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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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짖궃은 농담이다.
아니 몰래카메라다. 깜짝 놀랐지? 미안. 그냥 장난이었어"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프랑스 작가인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중에 "살인자의 건강법"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이 생각나게 하는 제목이었다.
그때는 기자와 소설가의 끊이지 않을 것 같은 대화였다면 이 책에서 김영하는 치매에 걸려
자신의 기억을 감각을 현재를 모두 잃어가는 70세의 치매노인 김병수 씨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 70세의 김병수 씨는 좀 특별한 사람이다. 바로 오랫동안 여러 사람을 죽여온 연쇄살인마인 것이다. 그것도 여성만 골라 살해하는..
김병수 씨는 딸인 은희와 함께 살고 있고 치매로 인해 점점 자신의 기억을 잃어가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기 위한 일종의 회고록(?)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기억을 잃어가던 중 박주태 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김병수 씨는 박주태가 자신과 같은 눈빛을 지닌, 같은 충동에 사로잡히는 인간. 즉, 연쇄살인범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박주태가 자신의 딸인 은희와 사귀는 것을 알게 되면서 멀어져 가는 기억 속에서 어떻게든 박주태로부터 은희를 구해내려 안간힘을 쓰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다. 길거리에서 정신을 잃기도 하고, 기억은 단편적으로 뚝뚝 끊어서 누가 누구인지, 얼굴을 볼 때마다 새롭다.
그리고 기억 속에서 김병수 씨는 지금 자신의 딸로 키우고 있는 은희의 어머니를 죽였을 때를 생각한다.
 
읽는 내내 흥미롭기도 했지만 뒷부분의 또 색다른 반전이 있었다.
역시 김영하는 읽히는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이야기꾼이다. 비록 그 이야기가 때로는 음습하고 거칠지라도.
 
<책속에서..>
p.8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입니다."
 
p.40
연쇄살인범도 해결할 수 없는 일 : 여중생의 왕따
 
p.94
나는 조용한 세상이 좋다. 도시에서는 살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소리가 나를 향해 달려든다.
너무 많은 표지판, 간판,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표정들, 나는 그것들을 해석할 수가 없다. 무섭다.
 
p.98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숨이 막힌다.
 
p.126
치매 환자로 산다는 것은 날짜를 잘못 알고 하루 일찍 공항에 도착한 여행자와 같은 것이다.
이런 일이 매일같이 반복된다. 그는 영원히 '제때'에 공항에 도착하지 못한 채 공항 주변을 배회하게 된다.
그는 현재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그 어떤 곳. '적절치 못한 곳'에서 헤맨다.
아무도 그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 외로움과 공포가 점증해가는 가운데 그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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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노래
김중혁 지음 / 마음산책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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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견딘다. 아니, 이 말은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뛰어넘는 법을 배운다. 시간을 가뿐히 뛰어넘어 다른 시간과 공간에 가닿는 방법을 배운다.
그렇게 시간을 견딘다. 음악이야말로 가장 짜릿한 마법이다."

