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싱 - 백인 행세하기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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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은 힘이 세다. '넷플릭스 방영'이라는 홍보 문구와 함께 출판되는 책이 자주 보인다. 출판시장 자체의 힘만으로는 웬만해서 얻을 수 없는 홍보 효과를 '넷플릭스'라는 이름에 기대어 볼 수 있기 때문일 테다. 책을 읽는 독자에게는 영상물 덕에 절판됐던 책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니 반길만 한 일이다. 넬라 라슨의 『패싱』이 그런 경우다.

『패싱』은 2006년 출간 후 절판됐고 올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화제가 되면서 출판사를 바꿔 다시 독자를 만나게 됐다. 그것도 무려 두 곳의 출판사에서. 2006년 판 서숙 번역자의 손을 거친 책이 민음사에서 7월에 나오고 이어 8월에는 다른 번역으로 문학동네에서도 출간됐다. 원작의 의미와 가치도 있지만 이름있는 영화제에서 성과를 올렸다는 것이 재출간의 가장 큰 동력이 되었을 듯 하다.


"개인, 단체나 국가간 따위에서 '열외(列外)' 취급을 당하는 경우를 빗대어 이르는 말"을 뜻하는 '패싱'은 우리 사회에서도 종종 들을 수 있는 단어다.(근래 정치 뉴스에서 많을 들렸었다.) 넬라 라슨의 책에서는 '패싱'은 다른 의미다. '백인 행세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인종 분리 정책을 고수하던 시대 미국에서 백인의 외모를 한 흑인 혈통의 사람들이 했던 '짓'을 말한다.

제목의 의미를 알게 되고 나서 생각나는 장면이 있었다. 노예무역 시기 7세대에 걸친 아프리카 흑인 역사를 다룬 소설 『밤불의 딸들』에 밝은 피부의 흑인 남성이 등장한다. 그는 재능 많은 흑인 여성과 결혼하지만 백인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가정을 버린다. 어느 날 길에서 백인 여성과 걷던 그는 흑인 아내와 아들을 마주친다. 그 때 그의 얼굴에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 어린다. 그 순간 그가 느낀 감정들이 강렬하게 느껴졌었다. 혈통을 감추고 이뤘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순간의 공포 그리고 그 이면에 서렸을 자신의 본질을 부정해야하는 수치심. '패싱'은 단순히 '행세'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소설 『패싱』에는 '백인 행세하기' 속에 잠재된 의미들을 드러낸다. '백인의 외모'는 그 시대 흑인들에게 기회가 될 수도 낙인이 될 수도 있었다. 아름다운 흰 피부의 흑인 클레어는 자신의 외모를 발판 삼아 상류사회 진입에 성공한다. 그녀는 단지 사람다운 "한 사람으로 살"고자 했다.


동정의 대상도 골칫거리도 아니라, 심지어 불량한 함의 딸도 아니라, 그냥 한 사람으로 살려고 말이야. 그리고 난 정말 많은 것들을 욕심냈어. 내 외모가 나쁘지 않고, 충분히 백인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pp.50-51


그러나 클레어의 남편은 극단적인 인종주의자였고 그와의 생활은 끊임없이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클레어의 친구 아이린 역시 백인의 외모를 가졌지만 흑인으로 살기를 선택한다. 아이린은 백인 행세를 하면서도 흑인의 삶을 동경하는 클레어와 거리를 두려하지만 같은 인종으로서의 유대감을 버리지 못한다.


인종에 대한 본능적인 충성심, 어째서 그녀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 까? 왜 거기에 클레어가 포함되어야 하는가? 클레어는 그녀나 그녀가 속한 인종을 배려하지 않는데 말이다. (…) 그녀는 사람들을 인종으로부터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고, 그녀 자신을 클레어 켄드리에서 떼어낼 수 없었다

p.200


'패싱'에는 다차원의 문제거리다. 흑인 사회에서는 백인의 외모를 가진 이들을 동경하면서도 흑인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피부색을 수단으로 백인 사회에 진출한다는 것은 더 나은 생활, 더 수월한 성공을 의미하기 때문에 시기의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패싱을 선택한 사람은 흑인 사회와 단절해야하고 자신의 근본을 철저히 숨겨야 한다. 그들은 흑인 사회와 백인 사회 어느 쪽에서도 정체가 탄로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피부가 밝은 흑인들은 때때로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남의 눈을 피해 '패싱'을 감행한다. 아이린은 백인 전용 찻집을 이용한다. 혼잡한 거리를 피해 택시를 잡아 탄 아이린에게 기사가 백인 전용 호텔 루프탑을 권하자 그 "호텔이 좋겠어요"라고 자연스럽게 응한다. 그러면서도 "백인 행세" 하는 클레어를 경멸한다. 마치 용인될 수 있는 '백인 행세"의 범위가 있다는 듯이.

아이린은 안정을 추구했다. 자신의 가정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그녀의 꿈은 클레어의 욕망으로 흔들리는 것처러 보인다. 클레어는 애써 얻은 백인 사회의 자리를 벗어나 흑인들의 세계로 돌아오려 한다. 아이린의 남편 브라이언을 이용해서. 아이린은 자신이 바라는 안정과 그에 따르는 희생에 대해 생각한다.


'안정'은 그저 단어로만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행복, 사랑, 또는 그녀가 결코 알 수 없는 어떤 본능적인 기쁨 같은 것들을 희생한 뒤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변치 않기를 바라고 믿는 것은 다른 기쁨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p.216


소설은 아이린의 시점에서 사건을 서술한다. 그녀는 상황을 판단하고 결심하고 우발적인 것처럼 행동했다. 모든 사건이 종료됐을 때 비로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과연 아이린의 눈을 통해서 본 일들이 그녀의 판단 그대로였을까. 아이린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봤다고 한다면 그녀의 시각 안에 갇혀서 독자가 간과하게 된 것은 무엇일까. 닫힌 듯 열려 있는 소설의 결말이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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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9-11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