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의 분열이다. 예송논쟁의 승리를 주도한 허목은 그 참에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남인 중에도 송시열의 위명을 두려워한 자들은 유배를 보내는 정도로 그치자는 온건론을 폈다. 결국 온건파의 주장이 채택되어 송시열은 다 늙은 나이에 생애 처음으로 유배를 떠났다. 그러나 의도적이든 아니든 적진을 분열시킨 것은 장차 그가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의 처벌을 놓고 강경파는청남
淸南
이 되었고, 허적
許積(1610~1680)이 이끄는 온건파는 탁남
濁南
으로 갈렸던 것이다(온건파를 ‘탁하다’고 비난한 것을 보면 그 명명은 허목 측의 작품인 듯하다).

과연 서인이 몰락하는 과정도 남인과 닮은꼴이었다. 예송에서 승리한 뒤 송시열의 처벌 문제를 놓고 남인이 두 파로 갈렸듯이, 재집권에 성공한 서인도 남인의 처벌 문제를 놓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었다. 하마터면 남인에 의해 죽을 뻔한 송시열은 당연히 강경파였고, 그의 제자이면서도 사적인 원한으로 사이가 벌어진 윤증
尹拯(1629~1714)?그는 아버지가 죽었을 때 송시열에게 묘비명을 부탁했다가 성의 없는 대우를 받자 사제지간을 끊었다?과 한태동
韓泰東(1646~1687)등은 온건파였다. 양측의 우두머리들 간에 연배 차이가 한 세대쯤 나기에 노장파는 노론
老論
, 소장파는 소론
少論
이라고 불리게 된다.

숙종은 장희빈과의 애정도 있거니와 국왕의 고유 권한(사생활)에까지 사대부들이 일일이 간섭하자 넌더리가 났다. 이런 왕의 심기 변화를 야당인 남인들이 그냥 흘려보낼 리 없다. 남치훈
南致熏(1645~1716)과 이익수
李益壽(1653~1708)등 소장파 남인들은 그런 숙종의 마음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결심을 굳힌 숙종은 노론을 대거 숙청하고 송시열과 김수항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것이1689년의 기사환국
己巳換局
이다.

숙종은5년 전과 정확히 반대되는 조치를 내렸다. 남인들이 일제히 숙청되었고, 서인들이 재집권했으며, 장희빈이 폐위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었다. 이것이 갑술환국
甲戌換局

울릉도와 달리 독도는 원래 무인도였던 탓에 오늘날까지도 분쟁거리로 남아 있다. 영토 국가의 개념이 확실치 않았던 시대에 무인도의 임자는 사실상 없었다고 봐야 한다(지리적으로 독도는 한반도에 가깝지만 고려와 조선이 왜구의 침략 때문에 전통적으로 해안 지대와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을 썼기 때문에 소유권이 더욱 애매해졌다). 따라서 지금 한국이든 일본이든 독도의 ‘역사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독도는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애치슨 라인을 모방한 이른바 ‘이승만 라인’으로 영토화함으로써 실효적 지배가 이루어져 한국의 소유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그렇다면 독도를 우리 땅으로 만든 것은 이승만의 유일한 업적이다).

장희빈은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뒤 곧바로 사약을 받았으나 그래도 그녀가 남긴 아들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복위된 인현왕후가 끝내 후사를 낳지 못했고 곧이어 맞아들인 세 번째 계비 인원왕후
仁元王后
도 아이를 낳지 못한 탓에, 장희빈의 소생인 세자를 교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태생에 하자가 있는 세자의 왕위 계승이 순조로울 리 없었다. 마침 숙종에게는 적자는 없어도 서자는 또 있었다. 갑술환국이 있었던1694년에 또 다른 후궁인 숙빈 최씨가 아들 연잉군
延?君(뒤의 영조)을 낳은 것이다. 최씨 역시 원래 궁녀의 시중을 드는 무수리의 신분이었으므로 연잉군도 신분상의 하자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불리는 사건인데(신임이란 신축년과 임인년, 즉 1721년과 1722년을 가리킨다), 연좌로 처벌된 인원이 무려 170명이 넘었다. 원래 목호룡은 노론의 인물이었으나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1662~1724)에게 매수되어 ‘자백’의 형식으로 노론의 역모를 고발했다. 그에 따르면 노론 측은 이른바 삼급수(三急手), 즉 칼과 약과 모해라는 세 가지 수단으로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자백만으로 정치적 대형 사태가 빚어졌다는 것은 조선의 정치 구조가 얼마나 취약했는지 말해준다. ‘말만의 역모’인 것은 다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그전까지의 사화나 환국은 정치 세력 간의 모함으로 빚어진 데 비해 이제는 한낱 점쟁이의 무고가 대규모 옥사를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개 지관
地官(풍수지리 전문가)에 불과한 목호룡
睦虎龍
이라는 자가 노론에 반역의 기운이 있다며 무고하자, 소론은 그것을 빌미로60여 명의 노론 일당을 처형해버렸다(노론4대신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소론은 경종이 살아 있을 때 연잉군을 없애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을 것이다. 연잉군은 조선의21대 왕인 영조
英祖(1694~1776, 재위1724~1776)로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김일경과 목호룡 등 신임사화의 주범들을 처단했기 때문이다.

그간 사대부들끼리 치고받은 싸움은 많았어도 국왕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하나의 세력을 숙청한 것은 인조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영조는 왕세제 시절의 경험을 통해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더 이상 당쟁을 놔두었다가는 필경 나라가 망하리라는 위기의식이었다. 이 점은 이후의 행보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국왕이라 해도 자신의 뜻을 펴려면 왕당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영조는 즉위 이듬해인1725년에 노론을 다시 불러들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쟁을 재연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정계에 복귀한 노론이 소론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극을 준비하는 것을 알고, 영조는 노론 내의 강경파를 쫓아내버렸다. 당쟁의 불길을 잡겠다는 굳은 각오를 공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아울러 그는 소론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 그 가운데 온건파를 등용해 노론과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었다. 당쟁을 제어하기 위한 나름의 묘책을 개발한 것이다. 그것이 영조의 대표적인 업적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는 탕평책
蕩平策
이다.

사대부 정치를 더 보편적인 개념으로 표현한다면 과두정치라고 할 수 있다. 과두정치의 장점은 어느 누구도 권력을 독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대표적인 사례는 고대 로마의 원로원 정치다(흔히 이 시기 로마의 정치 체제를 공화정이라고 부르지만 근대적 의미의 공화정보다는 과두정치에 훨씬 더 가깝다)

과두정치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한 시대를 이끌 만한 뛰어난 지도자가 등장하기 어렵다는 점이다.과두 체제에서는 탁월한 역량과 자질을 갖춘 정치가가 나오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설사 출현한다 해도 체제의 견제를 받아 희생될 공산이 크다. 기원전1세기에 황제가 되고자 한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의해 암살된 게 그런 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무엇일까? 측근을 키우지 않으면서 당쟁을 막는 제3의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대부들의 당파를 현실적으로 인정해주되 각 당파 간의 세력 균형을 유도하는 방법이다. 영조의 탕평책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고 탕평책이 효과를 거두자 영조는 두 번 다시 이 땅에 당쟁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1742년에 탕평비를 세웠다. 비문은 영조가 직접 썼는데, 탕평비를 세운 곳이 성균관이라는 것은 그곳이 바로 당쟁의 온상임을 상징한다.

탕평책의 첫 번째 수단인 쌍거호대
雙擧互對(둘을 등용해서 서로 견제하게 한다)의 전략이다.

그동안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되었던 서얼에 대한 차별을 완화해 서자 출신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영조 자신이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 때문에 느꼈던 ‘신분 콤플렉스’가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1746년에는 《속대전》이 간행된다. 무엇의 후속편이기에 이름이 《속대전》일까? 말할 것도 없이 《경국대전》의 후속편이다.

