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1 사유는 신의 속성이다. 또는 신은 사유하는 실재다

정리2 연장은 신의 속성이다. 또는 신은 연장되는 실재다

 

- 1부에서 신이 무엇인지 이야기했고 2부 서문에서 신에게서 필연적으로 따라 나와야 하는 것을 설명하겠다, ’모두가 아니라 인간 정신 및 지복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들, 이라고 에티카에서 논의할 대상을 한정했다. 한정 -> ”인간에 관한 것 -> 그래서 정리1과 정리2에서 딱 (인간이 지각 가능한) 연장과 사유에 대해서만 말한다.

- 스피노자는 속성개념을 아주 제한적으로 쓴다. 속성이랑 구별해서 쓰는 것이 특성. 스피노자에게 속성이란, 신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 , 본질. / 특성이란 본질에서 따라 나오는 그 사물의 고유한 성질을 말한다. 신의 본질로서의 속성에는 사유와 연장, 신의 본질로서의 특성에는 자기원인, 무한성, 유일성 등이 있다.

- 스피노자가 속성, 특성 이외에 또 이야기한 다른 한 가지: 상상적인 성질

* 2부 정리3의 주석에 상상적 투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은 자비롭다같은, 인간이 인간의 특성을 신에게 투사하는 것.

 

- 정리1사유는 신의 속성이다“= ”사유는 신의 본질이다같은 뜻이다

정리2의 연장은 신의 속성이다= 연장은 신의 본질이다.

- 1부 정리13 따름정리에서 연장속성/사유속성을 신의 속성으로 일치시키는 것이 매우 대담한 주장이라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었다.

 

* 정리1의 증명:

- 자연 안에 실존하는 모든 것은 그로부터 무언가가 따라 나올 수 있는 원인들을 갖고 있다. ,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갖고 있다. ?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신을 표현하니까.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신을 표현한다 = 신의 역량을 표현한다

- 양태를 양태로서 존재하게 성립하게 해주는 것= 속성.

양태가 다른 것 안에있다에서 다른 것“= 속성

- ”무한하게 많은 것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 존재자는 그 사유역량에 의해 필연적으로 무한하다“ => 어떤 사유든지 바로 이 사유라는 속성에 의해 가능하다.

 

- 1부 정리14의 따름정리2에서 연장되는 실재와 사고하는 실재신의 속성들이든가 아니면 (공리1에 의해) 신의 속성들의 변용들이라고 말함으로써 변용이 아닌 속성으로서의 연장되는 실재와 사유하는 실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 바 있지만, 신의 속성은 2부 정리1과 정리2에서 처음으로 제시된다.

- 정리1의 증명은 후험적 증명, 주석은 선험적 증명

 

* 선험적 a priori 아프리오리. (priori 앞서서)

- 선험적 인식: 굳이 경험을 통해 직접 체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지식. 칸트는 이 특징이 보편성이고 필연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수학적 진리, 논리학적 법칙들, 이런 것들이 선험적 인식에 해당한다고 본다.

- 선험적 증명: 원인이나 근거에서 출발하여 경험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

 

* 후험적 a posteriori 아포스테리오리. (posterior 나중에)

- 후험적 증명: 경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이런저런 개별적인 사물, 개별적인 생각)에서 출발하여 그것들의 원인이나 근거가 되는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 1부 정리11 다른 식의 증명. 유한한 존재자들= 나 자신. 증명을 여기서 시작한다. 내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실존하는데 무한한 존재자가 왜 실존을 못하는가? 유한-> 무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경험적으로 지각하기 쉬운 데에서 시작하니까 이해하기 쉽다

 

- 주의할 점: 칸트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transzendental 개념이다. 이 개념이 종종 선험적이라고 번역되기 때문에 a priori와 혼동을 빚는 일이 벌어진다. 전자를 선험적으로 번역할 경우에 후자는 선천적이라고 번역된다. 역시 혼란스러운 번역이다. 다행히 최근에는 주로 초월적이라는 번역어나 초월론적이라는 번역어로 옮겨지는데 이 번역이 원래의 뜻에 더 가깝고 혼동을 피할 수 있어 더 낫다고 생각한다.

- 이게 다 칸트 연구자들 때문이다. 칸트 연구자들은 대체 왜 저렇게 원래의 뜻과 맞지 않는 선험적이라는 번역을 하는 것일까? 우리나라 칸트 연구는 대부분 그대로 일본에서 다 가져왔기 때문이다. 일본식 용어를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 더구나 칸트는 이 두 단어를 자주 같이 쓴다. 그래서 더욱 혼란이 빚어진다. transzendental 철학 자체가 a priori한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분석하기 위한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헷갈린다.

 

* 초월론적/ 초월범주

 

- 스피노자도 이 transzendental이라는 말을 쓴다. 에티카에 딱 한 번 나온다. 2부 정리40의 주석1. 하지만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을 누락하지 않기 위해 나는 존재자, 실재, 어떤 것과 같이 초월적이라고 불리는 용어들 termini transcendentales dicti“

- 초월적 언어란 중세철학에서 매우 자주 쓰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이라는 책 이래로 서양철학에서 제일 중요한 파트 중에 하나인 범주론. 범주론은, 기본적인 개념, 우리가 사고하고 대화할 때 기본이 되는 개념을 말한다. 그러니까 범주를 다른 말로 하면 근간이 되는 개념/ 기초적인 개념.

- 그런데 이 중세철학이나 신학에서 쓰이는 초월적 언어는 기본적인 개념으로서의 범주보다 더 일반적이고 더 기본적인 용어들을 말한다. 범주를 초월하는. 이를테면 존재자, 실재, 어떤 것, 일자, . 이 얼마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단어들인가. 존재자만 해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것이니까.

- 즉 초월범주란 범주를 넘어서 범주보다 더 일반적인 것. 일반적인 범주를 초월해서 더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것. (굉장히 아이러니하기도 한 재밌는 작명이다ㅋㅋ 일반적인 걸 초월해서 독특해지는 게 아니라 일반적인 걸 일반적인 degree를 초월해서 더더 일반적인 것이 되다니...)

- 스피노자는 이 초월범주에 대해 매우 신랄하게 비판했다. 초월범주라는 것은 사실 아주 부적합하고 혼동된 용어라고.

 

* 칸트 철학에서 tranzendental은 두 가지 기본적 의미를 가진다

 

1) 가능성의 조건

 

- 가장 일반적인 뜻. 칸트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다른 철학자들도 transcendental을 쓸 때는 가능성의 조건/근거라는 의미로 가장 많이 쓴다. 이를테면 데리다의 초월론적 기의 transcendental signified‘. 데리다가 초월론적 기의라고 말하는 것은 신이라든가 기원이라든가 옛날의 형이상학에서 만물의 근원이 된다, 토대가 된다라고 생각했던 것들이다(초월적인 기의 transcendental signified가 존재하지 않으며, 의미화의 영역과 유희는 끝이 없다고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기의라는 단어 자체의 개념조차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칸트 이전의 다른 철학자들, 특히 중세철학에서 우주의 근거는 신이었다. 스피노자가 정리1에서 사유가 신의 속성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증명에서 이러저러한 개별적인 생각들은 양태이며, 양태들이 가능하기 위한 근거는 속성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속성은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 이게 바로 가능성의 근거라는 말의 전통적인 용법이다.

- 그런데 칸트는 다르게 말한다. ’칸트가 철학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했다고 말하는 이유이자 칸트 철학이 특별한 이유다. 그는 우리 인식과 진리의 근거가 우리 주관 바깥의 객관적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우리의 인식이 주관 바깥에 있는 객관 세계의 근거를 이룬다고 말한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예전에는 우리의 인식이나 진리의 근거가 우리 바깥의 객관적인 실체 안에 있다고 봤는데, 칸트는 이것을 부정한 것이다. 우리의 인식이나 객관세계의 근거는 우리의 주관 안에 있다고. 그러니까 우리의 주관이야말로 외부 세계나 우리 인식의 근거를 이룬다는 것이 칸트 철학의 핵심이다.

- 칸트가 transzendental이라고 말했을 때, 그 가능성의 조건을 칸트는 우리의 주관, 우리 주관 안에 내재해있는 선험적인 인식의 틀, 경험적인 틀에서 찾았던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도 역시 객관적이고 자연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을 인식하는 감성의 형식이라고 말한다. 앞에서 범주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가 사물을 사유하고 추론하고 인식하기 위한 제일 기본적인 개념들도 우리의 주관에 내재해있는 인식의 틀이라는 이야기다. 이게 칸트의 transzendental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다.

- , 사유 인식의 존재의 근거를 우리 주관 외부에서 찾지 않고 우리 주관 내부에 내재해있다고 보고, 인식의 근거,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우리 내부에서 찾자고 하는 것이 바로 칸트의 transzendental 철학. 초월론적 철학.

- transzendent 철학은 외부에서 객관적인 세계에서 근거를 찾는 것(가령 신이라거나) transzendental 철학은 내부에서 찾는 것. 가능성을 내부에서 찾는 것.

- <순수이성비판>에서 초월()이라는 말은, 우리의 인식(경험)의 조건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간 같은 감성의 형식 및 우리의 사유 범주들과 같은 지성의 형식, 그리고 초월()적 주체가 바로 우리의 인식(경험)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2)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탐구: 이러한 인식(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대한 탐구를 칸트는 초월()적 철학이라고 부른다.

 

*** 강의와 연관해서의 결론: 그러니까 transzendentala priori는 상당히 다른 의미라는 것을 꼭 염두에 두자

 

* 그럼 칸트와 스피노자를 비교한다면?

- 1부 정의4를 보면서 속성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A. 주관적 해석론

헤겔에서 유래한 이 관점. 정의4에서 지성이 지각하는이라는 구절을 주목. 이 구절이 속성이 실체의 객관적 본질이 아니라 인간지성이 실체를 파악하는 하나의 관점이라는 점을 말해준다고 간주한다. 20세기 전반까지 이 관점에 대한 상당수의 지지자들이 존재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스피노자가 속성과 특성, 상상적 성질 등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이유를 해명하지 못함. 이 관점에 따를 경우 속성자체가 이미 주관적인 성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는 스피노자가 속성들을 실체의 객관적 본질로 제시하는 다른 구절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1부 정리 19/ 두 번째, 네 번째 편지 등)

->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의 해석이 오늘날 속성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론의 시발점. 많이들 받아들였다.

 

- Harry Wolfson 울프슨의 주장: 스피노자 속성개념은 매우 주관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이건 중세유대사상에서 매우 유명하게 퍼져있던 개념이다. 이런 식이다. “이라는 절대자의 통일성을 생각해봤을 때. “속성은 실체의 본질, 즉 신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속성은 무한하게 많이 있다라고 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겠는가. 속성이 실체의 본질인데, 이 본질이 이렇게 무한하게 많다면 이게 어떻게 (유일자로서의) 신일 수가 있는가. , 신의 유일성 문제에 부딪히는 것이다. 울프슨의 주장은, 중세 유대신학에서는, “신은 초월적이라 신의 속성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초월자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파악하겠는가. 이미 인간의 능력치 바깥에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단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신이 이런 본질을 가졌을 거라고 단지 지각만 할 수 있다. , 객관적이지 않다. ”주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을 뿐이다. (중세유대신학과 스피노자철학을 비교하면서, 스피노자 철학이 중세유대신학에서 뻗어나왔다는 것을 전제로 한 주장)

 

- 20세기 전반까지 해서 헤겔 + 울프슨의 주관적 해석론을 학계에서 대세로 수용.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러한 주관적 해석론은 거의 사라지고 객관적 해석론이 대세가 되었다. 왜냐면 스피노자 텍스트를 고려해보면 그가 실제로 속성과 실체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는 것이 여러 텍스트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속성이 객관적으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254p에도 나와 있다.