김중혁의 글 속에 담긴 음악을 모두 모아 들으면서 함께 책을 읽는 호사스러운 독서를 했다.
읽을수록 느끼는데 이 작가 정말 내 스타일이다. 김중혁 작가가 작가라서 표현을 해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아마 모를거다.
내 마음 속에 담긴 이야기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글들. 언젠가는 한 번쯤 꼭 써보리라 마음만 먹고 있는 글을
김중혁 작가는 이렇게도 훌륭하게 써서 아무렇지도 않게 턱 하고 내놓는다. 그리고 뒤늦게 그 책을 읽는 나는..
무릎을 치며 마음을 치며.. 이 책에 홀딱 반해버린다. 너무나도 좋아서 몸서리가 칠 정도로 맘에 든다.
책에 모두 음악이 흐르는 것도.. 첫 단편 펭귄뉴스를 읽기 전 내가 먼저 읽은 건 <악기들의 도서관>이었는데 그때부터 탁! 하고
마음을 치고 울리는 것이 있었고 그래서 펭귄뉴스를 찾아보고 그래서 블라블라블라.. 이렇게 그의 책을 사랑하는 독자가 되었다.
정말... 이 책은. 그동안의 김중혁 작가의 글에 흘렀던 모든 노래를 모아모아둔 느낌이랄까?
리듬과 박자와 음악에 대해 너무 잘 알고 글을 써서 글이 노래같은 이 작가의 이 책은 정말 소장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꼭 사서 가지고 있어야지.. 좋은 책장을 구하면.....ㅎㅎ 지금 책장은 다 차서.. 근데 책장을 더 사둘데가 없으니까.
지금은 동생이 책을 읽고 있는데.. 다시 받으면 그곳에 있는 나를 감탄하게 했던.. 격하게 공감하게 했던...
그 문장들을 다시 좀 정리해서 올려야겠다. 김중혁의 <모든 게 노래>는 이 곡들과 함께 들어야 좋다. 
 
<책 속에서..>
p.ⅰ
음악을 듣고 있으면
순간과 현재를 느끼게 된다.
좋은 음악은 시간을 붙든다.
현재를 정지시키고 순간을 몸에다 각인한다.
 
p.책을 내면서
노래에 대한 글은, 쓰면 쓸수록 난감하다. 눈앞에서 둥둥 떠다니는 멜로디와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비트를, 글로 써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일이어서 좋기도 했다. 아무리 가닿으려 해도 멀어지는 목적지여서 좋았다. 노래에 대해서 묘사하고 설명하고 부연해도,
노래는 점점 멀리 달아난다. 멜로디는 더 높이 날아오르고, 비트는 더 세게 가슴을 두드린다. 노래는 글을 사뿐히 밟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노래가 없었다면 우리의 계절은 훨씬 흐리멍텅했을 것이다. 봄꽃은 덜 아름다웠을 것이고, 여름은 덜 더웠을 것이며,
가을은 덜 외로웠을 것이고, 겨울은 덜 추웠을 것이다.
 
모두 자신만의 노래가 있을 것이다. 모두들 그 노래를 잊지 않고 계속 불렀으면 좋겠다.
노래를 잊는 순간, 우리는 땅으로 곤두박질치게 돼 있다.
가사를 곱씹어 가며 부르든, 흥얼거리며 콧노래로 부르든 상관없다. 누군가에게 불러주든, 자신에게 불러주든 상관없다.
무엇이든 노래가 될 수 있고, 우리는 늘 노래를 부를 수 있다. 몰라서 그렇지, 자세히 둘러보면, 모든 게 노래다.
 
p.ⅳ
십대의 나는 아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지었지만 사십 대의 나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위로'라는 단어를 새롭게 알게 됐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위로할 수는 있다.
 
p.20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들이 있다.
길을 걷다가, 버스를 기다리다가, 버스를 타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무심코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멜로디가 있다.
 
p.27
자전거의 속도와 음악의 속도가 합해쳐 나를 하늘로 붕 띄워 올리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로지 속도와 나와 음악만 남아 있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p.29
우리에게 생긴 일이 누군가의 탓은 아니라고, 우린 그저 잘 받아들이는 일만 할 수 있을 뿐이라고.
그냥 흘러가는 거라고. 바람처럼, 스쳐가는 나뭇잎처럼 그냥 지나가는 거라고.
이런 순간들, 짧은 순간들, 자전거 위에서 맞는 바람 같은 순간들,
자전거를 타면서 음악을 들으면 위험하다. 자전거 위가 너무 좋아져서 내려오기 싫어진다.
 
p.38
내가 좋아하는 보컬은 대부분 '무심한 목소리'다. 감정이 없다기보다는, 옳고 그른 것이나, 좋고 나쁜 것에 경계를 두지 않는 목소리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감정을 애써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던져두고 멀리서 바라보는 목소리라고 해야 할까.
 