영조가 이룬 가장 큰 개혁의 성과는1750년에 균역법
均役法
을 제정한 것이다. 균역법이란 명칭의 뜻 그대로 백성들의 요역에 대한 부담을 균등하고 공평하게 하자는 취지를 가진 제도다. 요역 중에서도 으뜸은 군역이었으니까 균역법은 군제
軍制
나 다름없다.

(조용조란 각각 토지세, 요역, 특산물을 뜻한다)

물론 병역이 의무였던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의무는 양반과 천인 신분이 제외된 양인
良人
만의 몫이었다.

균역법의 첫 단추는 우선 군포의 양을 줄이는 것이었다.16개월에 베 두 필씩 바치던 것이 한 필로 대폭 삭감되었다.

한원진
韓元震(1682~1751)은 호서
湖西
, 즉 충청도 출신이었고, 이간
李柬(1677~1727)은 낙하
洛下
, 즉 서울 출신이었기에 출신지의 머리글자를 따서 호락논쟁
湖洛論爭
이라고도 부른다. 물론 그 내용은 이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인물성동론은 인과 물, 즉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서로 같다는 것이고, 인물성이론은 그 반대다. 호론
湖論
은 인물성이론의 입장이고, 낙론
洛論
은 인물성동론을 취한다.
그런데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왜 그 시기에 새삼스럽게 문제가 된 걸까? 그 논쟁에서 말하는 ‘사물’이 단지 일반적인 사물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면 그 논쟁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사물’에는 물론 동물도 포함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오랑캐’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물성동론과 인물성이론의 쟁점은 당시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만주족 오랑캐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데 있었다.

낙론은 사람이나 사물이나 똑같이 오상
五常(인·의·예·지·신의 유교 도덕)을 지니고 있으므로 오랑캐라고 해서 본성이 다르다고 구분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양측 모두 맹자와 주희 등 옛 유학자들의 고전에서 나름대로 근거를 인용하고 있으나, 낙론의 근저에는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비록 현실적인 힘에서는 오랑캐가 앞서는 세상이 되었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중화 세계의 적통인 조선이 우위에 있다는(나아가 세계 최고라는)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이런 변형된 중화 이념은 곧이어 자민족 중심주의로 발전하면서 예술에도 영향을 미쳐 진경산수화라는 미술 장르를 낳게 된다.

진경산수화는 금강산의 모습을 그린 〈금강전도
金剛全圖
〉와 인왕산의 경치를 화폭에 담은 〈인왕제색도
仁王霽色圖
〉의 화가인 정선
鄭敾(1676~1759)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이후 김홍도
金弘道(1745~?)와 신윤복
申潤福(1758~?)등으로 이어졌다. 이 새로운 화풍은 우리 역사상 가장 주체적인 예술 사조였으나 그 바탕에는 병적인 소중화 이념이 흐르고 있었다.

진경
眞景
이라면 ‘진짜 경치’, 즉 조선의 경치를 뜻한다. 조선의 화가가 조선의 경치를 그리겠다는 게 왜 중화 이념일까? 조선의 사대부들처럼 조선의 화가들도 이제 조선이 유일한 중화 세계, 즉 진정한 인간 세계라고 믿는 데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실학이라는 용어는18세기에 새로 등장한 학풍을 가리키지만, 원래는19세기 말과20세기 초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던 무렵에 민족 주체성을 고취하기 위해 학자들이 만들어낸 말이다(그러므로 당대에는 실학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에 대해 유학을 가리켜 실학이라 했고, 조선 초에는 성리학을 원시 유학, 즉 육경학이나 사장학
詞章學
에 대비해 실학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의미는 달라도 여러 용례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즉 실학이라는 말은 기존의 학풍에 대해 새롭고 진보적인 학풍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1634년 이수광
李?光(1563~1628)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20년 전에 쓴 원고를 정리해 《지봉유설
芝峰類說
》이라는 일종의 작은 백과사전을 펴냈는데, 이것이 최초의 실학서라고 간주된다.

우선 이수광이 보여준 길은 서양 문물을 수용함으로써 조선이 취할 대안을 모색하는 방향이다. 그런데 조선은 서양과 독자적으로 교류할 통로도, 권한도 없으니까 이 노선을 채택할 경우에는 청을 통해 서양 문물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 당시 청에서는 서양 문물을 서학
西學
이라고 불렀는데, 청은 조선의 북방에서 출범한 왕조였던 탓에 조선에서는 청을 통해 수입하는 서학을 북학
北學
이라고 불렀다. 북학파라는 명칭은 여기서 나왔다. 이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대외 교류가 중요했으므로 북학파는 상업을 중시하고, 그 상업을 뒷받침할 공업을 진흥하고, 화폐경제 제도를 도입하자는 정책 대안을 제시했다.

17세기 후반에는 재야학자 유형원
柳馨遠(1622~1673)이 토지와 법, 관직 임용 등 제반의 제도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연구를 남겼다. 유형원은 평생 관직 생활을 하지 않은 탓에 자신의 제안들이 실제 정책에 반영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죽은 뒤에는 공식적으로 실학의 선구자라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1769년에 영조가 그의 연구 성과를 정리해 책으로 간행하라고 명한 것이다. 죽은 지100년이나 지났으나 국왕에 의해 인정된 덕분에 그의 책 《반계수록
磻溪隧錄
》은 최초의 ‘정부 공인’ 실학서가 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유형원이 안내한 길은 내부 개혁 노선에 해당한다. 전통적으로 조선의 산업이라면 단연 농업이므로 개혁의 기본 방향은 농업을 육성하는 데 있다.

(정전법이란 토지를 ‘井’ 자 모양의 아홉 구획으로 나누어 한가운데 토지의 생산물을 조세로 내고 나머지를 경작자들이 가진다는 이상적인 제도다). 토지를 경작자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자는 유형원의 균전론
均田論
이나 토지 보유 상한선을 정해 대지주들을 제한하자는 이익
李瀷(1681~1763)의 한전론
限田論
은 모두 정전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북학파가 중상학파라면 내부 개혁론자들은 중농학파라고 부를 수 있다

영조의 치세에 여당은 노론이고 야당은 남인이었다. 북학파는 노론 내에서 호락논쟁이 벌어진 결과로 탄생한 집단이므로 인맥상으로는 노론의 계열에 속했다. 반면 야당 혹은 재야에 있던 남인들은 그 위치에 걸맞게 민생 문제에 주목했는데, 그들이 중농학파의 입장을 취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정전법이라는 고대의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모델로 삼은 이유도 명백하다. 예송논쟁에서도 드러났듯이 그들의 학문적 기반은 바로 성리학 이전의 원시 유학에 있었던 것이다.

청은 옛 중화 세계의 지배 이념이었던 성리학과 양명학
陽明學
을 버리고 새로이 고증학
考證學
을 채택해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학문 연구의 풍토를 정착시켰다.

성리학이 주로 국가 운영의 철학이자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한 데 비해, 양명학은 유학만이 아니라 선불교나 도교의 요소까지 가미해 일종의 생활 철학으로 성립했다

고증학은 늘 유학의 근저에 놓여 있던 그 사변성과 관념성을 제거하고 과학으로서의 유학을 지향했다. 그래서 고증학은 유학에서 나왔으되 가장 유학답지 않은 학풍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그리스도교가 누렸던 지위는 바로 동북아시아의 중화 세계에서 유학이 차지하는 위치와 똑같다. 오늘날 유학은 대학의 학문 분과 혹은 ‘한 과목’에 불과하지만(이를테면 ‘동양철학과의 유학 전공’), 유학이 세상을 지배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학문 분야가 아니라 학문 전체였고, 총체적인 세계관이었다. 지금의 학문 구분으로 말한다면 철학이나 역사학은 물론이고 법학, 경제학, 나아가 물리학, 공학 같은 자연과학도 모두 유학의 테두리 안에서 연구되고 논의되는 ‘유학의 분과들’이었다. 따라서 사회를 성립시키고 발전시킨 것도, 또 그 사회에 정체와 침체를 가져온 것도 유학이었다. 심지어 그 유학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것도 유학일 수밖에 없는데, 그게 바로 실학이다.