 

B. 객관적 해석론

20세기 후반 이후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속성을 실체의 객관적 본질로 파악하고 있음. 마샬 게루/ 질 들뢰즈/ 피에르 마슈레/ 에드윈 컬리 등 <- 스피노자 연구의 대가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왜 속성에 대한 정의에 지성이 지각하는이라는 규정이 나와있는지 더 설명해주어야 한다. (지성이 지각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냐? <- 이에 대한 답은 2부 정리 7 주석)

더 나아가 속성이 실체의 객관적 본질을 구성하고 속성들이 하나가 아니라 다수, 더 나아가 무한하게 많이 존재한다면, 무한하게 많은 본질을 가지는 실체가 어떻게 유일한지, 어떻게 통일성을 가지는지 설명해주어야 함. <- 그래서 최근 2-3년간 다시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주관적 해석론>을 복원하려는 움직임. (아래 객관적해석론을 펼치는 주장을 보고 정리해본다면, 그 무한하게 많은 본질이 -> 하나의 유일한 실체로 수렴되고(그러니 그 무한한 본질 자체가 이미 유일함으로 수렴), 이 실체가 때로는 이 속성으로 때로는 저 속성으로 때로는 무한한 속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라는 이야기인 듯. 비유를 하자면 무한까지는 아니지만 무수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라는 하나의 인간이 때로는 이 상황에서는 이 속성으로 저 상황에서는 저 속성으로 다채롭게 표현되지만 결국은 는 유일하다는 그런 것과 비슷한 것)

 

*** 마샬 게루(20세기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1부 정의 4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 2부 정리7의 주석 곧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사유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연장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 스피노자가 말한 지성은 인간 지성이 아니라 신의 지성이다. , 객관적 지성이다. 그러므로 객관적 해석론이 옳다. 저 구절이 객관적 해석론자들이 많이 근거 삼는 지점

 

C. 칸트의 경우

 

칸트: “속성이란 물자체다. 하지만 우리는 물 자체를 알 수 없다. 현상만 알 수 있다를 참고하면, 우리는 속성을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인간 지성이 지각하는 대로만 이해할 수 있다. , 속성이란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지성이 주관적으로 투사하는 것 <- 속성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론.

 

하지만 스피노자의 속성을 객관주의적 해석론으로 받아들이면, 칸트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칸트는 물 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고 했고, 현상만 인식할 수 있다고 했지만, 스피노자는 NO! 물 자체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생각했는데 20세기 와서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속성을 객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 근데 최근에는 여기에 대한 반론이 나와서, 주관주의적 해석론을 복원시키자는 움직이기 일어서 다시 논쟁 중)

 

- 속성의 주관적 해석론을 따르는 사람은 칸트적 해석을 따라는 것이다.

- , 우리의 지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하는 것.

- 속성이라는 것을 지성이 세계를 지각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틀이라고 본다면, 칸트식으로 이야기하면 이것은 범주가 될 수도 있고 시공간과 같은 감성의 형식이 될 수도 있다. 이런점에서 보면 스피노자 철학은 칸트와 아주 대조적이다. 실제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보면 칸트는 스피노자를 대표적인 교조주의적인 철학자로 본다.

- 하지만 스피노자가 속성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성이 그렇다고 지각하는 것이라고 보게 되면, 이건 칸트식의 범주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와 칸트는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객관적해석론과 주관적해석론에 따른 입장이 칸트와 스피노자를 대조적으로 보느냐 비슷하게 보느냐를 좌우)

 

* 칸트용법 중 감성의 형식에서의 감성직관과 같은 것으로 보면 된다. , 범주는 지성, 지적인 추론, 인식의 틀이고, 직관은 감성의 틀인. 칸트는 우리가 하는 감각적인 경험, 감각하는 자료들을 직관이라고 본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직관과는 상당히 다르다.

 

* 다시 2부 정리1의 주석으로 돌아가면-

 

- 스피노자가 2부 정리1의 증명에서는 독특한 사유, 이러저러한 생각에서 출발해서 사유속성으로 진행을 해간다면, 정리1의 주석에서는 아프리오리의 방식으로 증명을 시도하고 있다.

- ”무한한 사유하는 존재자“- 증명의 마지막에 나온 문장인데, 주석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

- 이 정리는 또한 우리가 무한한 사유하는 존재자를 인식할 수 있다는 점으로부터 명백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정확히 말해 논증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인 자명함을 제시하는 명제.

 

- 이 명제 다음에 나오는 논증은 이러한 자명성을 부여하는 논증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우리가 무한한 사유하는 존재자를 인식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1부 정리9에서 다루었던 명제다. 각각의 실재가 더 많은 실재성이나 존재를 지닐수록 그 실재에는 더 많은 속성들이 귀속된다이러한 명제 자체에는 숨은 공리가 있다. 그것은 무는 특성들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서부터 가장 완전한 존재자또는 절대적인 존재자에 이르기까지 실재성이나 완전성의 정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 2부 정의6도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어떤 사유하는 존재자가 더 많은 것을 사유할 수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그 사유하는 존재자가 더 많은 실재성 또는 완전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다.

- 그렇다면 무한한 사유하는 존재자무한하게 많은 것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 존재자그 사유 역량(virtue)에 의해 필연적으로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 여기서 역량을 포텐시아라고 하지 않고 vitrue, virtus 비르투스라고 한 것이 흥미롭다.

- 영어 virtue에는 라틴어 virtus에 들어있는 중요한 뜻이 빠져있다. 라틴어 vir라는 어근은 vis에서 나온 말인데 이 vis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비르투스에는 이미 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어에는 vir라는 어근이 담고 있는 이라는 의미가 탈락하고 도덕이라는 뜻만 남게 됐다.

- 마키아벨리 <군주론>에 대비되는 두 가지 개념이 나온다. virtu하고 fortuna.

- virtu 비르투라는 말은 비르투스의 이탈리아어. 포르투나는 우연, 운이라는 의미고 우연히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여건을 말한다. 마키아벨리는 이 두 가지를 정치, 역사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힘이라고 말한다.

- 한국에 대입시켜본다면 비르투는 촛불, 태극기ㅋㅋ 같은 것이고 포르투나는 러시아나 일본, 중국 같은 외부 세력.

- 마키아벨리의 비르투를 우리말로 역량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 스피노자가 여기서 쓴 비르투스는 이라기보다는 사유가 자신의 본성으로 인해 갖게 되는 힘, 역량을 표현하는 말이다.

- 4부 정의8. ”나는 덕(virtus)과 역량을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서는 virtus이라고 번역했다. 4부가 주로 윤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1차적인 뜻으로 했는데, 이 말이 딱 맞는 말이다. 비르투스는 포텐시아다. 그런데 이것을 역량이라고 번역하면 역량은 역량이다라는 동어반복이 되는데, 어쨌든 뜻은 그렇다. 비르투스와 포텐시아는 같은 말이라는 이야기.

 

* 2부 정리1,2가 속성(신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라면

2부 정리3,4는 직접적 무한양태에 대한 이야기다.

- 사유속성의 직접적 무한양태: 무한지성

연장속성의 직접적 무한양태: 운동과 정지

연장속성의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 전체의 모습

- 1부 정리16무한지성이 최초로 등장한다. 신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무한하게 많은 것들(곧 무한 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와야 한다.“

- 1부 정리30 현행적인 유한 지성이든 현행적인 무한 지성이든 간에, 지성은 신의 속성들 및 신의 변용들을 파악해야 하며,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파악하지 않는다.“

- 1부 정리17에서 정리33까지 이야기하면서 신과 관련한 스피노자의 독특한 점은 무한 지성과 의지를 신의 본질로 간주하지 않고 무한양태로 간주한 점이다.

 

정리3 ”신 안에는 필연적으로 신의 본질 및 그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에 대한 관념이 존재한다

 

* 정리3의 증명.

- 자신의 본질 및 그것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에 대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다 <- 신학으로 말하자면, 전제한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정도의 의미.

신의 권능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 = 신의 능력을 갖고 있는 모든 것

 

* 정리3의 주석

 

우중들은 신의 포테스타스를 포텐시아라고 오해한다.

- 곧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신이 자기 자신을 이해한다는 점이 따라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이 자기 자신을 이해한다 understand himself 또는 인식한다는 것은 논리적 필연성을 지칭한다. 곧 어떤 사물의 정의에서 그 정의가 논리적으로 포함하는 특성들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듯이(스피노자에게 definition이란 어떤 사물의 본질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은 그 본성에 의해 규정된 바에 따라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행위한다는 것을 의미.

- 스피노자는 1부 정리16의 증명에서 어떤 실재의 정의가 주어져 있을 때 지성은 그로부터 다수의 특성들을 도출해내는데, 그것들은 사실 그로부터(곧 실재의 본질 자체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며, 실재의 정의가 더 많은 실재성을 표현할수록, 곧 실재의 본질이 더 많은 실재성을 함축할수록 더 많은 특성들이 따라 나온다.“

 

- ”1부 정리34에서 우리는 신의 역량은 신의 활동적 본질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었으며 따라서 우리에게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식하는 것만큼이나 신이 행위하지 않는다고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부 정리34 신의 역량은 신의 본질 자체다“.

- 저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활동적 본질이라는 표현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본질은 잠재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 활동으로 필연적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행위하는 본질또는 행위로 표현되는 본질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 ”현행적 지성 intellectus actu / actual intellect) 이라는 표현: 스피노자는 정리31의 주석에서 자신이 현행적 지성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현행적 지성이라고 쓴 것은 잠재적 지성이라는 것의 존재를 인정해서가 아니다. 스피노자의 생각은 그와 정 반대다. 그는 오히려 잠재적 지성’, 실행되지 않고 있는 지적인 능력 faculty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실행되고 있는 지성의 활동으로서 현행적 지성이야말로 바로 지성활동그 자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 현행적 지성과 잠재적 지성

- 스콜라 철학에서는 현행적 지성의 반대말로 잠재적 지성을 말한다. ‘현행적 지성이라는 말은 원래 뜻대로 하면 지금 실행되고 있는 지성이고, 잠재적 지성은 지금 실행되고 있지는 않지만 지성의 본성을 갖는 것을 말한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대그리스 학파와의 논쟁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들이 일을 하지 않는 목수가 왜 목수인가. 지금 목수일을 하지 않는데? 집이라도 짓고 일을 해야 목수지.“라는 재미있는 의문을 제기하는데, 여기에 답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로 이걸 구분한다. 잠재태와 현행태. 잠재적인 것과 현행적인 것. 지금 비 오고 있는데 무슨 집을 져. 쉬어야지. 근데 쉰다고 해서 목수가 아닌가. 아니다, 목수다. 지금 발휘되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은 쉬고 있지만 잠재적인 능력은 계속 존재하는 것. 잠재태. 가능태. 이걸 사람의 인식과 관련해서 보는 보면-

 

*** faculty 라틴어로 하면 facultas 파쿨타스.

 

- 우리말로 보통 능력이라고 하기도 하고 직능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

- 서양의 인식론은 보통 faculty와 관련된 faculty psychology 라는 개념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플라톤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에서 사람의 정신이라는 것이 몇 개의 faculty로 나누어져 있다고 보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의 정신 중에는 욕망을 담당하는 faculty가 있고, 이성적 능력 지적인 능력만 담당하는 faculty가 있고, 어떤 부분은 의지라는 정신의 활동을 전담하는 faculty가 있다는. 이성의 파쿨타스, 감각 또는 상상의 파쿨타스, 의지의 파쿨타스. 이런 개념.

- 플라톤의 <대화>를 보면 그것을 마차와 말의 관계로 표현한다. 말이 있는데 하나는 말을 잘 듣고 하나는 자기 멋대로 날뛰고, 후자의 말이 욕망이고.

 

- 스피노자는 이 파쿨타스라는 개념을 굉장히 싫어한다. 2부에서 보게 되겠지만 우리의 정신이 몇 개의 파쿨타스로 구별되어 있다는 이 개념을 부정한다. 정신은 이런 게 아니다. 스피노자가 주석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내가 현행적 지성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어떤 잠재적 지성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작용하고 있지 않지만 지성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잠재된 게 있다고 생각해서 현행적 지성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다. 내가 볼 때 지성이라고 하는 것은 실행되고 있는 지적인 활동, 그게 바로 지성이다. 실행되지 않고 있는 지성 이런 것은 없다. 실행되지 않고 나중에 작용하려고 지금은 쉬고 있는 지성, 이런 것은 없다. 지성이라는 것은 항상 작용 중에 있고 작용 중에 있는 것이 바로 진짜 지성이다. 현행적 지성이야말로 지성 그 자체다.

 

- 존재하는 것은 항상 현실태로만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목수가 목수로 존재하려면 365일 내내 집만 져야 한다, 자고 있는게 무슨 목수냐. ”앉아있는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가 아니다“. 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이 비가 와서 쉴 때도 있지만 가지고 있는 잠재태. 가능태. potential potentia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않은 잠재적인 능력. , 능력이 때로는 actualize되지만 포텐셜 상태로 있을 때도 있다는 이야기다.

- 그러나 신의 본질 자체는 신의 포텐셜리티가 실현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게 아니라 신의 포텐셜리티는 필연적으로 actualize된다는 것이다.