p.83~84
새 책의 내용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무척 혼란스럽다.
"주인공은 어째서 이러저러한 일들을 겪게 되는 것인가요?" 라고 물어도 할 말이 없다.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 저는 그 책을 읽은 지 오래돼서 그 부분은 기억이 나질 않네요." 라고 대답을 하는데,
질문한 사람은 이걸 농담으로 받아들이겠지만 나는 진심이다. 내게는 이미 다 지난 일들이다.
그럴 때 소설 속의 시간이 참으로 신기하다. 내게 현재였던 소설 속 시간이 독자들에게는 오지 않은 미래이고,
독자들이 책을 읽을 때의 현재가 내게는 이미 오래전에 끝이 난 과거이고,
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 내 소설 속의 시간은 끝내 오지 않을 미래이다. 우리는 같은 시간 속에서 다른 시간을 사는 것이다.
 
p.87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더라도 쉼표가 없으면 안 된다. 쉬지 않으면 쉽게 질리고 만다.
최고의 문장 100개가 모조리 연결되어 있으면 그 어떤 문장도 빛이 나지 않는다. 쉬어가는 문장, 쓸데없는 문장 같은 문장이 조금씩 섞여 있어야
좋은 문장이 더 빛나게 마련이다.
 
p.94
사람이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행동이 위로라고 생각한다. 위로는 죽으려는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모든 것에 환멸을 느낀 한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완전히 알지 못해도 위로할 수 있다.
나는 '위로'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다. '위로'의 '로'는 애쓴다는 뜻이다.
 
p.102
대학시절에 좋아하던 노래와 지금 좋아하는 노래가 다른 게 아마 그런 이유 때문 아니었을까.
대학 시절에는 음악을 음악으로 대했고 음악의 앞모습만 보았다면, 이제는 앞모습보다 뒷모습 혹은 옆모습을 더 유심히 보게 됐고
음악 역시 사람이 하는 거라는 아주 평범한 사실을 깨닫게 됐다는 차이가 있다.
결국 음악을 듣는 것은 사람을 듣는 거로구나. 결국 책을 읽는 것은 사람을 읽는 것이고, 그림을 보는 것은 사람을 보는 것이구나.
 
p.124
CD에는 10곡 남짓이 들어가지만 MP3 CD에는 수백 곡을 넣을 수 있다. MP3 CD 한 장과 플레이어만 있으면
어디서든 다양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시켰다. 이때 처음 알게 됐다.
너무 많은 노래들에는 너무 많은 기회에는 너무 다양한 선택에는 절박함이 없다.
처음으로 음악이 시시하게 들렸다.
 
p.134
모든 작가는 각각 하나의 완결된 세계다. 생각과 문체와 문장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이다.
그 세계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지만 그 세계에다가 등수를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작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만큼의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설이 그저 이야기일 뿐이라면, 그래서 누군가 밤새 들려주기만 하면 되는 거라면 세상에는 단 한 명의 작가로 충분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레이먼드 챈들러와 스티븐 킹과 미야베 미유키는 모두 다른 글을 쓰지만 세상에는 그 모든 세계가 필요하다.
 
p.147
노래를 듣다가 울컥,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는데 노래 속의 어떤 단어나 목소리나 멜로디가 불쑥,
귀로 들어오더니 뒷골을 타고 내려가 심장을 후벼 판 다음 재빨리 얼굴로 올라가 눈물샘을 건드린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내가 어쩌다 눈물을 흘리게 됐는지도 알지 못한다. 눈물은 얼마나 재빠른지 손쓸 틈이 없다.
흐르고 난 후에야 닦아낼 수 있다.
 
p.150~152
사랑을 한다는 것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뜻이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나의 크기가 작아진다는 뜻이다. 혼자 차지하던 세계에 타인을 들어오게 하는 것이고,
타인이 잘 살 수 있게 내 영토를 줄이는 것이다. 내가 자꾸만 작아지니까 슬픈 거고, 그래서 자꾸만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날 사랑하느냐고, 날 좋아하느냐고' 묻게 된다.
 
