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시가 아직 살아 있는 덕이지만 병원에서 들은 대로 허공처럼 텅 빈 시야의 범위가 중앙에서부터 점점 확대되고 있기는 하다. 선글라스도 없이 수시로 골프도 치고 요트 타기도 즐기긴 했다만 ? 수면에 반사된 자외선 양은 일반 자외선의 두 배다 ? 그 시절에 누가 그런 걸 조심했겠나? 햇볕을 쬐는 것이 좋은 줄로만 알았던 시절이다.

그 느릿한 부패의 냄새와 불수의적으로 배출되는 분비물의 베이스노트를 숨기기 위해 여자들은 은은한 꽃향을, 남자들은 상쾌한 향신료 향을 덧바른다. 만발하는 장미나 무뚝뚝한 해적의 이미지를 여전히 각자의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뉴스는 아기 얼굴 가면을 쓴 폭도가 처음에는 시카고 외곽의 양로원, 두 번째로는 조지아주 서배나 인근의 양로원, 세 번째로는 오하이오주 애크런의 양로원에 불을 질렀다는 소식이다. 그중 하나는 공립 양로원이지만 나머지 두 곳은 자체 경비를 갖춘 사립 양로원이다. 사립 양로원 거주자 중 일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타 버렸는데 빈곤 계층도 아니라고 한다.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진행자가 말한다. 집단 방화입니다. 아르턴이라는 이름을 쓰는 집단이 웹사이트를 통해 범행을 시인했고 당국은 웹사이트 계정 소유자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사망한 노인들의 가족은 물론 ? 뉴스캐스터의 말이다 ? 충격에 빠져 있습니다.

윌마는 토비아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어쩌면 윌마의 존재 덕분에 지금 토비아스는 전보다 더 외모를 가꾸고, 더 어려 보이고, 덜 허약해 보이고, 더 민첩해 보일지도 모른다. 정수리에 숱도 더 많아지고.

"자기들 차례래요. 그래서 팻말에 우리 차례라고 써 넣은 거래요."
"아." 아턴(Artern). 아우어 턴(Our Turn). 잘못 들었던 것이다. "무슨 차례를 말하는 건데요?"
"삶. 삶에서의 차례요. 어떤 사람이 텔레비전 뉴스에서 말하는 걸 들었어요.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저기서 인터뷰를 하고 있더라고요. 들어보니까 우리, 우리 노인들 차례는 지나갔대요. 우리가 다 망쳤대요. 탐욕이며 뭐며로 지구를 파괴했대요."

"맞는 말이네요. 우리가 망쳤죠.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사회주의자들일 뿐이에요." 토비아스는 사회주의자에 대해 삐딱한 시선을 갖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죄다 속을 들춰 보면 사회주의자라는 식이다.

토비아스가 자신의 과거 금융 생활에 대해 털어놓는 일은 좀처럼 없다. 국제 무역 회사를 몇 개 소유했고 건전한 투자를 했다고만 할 뿐, 자기가 부자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부자들은 절대 자기가 부자라고 하지 않는다. 넉넉한 생활을 한다고 하면 모를까.

"우리한테 뭘 원한대요?" 윌마가 되도록 신경질적이지 않은 말투로 묻는다. "팻말 들고 있던 사람들 말이에요. 참 이게 무슨 일이래요. 우리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가 양보했으면 좋겠다네요. 좀 비켜 줬으면 좋겠대요. 팻말에도 쓰여 있어요. 비켜라."
"죽으라는 말 같네요. 오늘은 롤 좀 있어요?"

"위험해 보여요?"
"여긴 그런 것 같지 않아요.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방화를 저지르고 있대요. 그 무리가요. 국제 조직이래요. 수백만 명이 들고 일어나고 있다고 하고요."

윌마는 낙상을 당하는 일 없이 샤워까지 해낸다. 손잡이를 단단히 붙잡고 미끄러운 샤워젤은 과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수건으로 몸을 닦는 일은 어딘가에 앉아서 하는 것이 최선이다. 선 채로 발을 닦으려다가 봉변당한 이들이 많다. 윌마는 발톱을 깎을 때가 되었으니 잊지 말고 서비스 부서에 연락해 미용실에 예약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발톱 깎기도 윌마가 더는 혼자 할 수 없는 일 중 하나다.