근대에 와서 모든 학문의 뿌리를 이루는 철학조차 당시에는 ‘신학의 시녀’였다는 사실이 중세 그리스도교의 위력을 말해준다.

하지만 중화 세계인 조선이 근본 없는 오랑캐처럼 속되게 처신할 수야 없지 않은가? 이런 인식의 차이 때문에 청에서는 실학(고증학)이 곧 관학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재야의 학문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양에서 서적이란 대중에게 지식을 보급하기 해서가 아니라 국가가 지식을 보관하기 위한 용도였다.

왕이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고 있을 때는 말만의 역모가 아무런 소용이 없으므로 사대부들도 실력 행사에 나서게 된다. 그게 실패하면 반란이 되고 성공하면 반정이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의 조선 역사상 사대부들이 왕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경우는 모두 세 차례가 있었다. 그중 이인좌의 난은 실패한 반란으로 끝났고, 나머지 두 차례는 각각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으로 사대부가 승리했다. 따라서 정조가 대비할 것은 반정의 예방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물리력이 필요했다.
1785년 정조는 국왕을 특별히 수호하는 친위대를 만들고 이것을 장용위
壯勇衛
라고 불렀다.

세조가 처음 설치할 때의 명칭은 장용대(壯勇隊)였다. 이 장용대의 병사들은 무술에 능한 천인들로만 뽑았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국왕에 대한 위협이 있을 경우 목숨을 걸고 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름도 신분도 없는 결사특공대인 셈인데,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였기에 반대파의 책동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그렇듯 강력한 친위대가 필요했을 터이다.

정조가 축성한 수원성의 모습이다. 한양의 도성에도 없는 누대와 포대까지 설치된 것으로 미루어 정조는 자신의 개혁에 대한 반발로 내란이 벌어질 경우 대피처이자 임시 수도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장용영의 외영을 그곳에 주둔시킨 것도 마찬가지 목적이다. 이 성의 설계는 정약용이 주도했다.

이 군대는 엉뚱하게도 수원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왜 느닷없이 수원일까? 일단 장헌세자의 묘가 수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가 있는 현륭원
顯隆園(지금의 융릉
隆陵)의 방비를 외영에게 맡긴 것이다.

정조의 치세에는 점차 그리스도교를 종교로서 대하는 움직임이 싹트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드디어 한반도 최초의 정식 그리스도교도가 탄생했는데, 바로 이승훈
李承薰(1756~1801)

(정약전 삼 형제는 이승훈의 처남들이었다).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씌어졌을 뿐더러 해학과 풍자가 넘치기에 더욱 재미가 있다. 박지원은 여행 도중에 목격한 우스운 사건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익살스러운 언동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그려냈다. 그의 해학과 풍자는 당시 사람들의 고루한 사상을 깨뜨리는 데 효과를 발휘했고, 그러한 이유로 문체반정의 목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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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는 인빈 김씨의 오빠인 김공량
金公諒
이라는 자에게 접근해서, 장차 정철이 세자 책봉을 매듭지은 뒤 인빈과 신성군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을 흘렸다.

격노한 선조는 정철을 삭탈관직한 것은 물론 다른 서인들마저 강등시켰는데, 동인의 손아귀에서 완벽하게 놀아난 꼭두각시다.
이것으로 동인은 서인에게 진 기축옥사의 빚을 말끔히 갚았다. 당사자들은 최종 승리라고 여겼을지 모르지만, 사대부의 생리상 그런 일은 없다. 파이가 커지면 먹을 입도 늘어나는 게 부패한 권력의 속성이 아닌가? 승리한 동인들은 서인들에 대한 숙청의 정도를 놓고 두 파로 갈린다. 온건파인 유성룡은 남인
南人
, 강경파인 이산해는 북인
北人
이 된다.

사실 전란의 조짐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드러나고 있었다.15세기 중반에 시작된 일본의 센고쿠
戰國
시대는100년 이상 지속되다가16세기 후반에 들면서 점차 하극상의 분위기가 가라앉고 다이묘들 간의 서열이 정해졌다. 그중에서 대권 후보로 떠오른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1534~1582)는 라이벌들을 차례로 제압하고1568년 드디어 교토에 입성했다. 조선으로 치면 선조가 막 즉위한 시기였으니, 이 무렵에 중앙 권력을 장악한 조선의 사대부들은 당연히 일본의 변화에 주목했어야 한다. 그러나 곧이어 오다가 무로마치 바쿠후를 무너뜨렸을 때도, 또 그다음에 최대의 라이벌인 다케타 세력을 쳐부수고1580년에 드디어 사원 세력마저 정복해 일본 열도의 통일을 눈앞에 두었을 때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그나마 균형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이이가 죽기 전에10만 명의 병력을 양성해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부르짖었으나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582년 오다가 부하의 배신으로 뜻하지 않게 죽은 것은 조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조선 침략은 실제보다 몇 년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은 그 귀중한 마지막 몇 년을 동인과 서인의 당쟁으로, 쓸데없는 종계변무 문제로 탕진해버렸다. 오다의 뒤를 이은 간웅
奸雄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1536~1598)는 본토만이 아니라 시코쿠와 규슈, 홋카이도까지 차례로 정복하고1590년에 드디어 일본 역사상 최초로 전 일본 열도의 통일을 이루었다.

그에게는 여러 가지로 대외 침략에 나설 필요성이 있었다. 오랜 내전의 시대에 팽창할 대로 팽창한 군사력, 내전이 끝나면서 실업자가 된 센고쿠 다이묘들의 불만,

일본의 생각은 달랐다. 중국 황제가 책봉하는 것은 바쿠후의 쇼군일 뿐 일본 천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록 실권 없는 천황이지만 상징적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으니 조선과 달리 일본은 형식적으로 중국의 제후국이 아니다. 조선 정부는 일본 측의 사절단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불렀는데, 이는 쇼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간주했다는 의미다(《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일본 국왕’도 천황이 아니라 쇼군을 가리킨다).

가관인 것은 통신사의 보고 내용이다. 조정이두 파로 나뉘어 있으니 국정의 모든 사안마다양측을배려해야 한다.그래서 통신사의정사
正使
인황윤길
黃允吉(1536~?)은서인이고,부사
副使
인김성일
金誠一(1538~1593)은 동인이다. 비록 나라 안에서는 코를 깨물고 싸우더라도 나라 밖에서는 국익을 도모하는 데 의견이 일치해야 정치인의 도리가 아닐까? 하지만 그들은 그 기대를 무참히 깨버린다.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함대를 준비하는 것을 보고 조선을 침략할 게 틀림없다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한 것이다.

정사와 부사가 정반대의 견해를 내놓는데도 조정에서는 사실 확인을 채근하지 않고 부사인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 이유는 그 와중에 벌어진 정철의 건저 문제로 동인이 우세해진 탓이었으니, 당시 조선 정부가 얼마나 판단 능력이 부재했는지를 말해준다.

임진왜란은 흔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을 칠 테니 문을 열라는 구실을 내세워 조선을 침략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 정복이 단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구실이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도요토미는 한반도를 넘어 중국 대륙을 공격하려 했으며, 나아가서는 멀리 인도까지 침략할 구상을 품고 있었다(물론 그는 실패했지만 그의 구상은20세기에 현실화된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대륙 침략은 이미 일본 열도가 통일되는 시기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셈이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폐쇄적이었던 중화 세계와는 달리 일본은 이미 일찍부터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교역을 했고(중화 세계의 중국과 조선은 조공을 통하지 않은 사무역을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었다),16세기 중반에는 포르투갈 상인들과 무역을 하면서 조총이라는 신무기도 수입했다.

