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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리3이 너무나 당연한 말을 쓴 것 같지만("주어진 규정된 원인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결과가 따라 나오며, 반대로 아무런 규정된 원인도 주어져 있지 않다면 결과가 따라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모든 일에는 다 규정된 원인이 있다"는 하나마나해보이는 말), 그리고 인간-특히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성적 인간-은 누구나 다 저 당연한 말에 동의할 것 같지만, 잘 생각해보면 인간은 어떤 초월적 영역, 불가지한 영역에 쉽게 유혹된다. 합리적으로 밝혀내지 못한 원인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종교에서의 신, 사주나 별점 같은 미신)믿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면 얼마든지 신비초월성에 이성의 영역을 내어주면서까지 믿으려고 든다. 믿고 싶은 것 앞에서는 합리적으로 밝혀내지 못한 원인에 대한 그럴만한 이유를 어떻게든 붙여주고 싶어하고, 심지어 그 합리적으로 밝혀내지 못한 원인에 어떻게든 합리를 부여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사주나 별점의 경우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인류 역사를 거쳐 쌓인 통계에 기반한다인데, 몇 세기를 걸쳐 몇십 만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운명과 성격을 탄생일과 탄생시간별로 자료를 모아 분석하고 통계를 낸 흔적으로서의 실질적 자료를 본 적 있는 사람? ‘통계에 기반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그 누구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그리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불가능한 작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기독교에서 성경에 근거하여 신의 기적이라는 초월에 합리를 덧입히려고 하는 것은 또 어떻고.


'합리가 통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신은/오컬트는 초월적 영역에 속해있는 거라서 인간의 지성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는 말로 믿고 싶은 것을 그냥 영역 밖의 어떤 미지의 세계라는 신비를 덧바른다. 물론 인간의 지성이 매우 하찮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자연만물을 신이 만들어냈고 조종한다는 이유를 붙여 인간의 삶에 종속시켜버리고, 자연 그 자체로 존재하는 별자리를 미지의 영역이라는 이유를 붙여 인간의 삶에 대해 말해주는 어떤 것이라고 보는 것 자체가 이미 너무 인간 중심주의 아닌가. 인간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자연만물들이 인간의 운명에 대해 다 말해주고 신앙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돈독하게 하기 위해 기독교적 수단으로 존재하겠어. 인간처럼 하찮은 존재에 자연만물이 그리 관심이 있을 거라고, 거기서 인간의 운명을 읽고 점칠 수 있고 신앙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은 그냥 일개 만물 중 하나일 뿐이니까. 


아무튼 초월적 존재인 신에 대한 중세신학의 이런 비합리적인 점들이 스피노자는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식할 수 없는 영역따위를 아예 뿌리뽑아버리려는 의지가 듬뿍 담긴 공리2, 공리2에서 분명히 그은 선 위에 한 번 더 분명한 선을 긋는 공리3이 어쩐지 좋았다. 그리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공리3을 읽으면서 뭐야, 이거 너무 당연한 말이잖아?”라고 말하는 현대사회의 이성적인 사람들 중에도 믿고 싶은 것앞에서는 저 공리3을 쉽게 버려버릴 사람이 많을 거라는 것을. 중세신학의 시대에 살면서 스피노자는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4-5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주나 별점을 보러 다니고 재미있어하고 진지하게 귀담아 듣기도 했던 사람= 즉 공리3처럼 생각하지만 믿고 싶은 것 앞에서 지성을 잠시 버리고 초월성을 덧바르며 무너졌었던 사람으로서 매우 찔렸고, 반성합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나의 비이성을 저러다 말 귀여운 일탈로 여겨주고 견디어줬던(심지어 매우 심드렁한 상태로 같이 사주나 별점을 보러 가주기도 했던), 나의 친구들에게도 감사합니다... 


아울러 공리3을 정의7과 함께 생각해보면서, “자유로움에 대해 오해하는 많은 사람들이(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부정적 감정을 주거나 압박- ‘잘하고 싶다라는 성취욕까지 포함하는 압박-을 주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것을 진정한 자유로움이라고 오해하는) 합리적 인식 영역을 벗어나는 것 앞에서 매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두 가지 모두 객관적 이성의 토대가 단단하지 않을 때 쉽게 빠져들 수 있는 것들이니까. 자유에 대한 오해(이성이 헐거우면 감성과 부딪히는 제약적인 것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버거우니까)와 비이성적 영역에 대한 맹신(이성 대신 감성을 건드리는 마음에 드는 것들이 주는 위안은 매우 크니까).