외로움이라는 것은 아마도 사라지는 것들을 그리워하는 감정일 것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혼자라면 절대 알 수 없을 감정.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영토를 줄여본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을 감정. 함께하는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지만
결코 그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감정이 바로 외로움일 것이다.
 
p.169
막상 마음 먹고 노래를 만들다 보면(생각만큼 만만한 게 아니라서) 좌절하고 말지만, 누군가에게 노래를 만들고 싶게 만드는 건 참 멋진 일이다.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노래도 아니고, 닿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노래도 아닌, 누군가 만들어 보고 싶게 만드는 노래를 만드는 일은 참 멋지다.
 
p.180
이야기의 본질은, 어쩌면 사람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고 소설을 읽고 연극을 보고 영화를 보고
수많은 이야기들을 찾아 헤메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신을 이해해야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다.
서울의 달 아래에서 각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은 '텅 빈 가슴 안고 살아가지만' 때로 서로의 거울이 되어, 함께 살아가고 있다.
 
p.193~194
우리는 대체로 중력을 잊고 산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이야기를 읽고, 노래를 듣고, 사람들의 사연을 듣다가 중력을 느낀다.
그럴 땐 비참하기도 하지만 속시원해지기도 한다. 우리가 결국 우리라는 사실. 다른 무엇이 될 수 없고,
언젠가 여기에서 사라진다는 사실. 중력을 느낀다는 건 그런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날아가고 싶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여기서 그리워하고, 가련해하고, 괴로워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공기의 무게를 안고 살아야 한다. 이야기와 첼로가 있어서, 비슷한 무게를 끌어안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래도 버틸 수 있다.
 
p.204
노래를 듣다 보면 알게 된다. 푸른 바다 속 적막하고 고요하고 먹먹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 마음을 보게 된다.
거긴 깊다. 깊어서 좁지만 아늑하다. 몸을 웅크린 채 나에게 집중하고, 내가 왜 나였는지 알게 된다.
내가 왜 나였는지 아는 것. 내가 어떤 나인지 아는 것. 그것이 진정한 밤의 초능력이다.
노래를 다 듣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푸른 새벽이다.
 
p.223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쓰기 시작했다. 임의로 재생된 음악을 들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쓰려고 했던 게 명확해졌다.
바로 저런 풍경들을 쓰고 싶었다. 가장 기쁜 표정과 최고로 우울한 어깨 사이에 있는 이야기들. 마냥 웃거나 마냥 울 수 없는 이야기들.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 건드리는 것 같은 이야기들, 돌아보면 아무 것도 없는 이야기들.
누군가 내 어깨를 건드린 것 같은 미세한 감정만 남아 있는 이야기들.
 
카페의 스피커에서 어떤 음악이 흘러나오든 그 노래들만 들려오면 비밀의 문이 열린다. 카페의 벽이 허물어지고,
벽 너머에 있던 풍경들이 가까이 다가서고, 모든 테이블이 사라지면서 세상에 음악과 나와 노트북의 글자들만 남는다.
글자들이 음악과 만나 서로 얽힌다. 글자와 음악이 만나 길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춤을 춘다. 참으로 기묘한 경험이다. 이래서 내가 카페를 떠나지 못한다.
 
p.229
세월을 보내고 나이를 먹으며 우리가 쌓아가는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몇 시간의 기억이다.
밤을 꼴딱 새우며 책을 읽었던 시간들, 처음으로 가본 콘서트장에서의 10분 처럼 지나가버린 두 시간, 혼자 산책하던 새벽의 한 시간. 그 시간들.
그리고 책 속, 공연장, 산책길처럼 현실에 있지만 현실에서 살짝 어긋나 있는 공간에서 우리는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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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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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코 씨는 질문하는 것을 좋아한다. 대답하기 쉬운 질문만 하는 것이 기리코 씨의 좋은 점이다. 예의 바른 사람 같다.
대답하면서 나는 내 마음이 바른 위치에 자리잡아 가는 것을 느낀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인간인지 확실해 지는 느낌"
 