화력과 병력에서 앞선 일본군은 조선이 제정신을 차렸더라도 당해내지 못할 강적이었다. 게다가 조선에는 변변한 정부군마저 없었으니 백성들과 승려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는 것 외에는 달리 항전의 수단이 없었다. 더 불행한 일은 350년 뒤에도 이런 현상이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사실 일본이 준비한 함대는 병력 수송선이지 해전을 벌이기 위한 전선
戰船
이 아니었다.

일본군의 해상 전술이라고는 고작해야 배를 서로 붙여놓고 적의 배에 뛰어올라 자신들의 장기인 검술로 싸우는 것

임진왜란은 여러모로 20세기의 한국전쟁과 닮은 데가 많다. 우선 전쟁의 책임자가 아니면서도 한반도가 전장이 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개전 직후 공격 측의 일방적인 공세, 반격과 소강상태, 제3국(중국)의 참전 등 전쟁의 전개 과정도 그렇다. 게다가 종전 협상 과정은 더더욱 닮았다. 한국전쟁에서 국제연합과 북한이 휴전 협상의 주체였듯이, 임진왜란에서도 조선은 협상에 끼지 못하고 명의 일개 사신과 도요토미가 협상 주체였다. 일본의 요구 중에 조선의 국토와 왕족까지 포함되어 있는데도 조선은 발언권이 없었다(더구나 명의 강화 요구는 일본군이 조선에서 물러나고 도요토미가 사과하는 정도였을 뿐 조선이 입은 막대한 피해는 전혀 배려되지 않았다). 결국 조선은 일본과 명이 서로의 힘을 가늠해본 전쟁터만 제공해주고 만 셈이다. 마치 한국전쟁을 통해 서방 세계와 사회주의 세계가 서로의 힘을 시험했듯이.

결국 이듬해인1597년1월 도요토미는 재차 원정군을 보냈는데, 이것이 정유재란
丁酉再亂
이다. 명의 사신에 불과한 심유경의 어처구니없는 농간 때문에 조선은 다시 한 번 난리를 겪게 되었다.

일본의 제안을 명 황실에서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심유경이 엉뚱하게도 도요토미가 자신을 일본 왕으로 책봉해주고 명에 조공을 바칠 테니 허락해달라는 조건을 내세웠다고 본국에 보고한 것이다. 통역의 잘못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허위 보고

하지만 정유재란은 처음부터 임진왜란과는 딴판으로 전개되었다. 우선 일본군의 사기가 전만 못했으며, 개전 초부터 명군이 출동했다. 또1차전에서 무력하기만 했던 조선의 관군도 전열을 가다듬고 적극 대처하여 충청도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1598년에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일본군이 철수하는 것으로써7년간에 걸친 일본의 조선 침략 전쟁은 끝났다.

오랜 전란으로 한반도 전역이 거의 폐허처럼 변했고, 수많은 백성이 죽거나 삶의 터전을 잃었다. 임진왜란의 ‘종군기’에 해당하는 유성룡의 《징비록
懲毖錄
》은 그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중앙과 지방 할 것 없이 굶주림이 심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데 지쳐 늙은이와 어린이 들은 도랑과 골짜기에 쓰러졌고, 장정들은 도둑이 되었으며, 게다가 전염병으로 죽어 넘어지고, 심지어는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죽은 사람의 뼈가 잡초처럼 드러나 있었다."

더욱이 전쟁 전에 전국적으로170만 결에 이르던 경지가 종전 후에는 불과3분의1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전쟁으로 빚어진 엄청난 재앙을 복구할 재정도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 현실적 피해뿐 아니라 문화적 피해도 막심했다.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건축물이 잿더미로 변했고, 사서들을 보관한 춘추관이 불타 없어졌다. 아울러 수많은 백성이 일본으로 잡혀가 노예가 되기도 했다. 그 가운데 도공이나 인쇄공 들이 일본 문화의 창달에 기여한 것은 의도하지 않은 문화 전파였던 셈이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의 지배 체제가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오히려 사대부들에게는 큰 ‘성과’가 있었다. 삐걱거리면서도 그런대로 명맥을 유지하던 과전법이라는 토지제도가 완전히 무의미해진 것이다. 토지가 황폐해졌고 토지대장도 사라져버렸으니 이제 공전이고 사전이고 가릴 것 없이 말뚝만 꽂으면 모두 내 땅이었다. 그 말뚝은 물론 권력자만이 꽂을 수 있다. 대부분이 지주들인 사대부들은 마치 그때를 노리고 있었다는 듯이 일제히 토지 겸병에 나섰다. 몽골 지배기가 끝난 고려의 경우와 너무나도 흡사한 상황이다.

어떻게든 집권 세력인 남인의 꼬투리를 잡으려는 북인은 영의정 유성룡이 명에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며 탄핵했다. 결국 유성룡은 정계에서 은퇴해버렸고,2년 뒤 복직이 허용되었을 때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더욱 터무니없는 일은 그렇게 해서 남인을 몰아낸 공로를 놓고 다시 북인이 둘로 분열된 것이다. 유성룡의 탄핵을 주도한 남이공
南以恭(1565~1640)은 오히려 홍여순
洪汝淳(1547~1609)이 대사헌으로 승진하자 발끈했다. 임명은 국왕이 했지만 그것은 물론 홍여순을 지지하는 세력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북인이라는 같은 집에 살 이유가 없다. 그래서 남이공은 따로 살림을 차려 나갔는데, 그의 새 집은 소북
小北
이 되었고 홍여순의 옛 집은 대북
大北
이 되었다.

그 어린 계비 인목왕후
仁穆王后(1584~1632)가4년 뒤에 아들 영창대군
永昌大君(1606~1614)을 낳자 광해군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는 훨씬 어리더라도 엄연히 왕실 적자 출신이니 서자인 자신과는 신분이 다른 것이다.


●조선의 국왕은 많은 후궁을 거느릴 수는 있었지만 정비는 하나뿐이었다. 정비가 죽었을 때는 계비를 맞을 수 있었는데, 후궁들 가운데서 고르거나 궁 밖에서 데려왔다. 왕실에서 서얼의 차이는 있었으므로 정비나 계비가 낳은 아들은 대군(大君)이고 후궁의 아들은 그냥 군(君)이며, 딸은 각각 공주와 옹주(翁主)가 된다(그래서 광해군도 광해대군이 되지 못했다).

1600년에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죽은 게 광해군에게는 큰 불운이었다.

그녀가 죽었으니 혹시 선조가 계비라도 들인다면 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과연 그 혹시는 역시가 된다. 난리가 가라앉은1602년에 선조는 쉰 살의 나이로 열여덟 살의 계비를 맞아들인 것이다

박응서는 선조 초기에 영의정이었던 박순(朴淳)의 서자로, 학문과 재주가 뛰어났으나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좌절한 인물이다. 그는 같은 처지의 명문 출신 서자들과 함께 ‘강변 7우’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신세를 한탄하다가 광해군 즉위 초에 서얼 출신에 대한 차별을 없애달라고 탄원했으나 거절당했다. 공교롭게도 광해군은 그 자신도 왕실의 서자로 설움을 겪었으면서도 그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서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쓴 허균(許筠, 1569~1618)은 친구인 박응서가 체포된 뒤 신분 해방의 꿈을 접었으나 1618년 반역을 꾀했다가 처형당했다.