토비아스가 나간 후 윌마는 간이 부엌에 있는 라디오를 켜고 정보 수집 준비를 한다. 대부분 이미 아는 내용이고 새로운 소식은 거의 없다. 우리 차례는 하나의 운동이고,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어떤 시위대는 "죽은 나무의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는 기생충"이라고 부르고 또 어떤 시위대는 "침대 밑에 쌓인 먼지 더미"라고 부르는 대상을 소멸시키는 것이 목적인 듯하다는 것이다.

당국의 대응은 시답잖고 그마저도 산발적인 대응일 뿐이다. 추가적인 홍수, 방화에 의한 추가적인 산불, 추가적인 토네이도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만드는 더 중요한 문제들을 처리하느라 그렇다고 한다.

카티아가 떠나자 윌마는 발을 질질 끌며 거실로 가다가 책장에서 무언가를 건드려 떨어뜨린다. 나무 막대 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하니 연필통이다. 윌마는 이내 안락의자에 쓰러지듯 몸을 맡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신중히 살펴보고 지금껏 살아온 삶이나 그 비슷한 것을 돌이켜 볼 생각이지만, 먼저 큰 활자가 지원되는 전자책 리더기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한두 문장 읽으면서 찬찬히 할 것이다.

"점심 먹고 나면 우리 다 같이 마음을 다잡고 2열 횡대로 서서 밖으로 행진하죠! 그렇게 하면 당국에 우리 상황을 알릴 수 있고, 사람들이 와서 문을 열어 주고 저 가엾은 사람들을 제대로 된 시설로 옮겨 줄 거예요. 모든 게 정말 눈 뜨고 봐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에요! 아기 가면이나 쓰고 있는 저 멍청한 사람들은……."
"내보내 주지 않을 거예요." 토비아스가 말한다.
"하지만 같이 가면 되잖아요! 기자들이 찾아올 거예요.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데 감히 어떻게 우리를 막겠어요!"
"그럴 것 같지 않은데요." 토비아스가 말한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전 세계가 구경거리가 생겼다며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들 뿐이니까요. 마녀사냥이 벌어졌을 때도, 공개 교수형이 진행될 때도 늘 관중이 많았죠."

사자 장식이 박힌 문 밖에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있다. 늘 들고 있던 팻말을 휘두르고 있는데 새로운 팻말도 눈에 띈다. 때가 됐다. 먼지 더미를 불태워라. 때가 됐으니 서둘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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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스톤 매트리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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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더미 불태우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삶의 권리는 생명에서 오는 것인데, 누군가의 생명을 박탈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뺏을 수 없으랴? 마거릿 애트우드는 정말 재미난 이야기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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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때 참 재밌었는데, 그렇지?" 로드가 말한다. "그 낡은 집에서 말이야. 지금보다 순수했던 시절이었지."
"맞아. 정말 재밌었어." 이만치 떨어져서 보면 정말이지 재밌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재미는 뭐가 어떻게 끝날지 모를 때나 느낄 수 있는 법이다.

"그 책 때문에 나를 찼었어. 나의 진정한 재능을 저버렸느니 어쩌니 하면서."
"책 때문이 아니야. 걔는 널 사랑했어. 몰랐어? 네가 자기한테 프러포즈하기를 원했고 결혼하고 싶어 했어. 이레나 걔, 아주 고리타분한 애거든. 하지만 넌 그럴 낌새도 보이지 않았지. 걔는 완전 거절당한 기분을 느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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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대여 페이백] 스톤 매트리스
마거릿 애트우드 / 황금가지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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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재미있게 잘 쓰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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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캐리스와 토니와 로즈 모두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 지니아는 그들의 연인을 한 번씩 빼앗아 갔다. 토니에게서는 웨스트를 빼앗았다.

지니아가 캐리스에게서 빼앗은 남자는 빌리였다. 그것이 가장 잔인한 도둑질이었을 거라고 토니와 로즈는 생각한다.

나한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갔는데, 그게 뭐였냐면, 빌리가 돌아올 거라는 거였어."
"사후세계에선 소식이 되게 느린가 보네." 토니가 말한다. "빌리는 이미 돌아왔잖아."
"엄밀히 말하면 돌아온 건 아니지." 캐리스가 깐깐하게 따지고 든다. "그러니까, 우리는…… 빌리는 옆집 이웃일 뿐이니까."