푸켓 여행에서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 두 쌍의 가족..
한쪽은 모녀. 74세의 기리코 씨와 그녀의 딸 슈코씨. 또 다른 한쪽은 부녀.. 아버지와 17세의 그 딸 미우미..
미우미의 아버지는 슈코씨와 여행지에서의 짧은 순간을 함께 나눈다.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와서..
미우미는 기리코씨와 슈코씨와 친하게 지내게 된다. 처음 기리코 씨를 찾아가던 날 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인데 진짜로 찾아와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등의 여러가지 생각을 해 보지만.. 기리코 씨와의 만남을 통해 이혼한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혼란을 겪던 열 일곱의 미우미는
왠지 날 것 그대로의 자신. 다른 사람이 원하는 자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찾아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에쿠니 가오리 스러운.. 그리고 일본 스러운.. 책이지만 소소한 일상 같으면서도 새로운 것을 꿈꾸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드러내 준 것 같다.
내게는 무엇보다 표지의 질감과 편안한 색. 그리고 글자가 너무 맘에 들어서.. 손으로 자꾸만 만져보고 싶을 정도였다.
마치 올록볼록 튀어나와 만져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일본어로는 카라쿠타. 라고 하나부다. 잡동사니. 카라쿠타..
위험한 스캔들인데 이렇게나 평온하게 그리는 것도 에쿠니 가오리 문장의 특징일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착 가라앉도록 하는 그녀의 특유의 필력이 돋보이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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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의 추억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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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지. 줄곧 집 안에만 있거나 한 장소에 있다고 해서, 늘 똑같은 생활을 한다고 해서, 겉보기에 차분하다고 해서,

마음까지 좁게 닫혀 있거나 얌전하고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주 빈곤한 사고방식이야. 그런데도 대개는 그렇게들 생각하지.

마음 속은 얼마든지, 한없이 넓어질 수 있는데. 사람의 마음 속에 어떤 보물이 잠자고 있는지 상상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

 

항상 내게 편안함을 전해주는 요시바의 책. 되짚어 보니 국내 출간된 요시바의 책은 모두 읽은 것 같다.

에쿠니 가오리, 무라카미 하루키, 야마다 에이미 등 유명한 일본작가들은 많고 많지만

그중에서도 항상 나를 가장 편안하게 하는 책은 역시 요시바의 책이다.

 

이 막다른 골목의 추억은 다섯 편의 단편을 모아놓은 단편집이다. 최근 생활글에 가까운 글만 출간했던 요시바가

오랫만에 문장력이 돋보이는 책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다.

전반적으로 어떤 사건이나 상실 이후에 견뎌내는 사람들, 나아지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 책의 제목이 된 마지막 부분의 단편도 약혼자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여자의 헤어짐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외에도 사원식당에서 독(?)이 든 음식테러를 당한 후 다시 회복하는 이야기라던지

부모의 죽음 이후 혹은 엄청나게 커다란 인생의 사건 이후에 회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요시바가 힐링 작가라고 하는데 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누군가의 불편한 이야기랑은 다르게 요시바의 책은 일단 읽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들지 않고 편안한 마음이 들게 해 주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책에 나와있는 뭔가 잡신들 그득한 느낌을 수긍한다는 건 아니지만

요시바의 책은 오히려 그런 것들까지도 마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그러니까..

어색하고 서걱거리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들도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표현하는 재주가 있다.

 

결혼 전과 결혼 후의 요시바의 글을 비교해보면 훨씬 더 편안해졌음도 느낄 수 있고 죽음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는 것도 느낄 수 있다.