전혀 아귀도 들어맞지 않는 황당한 이야기였으나 광해군에게는 최대의 맞수인 영창대군과 소북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광해군은 김제남에게 사약을 내리고 그 이듬해에 영창대군을 유배시켰다가 죽였으며, 그 밖에100명이 넘는 소북 세력을 숙청했다. 열네 살의 영창대군은 이이첨의 끈질긴 사주로 강화부사에게 비참하게도 뜨거운 증기로 쪄서 죽이는 증살
蒸殺
을 당했다. 이로써 반대파는 완전히 제거되었고 광해군은 왕당파를 심복으로 삼아 왕권을 단단히 다지는 기반을 마련했다.

국왕에게는 좋은 건수로 활용할 만한 사건이 계속 터졌다. 이듬해인1612년에는 황해도에서 허위 역모 사건이 꾸며졌다. 내용 자체는 터무니없었다. 김경립
金景立
이라는 자가 군역을 피하기 위해 사기를 치다가 걸리자 봉산 군수 신율
申慄
은 그를 고문해서 김백함
金白緘
이라는 자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김백함을 체포하니 그의 아버지 김직재
金直哉
가 일찍이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의 상중에 술과 고기를 먹었다가 파직된 사연이 드러났다. 역모를 조작할 수 있는 좋은 건수다. 고문에 못 이긴 김백함은 엉뚱하게도 인목왕후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
金悌男(1562~1613)을 불었고, 때마침 충청도에서 강도질을 하다 잡힌 박응서
朴應犀(?~1623)라는 자가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 했다는 사건까지 겹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졌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건축을 서두른 게 상징적인 재건이라면,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시행한 대동법
大同法
은 실질적인 국가 재건 사업에 해당한다.
전란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었으니 가장 시급한 게 토지와 조세 제도다. 남아 있는 토지라도 추슬러놓아야 농업 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고 무엇보다 전후 복구를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한데 그 재정은 토지에서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전법이 유명무실해진 탓에 관리들의 녹봉 체계도 재정비해야만 국가의 기틀이 설 수 있다.

1608년 광해군은 경기도를 대상으로 대동법을 시범 운용했다. 대동법은 처음에 선혜법
宣惠法
이라는 명칭이었고 이 제도를 집행하는 기관으로 선혜청
宣惠廳
이 설립되었다. ‘선혜’라면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지만, 실은 백성들을 위하려는 게 아니라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해 필요했다.

대동법의 기본 정신은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그 이름처럼 간단하다. 생산자들이 국가에 납부하는 모든 조세를 한 가지 품목, 즉 쌀로 통일하는 것이다(이 쌀을 대동미
大同米라고 불렀다).

이전까지 농민이 국가에 내는 것은 편의상 조세로 통칭했지만 실은 기본적인 전세
田稅
를 비롯해 공물, 진상
進上(특산물), 잡세 등등 다양했다. 생활양식이 다양하니 그랬겠지만 세금을 그렇게 여러 가지로 거두어들인다면 재정 운영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고, 무엇보다 부패한 관리가 임의로 착복하기에 유리하다(그래서 근대 국가로 진화할수록 조세의 납부 방식은 단일해진다).

사실 대동법은 순수한 발명품이 아니라 ‘원조’가 있다. 국내판 원조는 일찍이 이이가 주장한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이다. 이것은 특산물 공납제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공납을 쌀로 통일하자는 구상

유통망이 발달한 덕분에 지방의 특산물 정도는 왕실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여러모로 세제를 통일할 조건이 숙성된 것이다.

대동법이 실시되자 과세의 표준이 확립되었고, 지방관들의 농간도 줄어들었다. 또한 탈세의 여지도 적어졌을 뿐 아니라 면세지 자체가 줄어 국가 재정이 강화되는 당장의 효과를 보았다. 아울러 조세 품목이 쌀로 단일화됨으로써 장차 화폐경제의 도입을 가능케 하는 장기적인 효과도 기대하게 되었다.

광해군 시대에는 중부 지방부터 양전이 이루어지면서 그에 따라 대동법도 점차 확대 실시되었다. 이리하여 속도는 느리지만 대동법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19세기 말까지 조선의 기본적인 세제로 기능하게 된다

서양에서는 중세부터 지대(rent)의 개념이 발달한 반면, 동양에서는 왜 지대가 없었을까? 지대의 개념을 적용하면 세금 제도는 아주 쉽게 해결된다. 땅의 이용자(농민)는 땅의 소유자(지주)에게 세금을 내고, 지주는 또 그것으로 국가에 세금을 내면 되기 때문이다(현물이든 화폐든 상관없다). 동양 사회에 그런 방식이 적용될 수 없었던 이유는 ‘지주’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양식 왕국에서 모든 땅은 왕(국가)의 것이다. 지주라는 용어는 있으나 서양과 달리 동양의 지주는 단지 ‘수조권자’일 뿐이다. 현실적으로는 실제 소유자처럼 처신하지만 원칙적으로는 왕토 사상이 적용되므로 지주는 땅의 진정한 소유자가 아니었다(

1593년에 중국과 조선에서 건주라고 부르던 힘의 공백 지역을 통일한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
努爾哈赤(1559~1626)가 바로 그 구심점이었다(원래 여진이라는 이름은 중국인들이 만주 지역의 여러 민족을 통칭하던 명칭이었으나 이 시기부터의 여진은 보통 만주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오늘날 중국 한족이 흔히 만족
滿族이라 줄여 말하는 게 그들이다)

후금이라면400년 전 송(북송)을 멸망시킨 금의 후예라는 뜻이며, 천명이라면 하늘의 명령이라는 뜻이 아닌가? 더욱이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중국 한족 왕조에 사대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표현이었다.

만주 쪽에서 보기에는 중원보다 더 가까운 게 한반도이고, 중국보다 더 약한 게 조선이다.

명은 서산에 지는 해이고, 후금은 동쪽 바다 위로 뜨는 해다. 하지만 명은 아직 후금이 두려워하고 있는 강대국이며, 전통적으로 조선의 상국이다. 그래서 광해군의 줄타기는 결코 쉽지 않다. 하나 다행스런 전망은 줄 위에 머물러야 하는 기간이 그리 오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조만간 늙은 공룡 명 제국이 쓰러질 것은 뻔해 보였으니까 그때까지만 견디면 된다.

광해군은 절묘한 타개책을 찾아낸다. 지원군을 보내되 싸우지는 않는다는 전략

광해군은 측근들도 모르게 강홍립에게 후금군과 가급적 싸우지 말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다. 알아서 눈치껏 처신하라는 명령인데, 과연 강홍립은 명의 제독 유정
劉綎
의 군대와 랴오둥에서 합류한 뒤 싸우는 척하다가 전군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해버렸다.

1622년 이이첨이 폐위된 인목왕후를 살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은 반대파의 공분을 자아내기에 족했다. 특히 정철이 실각한 이래 오랫동안 권력의 맛을 보지 못한 서인들은 이런 분위기를 틈타 뭔가 일을 엮어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왕당파란 잘 쓰면 약이 되고 잘못 쓰면 독이 되는 존재다. 그런 점에서,1617년 인목왕후를 폐위시켜야 한다는 대북인들의 주장을 광해군이 쉽게 허락한 것은 명백한 실책이었다.

손쉽게 궁궐을 장악한 반란군은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왕후에게 옥새를 건넨 다음 그녀의 손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왕위에 올렸다. 그가 조선의16대 왕인 인조
仁祖(1595~1649, 재위1623~1649)이므로 이 사건을 인조반정
仁祖反正
이라고 부른다. 엄연히 기존의 합법적인 왕권에 도전한 것이므로 실은 쿠데타였지만, 성공한 쿠데타이기에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反正]’행위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었다.

역사의 시계추를 되돌리고 왕국을 사대부 국가로 복원시켰다는 점에서, 인조반정은100여 년 전의 중종반정과 동급이 될 소지가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수많은 공신이 책봉되는 것은 당연할 터이다. 왕당파를 주도한 대북파의 우두머리들인 이이첨과 정인홍 등은 처형되었고, 반정을 주도한 소장파 서인들을 비롯해50여 명이 정사공신
靖社功臣
으로 책봉되었다.

