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소녀를 만나다 - 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 문지 푸른 문학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엮음, 김종회 책임편집, 황순원 원작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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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얼마 전 <어둠에서 벗어나기>를 읽으며, 이야기에 있어서 죽어 가는 자의 권위에 대해 생각했었다. 나는 방송에서 책을 소개하려고 몇 년만에 황순원의 <소나기>를 다시 읽었고, 그 직후 <어둠에서 벗어나기>를 읽은 탓인지 이번에도 두 책이 겹쳐 보였다. <소나기>는 1952년에 쓰여진 작품인데, 이 시기가 한국전쟁 당시였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 나라에서 "죽음이 또 다른 얼굴을 획득하는 과정" 에서 쓰여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어둠에서 벗어나기>에서 디디 위베르만은 우리가 이야기와 멀어진 이유를 벤야민의 말을 빌려와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죽음이 또 다른 얼굴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지나친 격의일 수 있지만, (나는 모든 것을 정확히 말해야 하는 학자적 책임과 같은 것은 사람이기에) <소나기>에서 소녀가 죽을 때 한 말, "자기가 죽거던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고 한 부분에서 벤야민이 이야기꾼에 대해서 쓰면서 하는 말, "이야기를 구성하는 질료들은 죽어 가는 자에게서 소통 가능한 형식을 띠게 된다. (중략) 그리고 자신의 표현과 자신의 시선 속에서 갑자기 잊을 수 없는 것이 솟아 오른다. 이것이 이 사람을 스쳤던 모든 것에 권위를 부여한다"와 겹쳐 보였다. 아마도 소녀의 분홍색 스웨터는 그래서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었을 것이다. <소나기>의 기원에는 죽어가는 소녀의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 <소년, 소녀를 만나다>는 <소나기>에 대한 아홉편의 오마쥬다. 개인적으로는 전상국의 <가을하다>는읽기 좀 거북했지만 나머지 단편들은 모두 재밌었고, 발상도 흥미로웠다.  특히 '이어쓰기'를 전승이라고 할 때 이어쓰기는 이야기만의 독점적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이 책이 <소나기>를 정보를 전달하는 하나의 고립된 소설이 아니라 경험을 전달하는 이야기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홉 편의 이야기에 모두 죽음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


1.안녕하세요? 이번 주에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시나요?


혹시 황순원 작가의 단편소설 <소나기> 읽어보셨나요? 


2.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라면 국민단편이니 저도 당연히 학교 다닐 때 읽어봤죠.


 그러면, 혹시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 소녀의 이름도 아시나요? 혹시 기억하세요?


3. 소설 <소나기>에는 소년과 소녀의 이름이 나왔나요? 저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네, 소설 <소나기>에는 한 소녀와 한 소년이 나옵니다. 소녀는 서울에서 온 윤초시네 증손 딸이구요 분홍색 스웨터에 단정한 치마를 입은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는 5학년 여학생입니다. 소년은 소녀가 온 시골 마을에서 살고 있고 소녀가 던진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만지작 거리는 부끄러움 많은 동갑내기 친구에요. 소년은 개울가 징검다리에서 만난 소녀를 좋아해 꽃도 꺾어다 주고, 밭에 들어가 무도 뽑아 나눠 줍니다. 소녀에게 잘 보이려 코뚜레도 뚫지 않는 송아지 등을 타보이기도 하구요. 그러다가 둘은 산너머로 놀러 갔다가 소나기를 만납니다. 소년은 소녀가 소나기를 피할 수 있도록 수수밭으로 달려가 수숫단을 세워주고, 비가 와 물이 불어 있는 도랑을 소녀를 업어 건넙니다. <소나기>의 결말은 아마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소녀는 소나기를 맞은 일로 앓다가 제대로 약도 써보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소녀의 아버지가 사업 실패로 어려운 처지였기 때문이죠. 소녀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해요. “그런데 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구..”. 


4. 그 옷은 소년과 함께 소나기가 오는 날 소녀가 입고 있던 옷이죠? 소년의 등에서 진흙물이 베어 버려서 얼룩이 생긴..


 네, 아마 소녀는 소년과 산너머까지 놀러다닌 것이 참 좋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구’ 했는데요, 이 말은 소녀의 마지막 말이기도 하고, 또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해요. 


5. 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여운이 오래 남았습니다. 이제 홀로 남은 소년의 마음은 어땠을까, 죽기 전 소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네, 저도 <소나기>를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다니며 국어 시간이었는데요, 교과서에 참 좋은 작품이 많지만 제게는 <소나기>는 소설을 읽은 원-체험이라고 할까요, 소설이란 것이 이런 거구나 하고 처음 느낀 원초적 기억처럼 남아 있습니다.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사랑도, 또 소설의 배경이 되는 개울이 흐르고, 갈대 밭이 있고, 수박 밭, 무 밭 사이로 저 멀리 원두막이 보이고, 허수아비를 흔들고, 아름다운 풀꽃 들꽃이 피어있는 공간은 한국 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보편적 기억’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소녀가 남긴 말은 많은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죠. 