아마 자녀가 생기고 그런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되면서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의 소중함 같은 것들이 더욱 절절히 다가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또 어떤 이야기들을 들려줄지 모르지만 암튼 요시바의 책은 언제나 내게 위로이고 힐링이다.

 

<책속에서..>

p.11

길거리를 같이 걷기만 해도 그의 반듯한 성장과정과 고운 마음씨를 금방 알 수 있었다.

가령 공원을 거닐 때, 바람에 나뭇잎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빛도 흔들린다. 그러면 그는 아스라한 눈으로 '아, 좋다.'하는 표정을 짓는다.

어린아이가 넘어지면 '저런, 넘어졌네.' 하는 표정을 짓고, 그 아이를 엄마가 안아 일으키면 '아, 다행이다.'하는 표정이 된다.

그런 순수한 감각은 부모에게서 절대적으로 소중한 무언가를 받은 사람의 특징이다.

 

p.57

내 안의 빛과 바깥에서 쏟아지는 아름답고 투명한 빛. 그리고 둘 사이에 피어난 빛이 모두 하나가 되어 미래를 비추고 있었다.

 

p.61

친한 누군가와 고타쓰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조금은 따분해 하면서도, 자기 의견을 고집하느라 껄끄러워지는 일 없이.

가끔 상대의 말에 감탄하면서 끝없이 떠들거나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이, 섹스를 하거나 한바탕 싸우고 뜨겁게 화해하는 것보다

훨씬 귀중하다는 사실을. 그렇게 시간을 두고 충격적으로 깨닫는 일은 절대 없었으리라.

 

p.97

하지만 나는 그날, 나도 모르는 새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이상한 길로 빠질 뻔했던 자신을, 부조리하고 언제죽어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불확실한 이 세상 시스템 속에서 간신히 살아가는 인간이란 존재의 훌륭함이 건져 올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p.106

나 하나쯤, 이 세상에 있어도 그리 큰 공간은 차지하지 않는다. 늘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은 언제 사라져도 모두들 마침내는 그 부재에 익숙해진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 사실에 나는 화들짝 놀라, 몇 번이나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몸이 있고, 여기에 ㅈ노재하고, 하늘을 보고 있는 나, 내가 있는 공간.

멀리서 빛나는 저녁노을처럼 아름다운, 나의 한 번 뿐인 이 몸에 깃든 생명을.

 

p.124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뜨거운 그 눈물이 내 안의 독을 씻어내고, 이번에야말로 진짜 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거야. 그런 기분이 들었다.

 

p.169

가장 고독했던 밤의 어둠 속에서도, 도모 짱은 뭔지 모를 것에 안겨 있었다.

벨벳 같은 밤의 빛,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의 느낌, 별의 반짝임, 벌레 소리, 그런 것들에...

 

p.212

옛날에 곧잘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죽느니 사느니, 어떤 인생을 보내고 싶은지, 의미도 없이 그런 거대한 생각을 했다.

별은 반짝이고 밤하늘은 한없이 멀었다.

그때의 시원한 바람, 끝없이 펼쳐졌던 미래, 나 태어난 동네를 자욱하게 덮은 아침 향내, 그 느낌이 되살아났다.

자유롭게, 끝없이, 노래처럼, 선율처럼 퍼져 나가는 어떤 마음의 상태....

그것을 추구하며 나는 아직도 한참 더 살아갈 수 있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화에 젖어 아픔에 둔해졌던 마음의 껍질 한 겹이 호르르 벗겨진 듯한 느낌이었다.

아프기는 아프지만, 멍한 채로 살아갈 때보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훨씬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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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 케이스북 셜록 시리즈
가이 애덤스 엮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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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자네가 이 모든 걸 정리했다니 놀라울 따름이군.
           지금까지 언급했던 모든 것들은 그저 아주 잠깐 생각한 것에 불과한데, 그걸 다 적어놓았군.
           이건 흡사 속도가 열 배나 느려진 음악을 듣는 것 같아.
 
