서 걸러낼 사람 걸러내서 이용될 거리를 없애면 되잖아. 그러면 남아날 사람이 거의 없을까봐 그렇게는 못하는 걸까?(진보권 좌파 세계에서도 성폭력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할 의지도 마음도 없으면서 많은 피해자들이 인생을 걸고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는 미투운동을 두고 저런 한가하고 속 들여다보이는 소리나 하고 있다니. 정치적 공작에 이용되지 않게 너희들이 알아서 잘하라고.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 페북에 저렇게 글을 올렸더니 분노의 덧글이 여러 개 달렸는데 그 중 한 분이 "이미 해일이 덮쳤는데.. 해일이 오고 있다는 그 상황 인식이 어이가 없어요... 그리고 김어준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비판을 난독증이라며 반박하는 난독증, 맥락맹이 너무 한심해요... 속이 터져요..."라고 다신 걸 보고 잠깐 생각했다. 그래, 김어준/패거리를 추종하거나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런 식의 비판이 있으면 늘 비판의 상대방을 "난독증" "맥락맹"이라고 몰아 부치는 걸로 유난한데 왜 그럴까에 대한 생각. 김어준류가 항상 취하는, 너희들은 미처 생각도 해보지 못한 뒷얘기를 해주마(<더 플랜>같은 음모론), 너희들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큰 그림'을 그려주마 같은 방식이 사람들의 어떤 취약하고(간절히 믿고 싶은 걸 믿고 싶은) 그래서 허영을 자극하는('큰 그림 그리는 사람'에 속하고 싶은) 마음을 건드려서 잘 먹히는 거 아닐까. 그러니 그걸 비판하는 사람들은 전부 뒷 얘기 생각도 못 하고 큰 그림 못 그리는 난독증/맥락맹으로 보이는 거겠지. 아오 그 놈의 큰 그림지겨워 죽겠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