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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옷을 입으렴
이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그리고 수안이의 아편은, 그 아이는 그게 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두려웠습니다.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함께 할 수 있을지, 내가 무엇을 해 주어야 할 지 알 수 없을 때가 올 것 같았습니다.
그 때가 되면 수안이는 나를 놓지 않아도 내가 그 아이를 놓을 것 같았습니다. 아가위나무는 그런 내 마음을 알았을까요."
꿈 속에서 울다 깨어난 나는 그 아이와 함께 포플러 신작로를 따라 타박타박 걷던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아버지에 의해 외가에 맡겨지게 된 열살 남짓의 여자아이 고둘녕..
둘녕이는 왠지 가족 같지 않은 낯선 외가에서 동갑내기 이종사촌 수안이를 만나게 된다. 처음에 수안이는 둘녕이에게 곁을 주지 않았지만,
외할머니를 따라 장터로 나갔다가 길을 잃고 겨우 외가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리고 외할머니가 둘녕과 수안을 데려가 사진관에서 함께 사진을 찍어주고
같은 디자인의 잠옷을 사와서 입으라고 했을 때부터 마치 쌍둥이처럼 영혼을 나눈 소울메이트처럼 딱 붙어다니는 단짝이 되었다.
엄마의 언니인 은이 이모와 동생인 경이 이모, 그리고 율이 삼촌(외삼촌). 그렇게 둘녕은 외가에서 새롭게 제 자리를 찾아간다.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좋고 싫음이 분명했던 수안은 둘녕을 아꼈고 학교의 다른 아이들과는 그다지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함께 먹고 자고 입고 자라며 시간을 보냈다.. 경이 이모의 천막교회 사건, 율이 삼촌의 대학포기 사건, 수안이의 동생 시웅이가 태어난 일 등등 소소한 사건들..
중학교에 가서 걸스카우트를 시작하고 문예반에 들게 된 수안은 첫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문예반에서 가장 글도 잘 쓰고 똑똑한 남자아이 승모. 그렇게 세상 부러울 것이 없던 것 같았던 수안. 둘녕은 어느 순간 수안이 멀어졌다 느낀다.
산에서 열린 큰 스카우트 캠프에서 불의의 사고로 수안은 승모를 잃게 되고, 그러면서부터 원래 몸이 약했던 수안은 불면증으로 괴로워한다.
신비의 명약, 만병통치약을 만들고 싶었던 둘녕은 위약(가짜약)을 만들어 수안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 하지만, 수안에겐 괴로운 시간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둘녕은 담임 선생님을 통해 읍내 편물점에서의 아르바이트(일)를 제안받는다.
늦게까지 가게를 봐야 하고 이제 독립도 해야 할 시기.. 대학을 가지 않기로 결정한 둘녕은 편물점에서 일하면서 읍내로 방을 얻어 나오려 한다.
그리고 상처입은 짐승처럼 오롯이 둘녕만 보듬고 있던 수안에게 그것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시간이 지나..... 지금 둘녕은 서른 여덟. 어느 도시 재개발 구역 어딘가에서 "실과 바늘" 이라는 이름의 편물점을 하며 홀로 살고 있다.
그 때의 사건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둘녕은 지금도 여전히 수안이 생생하다.. 그런 둘녕 앞에 새로온 마을버스 기사 산호가 나타나고,
둘녕은 산호의 정체를 알고, 자신의 자취방 뒷방에 사는(상상 속의) 향이와 뒷방 할머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 곳. 수안이 쓰러졌던 그곳에 자신의 잠옷을 가져가서 태워달라는 부탁을 한다.
수안은 그 모든 걸 견뎌내기에는, 그리고 마지막에 둘녕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둘녕 역시 그것을 알기에는 ..그건 아무도 몰랐던 일이었고,
이제 둘녕은 수안에게 미안해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수안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로.. 이 이야기를 쓴다.
먹먹하고 은근하고 은은한.. 그런 책이었다.
전작이었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에서도 느꼈지만 문장을 참.. 맛있게 쓰는 작가다. 책 속의 이야기로 읽는 사람마저 두근거리게 했던..
이번 작품에서는 사랑 이야기가 아닌.. 한 소녀의 혹은 두 소녀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어쩌면 가족과 삶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어딘가에서 둘녕과 수안이 예전 책보를 매고 다닐 그 때처럼 까르르 웃음 짓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책 속에서..>
p.37
나는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참을 줄도 알았고 내색하지 않는 법도 배웠지만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건 역시 힘들기도 했습니다.
p.38
그래도 수안과 내가 사는 세상은 그런대로 따뜻했습니다. 외할머니의 부엌엔 맛있는 음식이 있었고,
모두가 잠든 뒤에도 처마에 매달린 백열등은 꺼지지 않아 우리 방은 밤새 달빛보다 노란 빛으로 차 있었습니다.