- 신에게는 발휘되지 않은 여운의 능력이란 없다. 잔여를 남기지 않고 모두가 actualize. 가능태 현실태 구별을 할 수가 없는 것.

 

- 그러니까 저 앞의 활동적 본질은 풀어서 말하면, 행위로 다 표현되는 본질을 말한다.

- 저들처럼 신의 역량을 자유의지에 따라 행사되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은, 인간적인 이해방식일 뿐만 아니라, 신의 역량을 무기력 impotentia’로 이해하는 것이다.

- 신은 자신의 역량, 곧 자신의 본질을 필연적으로 행사하며 이것이 신의 본질 자체이지만, 인간의 경우는 자신의 역량을 온전히 필연적으로 행사하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의 유한성과 수동성의 존재론적 뿌리다. 따라서 신의 역량을 자유의지에 입각하여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모델에 기초하여 신을 이해하는 것(신인동형론)일 뿐만 아니라, 신이 자신의 본질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무기력한 존재자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 우리가 보통 능력이라는 말을 쓸 때 그 능력은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이해된 능력이다. 완전히 actualized 되지 않는, 무언가 잠재된 여분이 남아있는 것으로서의 능력.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역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1부 정리35 우리가 신의 권능potestas 안에 존재한다고[신의 권능에 달려 있다고] 인식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때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능력이라는 의미로 이해를 한다면, 스피노자가 여기서 이 능력이라는 말의 의미를 뒤집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능력이라는 말은 실현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고, 좀 더 잘 할 수도 있고 좀 덜 잘 할 수도 있는 것인데, 1부 정리35에서 스피노자는 (신의) 포테스타스는 그렇게 실현되고 말고 덜 되고의 여지가 없이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라며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능력, 즉 역량으로 그 뜻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이해하면 그건 필연적인 역량으로서 포텐시아라는 말과도 다르지 않다.

- 그러니까 원래 있던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스피노자가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게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능력이라고, 포텐시아라고 의미를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 스피노자 철학 자체에서 보면 포테스타스라는 말과 포텐시아라는 말은 같은 의미다. 그런데 어떤 신학자들이나 불구스들 같은 경우에는 자유의지에 따르는 능력하고 이것으로 이해를 한다는 것. 스피노자는 자유의지에 따라 실행되고 실행되지 않는 능력의 여지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포테스타스와 포텐시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유의지에 따른 능력, 무엇을 할 수 있는 권능,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둘 다 필연적인 능력으로서의 포텐시아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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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달이 참 예뻤다. 적당히 크고 환하고 살짝 붉은기가 돌았다. 버스정류장에서 달을 물끄러미 보면서 오늘 있었던 모종의 작은 사건과 관련해서 지인이라고 하기에도 매우 먼 사이지만 꽤 신뢰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몇 년째 겪었고 앞으로도 겪을 어떤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진실은 때로 너무나 달 같다. 우리는 달이 빛을 내지 못하고, 달이 스스로 움직이는게 아니며, 달의 모양이 실제로 변해가는 게 아니라는 과학적 진실을 잘 알고 있지만, 달을 볼 때 그 진실을 일일이 떠올리지는 않는다.

 

달을 보자마자 무심코 하는 생각은 달이 환하네, 달이 동그래졌네, 달이 이울었네, 달이 크네, 달이 떴네, 같은 것들. 과학적 진실은 미량의 능동적 에너지를 들여 '굳이' 떠올리려고 할 때서야 떠오른다. 그리고 전자가 더 낭만적이잖아. 그에 비해 진실은 건조하며 직관적으로 눈에 확 들어오지도 않는다.

 

직관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감각과, 가장 편하고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떨치고 진실을 떠올리는건 '굳이' 해야하는 일이다. 달의 경우야 명백하게 밝혀진 과학적 근거라도 있지, 레퍼런스도 변변히 없는 진실은 낭만적 거짓에 가려 구전으로만 근근이 전해지다가 금세 흩어져 여기저기 구멍만 뚫린 채 빛도 발하지 못한다. '진짜' 달처럼. 누군가 굳이 빛을 비춰주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진실은 때로 너무나 달 같고 무력하고 쓸쓸해



- 오래 전의 일기 (feat. 스피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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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예전에 썼던 글과 2부 정리35의 주석의 내용이 너무나 비슷해서 반가우면서도 깜짝 놀랐다. 역시 아주 가끔씩 보면 사람 생각하는 건 비슷비슷하다. 근대의 사람이든 현대의 사람이든.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지성적인 철학자든 불구스든. 줄여서 태양 200걸음 이론으로 나 혼자 부르고 있는 정리35의 주석과 비슷하다는 나의 예전 글.

 

어젯밤 달이 참 예뻤다. 적당히 크고 환하고 살짝 붉은기가 돌았다. 버스정류장에서 달을 물끄러미 보면서 오늘 있었던 모종의 작은 사건과 관련해서 지인이라고 하기에도 매우 먼 사이지만 꽤 신뢰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몇 년째 겪었고 앞으로도 겪을 어떤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진실은 때로 너무나 달 같다. 우리는 달이 빛을 내지 못하고, 달이 스스로 움직이는게 아니며, 달의 모양이 실제로 변해가는 게 아니라는 과학적 진실을 잘 알고 있지만, 달을 볼 때 그 진실을 일일이 떠올리지는 않는다.

 

달을 보자마자 무심코 하는 생각은 달이 환하네, 달이 동그래졌네, 달이 이울었네, 달이 크네, 달이 떴네, 같은 것들. 과학적 진실은 미량의 능동적 에너지를 들여 '굳이' 떠올리려고 할 때서야 떠오른다. 그리고 전자가 더 낭만적이잖아. 그에 비해 진실은 건조하며 직관적으로 눈에 확 들어오지도 않는다.

 

직관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감각과, 가장 편하고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떨치고 진실을 떠올리는건 '굳이' 해야하는 일이다. 달의 경우야 명백하게 밝혀진 과학적 근거라도 있지, 레퍼런스도 변변히 없는 진실은 낭만적 거짓에 가려 구전으로만 근근이 전해지다가 금세 흩어져 여기저기 구멍만 뚫린 채 빛도 발하지 못한다. '진짜' 달처럼. 누군가 굳이 빛을 비춰주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진실은 때로 너무나 달 같고 무력하고 쓸쓸해.“

 

* 2부 정리35의 주석 마찬가지로 태양을 바라볼 때 우리는 태양이 우리로부터 200걸음 떨어져 있다고 상상하는데, 이것의 오류는 단순히 이러한 상상에 있는 게 아니라, 이처럼 상상하는 동안 우리가 그것의 실제 거리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이렇게 상상하는 원인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왜냐하면 비록 나중에 태양이 지구 지름의 600배 이상이나 우리에게서 떨어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우리는 계속 태양이 우리와 가까이 있다고 상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양을 그처럼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의 실제 거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신체 자체가 태양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 우리 신체의 변용이 태양의 본질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2. 후설의 생활세계. 스피노자의 상상생활세계인 것은 확실히 전환이다. 우리의 인식의 조건이 생활세계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면서도, 그 생활세계로서의 상상에서 출발하는 것. 상상은 그릇된 인식, 부적합한 인식이지만 사유활동의 조건, 전제라는 것. 어떻게 보면 상상은 인식의 부모 같은 것이잖아? 조건이자 전제로서의 출발점이지만 결국에는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 것. 넘어서야하는 것. 사유의 인식의 근간이 되는 첫 생활세계를 부모가 만들어놓는다는 점에서도. 하지만 이런 비유는 매우 좋지 않다. 부모가 존재하는 가족의 형태를 기본이고 일반적으로 전제 삼고 만들어내는 비유. 이것 역시 그릇된 인식 부적합한 인식이지만, 우리의 사유 활동의 조건, 전제가 되고 결국은 멀어져야 하는 것. 세상의 많은 클리셰들에게 우리는 빚을 지고 있고 또 멀어져야 할 의무도 있고.

 

그런 점에서 감정인식의 관계와도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 또한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감정에 치일 때 감정이란 게 없어졌으면 좋겠어“ ”감정 없이 살도록 노력하겠다고 하는데 사실 감정이 없으면 인식도 있을 수가 없다. 평소에 감정이 일상에 아무런 균열을 일으키지 않을 때는 감정의 존재를 모르고 살지만 나나 타인의 감정이 나를 힘들게 할 때서야 감정이 거추장스럽고 거대하게 다가와서 그렇지. 감정은 인식과 기억의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스피노자는 어떻게 생각할지 어떤 통찰을 보여줄지 3부가 기대된다.

 

-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이 후설이 말하는 생활세계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태양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는 것처럼 볼 수밖에 없고, 이렇게 보는 것이 사실은 우리가 외부대상을 인식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우리는 그 조건 속에서 외부대상을 지각하고, 인식하고, 또 교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다고 보는 상상은 그릇된 인식, 부적합한 인식이기 이전에 오히려 사유활동의 조건, 전제가 된다.

- 알튀세르는 자기가 이야기하는 이데올로기 개념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허위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이라고.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화폐개념에 대해서도 말한다. 화폐가 상품교환의 매체가 아니라 어떤 경제적인 활동의 조건 배경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 아무튼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상상개념이 그릇된 1종의 인식 이전에 생활세계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 이렇게 보면 스피노자에게 우리의 사유활동, 우리가 관념을 만들어내고 적합한 인식을 하고 2종의 인식과 3종의 인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상상적인 생활세계에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의 조건이 생활세계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지만, 동시에 2종의 인식이든 3종의 인식이든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은 생활세계로서의 상상에서 출발하는 것.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상상이라는 것은 단지 1종의 인식, 부적합한 인식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식과 삶이 이루어지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 상상이라는 것은 초월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조건이라는 것.

 

3. ”빛이 자기 자신과 어둠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는 자기 자신과 거짓의 척도

 

* 정리43 참된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이 참된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실재의 진리에 대해 의심할 수 없다.“ 그러면서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를 한다. 빛이 자기 자신과 어둠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는 자기 자신과 거짓의 척도라는 점은 분명하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참된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참되다는 것을 알고 무엇이 거짓인지 참인지 다 알고 있다.

- 키에르 케고르가 이 말을 뒤집어서 이야기했다. ”거짓은 진리와 거짓을 지켰다또는 변형하자면 예외는 규칙과 예외의 척도다

- 칼 슈미트는 키에르 케고르의 이 말을 인용해서 이야기했다. ”주권자는 예외를 결정하는 사람이다예외를 결정하는 사람이 주권자다.

 

4.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따라 이것 또는 저것을 바라보도록 외적으로 규정되는 지각 방식으로 자연의 공통의 질서를 지각할 때.> 관념을 신의 관점에서 다 참된 관념이라고 규정해놓고 그 참된 관념의 덩어리에서 잘려나온조각조각을 우발적인 마주침으로 인식한다고 바라보는 것이 신선했다. 거대한 참된 관념이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데 지나가다가 우연히 부딪힌 접촉면을 보고 그것의 아주 작은 일부를 지각한다고 생각하니 참된 관념이 매우 내 가까이에 있는 느낌이라 정겨우면서도 너무나 거대하게 느껴져서 아득하다. 내 좁은 시야에 다 담아낼 수 있을까, 참된 관념으로부터 200걸음 떨어져 있으면 눈에 담길까. 전에 트위터에 스타벅스 이론을 적어서 많은 공감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스타벅스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 한토막, 누가 들어도 이건 A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게 틀림없지만 사실은 B였다는 작은 반전이 있는 글이었다. 그 글 아래 붙은 많은 글들을 하나하나 읽어보면 모두들 그런 일을 경험했고 모두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틀림없어 보이는 찰나의 대화로 찰나의 순간으로 무엇도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이건 추리게임입니다라고 누군가 선언하지 않는 이상 일상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잘려나가고 혼동된 인식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 또한 힘들다. 그래서 뭔가를 쉽게 유형화하는 사람을 경계한다. 침대는 프로크루스테스에게서 사지 말고 차라리 이케아에서.....

 

부적합한 관념이 거짓된 관념이 아니라는 것은 다행스러운 소식이기보다 불행한 소식이다. 어떤 사진을 놓고 이 사진이 합성이거나 조작된 사진이라는 것은 기술적인 눈을 가지고 있으면 알아볼 수 있고,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명료하게 밝혀낼 수 있다. 거짓은 거짓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무너뜨릴 수 있다, 상대적으로. 하지만 누군가 크롭해서 크기만 맞춘 사진을 보면서 이게 사실은 어떤 사진의 부분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상대적으로 훨씬 어렵다. 부분은 진실이 맞으니까 이것도 진실이라고 합리화하기도 쉽고, ’부분이 진실이면 그러면 됐지라고 나태해지기도 쉽다. 그릇된 것을 분별하는 것도 어렵지만 내가 보는 이것이 부분이라는 것을 분별하는 것은 그 부분에 진실이 섞여있다는 사실 때문에 분별해내는 데에 있어 더욱 정교하고 능동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거짓의 문제가 아닌 참-부분의 참의 문제는 더 복잡하니까.