외적의 침략도 아닌 국내의 반란으로 국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것은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었으므로 당시 관리들과 백성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수십 년 전 일본의 침략을 받아 선조가 버선발로 도망친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국가 비상사태였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내란으로 국왕이 꽁무니를 뺀 이번 사건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광해군이 주도한 왕국화의 노선이 붕괴하면서 국왕의 체통도 완전히 무너진 셈이다. 하지만 조선 백성들은 그로부터 불과 10여 년 뒤 그때 도망친 국왕이 외적 오랑캐 앞에서 무릎을 꿇는 광경까지 목격하게 된다.

후금은 황해도에 주둔한 채 강화도의 피난 정부에 화의를 제안했다. 그들의 요구 조건은 간단했다. 명의 연호를 사용하지 말고 조선 왕실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것인데, 그들이 침략해온 이유가 뭔지를 명백히 말해주는 요구다. 즉 후금은 장차 명을 칠 때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조선의 태도를 확인한 홍타이지는 조선을 응징하기 전에 먼저1636년4월에 국호를 중국식 이름인 청

으로 바꾸어 중원 정복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그래서 나중에 그의 시호도 중국식의 태종
太宗이 되니까 이때부터는 그를 청 태종이라 불러도 되겠다). 일정이 확실히 잡힌 만큼 후방을 다지는 일은9년 전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일단 그가 취한 조치는 전쟁이 아니라 ‘외교’였다. 그는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고 아울러 청에 대해 호전적인 태도를 가진 주전론자들을 압송하라고 주문했다. 예상했겠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이 그 요구를 받아줄 리 없었다. 결국 그것은 전쟁을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드디어 그해12월에 청 태종은 직접12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 침략에 나섰다. 이것이 병자호란
丙子胡亂
이다.

결국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이산가족’이 되는 것을 감수하고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지방에서 오는 군대도 자연히 왕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집결하면서 이곳은 조선의 임시 수도가 되었다. 이곳이 나라의 수도가 된 것은 일찍이 옛 백제의 근초고왕이 이곳을 도성으로 삼은 이래무려1300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피난처였기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1만 명이 넘게 불어난 성의 수비대를 감안하면 비축된 식량으로는 두 달을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청 태종은 굳이 성을 공략하려 하지 않았다. 이제20만 명으로 늘어난 군대로 성을 튼튼히 포위한 채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선 병력을 경기도 일대에서 차단하면서 기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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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종횡무진 한국사 2 - 조선 건국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남경태의 가장 독창적 역사 읽기 종횡무진 시리즈
남경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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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과 세조도 그랬듯이, 원래 정변으로 즉위한 왕은 개혁의 기치를 높이 치켜세우게 마련이다. 그러나 중종의 경우는 좀 달랐다. 국왕의 ‘임명권자’가 사대부인 만큼 왕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훈구파가 사라졌다. 세조의 집권을 도왔다는 공로만 두고두고 우려먹으며50년 동안 버텨온 그들이었지만 이제 그 약발은 완전히 떨어졌고,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실체마저 거의 사라졌다.

세조의 집권 과정에서도 그랬듯이, 비정통적인 왕위 계승이 있을 때는 이렇게 새로 공신 세력이 생겨나는 현상을 절대로 막을 수 없다.

세조가 창건한 원각사
圓覺寺
가 헐리고 거기서 나온 목재로 선박을 건조한 것은 불교 탄압의 정점이다. 그 때문에 원각사가 있었던 자리인 지금 서울 도심의 탑골공원

오늘날의 대학교나 대학원보다도 한 급 높은 교육기관이었다. 조선시대의 과거를 오늘날 사법고시에 비유한다면 성균관은 고시 합격생들을 교육하는 사법연수원에 해당한다. 성균관에 입학하려면 우선 사마시에 합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정을 주도한 공신 세력은 당연히 단경왕후의 복위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대사간
大司諫(사간원의 책임자)이행
李荇(1478~1534)은 복위론을 주장한 박상
朴祥(1474~1530)과 김정
金淨(1486~1521)을 유배시켰다.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조광조다. 그는 논쟁의 초점인 단경왕후의 복위 문제에서 벗어나 훨씬 더 중요한 쟁점을 제기했다. 바로 대사간의 기능에 관한 지적이다. 무릇 대사간이라면 조정에서 논쟁이 벌어졌을 때 교통정리를 담당해야 하는데(사간원은 비록 관청이지만 민간의 언론이 없던 시절에 유일한 언론기관이었다), 이행이 마음대로 상소자들을 유배시킨 것은 언로를 막은 커다란 잘못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중종의 신임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곧 조광조가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마당을 얻었다는 뜻이다.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에 대해 애틋한 마음이 있었으므로 조광조의 주장을 더욱이 반기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성리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았으나, 그전까지는 유학 이념이 사회와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하지는 못했다. 삼촌─조카 사이인 예종과 성종이 자매를 비로 얻은 것이나 형제간인 연산군과 중종이 각각 신수근의 누이와 딸을 비로 얻은 것에서 보듯이, 왕실에서조차 유교적 예법이 지켜지지 않았다.

조광조의 개혁은 국가 이념을 바로잡는 데 국한되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의 영역까지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조선 사회에 유교적 관념과 예식, 생활양식이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향약은 처음부터 성리학 이념을 향촌 사회에까지 침투시키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만들어진 것이다.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나쁜 일은 서로 바로잡아주며[過失相規], 이웃끼리 서로 예의로써 대하고[禮俗相交],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患難相恤]. 이것이 향약의4대 강령이다. 취지 자체는 좋지만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실천되어야 할 도덕을 관 주도의 인위적 캠페인으로 집행하려 한 것은 유학 국가만이 가능한 발상이었다.

성리학을 생활의 영역까지 관철시키려 한 조광조의 발상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을 연상케 한다. 무엇보다 관이 시민사회의 변화를 인위적으로 유도하는 게 그렇다. 더욱이 그 뿌리에는 시민사회를 관이 지배하기 쉬운 방식으로 재편하려는 불순한 의도도 있었다. 이렇게 현대사회에서 정부가 주도하는 캠페인도 근본을 따져보면 유학 이념에 따른 정치 공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실 인재의 선발을 위해 과거제보다 천거제를 중시한 것은 사림파의 전통이었다. 그 문헌적 근거는 《대학(大學)》에 있다. 제가(齊家)와 치국(治國)보다 근본적인 요소로 강조되는 수신(修身)에 철저한 인재를 뽑으려면 시험을 치르는 것보다는 평소에 언행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추천하는 게 더 올바른 방식이라는 것이다

1519년에 조광조의 건의로 시행된 현량과
賢良科
다. 국가를 위해 일할 만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인물들을 천거해 관직에 등용시킨다는 현량과

인물 추천제의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자의적인 기준이 적용되기 쉽다는 점이다(적어도 시험을 치러 성적순으로 인물을 선발하는 과거제보다는 객관성이 부족하다). 과연 조광조가 현량과를 도입한 의도는 곧 드러난다. 그는 단경왕후의 복위를 주장한 바 있던 박상과 김정은 물론 김식
金湜(1482~1520), 안처겸
安處謙(1486~1521)삼 형제 등 소장파 성균관 유생들을 천거해 요직에 임명했다.

존경 받는 원로 정승들까지 반대파로 돌아선 것은 조광조를 위해서나 개혁을 위해서나 좋지 않았다. 결국 그런 불찰이 조광조의 개혁을 불발시키게 된다.

