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생각을 한 적 있다. 사실 시중에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관한 책들이 제법 많이 나와있다. 요약본, 개론서, 해설서 등등. 아니, 여기까지 갈 것도 없이 <에티카> 원서도 있고, 번역서들도 여러 권있다. 이 중에 서너 권만 골라서 읽으면 되지 않을까. 보통 내가 책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재미나 지식, 지혜, 저 모든 것들을 즐길 수 있는 방법적 틀, 같은 것들일 테니까.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렇게이렇게 말했고 이것은 이러저러이러저러한 것이며 여기서 우리는 이렇고저렇고를 배울 수 있다” 정도의, 생산적이고 삶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결론에 해당하는 메시지들을 바로 가져가고 넘어가는 것이 여러모로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에 2시간 30분씩, 네 번의 세미나를 거쳐 겨우 책에서 ‘한 장’에 해당하는 분량을 읽어내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렇게 문장 by 문장으로 해석하고 파고들면서 a-> b-> c-> d.... 그러다가 마침내 Z를 얻어내는, 결국에는 저 Z에 해당하는 것들을 얻거나 알고자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인데 그 과정인 a, b, c, d, e, f....에 이렇게 1년 이상을 통째로 쏟아 붓는 것이 과연 현명한가. 비생산적이지 않은가. 이런 현타가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10시간동안 ‘한 장’을 읽은 경험이 그동안 했던 몇 안 되는 철학공부 비스무리와 비교했을 때 훨씬 재미있었고, 이 과정을 쫓아가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철학에서 얻고 싶은 것 그 자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느리게느리게 걸어가는 시간들이 무척 황홀했다. 세미나가 끝나고 녹초가 된 상태로 집에 돌아갈 때면 늘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릴 수가 없었다.
이런 소회들을 느끼던 중에 공리4를 접했고, 스피노자가 했던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으로”라는 표현이 성큼 와 닿았다. 첫 시간에 스피노자가 "어떻게 해야 자신이 갖고 있는 철학사상을 최대한 진리의 소실 없이 전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그 오랜 고민 끝에 기하학적 방식으로 집필한 것이 <에티카>라는 이야기와 하나의 맥락에서 생각하면, 나는 지금 ”최대한 진리의 소실 없이 전할 수 있는“ 고민이 담긴 <에티카>를 ”최대한 진리의 소실 없이“ 가져가기 위해서,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이 끼어들 여지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이렇게 한 문장 한 문장에 몇 시간씩을 들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아무리 이렇게해도 당연히 엄청나게 많은 진리의 소실이 있을 것이고,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으로 남는 진리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행위 자체에서 오는 감동이 크다. 이를테면 10시간의 소요 끝에 공리4에서 2부 정리7로 넘어갔을 때, 그리고 공리5에서 공리6으로 넘어갔을 때 몰려오는 커다란 감동 같은 것은 이런 방식이 아니었다면 얻을 수 없었을 것이기에.
새삼스럽지만(정리1에서부터 정리10까지 읽으면서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기 때문에), <에티카> 정리들의 간결한 한두 문장이 도출되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살면서 뇌를 가장 근사하게 쓰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스피노자 철학에 관심이 있어서 나에게 이런저런 것을 묻는 친구들에게 이제부터는 잊지 않고 덧붙이려고 한다. “기회가 있다면 꼭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는 강독을 들어봐”라고. 가장 비생산적이지만 가장 짜릿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에티카>는 담겨있는 메시지를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들기에도 시간이 매우 많이 걸릴 난해한 책이지만, 그 메시지를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것에만 만족하기에는, 메시지가 도출되는 과정을 하나하나 느릿느릿 따라가는 감동을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책이다. 기하학적으로 단단하게 세공된 철학책은 에티카가 유일하니까. 수학 교과서에서 외우라고 파란칸이 쳐져있는 공식을 그냥 외우는 것보다 그 공식이 왜 나왔는지를 알아가는 즐거움, 혹은 영어 단어를 그냥 외우는 것보다 그 단어의 어근과 어원을 아는 재미에 약했던 사람은 <에티카>를 보면 정신을 못 차릴 지도 모른다ㅋㅋ 정리5때도 그랬지만 정리8의 증명을 따라가면서도 그랬다. 수학적 짜릿함. 나의 머릿속에 레고가 한 조각도 남김없이 딱딱 맞춰지며 작고 볼품없는 건물이라도 하나씩 세워지는 짜릿함.
- 정리8 + 정의6 = 하나의 속성에 존재하는 각각의 무한한 실체가 있고 각각의 무한한 실체가 무한하게 많이 구성된 것이 신인가. 그렇다면 실체는 무한+1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인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있고 무한하게 많은 실체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 무한하게 많은 실체들이 구성하는 ‘절대적인 신’이라는 존재가 있으니 그게 바로 1. <- 아 이 기하학적 추론의 아름다움 어쩔거야ㅠㅠㅠ 무한+1이라니ㅠㅠㅠㅠ) 대체 실체는 몇 개나 존재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