 

잘려지고 혼동된 방식” : 정리40의 주석2. 스피노자가 부적합한 인식에 대해 말할 때 관용적으로 쓰는 표현이다. 이 말은 2부 정리29에서 유래하는데 인간 신체의 각각의 변용에 대한 관념의 관념은 인간 정신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함축하지 않는다 여기에 따라오는 따름정리가 중요하다. 이로부터 인간정신은 그것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신체에 대한, 그리고 외부 물체들에 대해사도 적합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단지 혼란스럽고 잘려나간 인식만을 가진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이게 바로 부적합한 인식을 갖게 되는 상황이다. 적합한 인식과 혼란스럽고 잘려나간 인식의 대비

- 그러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라는 것은 어떤 때인가. 주석에 설명이 나온다.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따라 이것 또는 저것을 바라보도록 외적으로 규정되는 지각 방식으로 자연의 공통의 질서를 지각할 때. 무엇이 나의 시야에 들어오고, 무엇이 나의 신체를 접촉하면 그때그때마다 자신을 변용하는 대상에게 관심이 쏠리면서 지각을 하는 것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지각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체계적으로 연속적으로 집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그때그때 우발적으로 지각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 실재들에 대해 총체적인 인식을 갖기보다는 단편적이고 혼란스러운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스피노자가 잘려나간 인식이라고 말한다. mutilated한 인식.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이 만들어내는.

- 부적합한 관념이 거짓된 관념이라는 것도 아니다. 스피노자에게 거짓된 관념이라는 것은 없다. 스피노자에게 관념이라는 것은 항상 참된 관념이다. 신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관념은 다 참된 관념이다. 부적합한 관념이라고 하더라도 잘려나갔을 뿐이지 잘려나가지 않은 자잘한 부분은 일치하는 것이니까. 그러니 부적합한 관념은 참된 관념의 일부, 참된 관념의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5. 이번 강의에서는 다른 철학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복습하면서 알튀세르의 생활세계, 일반론에 대해 찾아보게 되었고 후설의 현상학을 조금 찾아본 것도 재미있었지만 무엇보다 바슐라르에 한나절 넘게 빠져있었다. 인용으로서 바슐라르를 읽은 적은 있지만 바슐라르 책을 읽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저 나에게는 내가 한때 매우 좋아했던 미셸 투르니에가 매우 좋아했던, 그의 대학시절 교수였다는 것이 내가 바슐라르에 대해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정도다. 언젠가 바슐라르의 책을 읽어봐야겠다. ”왜 무인가라는 느낌의 질문을 던지는 철학자들을 나는 좀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은 바슐라르에게서 가져온 개념이다. 바슐라르나 캉길렘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인식론적 단절에 대해 연구했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식론적 단절개념은 스피노자의 이 세 가지 종류의 인식에서 유래했다. 알튀세르의 <맑스를 위하여>를 보면, 알튀세르가 일반성1 일반성2 일반성3, 이렇게 세 개의 일반성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인식을 이 세 가지 일반성으로 이야기한다.

 

5. 이날 들은 가장 무서운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스피노자의 세 가지 유형의 인식은 인간의 윤리적인 삶의 유형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종의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삶도 1종의 삶을 살게 되어있다. 상상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상상적인 삶, 특히 미신을 좋아하고 정념에 잘 휩싸이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까 1종의 인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유형하고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다.>

 

나는 너무나 저 유형에 해당하는 많은 사례들을 나와 타인으로부터 갖고 있다. 미신을 좋아하고 정념에 잘 휩싸이는 사람은(또는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는 경우에는) 정말 1종의 인식의 지배를 받고 있다. 미신을 좋아하고 유형화를 좋아하고 그 유형화를 합리화시키고 부분만을 보고 판단을 쉽게 내리거나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에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도, 내 안의 그런 부분도 조심해야한다는 생각을 작년부터 특히나 더 하고 있어서 저 말이 너무나 무섭게 다가왔다. 1종의 인식을 갖고 1종의 삶을 살고 싶지 않다.

 

한때는 1종의 인식을 갖고 1종의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 사람들이 더 행복해보였다. 뭔가에 사로잡혀있으면서 그것이 세상의 전부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옳다고 믿고 그런 것들을 강화해주는 사람들만 주변에 컬렉팅해서 둘러놓고 살면, 그러니까 단순한 세계 안에 갇혀 살면 갈등도 없고 균열도 없고 평화로울 것 같아서. 그래서 공부해야 한다, 고민해야 한다, 너에게 달콤한 말만 던져주지 않고 눈물이 쏙 빠질 정도의 불편하고 신랄한 말을 던져줄 줄 아는 사람과도 가까이 살아야 한다 같은 말들이 버거웠다. 나 그냥 1종의 세계 속에서 고민 없이 편하게 살다가 1종의 사람으로 생을 마감하면 안 될까? 타인 따위. 세상 따위. 유치하고 부조리하게 살면 어때. 그 안에서 내가 나를 유치하다고 부조리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살면 되는데. 이런 생각들. 내 주변만 봐도 2, 3종의 인식에 가닿은 통찰력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피곤하고 힘들게 살던데.

 

하지만 1종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매우 단단하게 만들어나가는 일부 친구들이 점점 퇴화되어 가는 걸 보면서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은 그 안에서 여전히 2, 3종의 세계에 가닿은 친구들보다 편안하고 단순하고 내가 그들(2, 3종의 세계에 가닿은 친구들)보다도 현명하다는 생각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았어. 그냥 저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경종을 마구 울려댔다. 그리고 어차피 사람은 치열하게 공부하고 고민하고 생각해도 1종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힘든데, 내가 안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여전히 1종의 늪에서 나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그걸 합리화시키며 단단히 만들어나가기까지 하면 정말 어느 순간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23종의 세계에 가닿아 있는, 더욱 가닿기 위해 노력하는 친구들은 1종의 세계 속 사람들보다 더 복잡하게 산다. 보이는 만큼 아프고 보이는 만큼 분노하고 보이는 만큼 싸우고 보이는 만큼 자신이 뭐가 부족한지를 보면서 산다. 피곤할 것 같은데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삶을 훨씬 더 입체적이고 깊숙하게 즐긴다. 그들의 내면에 단단하게 자리한 즐거움과 자족감이 얼마나 강건하고 깊은지 옆에서 볼 때 마다 느낀다. 흔들려야 할 때 흔들릴 줄 알고 흔들리지 않아야 할 때 엉망진창인 와중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웃음을 터뜨리며 꿋꿋이 버틸 줄 안다. ’마음에 안 드는 주변을 쳐내는 게 아니라 주변을 품어 안으면서 조용히 자신의 세계로 감화시킬 줄 아는 힘을 갖고 있다. 주변에 그런 존경할만한 친구들이 있어서, 1종의 세계에 눌러앉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나를 부드럽게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일으켜 세워 등을 떠미는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 세계로 넘어가려면 아직도 갈 길이 너무 멀지만 차근차근 그 곁으로 가고 싶다.

 

-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스피노자의 세 가지 유형의 인식은 인간의 윤리적인 삶의 유형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종의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삶도 1종의 삶을 살게 되어있다. 상상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상상적인 삶, 특히 미신을 좋아하고 정념에 잘 휩싸이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까 1종의 인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유형하고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다. 2종의 인식, 3종의 인식 역시 윤리적인 삶의 유형, 실천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분류법은 윤리적인 실천이라기보다 상당히 과학적인 분류, 이게 과학적인 인식인지 비과학적인 인식인지를 따지는, 스피노자보다는 훨씬 더 이론적 분석에 가까운 분류법.

 

6. 스피노자의 관념과 정신에 대한 개념이 좋다. 관념은 적극적 활동이고, 우리의 정신도 그런 걸 담아놓는 틀 같은 게 아니라 계속 움직이는 적극적 활동이라는 점.

 

7. 스피노자의 2부 정의들 중에 가장 독특하다는 정의7이 나도 정말 흥미롭고 좋았다. singularis라는 이름을 가지고는 하나의 독특한 실재를 이루고 있다가 다시 분산했다가 다른 하나의 실재를 또 이룰 수 있다는 독특한 실재. 그리고 이게 1부에서 이야기했던 스피노자의 진공이 없다-> 원자가 없다와도 이어졌을 때 무릎을 쳤다. 이미 원자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순간 이 세계에는 복합체가 아닌 단독 개체가 있을 수 없었던 거였어.

 

정의7

나는 독특한 실재(res, singularis),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작용에 협력하여 그 개체 모두가 함께 하나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된다면, 나는 이것들 모두를 바로 그런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로 간주한다.

- 스피노자의 singular thingindividual (개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individuus 인디비두우스. 쪼개진다, 나뉜다라는 뜻의 dividuusin이 붙으면서 쪼개지지 않는,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나누어지지 않는 이라는 의미가 됨. 그리스의 모나스 monas라는 말을 번역하기 위해 키케로가 만든 말이다. 명사형은 individuum. 1부에서 스피노자가 진공을 부정했었다. 진공 부정은 원자 부정. 즉 스피노자 철학에서 원자의 의미로서의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개체는 언제까지나 무한하게 쪼개어질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개체는 복합체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체의 의미와는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개체는 singular thing 같은 것이다.

- 그러니까 어떤 실재를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 -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것

 

8. 우연히 하나가 되어 획득한 유일성과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의 유일성의 구분

 

- 스피노자는 1부에서 딱 한 번 unique라는 말을 썼는데 그건 유일하다는 뜻이었다. 신은 유일하다라고 말할 때. 이때 유일성이라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유일성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경험적 유일성. 예를 들어 17세기에 우표를 100장 만들었는데 세상에 딱 1장만 남게 되어 유일한 판본이 되었다고 할 때의 유일성. 2) 신은 유일하다의 유일성은 1)처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었는데 하나가 되어서, 우연히 하나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일 수밖에 없는 의미에서의 유일성. unique하다, 유일하다는 그런 의미다.

 

9. <방법서설>(라틴어 버전으로는 그 이후의 <철학원리>) cogito ergo sum<성찰>ego sum ego existo의 차이를 몰랐다. <성찰>ego sum 이라는 문장을 발화하는 순간 이미 그 주체가 그 자체로 입증되므로 고로같은 연역 따위 필요 없다는, 텍스트 문장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은 이런 현장성이 반영된 명제였다니, ego sumego existo 사이의 콤마는 철학사에서 가장 많은 것이 압축된, 가장 단호하고 시적인 문장부호 아닐까.

 

- 의심하는 동안에도 의심하면서 생각하는 주체. 생각하면서도 생각하는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순. <철학원리>에서는 저렇게 간단하게 말하는데, <성찰>은 훨씬 세련되고 깊다. ego sum, ego existo.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 ‘생각한다는 것이 생략되어있다. ego sum이라는 문장을 발화하는 내가 지금 있지 않은가.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주체가 그 자체로 입증되는 것. “그러므로라고 연역을 하지 않아도, ego sum이라는 것을 발화하는 순간 이미 주체가 그 자체로 입증된다는 것. 훨씬 간단하면서도 세련된 명제다.

 

10. 이 글을 읽고나서 한나절 동안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대화들을 면밀히 듣고 텍스트 메시지를 면밀히 읽었는데 정말로 대부분이 performative로 수렴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내가 굉장히 피곤해한다는 것 또한 알았다. constative의 외피를 둘렀지만 그 안에는 많은 욕망 바람 기대 공격 방어 자기어필 등이 꽉꽉 눌려 담겨있는, 수많은 performative. 이것의 정점은 아마 수동공격일테고. 조금만 과장 보태서 말하면 constative 형식으로 구성된 performative야말로 코나투스들이 드글드글 살고 있는 집이었다.(<- 나름 topikㅋㅋㅋ)

 

- 그가 이렇게 두 가지 개념을 구별한 이유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언어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의 문장이 constative만 있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언어의 주된 기능이자 언어의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볼 때 우리 언어의 굉장히 많은 것이 constative 이외에 performative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라고 <화행론> 중간 쯤에 이렇게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해놓는다. 그리고 중간 이후부터는 그런데 오스틴이 생각해봤더니 이 구별에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내가 constative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우리가 다 performative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다, 라고 하면서 performative의 몇 가지 종류를 구별한다. 그러니까 중간 이후부터는 우리가 쓰는 문장은 다 performative라고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 어쨌든 데카르트의 ego sum, ego existo도 그냥 진술문이 아니라, 일종의 performative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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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노자에게는 정신 자체도 관념이다. 그에 따르면 관념은 적극적 활동이고, 우리의 정신도 그런 걸 담아놓는 틀 같은 게 아니라 계속 움직이는 적극적 활동이다

- 정의4에서 말하는 적합성은 합치와는 다르다. 합치는 외적인 일치까지 이루는 것인데, 스피노자가 말하는 적합성은 어떤 이유로 합치하는 지를 파악하는 내적 근거까지를 말하는 것. 부적합한 인식이 늘 오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찍어서 때려 맞출 수도 있다. 이런 외적 합치는 적합성이 아니다.