3. 사주나 별자리에 대한 신뢰를 보이지 않을 때 명리학자나 점성술사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이것이다. "인간이 되게 복잡하고 개개인이 다 특별해보여도 사실 그렇지 않다.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눠 분류할 수 있고, 그 분류에 누군가는 속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적 오만이다"  나는 여기에 동의한다. 심지어 12가지 유형 분류도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ㅋㅋㅋ 소설이나 시나리오 작법서만 읽어봐도 그렇다. 인간 캐릭터나 인간의 삶을 담은 서사구조의 종류는 의외로 몇 가지 안 된다. 그 몇 가지 안 되는 타입이 끝임없이 변주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유형 분류의 기준이 '출생년도와 출생시간' '별자리'라는, 과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아무런 근거 없는(아무 자료나 사료도 없는 통계학 이야기 빼놓고는) 것이라면, 그게 어떻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되겠느냐는 것이 이성적인 사람들이 사주나 별자리에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근거다. 근거 없는 전제로 그룹핑을 한 뒤에 미래까지 점치는 것을 어떻게 믿지? 기독교 교리도 마찬가지다. 성경이라는, 누군가의 번역이 거친 텍스트를 누군가의 해석이 붙은 설교로 전해지는 것인데 그 "누군가"의 역량에 따라 천차만별의 해석이 나오는 와중에 하나의 신앙적 규범이라는 것이 굳건하게 존재하는 게 가능한가? 그걸 마치 "신의 말씀" "신의 뜻"이라고, "누군가"에 해당하는 인간들의 사고가 완전히 배제된 초월적 교리라는 듯이, 무조건 따르고 순종하라고 주장하는 걸 어떻게 믿지? 허무맹랑한 것에 기대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나도 내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나약했던 시기에 이 모든 것들에 차례로 한번씩 기대었던 몇 년의 시간들이 있었기에), 그 허무맹랑함을 '합리'로 치장하고 이성적 인정까지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 같지 않지만 그냥 내가 믿고 싶어서-라고, 잘 쓴 건 아니지만 그냥 내가 읽으면 좋아서-라고 아끼는 책 이야기하듯 하면 되잖아.


4. 별점과 신앙 이야기하면서 정희진 님이 그랬지. 그게 무엇이 됐든 인생에서 쉽게 답을 얻으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은 다 사기라고.


5. 그래서 스피노자의 성격이 확실히 보이는 공리2와 거기에 함축되어있는 뜻이 정말 좋았다("다른 것에 인식될 수 없는 것은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인식할 수 없는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들, 그래서 초월성이라는 아우라를 자동적으로 갖게 되는 것들에 대해 그런 건 있을 수 없다고 철저하게 논박하는 것. 그 "초월성"이라는 아우라가 중세신학의 신에게 비합리적이면서 커다란 권위를 부여하는 당대 분위기의 싹을 아예 뽑아버리려는 그의 지성적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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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한 적 있다. 사실 시중에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관한 책들이 제법 많이 나와있다. 요약본, 개론서, 해설서 등등. 아니, 여기까지 갈 것도 없이 <에티카> 원서도 있고, 번역서들도 여러 권있다. 이 중에 서너 권만 골라서 읽으면 되지 않을까. 보통 내가 책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재미나 지식, 지혜, 저 모든 것들을 즐길 수 있는 방법적 틀, 같은 것들일 테니까.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렇게이렇게 말했고 이것은 이러저러이러저러한 것이며 여기서 우리는 이렇고저렇고를 배울 수 있다정도의, 생산적이고 삶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결론에 해당하는 메시지들을 바로 가져가고 넘어가는 것이 여러모로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에 2시간 30분씩, 네 번의 세미나를 거쳐 겨우 책에서 한 장에 해당하는 분량을 읽어내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렇게 문장 by 문장으로 해석하고 파고들면서 a-> b-> c-> d.... 그러다가 마침내 Z를 얻어내는, 결국에는 저 Z에 해당하는 것들을 얻거나 알고자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인데 그 과정인 a, b, c, d, e, f....에 이렇게 1년 이상을 통째로 쏟아 붓는 것이 과연 현명한가. 비생산적이지 않은가. 이런 현타가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10시간동안 한 장을 읽은 경험이 그동안 했던 몇 안 되는 철학공부 비스무리와 비교했을 때 훨씬 재미있었고, 이 과정을 쫓아가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철학에서 얻고 싶은 것 그 자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느리게느리게 걸어가는 시간들이 무척 황홀했다. 세미나가 끝나고 녹초가 된 상태로 집에 돌아갈 때면 늘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릴 수가 없었다


이런 소회들을 느끼던 중에 공리4를 접했고, 스피노자가 했던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으로라는 표현이 성큼 와 닿았다. 첫 시간에 스피노자가 "어떻게 해야 자신이 갖고 있는 철학사상을 최대한 진리의 소실 없이 전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그 오랜 고민 끝에 기하학적 방식으로 집필한 것이 <에티카>라는 이야기와 하나의 맥락에서 생각하면, 나는 지금 최대한 진리의 소실 없이 전할 수 있는고민이 담긴 <에티카>최대한 진리의 소실 없이가져가기 위해서,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이 끼어들 여지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이렇게 한 문장 한 문장에 몇 시간씩을 들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아무리 이렇게해도 당연히 엄청나게 많은 진리의 소실이 있을 것이고,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으로 남는 진리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행위 자체에서 오는 감동이 크다. 이를테면 10시간의 소요 끝에 공리4에서 2부 정리7로 넘어갔을 때, 그리고 공리5에서 공리6으로 넘어갔을 때 몰려오는 커다란 감동 같은 것은 이런 방식이 아니었다면 얻을 수 없었을 것이기에.