 왓슨: 이 험한 세상, 평범한 두뇌로 살아가는 게 뭐 그린 놀랍단 말인가?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 게 놀라울 뿐."
 
어느 날, 나의 작은 눈을 번쩍 뜨이게 해 준 셜록. 뭐 아서 코난 도일의 원작 셜록홈즈야 워낙 유명한데다가
중학교 때 이전부터도 많이 읽었고 셜록 홈즈 뿐만 아니라 애거서 크리스티, 아르센 뤼팽, 브라운 신부, 캐드펠 수사 등
추리물이라는 추리물은 다 읽어온 터라.. 그닥 새롭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미드 중에서도 추리물과 수사물은 모두 섭렵하는 취향이라..
처음 BBC 셜록 방영 당시만 해도 별로 큰 기대감이나 호기심 없이 그냥 셜록이라길래 봤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마성의 매력남 좀 보게;;ㅎㅎㅎ
 
이제까지 영상으로 만들어졌던 중후하고 친절한 셜록 홈즈 대신 제멋대로에 까칠하고 지 잘난 척은 엄청 해대는 셜록인데..
그 모습이 또 왜 이렇게도 매력적인지.. 전세계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새로운 셜록 홈즈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사실 셜로키언들 사이에서도 방영 전부터 셜록 홈즈에 가장 어울리는 현대 배우는 베네딕트 컴버배치 뿐이라는 의견이 많았다고..
그도 그럴 것이 아서 코난 도일의 책에서 묘사된 셜록 홈즈의 외양을 가장 유사하게 갖춘 배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나 다른 영화들에서 금발머리의 멍청한 캐릭터로 나오던 그의 모습과는 또 색다르게..
검은 파마머리로 변신한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그야말로 현대를 사는 베이커가 221B의 셜록 홈즈 그 자체였다.
 
왓슨 역 배우와의 케미도 굉장해서 그냥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난달까.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준 BBC 영드 셜록의 시즌1~2가 탄생된 배경과 제작자의 이야기
각 에피소드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겨 있는 이 책을 보며
BBC 영드 셜록 재관람 의지가 불태워진다.ㅎㅎ
곧 시즌3가 나온다고 하는데.. 이미 지금 촬영중이고 내년 초쯤 우리가 볼 수 있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아서 코난 도일이 초기 생계를 위해 창조한 셜록 홈즈, 그러나 그닥 그의 맘에 들지는 않았던..
그래서 모리아티와의 대결에서 죽은 것으로 밝혀졌던 셜록 홈즈..
시즌2까지는 바로 그 이야기까지 등장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죽은 셜록을 보고 있는 왓슨과 그러한 왓슨을 지켜보고 있는 셜록에서 끝났었는데..
시즌3 더욱 강력해진 셜록이 돌아올 것을 기대해 보고 있다.
 
중간중간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하며 셜록을 그리워하는 팬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는데
두뇌와 육체 모두 완벽한 초사이어인으로 등장한 스타트렉 2: 다크니스 가 그것이고..
2013년~2014년 개봉을 기다리는 베니의 신작은 무려 다섯 편의 영화가 있다.
 
<트웰브이어스 어 슬레이브>, <오거스트: 오세이지 카운티>, <제5계급>, <이미테이션 게임>, <더 로스트시티 오브 지>
이 작품 외에도 아마 앞으로 베니의 활동은 더욱 탄력을 받을 것 같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BBC의 셜록을 기다리는 이유를.. 아마 아직 모른다면 파일럿 0편이라도 먼저 보시길. 반하지 않고는 못 배길테니..ㅎ
잘생김에서 못생김까지 한 얼굴에 다 드러난다는 베니의 다음 셜록이 기다려진다.
 
오만하고 깐깐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이 남자 셜록을 기다리는 가을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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