나는 새삼 수안이와 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p.69
그러나 할머니, 나는 세상 어딘가에는 만병통치약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다못해 호랑이 연고라도 꾸준히 바르면 온갖 병이 낫는 줄 알았습니다.
p.133
차라리 함께 지내는 편이 낫다는 것을, 그나마 뒷방의 그들이 곁에 있어주는 게 좋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들이 환상이거나 혹은 나쁜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까지 사라진다면 외롭고 쓸쓸하리라는 것을. 실은 내가 줄곧 그들을 원했다는 사실을.
p.239
"이건 도리아 기둥"
"근사하다"
진심으로 말했다. 충하는 내 손에 기둥 두 개를 내려놓았다.
"버리지 마."
안 버려 라고 소리 없이 속삭였다. 분필로 만든 기둥은 금방이라도 부러질까 두려웠지만 그래도 영원히 간직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너 방금 말 안 더듬었어."
충하는 당황했다.
p.268
누군가의 죽음과 사라져간 것들에 대해, 우리는 인내의 시간을 두고 품위 있게 슬프고 싶었다. 농밀하게 슬픔을 나누고 음미하고 싶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진짜 슬픔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품위 있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p.298
정말 도깨비불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알게 된 건 그런 것이었다. 누군가 힘들 때 그걸 고쳐주는 일은 쉽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보며 기다려주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는 걸.
귀에 한 번 찾아온 통증이 잦아들기까지는 삼십 초가 걸릴 때도 있고 몇 분이 걸릴 때도 있었지만, 늘 똑같이 긴장하며 기다려야 했다.
p.393
마음을 닫아버린 듯 조용한 목소리가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언제나 전부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내 사촌은 그랬다.
그런 점이 함께했던 시절 동안 나를 힘들게도 했지만, 그 순간은 다 고마운 기억 뿐인 것 같았다.
p.401
사위가 어둑해질 때까지 옥상 난간에 앉아 있었다. 겨우 며칠 지났을 뿐인데 모암마을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포플러 신작로를 따라가면
그곳 하늘에도 똑같이 노을이 지고 낯익은 집들이 있다는 걸 알지만, 지금은 너무 멀었다. 내 곁에서 사라진 풍경과 더불어,
내가 알던 촉촉하고 부드럽고 좋은 냄새를 풍기던 어떤 것들이 내게서 영영 떨어져 나갔다는 것. 좋은 날들은 가버렸으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p.417
"뭐야.. 왜 온거야."
네가 사라지는 줄 알았어. 나는 들리지 않게 귀엣말을 했다. 고개 숙인 수안의 머리가 어둠 속에서도 선연해 마음이 아렸다.
"머리카락은 왜 이런건데."
"나도 몰라."
"아는 게 뭐야 그럼. 도대체 왜 이래. 응?"
"그냥 다 무섭고 불안해. 밤도 무섭고, 낮도 무서워. 내가 무서워 한다는 사실이 가장 무서워."
수안은 고통스럽게 대답했고, 나는 목이 메었다.
p.442
배낭을 추슬러 메고 혼자 여행지를 벗어나는 수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내 사촌은 어느새 내가 위로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 멀리 가버린 것만 같았다.
수안은 아직도 내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고, 나 또한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날만은 너무 버거웠다.
p.445
한 시간이 흘렀다. 의자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하나 둘 승차장으로 나가고, 새로 온 이들이 내 곁에 앉았다. 출발시각이 다가올수록 두근거렸다.
막연히 나는 불안했고,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가 버스를 타게 될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이대로 수안을 따라가면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이제 겨우 내 길을 찾은 것 같은데,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 것 같은데..
대합실 벽에 걸린 커다란 원형시계가 다섯 시를 가리켰을 때 나는 일어서지 않았다. 터미널 바닥에 석양이 드러눕고 이내 어스름이 깔렸다.
어두침침한 전등이 켜진 승차장에 야간 버스들이 도착하고, 또 떠났다. 마침내 매표소 창에 판지를 대고 창구를 닫을 때까지, 나는 손에 표를 쥔 채 정물처럼 앉아 있었다.
p.448
어린 시절 나는 한 때 만병통치약을 만들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꿈을 잊어버렸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잘못이었을까요. 설령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어도, 함께였다면 좋았을지 모른다고 뒤늦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인가 해주어야 한다고, 사랑하니까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믿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그 아이는 내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닫습니다.
그날 밤 마을버스를 운전하며 당신이 말했죠. 그럴 줄 몰랐던 거라고. 그 말이 내겐 사무쳤습니다. 나 역시, 그럴 줄 몰랐습니다.
다시 그날 오후로 돌아간다 해도 내가 터미널에서 다음 버스를 탈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을 모릅니다.
누구 탓도 아니었다고, 어떻게 하든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거라고, 살아오는 동안 그렇게 생각하려 했습니다. 비록 잘되진 않았지만요.
p.460
"실은 나, 돌아올까 해!!"
충하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가을에 이사올지도 몰라. 여기서 살고 싶어."
충하는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
"조, 좋은 생각이야. 자, 자자잘됐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얼굴을 붉혔다. 소년은 변했지만 또 변치 않았다. 내 속의 소녀도 변했지만 또 변치 않은 것처럼.
책 뒷표지..
"당신이 보기엔 별 거 아니겠지만 내겐 그랬습니다.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