 지금까지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에 대해서 길게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사실 <소나기>가 아닙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책은 문학과 지성사에서 만들고,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에서 엮은 <소년, 소녀를 만나다>라는 책이에요. 이 책의 부제에는 ‘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라는 제목이 붙어 있어요. 말 그대로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 남는 여운과 마지막 대사가 불러 일으키는 저마다의 상상력으로 <소나기>를 이어쓰는 9편의 소설이 실려 있습니다. 


6. 아, 그러니까 <소나기>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아홉 개의 작품을 담은 책이군요. 정말 재미있는 기획이네요.


 아까 제가 소년과 소녀의 이름을 기억하시냐고 여쭸는데요, 원작 <소나기>에는 소년과 소녀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작가는 소년과 소녀의 이름을 붙이지 않는 방법으로 소설을 읽는 독자가 누구라도 자신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도록 했겠죠. 그런데 이 책에서 <소나기>를 이어 쓴 서하진 작가의 <다시 소나기>에는 소년의 이름은 ‘환’, 소녀의 이름은 ‘윤희수’로 소개됩니다. 소년, 소녀에게 이름을 붙인 것도 재밌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소설의 내용도 흥미롭습니다. <다시 소나기>에서 ‘환’은 윤희수의 사촌인 윤희영과 한 반이 됩니다. 처음에는 희영이 희수의 사촌인 줄 몰랐던 환은 희영이 희수와 많이 닮았다고만 생각했는데, 우연히 함께 귀가하다가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둘이 걷다 다시 소나기를 만나고, 둘은 함께 달리기 시작합니다. 서하진 작가는 희수와의 기억이 사촌인 희영과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상상력을 발휘해본 것이죠.


7. 아, 재밌네요. 마지막에 환과 희영이 다시 소나기를 만나는 것도 원작 <소나기>의 내용이 오마쥬되는 거네요.


 네, 그래서 이 작품 제목이 <다시 소나기>이기도 해요. 이외에도 아홉 편의 단편에서 원작 <소나기>의 여러 내용이 차용되고, 저마다 다른 상징과 의미로 활용됩니다. <소나기>에서 소녀가 개울가에서 소년에게 집어 던진 ‘조약돌’, 그리고 조약돌을 집어 던지며 소녀가 소년에게 한 말 ‘이 바보’라는 말, 또 소녀가 소녀에게 건네 준 ‘대추 한 줌’, 거기에 대한 보답으로 소년이 근동에서 제일 가는 맛이라 서리한 ‘호두’, 소녀가 입고 다녔던 ‘분홍색 스웨터’, 둘이 함께 맞았던 ‘소나기’ 등 소설에 나오는 소품과 소재들이 아홉편의 소설에서 저마다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 책에서 구병모가 이어 쓴 <헤살>은 소녀가 죽고 나서 소년의 슬픈 마음을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헤살>에서는 소녀가 죽고난 후 소년도 며칠 아팠다고 작가는 상상합니다. 소년은 학교도 한동안 가지 못했는데, 유급을 피하려 학교에 가는 날 다시 문제의 개울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물 안개가 자욱히 껴 잘 보이지 않는 건너편을 응시하며 징검다리를 건넙니다. 제가 잠깐 읽어보겠습니다.


“소년은 한 발을 돌 위에 올려놓았다. 다음 그리고 다음. 네댓번째, 예닐곱번째를 가볍게 건너뛰어 기어이 그 자리에 섰다. (중략) 소년은 부스러지고 눅눅해져 이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호두 알맹이를 개울에 뿌렸다. 물살을 따라 어딘가로 춤을 추는 듯 떠내려갔다. 주머니를 까뒤집어 나오는 대로 뭐든 개울에 떨어뜨렸다. 말라비틀어진 대추 몇 알하며 소녀의 목덜미처럼 흰 조약돌까지”.


8. 호두 알맹이도, 대추알도, 조약돌도 개울에 떠내려 보내며 슬픔까지 떠내려 보려고 했던 것이군요. 


 네, 그래서 저도 구병모가 이어 쓴 <헤살>은 소년의 애도를 담고 있는 이야기로 읽었구요, 특히 <헤살>은 이야기가 이뤄지는 시점도 소녀가 죽고 난 직후고, 문체도 황순원 작가의 것을 최대한 따라 쓰고자 한 점이 있어 마치 <소나기>와 한편의 이야기처럼 읽힙니다. 하지만 <소나기>에서 호도, 대추알, 조약돌은 소년과 소녀의 소박하고 수줍은 사랑을 상징하는 것들이었지만 <헤살>에서는 슬픔과 애도의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점이 차이라 할 수 있겠죠.