- 자연의 공통질서에 입각한 지각 방식 부적합한 인식 잘려나가고 혼란스러운 인식

 

정의5

지속은 무한정한 실존의 연속이다

해명

나는 무한정한 이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실존하는 실재의 본성 자체에 의해 결코 규정될 수 없고 또한 실재의 실존을 필연적으로 정립하지 제거하지 않는 작용인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 1부 정의8에서 영원을 다뤘고 2부 정의5에서는 지속을 다루고 있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한정한이라는 표현. indefinitus 인데피니투스. 1부에서는 주로 무한한유한한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영어로 하면 infinite finite. 무한정한은 영어로 하면 indefinite.

- ‘무한정은 사물과는 관계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을 말한다. 이 무한정이라는 범주는 굉장히 유동적이다. 언제 시작할지도 모르고 끝날지도 모르는.

 

- 여기서 스피노자가 유한한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이라고 한 것은 갈릴레이나 데카르트의 물리학에 나오는 관성개념을 함축한 것이다. 갈릴레이의 17세기 사고실험. 끝도 없는 평면을 가정해놓고 거기서 어떤 물체가 운동을 시작하면 그 운동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관성개념. 어떤 물체가 일단 작용하게 되면 그 물체의 작용은 관성원리에 따르면 계속 되고, 다른 물체가 그 물체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기 전까지 계속된다. 정지해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계속 정지. 여기서 말한 계속을 스피노자가 무한정하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게 스피노자가 말한 지속개념의 뜻이다(그러니까 무언가에 의해 멈추기는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에서는 모든 물체는 자기가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원운동. 관성개념은 운동이란 건 무한정인 직선운동. 다른 물체가 다른 물체를 멈출 때에서야 끝나는. ,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경계가 있는 우주지만 갈릴레이 관성개념은 끝이 없는 우주다. 그러나 이 무한정함은 사물의 본질과는 관계없다.

 

- 사물의 본성하고도 관련이 없고, 또 실재의 실존을 필연적으로 정립하는 작용인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 것을 스피노자는 무한정한 실존의 연속으로서 지속이라고 규정한다. 지속 duratio 듀라치오.

- 지속 개념은 3부의 코나투스와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2부 정의2와 연관 지어 보면 실존하는 사물이 있어야 코나투스가 존재하고 실존하는 사물이 없으면 코나투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코나투스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이 존재할 때만 함께 존재하는 현행적 본질이다. 3부 정리8을 보면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은 유한한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을 함축한다라고 하는데, 코나투스의 시간은 무한정하다= 그 사물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 그럼 코나투스의 시간은 지속이다= 하지만 영원은 아니다

- 그러니까 지속이라는 것은 정의상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정확히 말하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이게 그냥 쭉 계속 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무한하지는 않고, 또 영원하지도 않은. 그래서 무한한이라고 하지 않고 무한정한이라고 한 것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을 수 있지만 무한하다, 영원하다라고 얘기할 수 없는 실존의 차원을 스피노자는 지속이라고 한다.

- 무한은 시작도 끝도 없을 수밖에 없는 게 무한에서는 무한만이 나오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중요한 1부 정리 21-23의 명제는 무한한 것에서는 무한한 것만이 나온다는 것을 말해준다. 직접적 무한양태 매개적 무한양태. , 또는 신의 본질을 이루는 속성에서 유한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 거기선 무한한 것이 나온다.

 

정의6

나는 실재성과 완전성을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 실재성과 완전성 개념은 1부에 이미 몇 차례 등장했다

- 1부 정리11의 주석 어떤 외부원인에 의해서도 생산되지 않는 실체들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실 외부 원인들에 의해 생겨나는 것들은 그것들이 많은 부분을 포함하든 적은 부분을 포함하든 간에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완전성 또는 실재성을 외부원인들의 힘에 의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들의 실존은 오직 외부원인의 완전성에서 비롯할 뿐이며, 그것들 자신의 완전성에서 비롯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실체가 지니고 있는 완전성은 어떤 것이든지 어떠한 외부원인에 의지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실체의 실존 역시 실체의 본성으로부터만 따라 나와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실체의 본질과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어떤 실재의 완전성은 실존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정립한다. 반대로 불완전성은 실존을 제거하며,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실재의 실존에 대해서도 절대적으로 무한한 또는 완전한 존재자, 곧 신에 대해서보다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의 본질은 모든 불완전성을 배제하고 절대적 완전성을 함축하므로, 그에 따라 그의 실존에 대해 의심할 모든 이유를 제거하며 그의 실존에 대해 가장 큰 확실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 1부 부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학설은 지고하고 가장 완전한 것을 극히 불완전한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정리 21,22,23에 의해 확립되었듯이, 신에 의해 직접 생산되는 것이 가장 완전한 결과이며, 어떤 것이 생산되기 위해 매개적인 원인들이 더 필요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 완전성/불완전성에는 degree가 있다. 직접적 무한양태는 양태 중 가장 완전한 것이고 유한양태는 덜 완전한 것이다.

 

* 실재성

- 1부 정리9 각각의 실재가 더 많은 실재성 또는 존재를 지닐수록 그 실재에는 더 많은 속성들이 귀속된다

- 1부 정리 11의 주석 왜냐하면 실존할 수 있음은 역량이므로, 어떤 실재의 본성에 더 많은 실재성이 속할수록, 그 실재는 실존하기 위한 힘을 스스로 더 많이 지니게 된다는 점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 또는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역량을 스스로 지니고 있으며, 그 때문에 절대적으로 실존한다.“

- 1부 정리16의 증명 실재의 정의가 더 많은 실재성을 표현할수록, 곧 실재의 본질이 더 많은 실재성을 함축할수록 더 많은 특성들이 따라 나온다.“

- 여기에서도 실재성이 degree를 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실재는 실재성을 더 많이 갖고 있고 어떤 실재는 덜 갖고 있고.

- 1부에서 명시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스피노자는 완전성=실재성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완전성과 실재성은 같은 것이고 정의6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정의6에서 한 가지 빠져있는 것은 1부 정리11의 주석에도 나오는 역량이다. 사실상 실재성=완전성=역량

- 4부 서문의 초반부는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다. 철학적/추상적 개념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따져보는 니체의 계보학적 인식과 비슷한데, 여기에 따르면 완전성도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상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의7

나는 독특한 실재(res, singularis),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작용에 협력하여 그 개체 모두가 함께 하나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된다면, 나는 이것들 모두를 바로 그런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로 간주한다.

- ”독특한 실재에 대한 정의. 2부 정의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면서 흥미로운 정의다.

- 첫 번째 문장은 1부 정리28에서 접했던 규정이다. 핵심은 그 뒷부분이다.

-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res singularis / singular thing이라는 것은 단순히 개체가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이나 개별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결과를 산출하는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행위하느냐 여부가 어떤 것을 독특한 실재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100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데모를 해서 정권이 퇴진한다면 또는 탄핵이 된다면, 그것도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독특한 실재라고 할 수 있다. 공통의 작용에 같이 협력을 한 것이니까. 따라서 어떤 하나의 공통의 작용을 통해서 어떤 결과를 산출해 냈다면 그게 숫자가 얼마가 되었든 간에 스피노자 관점에서는 그것을 하나의 singular thing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 이런 점에서 굉장히 재미있는 정의다.

 

- , 다수의 개체들이 어떤 같은 작용을 수행해서 공동의 결과를 산출한다고 하면 스피노자에게는 그 모두가 하나의 독특한 실재다. 다수가 분리되어 있는 개체들이라고 하더라도. 스피노자에게 수백만의 개체도 singular thing이 될 수 있다. , 스피노자에게 singular thing의 범위는 매우 가변적이다. ‘개체와 오해해서는 안 된다.

- 스피노자가 독특한 실재를 이렇게 정의한 것은 아마 복합물체를 주로 염두에 둔 것일 것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인간의 신체를 포함한 복합물체는 다수의 물체가 합쳐져서 형성된 것. 물리적인 의미에서 개체의 본질은 운동과 정지의 관계(2부 자연학 소론에 나오는 개체에 대한 정의 참조). 그 개체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물체들이 동일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면, 이것은 하나의 독특한 실재를 유지하고 있는 것. 그 운동과 정지의 관계가 깨지면 다른 개체들로 또는 독특한 실재들로 분할되는 것.

 

- 스피노자의 singular thingindividual (개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individuus 인디비두우스. 쪼개진다, 나뉜다라는 뜻의 dividuusin이 붙으면서 쪼개지지 않는,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나누어지지 않는 이라는 의미가 됨. 그리스의 모나스 monas라는 말을 번역하기 위해 키케로가 만든 말이다. 명사형은 individuum. 1부에서 스피노자가 진공을 부정했었다. 진공 부정은 원자 부정. 즉 스피노자 철학에서 원자의 의미로서의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개체는 언제까지나 무한하게 쪼개어질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개체는 복합체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체의 의미와는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개체는 singular thing 같은 것이다.

- 사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표현인데, singularis라고 하면, ”하나의, 단독의~“ 라는 의미이며 원래 쓰이는 단어의 용법도 하나, 단수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철학적으로 정의하면서 이 단어의 원래 용법을 내용상으로 뒤집은.

- 그러니까 어떤 실재를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 -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것

- 스피노자는 1부에서 딱 한 번 unique라는 말을 썼는데 그건 유일하다는 뜻이었다. 신은 유일하다라고 말할 때. 이때 유일성이라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유일성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경험적 유일성. 예를 들어 17세기에 우표를 100장 만들었는데 세상에 딱 1장만 남게 되어 유일한 판본이 되었다고 할 때의 유일성. 2) 신은 유일하다의 유일성은 1)처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었는데 하나가 되어서, 우연히 하나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일 수밖에 없는 의미에서의 유일성. unique하다, 유일하다는 그런 의미다.

- 그런데 singularis는 그런 의미의 유일성과는 다른, 하나의 독특한 실재를 이루고 있다가 다시 분산된 다음 다른 하나의 실재를 또 이룰 수도 있다.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다. 300년전 철학이지만 매우 현대적인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바로 이런 점이다.

 

2부에는 5개의 공리가 있다 (1부는 7개였다). 주로 인간의 사유, 실존과 관련된 공리들이다.

 

공리1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 곧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 실존하거나 실존하지 않는 일이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

 

- 우리는 1부 논의를 통해 실체는 본질이 필연적으로 실존을 함축하는 자기원인인 데 반해, 후자는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되는 만큼 자기원인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근거 내지 원인으로 삼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다른 것은 바로 실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인간은 양태이며 양태는 필연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인간이 실존하느냐 실존하지 않느냐는 자연의 질서 ordo naturae에 달려있다.

 

공리2

인간은 사유한다 Homo cogitat

 

- 주지하다시피 데카르트 철학은 코기토cogito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잘 알려진 유명한 명제가 코키토 에르고 숨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1637)>에서 프랑스어로 이 명제를 처음 사용했으며(“je pense, donc je suis.”) <철학원리(1644)> 17항에서 라틴어로 이 명제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 cogitare: 생각한다. cogito라는 동사변형 자체(1인칭 현재형)에 이미 나는 생각한다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스피노자는 ego cogito하지 않고 3인칭을 써서 “homo cogitat”로 흥미로운 대비를 보여준다.