결과적으로 로즈와 토니는 자신들을 파멸로 이끌려는 지니아의 갖은 노력에도 제각기 남자와 함께하는 삶고 있었지만 캐리스는 아니었다.

그런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최근에 사건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얼간이 빌리가 별안간 나타난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후, 이제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빌리와 지니아는 단둘이 도망가 버렸다. 닭장의 닭은 몽땅 죽어 있었다. 두 사람이 빵칼로 닭의 목을 죄다 베어 버리고 갔던 것이다

지니아는 미치의 주머니까지 털어먹고도 캐리스가 미치의 정신적 고결함이라 부른 것까지 앗아 간 후 그를 차 버렸고, 미치는 결국 온타리오호에 투신해 익사했다.

먼 친척으로부터 어마어마하지는 않아도 섬을 떠날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을 물려받은 캐리스

물론 그들은 계약의 부당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서명까지 떡하니 박힌 그 빌어먹을 계약서를 운운할 뿐이었다. 그러니 어쨌든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돈을 내어줘야 했다.

변호사들은 의뢰인을 처음에는 한입씩 베어 먹다가 나중에는 가죽이나 힘줄이나 발톱만 남을 때까지 흰담비나 쥐나 피라냐 떼처럼 조금씩 뜯어먹는 족속이었다.

결코 말이 많지는 않았고 신중했지만 어떤 말을 하지 않으려 하는지를 지켜보다 보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가 드러났다.

"일자리를 구할 거야." 잭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일자리?" 흑요석 같은 심장의 소유자 이레나가 말했다. "진저에일도 있으니까 먹고 싶으면 먹어."
"백과사전 팔아도 되겠네." 로드가 그렇게 말하며 웃자 나머지 둘도 웃음을 터뜨렸다. 백과사전 판매는 무책임하고 무능하고 절박한 사람이 동원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알려져 있었던 터다. 그리고 잭 데이스가 실제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판다는 생각 자체가 그들에게는 우스울 따름이었다.

"네 소설 인세를 나누는 건 어때?" 로드가 말했다. 로드는 경제학 전공이었다.

"무슨 시간?" 재프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절대적 시간, 아니면 상대적 시간? 정신적 시간, 아니면 측정 가능한 시간? 유클리드적 시간, 아니면 칸트적 시간?" 철학 개론 수업에서처럼 사소한 것 하나하나 꼬치꼬치 물고 늘어지는 말장난

계약서를 작성한 사람은 로드였다. 월세 3개월 치에 1개월 치, 즉 잭이 내지 못했던 3개월 치에 앞으로 내야 할 1개월 치를 세 사람이 내주는 대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잭의 소설에서 발생할 인세 수입을 잭의 몫을 포함해 4분의 1씩 나누어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어떤 소설이든 소설 쓰기는 자존심의 문제였다. 재프리와 로드가 계속 비아냥거리게 놔둘 수는 없었다. 더는 이레나의 아름다운 푸른 눈에 서린 동정과 멸시를 견딜 수 없었다.

책이 출간되면 그동안 숨겨 온 너무 많은 진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분명 룸메이트들은 잭이 아무 생각 없이 소설에 집어넣은 각자의 모습이 유령의 집에 설치된 거울의 상처럼 왜곡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고 말 터였다.

잭, 이레나, 로드, 재프리는 결국 재계약을 하지 않고 각자 다른 집을 구해 떠났지만 잭은 로스쿨에 가기로 결정한 이레나와 계속 만남을 이어 갔다.

불가사의한 미소를 머금은 이레나는 여전히 실용적인 검은 팬티를 벗고 있는 모습으로 잭의 머릿속에 고이 자리해 있다. 훗날 1년에 두 번씩 잭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냉혹하고 탐욕스러운 마귀할멈과는 꽤나 다른 모습이다. 잭이 도통 통합시키지 못하는 두 얼굴을 가진 이레나랄까.

"하지만, 난 그 계약 잊고 있었어. 진짜 계약도 아니잖아. 그냥 농담으로 한 소리지, 그건 그냥……."
"진짜 계약이야." 이레나가 냉담하게 말했다. 그때 이레나는 진짜 계약이 무엇인지 알 만큼 알고 있었다. "고의성이 입증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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