일단 조광조는 선제공격을 가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반정공신들 가운데 자격 미달인 자가 많다는 상소를 올린 게 먹혀든 것이다. 우선 양적인 면에서 "태조 때의 개국공신들도10여 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공신들의 수가 너무 많다."라는 개혁파의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결국 조광조 일파의 주장이 채택되면서76명의 공신들이 자격을 박탈당하고 그들에게 주어졌던 공신전과 노비 들이 몰수되었다.

현량과를 관철시킨 것만 해도 괜찮았다. 비록 반발은 있었으나 기본 취지가 좋은 데다 전 사회가 개혁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어 반대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못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간의 성과에 지나치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 탓일까? 조광조는 내친 김에 궁지에 몰린 훈구파에 치명타를 가했는데, 결국 그 주먹이 자신에게 돌아오고 만다.

중종은 자신이 반정을 통해 즉위한 만큼 공신의 자질론을 앞세운 개혁파의 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조선의 국왕은 조선에서는 군주지만 황제의 책봉을 받으므로 황제에게는 신하(제후)의 신분이다. 황제를 받들어 모신다는 점에서는 국왕도 사대부와 같은 처지다(이것을 사대부들은 "천하동례天下同禮, 즉 천자 앞에서는 누구나 같다."라고 말했다).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천하의 주인은 오직 천자 하나뿐이므로 사대부는 천자를 제외한 모두?조선 왕도 포함된다?를 탄핵할 수 있다. 조선 사대부들의 이런 군주관은 17세기에 중국 대륙을 ‘오랑캐’인 만주족이 정복할 때까지 지속된다.

하지만 그런 비타협적인 태도 때문에 그는 그의 개혁을 처음부터 충실하게 지지해주었던 가장 중요한 후원자를 잃게 된다. 아무리 학문을 좋아하는 중종이라 해도, "학문이 고명해지면 다른 일은 자연히 노력하지 않아도 다스려지는 것"이라면서 학문의 지극한 경지에 오르도록 하라는 조광조의 말에 거부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광조와 김정 등 개혁 주도 세력은 유배되었다가 곧 사약을 받았다. 촉망받던 소장학자 김식은 유배지에서 군신천세의
君臣千歲義(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영원하다)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시를 짓고 자결했다. 물론 그 밖에도 수십 명이 옥사하고 파직당했다. 이해가 기묘년이기에 이 사건을 기묘사화
己卯士禍

원래 만주는 중국의 영향권 바깥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중국의 역대 통일 제국들 가운데 만주를 지배한 것은 몽골족의 원 제국밖에 없었다.

실제로 얼마 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비변사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했다. 일본군과 맞서 싸운 것은 이순신의 수군을 제외하면 거의 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었다.

군제는 오히려 시대를 역행했다. 군역을 면하게 해주는 대신 베를 받던 관행(당시 베는 현금이었다)이 방군수포제
放軍收布制
라는 정식 제도로 자리 잡을 정도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돈을 주고 국방의 의무를 면제하는 게 합법화된 격이다.
그랬으니 당시 조선의 국방력이 어땠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차라리 세조처럼 칼을 앞세워 정변으로 권력을 차지하는 편이 더 솔직하고 ‘건강’했다. 물론 그것도 조선이 왕국이던 조선 초기이기에 가능했지만). 연극처럼 허구적인 반역이라는 점에서 조선의 사화들을 일종의 ‘반역극’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다. 가히 모함의 전성시대

조선 중기의 4대 사화로 불리는 무오년, 갑자년, 기묘년, 을사년의 사화에서 앞의 두 사화는 연산군이 일으킨 것이지만, 중종과 명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는 사대부들 간의 세력 다툼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그녀는 즉각 대윤의 일당을 잡아들이고 역모의 죄를 뒤집어씌웠다. 윤임을 비롯한 수십 명이 처형되고 유배된 이 사건은 을사사화
乙巳士禍
라고 불린다

대자보는 조선의 병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었지만, 윤원형은 오히려 그것을 을사사화가 불충분했다는 증거로 해석했다. 그래서 봉성군을 비롯해 수십 명의 반대파가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작은 사화가 또다시 벌어졌다. 이 사건을 정미사화
丁未士禍

사화를 일으켜 공신이 된 자들은 과거 훈구파만큼의 경륜과 실력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아무래도 대세는 사림파를 필요로 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현역 군부가 부패하면 사관학교가 상대적으로 청렴해 보이는 것과 같다고 할까?). 특히 사림의 뜻있는 유생들은 혼탁한 중앙 정치를 버리고 낙향해 전국 각지에서 서원
書院
을 세우고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이들이 장차 조선을 이끌어갈 인재로 성장하게 된다(

조선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세워진 것도 이 무렵이다.

사실 이량은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
仁順王后
의 외삼촌이었으니 결과는 처음부터 보지 않아도 뻔했다(자신의 외삼촌을 제거하기 위해 처외삼촌을 기용한 격이다).

흔히 말하는 ‘관군’은 오늘날로 치면 군대가 아니라 경찰력에 불과하다. 당시 조선에는 변방을 지키는 비변사 이외에 특별한 군 조직이 없었다

삼포왜란에 놀라 비변사
備邊司
라는 군사 기구를 설치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 역사상 최초로 국방을 전담하는 정규군 조직

덕흥군 자신도 한창 젊은데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경우는 역사상 처음이다. 처음이니까 새 직함이 필요하다. 그래서 덕흥군은 나중에 죽은 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격상된다. 이것이 대원군이라는 직함의 시작이다. 즉 대원군은 원래 왕위 계승자가 아닌 상황에서 아들이 왕으로 옹립되었을 때 그 왕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직함이다.

이성계의 역성 쿠데타에 반대한 윤이와 이초는 명 황실에 이성계가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보고했다. 정치적으로 신진 사대부의 대표인 이성계가 권문세족인 이인임의 아들일 리도 없거니와 이인임은 성주 이씨고 이성계는 전주 이씨니까 말도 안 되는 보고였지만

당시 명은 조선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므로 의도적으로 사실을 무시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명의 사관은 주원장의 치세를 기록한 《태조실록》에 이성계를 이인임의 아들로 올려버렸다.
가뜩이나 신생국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문제로 부심하고 있었던 이성계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눌러 참으며 때마침 조선에 온 명 사신에게 사실을 수정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후속 조치가 전혀 없었다. 이때부터 조선의 역대 왕들은 이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주청사를 보냈다. 하지만 명은 태조의 유훈이 실린 《대명회전》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어쩔 수 없다고 둘러대면서 약을 올렸다.

다툴 이유가 모두 사라졌는데도 사대부들은 오히려 전보다 더욱 큰 규모로, 더욱 심하게 다투기 시작한다. 권력의 정점에 올랐는데도 그들은 자기들끼리 파당을 만들어 싸운다. 이것을 좀 거친 용어로 표현하면 당쟁이고, 세련되게 포장하면 붕당정치
朋黨政治
다.

국왕을 선택할 만큼 권력을 확고히 장악했고, 숙적인 훈구파와 외척도 사라졌다. 이념에서도 전 사회가 성리학으로 완전히 통일되었다. 그렇다면 사대부들 간의 권력 다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처럼 시시콜콜하게 말꼬리나 잡으며 박 터지게 싸운 경우는 없다.

권신 이량을 축출하는 데 공이 컸던 심의겸은 인순왕후의 동생이라는 신분상의 ‘한계’(사림의 세상에서는 왕실 외척이라는 게 오히려 단점이었다)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으므로 사대부들 간에 명망이 높았고 선후배 관계도 좋았다.

학문적으로는 라이벌이지만 학파로는 동지였던 이이와 성혼은 정파로도 서인에 속하는 동지였다.

