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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짖궃은 농담이다.
아니 몰래카메라다. 깜짝 놀랐지? 미안. 그냥 장난이었어"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프랑스 작가인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중에 "살인자의 건강법"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이 생각나게 하는 제목이었다.
그때는 기자와 소설가의 끊이지 않을 것 같은 대화였다면 이 책에서 김영하는 치매에 걸려
자신의 기억을 감각을 현재를 모두 잃어가는 70세의 치매노인 김병수 씨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 70세의 김병수 씨는 좀 특별한 사람이다. 바로 오랫동안 여러 사람을 죽여온 연쇄살인마인 것이다. 그것도 여성만 골라 살해하는..
김병수 씨는 딸인 은희와 함께 살고 있고 치매로 인해 점점 자신의 기억을 잃어가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기 위한 일종의 회고록(?)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기억을 잃어가던 중 박주태 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김병수 씨는 박주태가 자신과 같은 눈빛을 지닌, 같은 충동에 사로잡히는 인간. 즉, 연쇄살인범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박주태가 자신의 딸인 은희와 사귀는 것을 알게 되면서 멀어져 가는 기억 속에서 어떻게든 박주태로부터 은희를 구해내려 안간힘을 쓰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다. 길거리에서 정신을 잃기도 하고, 기억은 단편적으로 뚝뚝 끊어서 누가 누구인지, 얼굴을 볼 때마다 새롭다.
그리고 기억 속에서 김병수 씨는 지금 자신의 딸로 키우고 있는 은희의 어머니를 죽였을 때를 생각한다.
읽는 내내 흥미롭기도 했지만 뒷부분의 또 색다른 반전이 있었다.
역시 김영하는 읽히는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이야기꾼이다. 비록 그 이야기가 때로는 음습하고 거칠지라도.
<책속에서..>
p.8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입니다."
p.40
연쇄살인범도 해결할 수 없는 일 : 여중생의 왕따
p.94
나는 조용한 세상이 좋다. 도시에서는 살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소리가 나를 향해 달려든다.
너무 많은 표지판, 간판,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표정들, 나는 그것들을 해석할 수가 없다. 무섭다.
p.98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숨이 막힌다.
p.126
치매 환자로 산다는 것은 날짜를 잘못 알고 하루 일찍 공항에 도착한 여행자와 같은 것이다.
이런 일이 매일같이 반복된다. 그는 영원히 '제때'에 공항에 도착하지 못한 채 공항 주변을 배회하게 된다.
그는 현재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그 어떤 곳. '적절치 못한 곳'에서 헤맨다.
아무도 그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 외로움과 공포가 점증해가는 가운데 그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