 

- 코기토의 철학은 주관성의 철학, 주체성의 철학. 나라는 사유하는 주체를 기반으로 둔 근대의 주관성의 철학. 이것을 강조한 사람이 하이데거고, 저 말들도 다 하이데거가 만든 말들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데카르트의 이 말을 ich denke, 독일어로 번역한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예전에는 초월적 통각이라고 번역했었는데 요즘은 수반 의식,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생각, 우리가 외부 사물을 표상하거나 생각할 때 항상 수반되어있는 생각, 모든 표상들에 수반해야 하는 의식이 바로 ich denke. 태양에 관한 생각이든, 다른 사물에 대한 생각이든 거기에는 명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항상 이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수반되어 있다. 칸트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번역하면서 자기 철학을 transzendental philosophy 초월론 철학, 초월 철학으로. 그리고 근대철학에 근거한 주관성의 형이상학의 시작을 데카르트가 했다고 말한 사람이 하이데거다. 코기토의 철학, 코기토의 형이상학, 이 말들도 다 하이데거가 만들었다. 하이데거가 쓴 <니체> 24부를 보면 서양의 형이상학의 역사를 하이데거가 재구성한 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에도 코기토 이야기가 한참 나온다. 하이데거가 볼 때 데카르트에서부터 니체에 이르는 400년 가까운 시간이 근대철학의 시작인 것이다.

 

- <방법서설> Discours dela methode. 뭔가 방법에 대한 담론이라고 번역해야할 것 같은데 방법서설이라고 하니까 좀 이상한데 17세기에는 discours라는 말이 서설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였다. 저 방법서설이라는 제목은 데카르트가 과학자였던 시절 1637년에 과학논문 세 편을 발표할 때, 그 앞에 자기가 어떻게 해서 이런 논문을 쓰게 됐는지 철학적 서론을 붙인 것에서 나온 것이다. 자기가 이 과학적인 논문을 쓰게 된 방법론적인 서론이라는 뜻인데, 이게 워낙 유명해지면서 과학논문은 다들 잊어버리고ㅋㅋ 저 서론만 논의하게 됐다. 과학논문도 사실 굉장히 중요한 논문인데. 이 방법서설은 근대철학서에서 아주 중요한 책이다. 책이라고 하기에는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바로 이 방법서설에서 이 유명한 명제가 불어로 처음 쓰이게 되고, 1644년에 <철학원리>에서 1부에 불어로 썼던 것을 라틴어로 표현한 cogito ergo sum이 등장한다. sum도 역시 1인칭 현재동사로 영어로 하면 be동사의 1인칭. I think therefore I am.

- 데카르트의 제일 유명한 책은 <성찰>인데 이게 제일 유명한 책인데다가 코기토 명제가 제일 유명한 명제다 보니 cogito ergo sum<성찰>에 등장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ㅋㅋ <성찰>에는 조금 다른 명제가 나온다. ego sum, ego existo

 

- <철학원리>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게다가 그것이 거짓이라고 상상하는 동안에는, 우리는 쉽게, 신도 하늘도 신체들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이 손도 발도 마지막으로 신체도 갖고 있지 않다고 가정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들을 생각하는 것인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앞과 같은 식으로 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어떤 것이 그것이 생각하는 동안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 자가당착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이러한 인식은 올바른 순서에 따라 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차적이며 가장 확실한 인식으로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 의심하는 동안에도 의심하면서 생각하는 주체. 생각하면서도 생각하는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순. <철학원리>에서는 저렇게 간단하게 말하는데, <성찰>은 훨씬 세련되고 깊다. ego sum, ego existo.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 ‘생각한다는 것이 생략되어있다. ego sum이라는 문장을 발화하는 내가 지금 있지 않은가.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주체가 그 자체로 입증되는 것. “그러므로라고 연역을 하지 않아도, ego sum이라는 것을 발화하는 순간 이미 주체가 그 자체로 입증된다는 것. 훨씬 간단하면서도 세련된 명제다.

- 현대언어철학에서 저것을 performative, 수행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성찰>에 나오는 저 명제가 현대언어철학의 통찰에 훨씬 가까운 명제다.

- 수행문, 서술문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사람은 존 오스틴 John Langshaw Austin이라는 언어철학자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 중 <화행론> <말과 행위>가 있다. 서술문/진술문 constative는 우리가 말을 하거나 어떤 문장을 쓸 때 어떤 사실에 관해 서술하고 진술하는 것을 말한다. “날이 덥다” “9시다같은 것들. 수행문 performative는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실제로 어떤 행위를 산출하는 문장을 말한다. “물 좀 가져와라같은 것. “오늘 강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라는 말은 결국 짐 싸세요ㅋㅋㅋ 지금부터 청문회를 싲가하겠습니다같은 것.

- 그가 이렇게 두 가지 개념을 구별한 이유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언어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의 문장이 constative만 있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언어의 주된 기능이자 언어의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볼 때 우리 언어의 굉장히 많은 것이 constative 이외에 performative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라고 <화행론> 중간 쯤에 이렇게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해놓는다. 그리고 중간 이후부터는 그런데 오스틴이 생각해봤더니 이 구별에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내가 constative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우리가 다 performative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다, 라고 하면서 performative의 몇 가지 종류를 구별한다. 그러니까 중간 이후부터는 우리가 쓰는 문장은 다 performative라고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책은 존 오스틴이 직접 쓴 책이 아니라 오스틴이 직접 책으로 내기 전에 세상을 떠나서 제자가 강연을 묶어서 낸 것.

- 어쨌든 데카르트의 ego sum, ego existo도 그냥 진술문이 아니라, 일종의 performative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 공리2에서 스피노자가 cogitohomo cogotat로 바꾼 것은 ego -> homo의 간단한 변화 같지만, 사실 매우 복잡한 결과를 낳는 변화다. 사실 인간은 사유한다는 명제는 무척 간단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직관적으로 분명치는 않다. 몇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고려해보자.

1) 이 명제는 가령 인간(만이)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곧 무생명체는 물론이거니와 식물, 더 나아가 동물도 생각하지 못하는 반면, 인간은 생각한다. 따라서 생각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2부 정리13의 주석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명제와 충돌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보여준 것은 완전히 일반적인 것이어서 다른 개체들- 이것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정신화되어 있다(omnia quamvis diversis gradibus animata sunt)- 보다 인간에게 더 많이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 안에는 모든 실재에 대한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이 말은 인간과 다른 모든 개체들도 정신화되어 있다는 말이고, 이 말은 인간과 다른 모든 개체들도 어떤 방법으로든(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사유할 수 있게 되어있다는 의미다.

2) 그렇다면 이 명제는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아니면 조금 더 정확히 말해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보다 더 많이, 또는 더 높은 정도로) 생각한다.”로 바꿔서 표현해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이 왜, 어떤 근거로 생각을 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도 몇 가지 해석 가능성이 있다. <- 알파고 때문에 이 해석도 달라질 것 같긴 하다. 알파고는 인간보다 더 복잡하게 생각하니까.

3) 우선 (생각은 인간의 유일한 본질이므로) 인간은 생각한다고 바꿔 표현할 수 있다.

4) 또는 (생각은 인간의 본질들 중 하나이므로) 간은 생각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5) 아니면 “(생각이 인간의 본질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인간은 생각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생각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말하자면 우연적 성질, 아키댄스가 될 것이다.

 

- 이 가능성들 중에서 5)는 뒤에 나오는 논의와 어긋난다. 2부 정리11의 증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1. 인간의 본질은 (정리10의 따름정리에 의해) 신의 속성의 양태들로 구성된다 2. (2부 공리2에 의해) 사유 양태들에 의해 구성되는데, 3. 이 사유양태 전체 중에서 본성상 앞서는 것은 (2부 공리3에 의해) 관념이며, 같은 개체 안에 다른 양태들(관념이 그것들에 대해 선행하는)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관념이 존재해야 한다. 4. 따라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일차적인 것은 관념이다.

- 34는 뒤에 나오는 공리3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일단 논외로 하고 12를 통해 우리는 공리2에 나오는 인간은 사유한다/생각한다는 명제가 인간의 본질과 관련된 명제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3)을 의미하는지 4)를 의미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것은 정리13의 따름정리인 이로부터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 실존한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그리고 3부 정리7과 정리9까지 가야 조금 더 정확히 답변될 수 있다.

- (그러니까 인간이 3) ”생각한다는 것을 유일한 본질로 갖고 있는지, 4) ”생각한다이외에 인간에게 또 다른 본질이 있는지 이것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아직 결정이 안 된 문제다. 이것은 뒤에 가봐야 알게 될 것이다. 어쨌든 2부 공리2에서는 인간은 생각한다고 하고 있고, 뒤에 나오는 논의를 고려해봤을 때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특징이다정도로 알 수 있다)

 

-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이런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인간은 생각한다고 했을 때, ”인간은 누구인가?

6) 인간은 개별적인 인간인가 아니면 집합적인 또는 유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인가?

7) 더 나아가 이러한 인간은 데카르트의 cogito가 함축하는 의미에서 라고 하는 ego I같은 독자적인 주체또는 적어도 독립적인 개체인가? ( 1) 독자적인 주체, 개별적인 주체인지, 아니면 2) 이런 개별적인 주체와는 다른 어떤 것인지 이것도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다.)

 

- 가령 프로이트에게 생각의 주체, 코기타치오의 주체는 누구일까? 무의식이다. 그렇다면 의식은?

-프로이트의 초기저작 <꿈의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라고 할 수 있는 7장에 가보면 그는 인간의 정신장치를 망원경에 비교해서 그린다. 사이킥 아파라투스. 정신장치. 정신모델

W 지각(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아 수용하는 기관) -> ll Er 기억 ll 기억‘ ll 기억’‘ 무의식 llll (<- 전의식의 장벽을 통과) -> M 운동

2. W 지각 -> M 운동 : 제일 원시적인 정치장치. 지각하고 바로 배출해버림

 

- 프로이트의 정신장치 중에서 2번 같은 원시적인 장치에는 기억이 없다. 외부에서 들어온 자극을 기억으로 축적하지 않고 바로 배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같은 고도로 발전한 존재의 정신장치는 자극을 받으면 다 배출하는 게 아니라 1)처럼 기억을 통해 정신장치 안에 자극을 새겨 넣고 축적한다. 그리고 이런 기억장치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있다. 제일 앞에 있는 것이 제일 어렸을 때의 인상들, 그 뒤에 나오는 것은 그 이후의 인상들... 이런 식으로 기억장치가 굉장히 많다.

- 그리고 이게 무의식이다. 이런 기억장치들을 통해 무의식이 구성된다. 그러면 이렇게 구성된 무의식이 바로 M으로 연결되는가? 아니다. 저 약식 그림에서처럼 전의식이라는 장벽이 저렇게 서있다. 전의식의 검열을 통과해야 무의식이 우리의 의식적인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다. ,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전의식이 무의식을 검열하고, 전의식이 무의식의 소원을 배출하는 밸브와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전의식의 검열을 거쳐야 무의식이 비로소 우리의 꿈 같은 것을 통해 표현이 된다는 것이다. 무의식-전의식-의식 이런 3원 구도.

- 그러나 후기 저작에 가면, 특히 <자아와 이드(1823)>라는 작은 소책자에 가면 그는 더 이상 저 3원 구도를 이야기하지 않고 이드-초자아-자아의 도식을 이야기한다.

 

- 이런 식의 방식을 프로이트는 독어로 topik이라고 하는데, ’장소를 뜻하는 그리스어 topos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말로 적절하게 번역하면 장소론‘. 어떤 개념을 공간적인 비유로 푸는 것을 말한다. topos라는 말을 가지고 와서 프로이트는 topik이라고 말했고, 초기저작의 이드-초자아-자아의 도식도 topik이고 이드-초자아-자아의 도식도 topik이다. <자아와 이드>를 보면 프로이트가 아예 사람의 머리 모양을 그려놓고 여기서 이드 초자아 자아를 구별한다. 공간적인 비유를 가지고 인간의 정신구조를 표현한 것이다

- 맑스에게도 topik이 있다. ”토대와 상부구조이것을 가지고 사회를 공간적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사실 서양철학사에 보면 topik을 쓰는 철학자들이 근대에 꽤 있는데, 어떤 사람은 topography로 해서 지형학이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장소론이 맞다

 

- 다시 프로이트 후기 저작 이야기로 돌아와서, 후기 저작의 이 topik의 흥미로운 점은 여기에서 이드는 당연히 무의식이고, 여기서 전의식에 해당하는 초자아를 무의식에 속한다고 이야기한다. 첫 번째 토픽에서는 전의식이 무의식을 검열했는데 두 번째 토픽에 가면 초자아 자체도 무의식에 속하는 것이다. 첫 번째 <꿈의 해석>에 나오는 무의식은 아주 병리적이고 아주 파괴적이고 원시적인 충동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후기의 두 번째 토픽에 가면 무의식은 더 이상 그런 게 아니라, 초자아, 여기서는 도덕적인 의식이라든가 인간에 내재해있는 도덕률도 인간의 무의식에 속하는 것이다. 무의식의 영역과 무의식의 역할이 훨씬 강조된 것이 후기이다.