9. 선생님께서는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었던 이야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솔직히 말씀드려 모두 다 재밌었는데요, 특히나 기발하다고 생각하며 읽었던 작품은 손보미 작가가 쓴 <축복>입니다. 좀 소개를 해드리면요, 손보미 작가는 <소나기>에 소년과 소녀 두 사람 말고 원작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제 3자를 개입시킵니다. 그 제 3자는 바로 소녀를 좋아하는 소년을 좋아하는 또 다른 소녀입니다. 기발한 상상이죠? <축복>에서의 주인공인 이 시골 소녀는 서울서 전학 온 소녀를 부러워 합니다. 얼굴이 ‘햇볕에 타서 시커멨고 머리카락은 귀밑까지 짧게 자르고 다녔던’ 자신과 ‘분홍색 스웨터와 남색 스커트를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반양말을 신고서는 얼굴이 아주 하얀’ 서울서 온 소녀와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한 소년이 서울 소녀에게 갈꽃을 꺽어주고, 조약돌을 집어던지고 하는 걸 모두 숨어서 바라 봅니다. 못났고 예쁘지도 않은 자신의 모습에 비해 서울 소녀와 소년의 데이트는 너무나 아름다웠던 거죠. 그런 소녀는 서울 소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여자애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또 소녀가 죽습니다. 소녀는 자라서 서울에 있는 여대에 진학 후 친구들이 시위를 하며 거리에서 죽어가는 것을 봅니다. 이 과정에서 ‘죽음’의 의미를 좀 더 이해하게 됩니다. 소년이 서울 소녀가 죽었을 때의 느꼈을 감정에 대해서도 생각하구요.


10. 아, 소년과 소녀를 바라보는 또 다른 소녀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네요.


 심지어 이 책에는 소년이 노인이 되어 등장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노희준 작가가 쓴 <잊을 수 없는>에서 소년은 이제 노인이 되어 동물원에서 어린 손녀와 함께 앉아 있습니다. 이제 노인이 된 소년은 치매 초기 증상를 보입니다. 치매를 앓으며 가까운 기억부터 사라져 이제 노인은 소년일 때의 기억 앞에 있습니다.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상처도 이십대의 가슴앓이와 함께 지나가 버렸고”, “열심히 일하는 동안, 소녀의 기억은 전생처럼 멀어져” 갔습니다. 그리고는 손녀와 함께 있는 동물원에도 소나기가 내립니다. 인생의 끝자락에는, 열정도, 사랑도, 가슴앓이도 사위어가지만 그럼에도 동심의 기억은 여전히 강렬합니다. 이 작품에서 원작 <소나기>의 이야기는 하나의 추억이 되고, 소나기는 그 추억을 되살리는 매개가 됩니다.


11. <소나기>의 소년이 노인이 된 이야기까지, 흥미로운 책입니다. 이 책을 소개해주시는 이유 정리해주시죠.


 이 책은 지난 2015년 황순원 탄생 100주년을 맞아 황순원 문학촌에서 여러 작가들이 <소나기>를 오마주한 작품을 묶은 책입니다. 다섯 편은 황순원 작가의 경희대 제자인 다섯 명의 현역 작가들, 네 편은 경희대 출신의 젊은 작가 4명의 작가가 썼습니다. <소나기>는 1952년 작품이구요, 이 소설이 쓰여진지는 60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 엮인 아홉 편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고민들도 담고 있습니다. 소년을 노인으로 그린 작품은 기억의 문제, 세대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또 시골 소녀와 서울 소녀의 대비가 나타나는 작품에서는 서울과 지방 사이의 문제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작품에서는 소년이 이제 자라 공장 노동자가 되는데 여기에서는 도시 삶의 고단함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야기에서는 소녀가 외계인이었다는 설정도 있습니다. 저마다 지금의 문제를 <소나기>의 뒷이야기를 상상하며 다루고 있습니다. 


 책을 구매하시면, 별책으로 ‘소나기 이어쓰기’라는 노트를 한 권 받게 되시는데요, 여기에는 독자들 역시 자신만의 <소나기> 이어쓰기를 권유하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도 아홉 명의 작가처럼 이번 여름 소나기 오는 날, 마음을 다잡고, <소나기> 이어쓰기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어떤 이야기라도 좋습니다. 그렇게 쓴 이야기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시대가 담겨 있는 것이죠. 거기서부터 치유가 일어납니다. 문학의 힘인 것이지요. 이 책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읽어보신다면, 청취자분들, 문학을 만나게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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