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골목의 추억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말이지. 줄곧 집 안에만 있거나 한 장소에 있다고 해서, 늘 똑같은 생활을 한다고 해서, 겉보기에 차분하다고 해서,

마음까지 좁게 닫혀 있거나 얌전하고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주 빈곤한 사고방식이야. 그런데도 대개는 그렇게들 생각하지.

마음 속은 얼마든지, 한없이 넓어질 수 있는데. 사람의 마음 속에 어떤 보물이 잠자고 있는지 상상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

 

항상 내게 편안함을 전해주는 요시바의 책. 되짚어 보니 국내 출간된 요시바의 책은 모두 읽은 것 같다.

에쿠니 가오리, 무라카미 하루키, 야마다 에이미 등 유명한 일본작가들은 많고 많지만

그중에서도 항상 나를 가장 편안하게 하는 책은 역시 요시바의 책이다.

 

이 막다른 골목의 추억은 다섯 편의 단편을 모아놓은 단편집이다. 최근 생활글에 가까운 글만 출간했던 요시바가

오랫만에 문장력이 돋보이는 책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다.

전반적으로 어떤 사건이나 상실 이후에 견뎌내는 사람들, 나아지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 책의 제목이 된 마지막 부분의 단편도 약혼자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여자의 헤어짐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외에도 사원식당에서 독(?)이 든 음식테러를 당한 후 다시 회복하는 이야기라던지

부모의 죽음 이후 혹은 엄청나게 커다란 인생의 사건 이후에 회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요시바가 힐링 작가라고 하는데 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누군가의 불편한 이야기랑은 다르게 요시바의 책은 일단 읽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들지 않고 편안한 마음이 들게 해 주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책에 나와있는 뭔가 잡신들 그득한 느낌을 수긍한다는 건 아니지만

요시바의 책은 오히려 그런 것들까지도 마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그러니까..

어색하고 서걱거리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들도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표현하는 재주가 있다.

 

결혼 전과 결혼 후의 요시바의 글을 비교해보면 훨씬 더 편안해졌음도 느낄 수 있고 죽음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는 것도 느낄 수 있다.

아마 자녀가 생기고 그런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되면서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의 소중함 같은 것들이 더욱 절절히 다가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또 어떤 이야기들을 들려줄지 모르지만 암튼 요시바의 책은 언제나 내게 위로이고 힐링이다.

 

<책속에서..>

p.11

길거리를 같이 걷기만 해도 그의 반듯한 성장과정과 고운 마음씨를 금방 알 수 있었다.

가령 공원을 거닐 때, 바람에 나뭇잎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빛도 흔들린다. 그러면 그는 아스라한 눈으로 '아, 좋다.'하는 표정을 짓는다.

어린아이가 넘어지면 '저런, 넘어졌네.' 하는 표정을 짓고, 그 아이를 엄마가 안아 일으키면 '아, 다행이다.'하는 표정이 된다.

그런 순수한 감각은 부모에게서 절대적으로 소중한 무언가를 받은 사람의 특징이다.

 

p.57

내 안의 빛과 바깥에서 쏟아지는 아름답고 투명한 빛. 그리고 둘 사이에 피어난 빛이 모두 하나가 되어 미래를 비추고 있었다.

 

p.61

친한 누군가와 고타쓰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조금은 따분해 하면서도, 자기 의견을 고집하느라 껄끄러워지는 일 없이.

가끔 상대의 말에 감탄하면서 끝없이 떠들거나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이, 섹스를 하거나 한바탕 싸우고 뜨겁게 화해하는 것보다

훨씬 귀중하다는 사실을. 그렇게 시간을 두고 충격적으로 깨닫는 일은 절대 없었으리라.

 

p.97

하지만 나는 그날, 나도 모르는 새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이상한 길로 빠질 뻔했던 자신을, 부조리하고 언제죽어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불확실한 이 세상 시스템 속에서 간신히 살아가는 인간이란 존재의 훌륭함이 건져 올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p.106

나 하나쯤, 이 세상에 있어도 그리 큰 공간은 차지하지 않는다. 늘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은 언제 사라져도 모두들 마침내는 그 부재에 익숙해진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 사실에 나는 화들짝 놀라, 몇 번이나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몸이 있고, 여기에 ㅈ노재하고, 하늘을 보고 있는 나, 내가 있는 공간.

멀리서 빛나는 저녁노을처럼 아름다운, 나의 한 번 뿐인 이 몸에 깃든 생명을.

 

p.124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뜨거운 그 눈물이 내 안의 독을 씻어내고, 이번에야말로 진짜 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거야. 그런 기분이 들었다.

 

p.169

가장 고독했던 밤의 어둠 속에서도, 도모 짱은 뭔지 모를 것에 안겨 있었다.

벨벳 같은 밤의 빛,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의 느낌, 별의 반짝임, 벌레 소리, 그런 것들에...

 

p.212

옛날에 곧잘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죽느니 사느니, 어떤 인생을 보내고 싶은지, 의미도 없이 그런 거대한 생각을 했다.

별은 반짝이고 밤하늘은 한없이 멀었다.

그때의 시원한 바람, 끝없이 펼쳐졌던 미래, 나 태어난 동네를 자욱하게 덮은 아침 향내, 그 느낌이 되살아났다.

자유롭게, 끝없이, 노래처럼, 선율처럼 퍼져 나가는 어떤 마음의 상태....

그것을 추구하며 나는 아직도 한참 더 살아갈 수 있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화에 젖어 아픔에 둔해졌던 마음의 껍질 한 겹이 호르르 벗겨진 듯한 느낌이었다.

아프기는 아프지만, 멍한 채로 살아갈 때보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훨씬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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