- 다시 코기타치오의 주체로 돌아가보면, 프로이트는 코기타치오의 주체, 사유의 주체를 이드라고 말할 것이다. 이드는 원래 라틴어이고, 불어로는 sa, 영어로는 it, “그것”. 코기타치오의 주체로 데카르트는 에고를 이야기했지만 프로이트의 tipik에서 에고, 자아라는 것은 아주 표층적인 층위만 갖고 있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답은 에고일 수가 없다. 이드. 그것. 하지만 그것이 뭔지는 불분명하다. ’그것이 생각한다. 우리 안의 그것이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뭔지는 모른다. 본능일 수도 있고, 도덕적인 도덕률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들어서 생겨난 생각일 수도 있고.

- 예전에 내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우리나라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60대 이상만 되면 생각이 다 똑같아진다고 말했었는데, 이들의 생각의 주어는 누구일까? ....국정원?ㅋㅋㅋㅋㅠㅠ 노모의 핸드폰에 카톡 오던 그 메시지들이 국정원 전직원들이었다는 게 밝혀졌는데, 정말 국정원들이 만들어서 수백만 명에게 뿌린 메시지들이 들어가고 돌고 그러다보면 생각의 주어가 누구인지, 국정원인 건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무튼 에고가 아니다. 이드이다. 그것. 그것이 생각한다.

- 그러니까 호모 코기타트, 인간은 생각한다라고 말했을 때 스피노자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누구인지, 이것은 정해져 있지 않다. 아까 독특한 실재라는 게 굉장히 가변적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생각의 주체인 호모라는 것도 그렇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결코 에고로 국한될 수 없다는 것. 이것은 분명하다.

- 혹시 미래에 우리가 뇌에 칩 같은 것을 달고 살아가게 된다면 생각의 주체가 누군인지에 관한 문제가 정말로 훨씬 더 복잡해질 것이다. 사실 지금도 칩을 달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지만.

 

공리3

사랑이나 욕망 또는 마음의 정서(affectus animi)라는 이름 아래 지칭되는 모든 것과 같은 사유 양태들은, 동일한 개인 안에 사랑 받는 대상, 욕망 받는 대상 등에 대한 관념이 존재할 경우에만 존재한다. 하지만 관념은 다른 어떤 사유 양태들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에도 존재할 수 있다.

 

- 내가 사랑해라고 하면 대상이 있을 것이다. 대상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으니까. 나는 욕망해라고 하면 욕망의 대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정서에는 대상이 있기 마련이고 그 관념이 존재한다. . 관념이 아펙투스보다 선행한다. 그러니 아펙투스가 없이도 관념은 존재 가능.

 

공리4

우리는 어떤 신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을 느낀다 affectio

 

-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어떤 신체라는 표현이다. ”우리의신체라고 말하지 않고 어떤이라고. 스피노자는 지금 소유격을 쓰는 것에 매우 조심스럽다. 나의- 우리의- 라고 말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도 그렇고 스피노자도 그렇고 이게 나의 신체다라고 말하기 굉장히 어렵다. 데카르트는 이원론자라서 그렇다. 데카르트 철학에서 정신과 신체는 엄밀하게 분리가 되고, 정신이야말로(사유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사유와 분리가 되어있는 이 신체라는 것이 정신과 어떻게 유니온을 이루고 있는지를 철학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정신과 신체가 유니온을 이루고 있는데, 데카르트 철학에서는 어떻게 하나는 사유속성에 속하고 하나는 연장속성에 속하는 정신과 신체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게 너무 어렵다. 그러니까 이 신체가 나의 신체라고 딱 집어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 스피노자는 여기서 어떤 신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을 느낀다고 표현. 어떤 신체가 변용되고 있다, 추워서 입김이 나온다거나 살갗에 오돌도돌 몸서리가 쳐지는데 이게 지금 나의 신체가 그렇다고 말하지 않고 어떤 신체가 그러는 걸 느낀다고 말한다. 이 신체가 나의 신체다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앞으로 가야한다. 그래서 공리에서는 어쨌든 나의 신체라고 철학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데 어떤 신체가 변용되는 것을 느낀다고 말한다.

 

공리5

우리는 신체와 사유 양태들 이외의 다른 어떤 독특한 실재도 느끼거나 지각하지 못한다

 

- 신체 body 연장속성의 양태 / 정신 관념. 사유속성의 양태

- 1부 정의6에 보면 실체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되었고 신 자체는 무한하지만 우리는 그 무한한 와중에서 신체와 정신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속성만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속성의 양태 이외의 속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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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수한 실재/ 독특한 실재 :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속성을 표현하는 것 = 양태

* 그러니까 양태는, 속성을 표현하는 것. 속성이 갖고 있는 역량을 양태가 나눠 갖는다. 양태는 어떤 속성에 속한다. 각각의 인간정신은 생각이라는 속성, 사유속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나눠 갖고 있기 때문에, 사고할 수 있는 역량을 속성에서 가져오는 것이다.

* 정신이 사유속성에 속하는 한 양태로서 굉장히 많은 관념을 만들어낼 수 있다. 1종의 인식에 속할 수도 있고, 2, 3종의 인식에 속할 수도 있다. 1종은 부적합한 인식, 2, 3종은 적합한 인식.

* 관념이 외부대상과 합치한다 -> 긍정

관념이 외부대상과 합치하지 않는다 -> 부정

- 데카르트는 이때 작용하는 것이 의지라고 봤다. 우리 정신이 거짓된 생각을 하는 것은 의지 작용을 잘못 수행했기 때문이라는 것.

- 그러나 스피노자는 지성과 의지가 별도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파쿨타스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정신이 관념을 형성할 때 이미 참인지 거짓인지가 동시에 수행되는. 스피노자에게 관념과 의지는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 2부 정리35의 주석 마찬가지로 태양을 바라볼 때 우리는 태양이 우리로부터 200걸음 떨어져 있다고 상상하는데, 이것의 오류는 단순히 이러한 상상에 있는 게 아니라, 이처럼 상상하는 동안 우리가 그것의 실제 거리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이렇게 상상하는 원인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왜냐하면 비록 나중에 태양이 지구 지름의 600배 이상이나 우리에게서 떨어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우리는 계속 태양이 우리와 가까이 있다고 상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양을 그처럼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의 실제 거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신체 자체가 태양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 우리 신체의 변용이 태양의 본질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과학적인 지식을 통해 알게 된다고 해도 우리는 다음날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아 저게 뒷산에 걸려 넘어가는 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가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오류가 아니다, 우리가 시각기관이 그렇게 만들어져있고, 우리의 신체적 조건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태양의 실제거리를 안다고 해도 우리는 태양을 그런 식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이야기.

-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 상상이라는 것은 단순히 그릇된 인식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이나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우리는 바로 이런 식으로 밖에 우리 신체나 정신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외부 대상을 지각하는 것을 스피노자는 변용의 질서와 연관이라고 말한다. 2부 정리18의 주석에 나오는 표현이다. 우리가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이 바로 변용의 질서와 연관이다. 이것은 우리가 외부 대상이나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조건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나 정신을 인식할 때도 우리는 처음에는 다 이렇게 인식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정신이라고 해서 우리 자신이 특별히 더 잘 아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정신이나 신체도 우리가 외부 사물을 인식할 때처럼 똑같이 변용의 질서와 연관을 매개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항상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그 조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으로서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인식하고 경험하기 위한 1차적인 조건.

 

- 이것은 태양을 바라보면서 신을 떠올리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가 태양의 거리를 알면서도 태양을 바라볼 때마다 아, 몇 백 광년 떨어져있구나라고 보기는 힘들다. 우리의 시각기관이 그렇게 지각하도록 생겼기 때문에. 불가피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신은 다르다. 가령 과거에 동양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신 개념을 갖고 있지 않던 시절에 서산에 지는 해를 보면서 동양 사람이나 서양 사람이나 해가 200걸음 떨어져있다고는 인지하겠지만, 그걸 보면서 똑같이 신을 떠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200걸음 떨어져있는 것으로 태양을 보는 것은 훨씬 더 근본적인 이야기다. 그래서 알튀세르가 스피노자한테서 상상이라는 것은 패컬티, 직능이 아니라 생활세계라고 말한다. 생활세계. 또는 줄여서 세계. 아주 중요한 말이다. 스피노자의 상상은 패컬티가 아니라 생활세계다.

- 이 생활세계라는 개념은 하이데거의 스승뻘 되는 에드문드 후설이 만들어낸 개념인데, 우리의 인식, 우리의 사유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전제가 되는 조건을 말한다. 이론적 인식, 과학적 인식(근대 갈릴레이 이래 발전된), 철학적 인식, 사유활동 등이 기반을 두고 있는, 하지만 근대과학적인 사유가 침식하고 약화시키는 위험에 처해있는 인식의 조건을 생활세계라고 부르고 있다("모든 개별적 경험의 보편적 기반으로서 ······ 일체의 논리학적 수행에 선행하여 미리 직접 주어져 있는 세계"[EU 38] 또는 "우리의 생활 전체가 실제로 거기서 영위되는 바의, 현실에서 직관되고 현실에서 경험되며 또한 경험될 수 있는 이 세계"[Krisis 51] 그러나 이러한 생활세계는 근대 과학의 방법적 조작을 통해 이중으로 <이념화>됨으로써 점차로 은폐되고 망각되어가게 된다. -생활세계 [生活世界, Lebenswelt, life-world] (현상학사전)

-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이 후설이 말하는 생활세계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태양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는 것처럼 볼 수밖에 없고, 이렇게 보는 것이 사실은 우리가 외부대상을 인식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우리는 그 조건 속에서 외부대상을 지각하고, 인식하고, 또 교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다고 보는 상상은 그릇된 인식, 부적합한 인식이기 이전에 오히려 사유활동의 조건, 전제가 된다.

- 알튀세르는 자기가 이야기하는 이데올로기 개념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허위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이라고.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화폐개념에 대해서도 말한다. 화폐가 상품교환의 매체가 아니라 어떤 경제적인 활동의 조건 배경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 아무튼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상상개념이 그릇된 1종의 인식 이전에 생활세계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 이렇게 보면 스피노자에게 우리의 사유활동, 우리가 관념을 만들어내고 적합한 인식을 하고 2종의 인식과 3종의 인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상상적인 생활세계에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의 조건이 생활세계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지만, 동시에 2종의 인식이든 3종의 인식이든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은 생활세계로서의 상상에서 출발하는 것.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상상이라는 것은 단지 1종의 인식, 부적합한 인식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식과 삶이 이루어지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 상상이라는 것은 초월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조건이라는 것.

 

* 정리43 참된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이 참된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실재의 진리에 대해 의심할 수 없다.“ 그러면서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를 한다. 빛이 자기 자신과 어둠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는 자기 자신과 거짓의 척도라는 점은 분명하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참된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참되다는 것을 알고 무엇이 거짓인지 참인지 다 알고 있다.

- 키에르 케고르가 이 말을 뒤집어서 이야기했다. ”거짓은 진리와 거짓을 지켰다또는 변형하자면 예외는 규칙과 예외의 척도다

- 칼 슈미트는 키에르 케고르의 이 말을 인용해서 이야기했다. ”주권자는 예외를 결정하는 사람이다예외를 결정하는 사람이 주권자다.

 

정의4

나는 적합한(adaequatua) 관념을, 대상과의 관계없이 고찰되는 한에서 참된 관념의 모든 특성 또는 내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해명

나는 외재적 특징, 곧 관념과 그 대상의 합치를 배제하기 위해 내재적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가 내재적이라고 말한 이유에서 적합한합치가 대비되는 걸 알 수 있는데,

- 아다이콰치오. 중세철학 이래로 서양철학에서 진리에 대한 대표적 정의로 알려져 있는 명제, ”adaequatio intellectus et rei : 진리는 지성과 사물의 일치다에 대한 개조를 함축. 여기서 아다이콰치오는 일치내지 합치” “상응을 뜻하는 말이다. 중세철학에서 아다이콰치오의 표준적인 의미.