삼스럽지만(정리1에서부터 정리10까지 읽으면서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기 때문에), <에티카> 정리들의 간결한 한두 문장이 도출되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살면서 뇌를 가장 근사하게 쓰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스피노자 철학에 관심이 있어서 나에게 이런저런 것을 묻는 친구들에게 이제부터는 잊지 않고 덧붙이려고 한다. “기회가 있다면 꼭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는 강독을 들어봐라고. 가장 비생산적이지만 가장 짜릿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에티카>는 담겨있는 메시지를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들기에도 시간이 매우 많이 걸릴 난해한 책이지만, 그 메시지를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것에만 만족하기에는, 메시지가 도출되는 과정을 하나하나 느릿느릿 따라가는 감동을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책이다. 기하학적으로 단단하게 세공된 철학책은 에티카가 유일하니까. 수학 교과서에서 외우라고 파란칸이 쳐져있는 공식을 그냥 외우는 것보다 그 공식이 왜 나왔는지를 알아가는 즐거움, 혹은 영어 단어를 그냥 외우는 것보다 그 단어의 어근과 어원을 아는 재미에 약했던 사람은 <에티카>를 보면 정신을 못 차릴 지도 모른다ㅋㅋ 정리5때도 그랬지만 정리8의 증명을 따라가면서도 그랬다. 수학적 짜릿함. 나의 머릿속에 레고가 한 조각도 남김없이 딱딱 맞춰지며 작고 볼품없는 건물이라도 하나씩 세워지는 짜릿함.

 

- 정리8 + 정의6 = 하나의 속성에 존재하는 각각의 무한한 실체가 있고 각각의 무한한 실체가 무한하게 많이 구성된 것이 신인가. 그렇다면 실체는 무한+1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인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있고 무한하게 많은 실체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 무한하게 많은 실체들이 구성하는 절대적인 신이라는 존재가 있으니 그게 바로 1. <- 아 이 기하학적 추론의 아름다움 어쩔거야ㅠㅠㅠ 무한+1이라니ㅠㅠㅠㅠ) 대체 실체는 몇 개나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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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틀 무렵까지도 잠이 오지 않아 이 책 저 책 이 메모 저 메모 뒤적이던 중 우연히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서문의 한 구절을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서 당황했다.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모든 확실하고 굳건한 인식은 이미 확실하게 알려진 것으로부터만 끌어내고 도출될 수 있기 때문에, 후자의 것[이미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처음부터 견고한 토대로 놓여야 하며, 이 위에 그 이후 인간 지식의 건물 전체를 구성해야 한다.”


평범하다면 매우 평범한 문장이고, 기본이라면 너무 기본인 이야기인데 사실 나는 이 구절이 예전에 처음 읽었을 때도 무척 좋았다(인생의 제2원칙 정도로 삼고 싶었다). 오늘 새벽 갑자기 눈물이 났던 건 어제의(사실 요즘 계속 누적되어왔던) 여파로 잠을 거의 설친 상태에서 이 구절이 자동으로 #미투운동과 연결되어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미 확실하게 알려진 것]공적으로견고한 토대로 제대로 놓여본 적이 없어서, 알려지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까지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토대가 될 [이미 확실하게 알려진 것]들에 대해 공적 합의를 제대로 해놓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 모두는 사실 알고 있었지만 공적으로는 모르는 것으로 되어있었던 알려진 것들을 단단하고 견고한 공적 사실로 만들기 위해,

그래서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은 유형의 폭력 뒤에서 혼자 고통스럽게 견디고 있을 이들 또한 인식의 영역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해 이렇게 기를 쓰고 있구나, 살아온 삶을 걸고 살아갈 삶까지 다 걸고.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 모두를 걸고. 더 일찍 견고하게 토대를 닦아놓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좀 더 용기 내어 싸웠어야 하지 않았을까 같은 자책감도.


이 위에 어떤 건물을 짓기 시작할지, 지금 우리는 몇 번째 삽 정도를 뜬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아직 겨우 첫삽을 뜨고 있는 중인 줄도 모른다. 이제야 겨우 일상에서 행해지는 권력형(젠더권력형도 포함) 성폭력을 당하는 한국여자들의 목소리들을 듣기 시작했다. 겨우 '듣기 시작'했다. 아직 제대로 듣고 있지도 않을 이주노동여성들, 장애인들, 성소수자들 문제까지 가려면 아직도 멀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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