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엄기호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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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인권 운동을 하던 저자가 마주한 고통과 그 고통의 주변 세계를 고찰한 책이다. 누구든 한 번은 고통의 당사자 혹은 고통을 곁에서 지켜봐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한 번의 상처로 지나가는 고통이나 시간이 가면 털어버릴 수 있는 고통이 아닌 고통의 당사자를 파괴할 정도의 고통은 곁을 지키는 사람조차 망연하게 만들곤 한다. 저자 엄기호는 "고통을 겪는 이들의 주변 세계"에 주목했다. 다시 말해 '고통' 자체를 다루지 않는다. 이 책은 "고통을 겪는 이들이 그 곁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해부하고 "고통의 곁이 말할 수 있어야" 함을 환기하기 하고 있다.


최근 가까운 이가 겪는 고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야 했던 경험때문에 관념적 수사가 많아 다소 어려운 책임에도 읽을 수 있었다. 저자가 적시하는 "고통의 말할 수 없음"이 무엇인지 "고통의 겪는 이의 언어는 '주문'일 수 밖에 없다"는 문장의 의미를 경험 속에서 해석해낼 수 있었다.


3부로 구성된 책의 첫 부분에서는 "고통의 겪는 이의 언어가 어떻게 응답을 기대하지 않고 응답을 할 수 없는지, 그리하여 곁을 파국으로 몰고가는지를" 다룬다. 고통 당하는 사람의 비명에 가까운 언어가 대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주변을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설명하는 대목이 실감났다. 울부짖는 사람 곁에선 아무런 말도 필요없게 된다. 울음과 넋두리는 누군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닐 뿐더러 대답한들 의미가 전해질리 없다.


고통의 특징이 '호소'라고 한다면, 고통이 곁을 파괴하는 이유는 호소의 일방성에 비롯된다. 고통을 호소하는 말은 일방적으로 들을 수만 있을 뿐 응답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와 타자 사이에 집을 지을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듣기를 강요하는 말이다.

p.106


저자는 고통받고 있음을 공감하면서 소통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본다. 그러나 이 과정에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고통받고 있음을 말하려면 고통 자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의 당사자에게도 고통의 서사를 구성할 곁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겪고 있는 '것'인 고통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겪고' 있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그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과정, 말할 수 없는 것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 대한 것 말이다.  (…)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그 과정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서로가 고통받고 있음을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 말할 수 있다.

p.114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어떻게 고통이 이 사회의 정치이자 경제가 되었는지", "비참의 전시를 통해서만 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 대해 들여다본다. 고통은 전시되고 소비된다. 더 쎄게 보여주고 말하는 고통이 더 많은 주목을 받고 고통은 더이상 고통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재미가 된다. '정의'라는 명분으로 신상털이가 이뤄지고 플랫폼은 피해자를 관종으로 만들어버린다.


저자는 '곁'에 선 사람이 "고통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쓴다. 3부에서는 당사자가 말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는 자리는 '곁'이며 그 '곁'이 굳건하기 위해 '곁'을 지키는 '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곁'의 역할을 윤리적으로 미화시키는 일을 경계한다. 고통의 '곁'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해야하며 지쳤을 때 '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죄책감을 갖지 않고 역할을 교대할 수 있을 때 더 나은 보살핌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불길한 조짐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이것이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 더욱 불길하다. 사회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자기의 고통을 전시하며 주문을 외는 동안 곁은 빠르게 파괴된다. 대신 고통의 곁에 선 이에게 나무것도 아닌 존재로 가만히 있어주기를 기대한다. 심지어 이것은 "비를 맞는 이에게 가장 좋은 사람은 같이 비를 맞는 사람"이라는 말로 윤리화되고 미학화되어 있다.

pp.16-17


책은 고통에 대해 말하는 방법으로 "자신에 대한 앎에 도달하"기 위한 글쓰기를 제안한다. 고통의 당사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나와서 '곁'의 위치에서 고통을 말할 수 있다. '곁'의 자리에 서는 가장 좋은 도구가 '글쓰기'다. 저자는 "자기 자신의 곁에서 스스로에게 말을 걸"면서 파괴된 내면을 재건할 수 있다고 전한다. 곁의 도움을 받지 않고 고통의 당사자가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게 된다. 자신과 고통에 대한 글쓰기는 고통의 당사자가 스스로의 독자가 됨으로써 고통을 객관화할 수 있게 만든다.


글쓰기는 그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도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 조건인 복수성을 짓는 '구축의 도구'이기도 한 셈이다. 글쓰기를 통해 사람은 자기 자신과 동행할 수 있었다. 동행이 있을 때 사람은 동행의 말에 자신을 비추어보고 그 말에 응답하면서 자신의 말과 글을 쓸 수 있었다. 말과 글의 자리는 그라운드 제로가 아니라 '곁'이었다. 곁에서 말과 글이 나오고, 말과 글을 통해 곁이 생긴다. 말과 글을 만들고 또 그 말과 글을 만들 수 있는 곁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동행'이다. 글을 통해 사람은 자기 자신과 동행할 수 있게 되었다.

p.238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에서도 비슷한 결론을 마주했었다. 조울증으로 정신병원 강제 입원까지 경험했던 저자는 투병을 글로 기록하면서 그 시간들을 의미화했다. 완치 가능성이 희박한 지병을 가진 환자이면서 자신의 병력을 기록하는 기록자로서 '곁'의 자리를 만든 저자는 스스로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관계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기자'라는 글쓰는 직업인이기에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고통의 당사자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경험을 하얀 종이에 문자로 인쇄해 스스로 읽어보는 작업이 의미있으리라 여겨졌다.


고통을 대하는 저자의 숙고가 지식인의 이름값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저자는 "고통과 동행하는 그들"과 "동행하는 것"이 "소위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적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숙고하여 다른 이야기로 변위해 돌려주고, 그들이 거기에 다시 응답하여 새로운 이야기가 끊이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이다. 고통의 '곁'을 고통 옆에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곁'의 '곁'으로서 역할을 고민하는 지식인이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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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