- 그런데 스피노자는 정의4에서 적합한 관념을 정의하면서 대상과의 관계없이 고찰되는 한에서라는 말을 포함시킴으로써, 진리를 진리로 만드는 내적 기준에서 일치내지 합치라는 의미를 배제한다. 더 나아가 스스로 정의에 대한 해명을 붙이면서 외재적 특징, 곧 관념과 그 대상의 합치를 배제하는 것이 정의4의 기본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

- 따라서 스피노자에 따르면 진리 또는 참된 관념은 <대상과 합치하는> 관념이면서 또한 <적합한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합치>는 어떤 관념이 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징표이기는 해도 그것을 참된 관념으로 만드는 내적 근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 2종의 인식과 3종의 인식을 적합한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원리를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인데, 원리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저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지, 저 사물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합치는 당연히 본질과 특성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 “잘려지고 혼동된 방식” : 정리40의 주석2. 스피노자가 부적합한 인식에 대해 말할 때 관용적으로 쓰는 표현이다. 이 말은 2부 정리29에서 유래하는데 인간 신체의 각각의 변용에 대한 관념의 관념은 인간 정신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함축하지 않는다 여기에 따라오는 따름정리가 중요하다. 이로부터 인간정신은 그것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신체에 대한, 그리고 외부 물체들에 대해사도 적합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단지 혼란스럽고 잘려나간 인식만을 가진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이게 바로 부적합한 인식을 갖게 되는 상황이다. 적합한 인식과 혼란스럽고 잘려나간 인식의 대비

- 그러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라는 것은 어떤 때인가. 주석에 설명이 나온다.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따라 이것 또는 저것을 바라보도록 외적으로 규정되는 지각 방식으로 자연의 공통의 질서를 지각할 때. 무엇이 나의 시야에 들어오고, 무엇이 나의 신체를 접촉하면 그때그때마다 자신을 변용하는 대상에게 관심이 쏠리면서 지각을 하는 것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지각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체계적으로 연속적으로 집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그때그때 우발적으로 지각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 실재들에 대해 총체적인 인식을 갖기보다는 단편적이고 혼란스러운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스피노자가 잘려나간 인식이라고 말한다. mutilated한 인식.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이 만들어내는.

- 다수의 실재를 동시에 바라봄으로써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이해하는 것이 적합한 인식이 형성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다수의 실재들 동시에 바라봄으로써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이해하도록 외적으로규정될 때 적합한 인식을 형성하는 것.

 

- 이 따름정리나 주석을 보면 자연의 공통의 질서는 별로 좋은 게 아니다. 나쁜 것이지. 일부 주석에도 이런 표현이 나온다. 그러니 자연의 공통 질서라는 것은 우리가 자연을 1차적으로 경험하는 질서,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 4부에 가게 되면 common oder of nature 공통의 질서라는 말이 또 자연의 어떤 법칙과 연결된 부분이 나온다. 그러니까 어떤 대목을 보면 이 어구가 자연의 객관적이고 법칙적인 질서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대목을 보면 이게 상상적인 인식을 갖는 어떤 가상적인 질서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다. 그래서 스피노자가 에티카에 쓰는 용법으로만 보면 이 어구가 어떤 의미라고 딱 단정지어 말하기가 참 어렵다. 그래서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쉽지 않다. 누가 편지로 좀 질문을 해줬아야 하는데ㅋㅋㅋ

 

- 그렇다고 명석판명한 개념과 배치된다고 말하기도 좀 어렵다. 왜냐면 스피노자가 명석판명한 관념이라는 말도 여러 번 쓰는데, 어떤 경우에는 명석판명한 관념이라는 것을 적합한 관념이라는 말과 등가적으로 쓰기 때문이다. ’판명하다는 말이 사물의 본질과 특성을 인식하는 것을 뜻하니까 적합한 대신 명석판명을 쓰는 경우도 있다.

- 부적합한 관념이 거짓된 관념이라는 것도 아니다. 스피노자에게 거짓된 관념이라는 것은 없다. 스피노자에게 관념이라는 것은 항상 참된 관념이다. 신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관념은 다 참된 관념이다. 부적합한 관념이라고 하더라도 잘려나갔을 뿐이지 잘려나가지 않은 자잘한 부분은 일치하는 것이니까. 그러니 부적합한 관념은 참된 관념의 일부, 참된 관념의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참된 관념이라고 썼을 때는 대상과 관념이 일치하느냐 아니냐의 문제. 말하자면 x7이냐 아니냐. 7이면 참되고 아니면 참이 아니고. 7이라는 관념이 어떤 근거에 입각해서 나오는 건지, 근거와 상관없이 우발적으로 나온 건지, 참된 관념이라고 하더라도 근거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면 그건 1종의 인식에 속하는 것이다.

 

- 알튀세르의 이론 중 아주 유명한 이론 중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표현하는 개념이 있다. 그는 기 개념을 맑스의 청년기 사상과 성숙기 사상이 다르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썼다. 같은 맑스가 갖고 있는 생각이라고 해서 똑같은 생각이 아니다라는. 알튀세르는 1845년이 바로 맑스 사상의 단절이 이루어지는 시점이다라고 말한다. 생전에 출판하지는 않았지만 1845년에 맑스는 엥겔스와 같이 <독일 이데올로기>를 썼는데, 알튀세르가 보기에는 이 책이 맑스 사상의 단절을 표시하는 지점이다. 이 책에 성숙기 맑스 사상의 중요한 개념들이 처음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생산양식이라든가 이데올로기를 갖는다같은 내념들이 이전의 책에는 나오지 않다가 여기서부터 등장을 하고, 이게 맑스의 역사유물론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들이기 때문에 알튀세르는 이 지점이 바로 단절이 이루어진 시기라고 보는 것이다. 이 이전의 맑스사상은 진짜 맑스가 아니라 여전히 헤겔주의자고, 아직 자기의 진짜 사상을 갖지 못했던 맑스, 그러니까 청년 맑스라고 부르는 맑스는 진짜 맑스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책에 진짜 맑스 사상이 이 시기에서부터 시작된다를 표현하기 위해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표현을 썼다. 맑스 사상이 동질적이고 연속적이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하지만 알튀세르가 인식론적 절단을 주장한다고 해서, 절단 이후의 맑스 사상이 동질적이거나 완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알튀세르의 논점은 절단을 이룩한 이후에도 맑스 사상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불완전하고 불균등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맑스주의 내에서 스탈린주의나 인간주의 같은 여러 가지 이론적 편향들이 발생하며, 다시 이는 정치적 오류 및 맑스주의 자체의 위기를 낳게 된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보기에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진 맑스 사상을 개조하고 좀더 완전한 상태로 발전시키는 것은 이론적이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과제였다.“)

 

- 이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은 바슐라르에게서 가져온 개념이다. 바슐라르나 캉길렘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인식론적 단절에 대해 연구했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식론적 단절개념은 스피노자의 이 세 가지 종류의 인식에서 유래했다. 알튀세르의 <맑스를 위하여>를 보면, 알튀세르가 일반성1 일반성2 일반성3, 이렇게 세 개의 일반성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인식을 이 세 가지 일반성으로 이야기한다.

- 첫 번째 일반성은 인식의 소재가 되는 각종 정반합적인 표상, 이데올로기. 아직 과학적인 인식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상식적인 생각이라든가, 생각들, 관념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물리학을 쓰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일반성1에 속한다.

- 일반성2는 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을 뜻한다. 물리학에서라면 중력 개념이라든지 상대성 이론이라든지, 맑스에서라면 생산양식이나 잉여가치, 이데올로기 같은 개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과학의 핵심을 이루는. 어떤 과학을 과학으로 만들어주고, 이전의 비과학적인 상식과 구별해서 과학적 인식으로 만들어주는 개념을 일반성2라고 하는 것이다. 일반성3은 일반성2를 통해 새로 만들어진 과학적 인식을 말한다. 그러니까 일반성2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기반이면서 생산수단인 것이고, 일반성2은 이 생산수단을 바탕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과학적 인식인 것이다.

- 그러니까 알튀세르는 일반성1과 일반성2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과학자들이나 이론가들의 목표는 일반성2 개념에 입각해서 일반성1에 속하는 비과학적인 생각을 과학적 인식으로, 상식을 계속 개조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일반성1,2,3은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의 세 가지 인식분류를 개조한 것이다, 맑스를 설명하기 위해.

 

- 스피노자에게서도 1종이 부적합한 인식, 2,3종은 적합한 인식이었고, 이 사이에 단절이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분류법과 스피노자의 분류법이 아주 비슷하지만(1) 인식에는 세 가지 유형이 존재한다 2) 12/3 사이에 단절이 존재한다 3) 인식은 백지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기존에 존재하는 상상적인 관념을 개조하는 작업이라는 것), 차이점이 있다. 스피노자는 3종의 인식이 일반적 인식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 정리40의 주석2를 보면 보편적 통념을 만들어내는 세 가지 방식을 이야기하며, universal notion을 만들어내는 두 가지 방식은 1종의 인식에 속하는 것이고, 2종의 인식은 universal notioncommon notion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1종의 인식이나 2종의 인식이나 다 일반적인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3종의 인식은 직관적인 인식이라고 하지 일반적인 인식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이것을 일반성3이라고 한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3종의 인식과 알튀세르의 3가지 일반성의 중요한 차이다.

-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스피노자의 세 가지 유형의 인식은 인간의 윤리적인 삶의 유형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종의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삶도 1종의 삶을 살게 되어있다. 상상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상상적인 삶, 특히 미신을 좋아하고 정념에 잘 휩싸이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까 1종의 인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유형하고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다. 2종의 인식, 3종의 인식 역시 윤리적인 삶의 유형, 실천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분류법은 윤리적인 실천이라기보다 상당히 과학적인 분류, 이게 과학적인 인식인지 비과학적인 인식인지를 따지는, 스피노자보다는 훨씬 더 이론적 분석에 가까운 분류법.

 

- 우리가 이런 단절의 인식론을 받아들이면 1종의 인식과 2종의 인식 사이에는 단절관계가 성립한다. 우리가 2, 3종의 적합한 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1종의 인식과 단절해야 한다. 상상적 인식, 부적합한 인식, 잘려나가고 혼동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우리가 2종의 인식 3종의 인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인식에서 1종과 2종 사이는 단절적인, 하지만 2종과 3종 사이에는 적합한 인식으로서의 연속성이 있는.

- 하지만 잊지 말아야할 것은 상상은 부적합한 인식이고 오류를 낳은 인식이지만, ”생활세계라는 점이다. 우리의 인식과 삶이 이루어지는 기관이 바로 상상이다. 상상이라는 것은 오류, 거짓과 연결되는 게 아니라 인식의 조건이라는 것. common notion을 형성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것. 그렇게 보면 1종의 인식과 2종의 인식 사이에 완전한단절관계가 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또 어려운 부분이 있다.

- 2종의 인식 없이 3종의 인식으로 갈 수 있을까요? 그럼 신비주의로 가야겠죠ㅋㅋㅋㅋ 2종의 인식이 있어야 우리는 3종의 인식을 얻을 수 있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우리가 어떻게 common notion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2부 정리3839가 스피노자가 common notion에 대해 이야기하는 전부다. 그걸 설명해주는 사람이 들뢰즈.

 

- 알튀세르가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스피노자의 3종의 인식과 자신의 세 가지 일반성이 사실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사실 그건 잘못 생각했다기보다 알튀세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내가 스피노자 3종의 인식에 대해 예잔에는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계속 생각하다보니 그에 관해서 더 좋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스피노자는 그에 관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내가 볼 때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3종의 인식의 아주 풍부한 사례들이 나오는 책, 3종의 인식으로 가득 찬 책이 있다. 바로 <신학정치론>. 내가 볼 때 3종의 인식은 singular thing에 대한, 독특한 실재에 대한 인식이고, 2종의 인식은 보편적 인식인데, 내가 볼 때 <신학정치론>이야말로 이 singular thing에 관한 인식으로 가득 차있는 책이다ㅡ 라고 말한다.

- 현대 사회가 과학과 문화의 발전으로 옛날 사람들보다 자명한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이게 더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개인적으로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쓰고 인공지능이 발전하고 그밖의 여러 기술이 발전했지만 우리가 그 원리를 알고 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윈도우를 쓰지만 가면 갈수록 이 윈도우의 원리가 뭔지 전혀 몰라도 잘 쓸 수 있게 만들어서 내어놓지 않는가. 우리의 인식이 더 증대했다, 더 적합해졌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 스피노자의 직관과 베르그송의 직관은 다르다. 베르그송의 직관은 지성하고 상당히 대비되는 개념이다. 지성이 상당히 추상적이고 뭔가 분리된 인식을 가리키는 데에 반하는 직관. 그러니까 베르그송의 경우 직관과 지성이 너무 대립적 대조적인데, 스피노자는 2종의 인식이 지성과 3종의 인식인 직관적 지식 사이의 단절과 대립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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