정여립
鄭汝立(1546~1589)이라는 제자가 묘한 행적을 보였다. 스승인 이이를 배반하고 동인 편으로 붙는가 싶더니 이이가 죽자 서인의 단독 거두가 된 성혼을 거세게 비판한 것이다(이이를 배반한 직접적인 이유는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한 탓이었으니, 이래저래 이조전랑은 골치 아픈 자리였다). 그러나 당시는 서인이 득세하고 있었으므로 정여립은 곧 서인들에게 밀려 중앙 관직을 얻지 못하고 고향인 전주로 낙향했다.

정여립은 고향에서의 영향력을 반전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측근들로 대동계
大同契
라는 일종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매달 한 차례씩 활쏘기 대회를 여는 등 지역의 유지라는 신분을 넘어 정치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게다가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정치 공작으로 나아갔다. 승려들과 규합해 전주에서 장차 왕이 탄생할 것이라는 둥, 목자
木子
가 망하고 전읍
奠邑
이 흥할 것이라는 둥 터무니없는 소문들을 민간에 퍼뜨린 것이다(‘木子’는 ‘李’이고 ‘奠邑’은 ‘鄭’이므로―邑은?과 같다?그 소문은 이씨가 망하고 정씨인 자신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조선 초기부터 《정감록(鄭鑑錄)》이 나돌았다. 정도전이 지었다는 설이 있는 이 책은 도참설과 풍수지리 등 민간신앙을 바탕으로 깔고 은유와 파자(破字)를 많이 써가면서 장차 정씨 성을 지닌 진인(眞人)이 나타나 이씨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상을 구하리라는 내용

정철
鄭澈(1536~1593)은 이 사건을 특별히 담당하는 우의정으로 임명되어, 동인의 우두머리인 이발
李潑(1544~1589)을 비롯해 수십 명의 동인 측 사대부들과 그 가족들을 처형하고 유배시키며 오랜만에 마음껏 분풀이를 했다.
정여립이 실제로 역모를 꾀했는지는 지금까지도 논란거리지만, 역모가 사건으로 표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대규모 옥사가 빚어졌으니, 역시 ‘말만의 역모’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정여립 모반 사건은 앞서의 사화들과 궤를 같이한다. 다만 사화의 경우와 다른 점은 이제는 개혁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아니라 사대부들 간에 사적인 친분 관계(당파)조차 쉽게 대형 사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정철은 평안한 만년을 즐길 팔자가 아니었다. 그 공로로 그는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한 계급 특진했으나 얼마 안 가서 동인의 역공을 받아 실각하고 말았다. 세자 책봉이 연관되어 있기에 건저
建儲(‘儲’란 세자를 뜻한다)문제라고 불리는 사건인데, 이 역시 전형적인 말만의 음모였다.

정철은 한직을 떠돌던 시기에 소일거리 삼아 노래들을 지었지만, 차라리 그것을 업으로 삼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런 노래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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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어느 해가 생각난다
그해 사월 어느 새벽
사랑스러운 내 기쁨을 노래했지
일 년 중에도 사랑의 계절에
씩씩한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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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정도전은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게 아니라 거꾸로 장량이 유방을 이용했다고 말했는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는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의 호방함도 대단하지만 그런 말을 이성계가 용납했을 정도면 당시 정도전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정도전이 국호를 정하는 일에서도 중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고려가 건국될 때처럼 분열되어 있던 나라들을 통일한 게 아니라 쿠데타로 이룬 새 나라였다. 그러므로 정통성의 문제는 오로지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친명파이자 사대주의자인 정도전이, 비록 계획으로만 그쳤지만 랴오둥 정벌을 계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명이 신생국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경국전》은 조선의 설계도에 해당하는 셈이다. 과연 나중에 이 책은 세조 때 본격적인 국가 운영 지침서인 《경국대전》의 모태가 된다.

《조선경국전》에서 주목할 것은 우선 서론에서 강조되는 ‘인

’의 정치다. 공자는 주나라 시대에 생겨난 조상숭배와 사직을 뜻하는예

의 개념에 국가와 사회 조직의 원리인 인을 더해 새로운 정치 이데올로기인 유학을 창시했다(맹자도 역시 인에 의한 왕도
王道정치를 주장한 바 있다).
정도전이 국가 경영(경국)의 원리로 인을 내세운 것은 곧 유교 정치 이념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유교 국가의 왕은 사직에 충실하면 될 뿐 실무를 담당하는 존재가 아니다. 국가 경영의 실무는 과거제로 뽑은 관료들이 담당한다. 그래서 정도전은 관료들의 수장인 재상이 통치의 실질적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테면 국왕은 상징적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는 존재이고, 실제 정치와 행정은 재상 중심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도는 천자를 정점으로 하고 사대부들이 천자를 보좌하는 전형적인 유교 정치의 밑그림이며, 주자학(성리학)을 정립한 주희
朱熹(1130~1200)의 정치사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정도전이 제시한 조선 건국의 이념은 명확해진다. 그는 옛 주나라의 예법을 기본 바탕으로 하면서 주희가 체계화한 성리학의 정신에 따라 조선을 유교 왕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아울러 개인적인 동기로, 정도전은 이성계가 국왕이지만 조선의 기획자인 자신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왕을 상징 권력으로 치부하고 관료가 실무를 담당하는 체제가 가장 바람직스럽다.

이성계가 시공자라면 정도전은 건축가

‘심기리(心氣理)’의 심은 불교, 기는 도교, 리는 유교를 뜻한다. 《심기리편》에서 정도전은 불경을 이용해 도교를 비판하고 노장사상을 이용해 불교를 비판하면서 결국 리를 본질로 하는 유교만이 최선의 이념이라고 찬양한다. 또한 《불씨잡변》에서는 논의의 차원을 더욱 끌어올려 철학적으로 불교의 윤회설을 공박하면서 불교를 숭상한 고려가 어떻게 멸망의 길로 치달았는지를 성리학적 관점에서 치밀하게 논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불교의 자비와 유교의 인 개념을 혼동하지 말라고 주장한 점이다.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정도전에 따르면 자비는 무차별한 박애주의이므로 오히려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파괴하는 위험한 개념이다. 그 근거는 분명하다. 불교의 자비는 도덕적 개념이지만 유학의 인은 원래 정치와 국가 운영을 가리키는 개념이니까.

건국자가 죽고 난 다음에 왕위 계승전이 벌어진 고려와는 달리 조선의 개국 초기 증후군은 이성계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시절에 터져 나왔다.

무릇 새 왕조는 이른바 ‘개국 초기 증후군’이라는 증상을 겪게 마련이다. 건국자의 특권과 권위는 보장되지만 건국자가 물러난 뒤에는 그 특권과 권위가 특정한 개인에게 순탄하게 상속되기 어렵다는 증상, 요컨대 후계 문제가 바로 그것

왕위 계승자의 신분이 태어나면서부터 왕자였나, 아니었나는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사소하지만 당대에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참고로, 로마 제국에서는 현역 황제를 아버지로 두고 황궁에서 태어난 아이를 가리켜 포르피로게니투스(porphyrogenitus, ‘태어나면서부터 황태자’)라는 별도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이성계는 지금의 아내 강씨(신덕왕후)의 소생인 이방번
李芳蕃(1381~1398)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마음먹었다. 강씨는 고려 말 권문세족인 강윤성의 딸인데, 이성계는 처가의 도움에 보답할 겸 명문의 후손을 후계자로 삼고자 방번을 낙점했을 것이다.

여섯 아들은 모두 지난해에 죽은 첫 아내(신의왕후)의 소생, 따라서 태어나면서부터 왕자의 신분이 아니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온전한 왕위 계승자라고 볼 수 없다.

결국 무모한 랴오둥 정벌 계획이 정도전의 명을 앞당기고 말았다. 정벌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1398년 여름, 정도전은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
私兵
조직을 해체하고 왕자들도 군사 훈련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자들이 따르지 않자 정도전은 징계 삼아 그들을 모두 지방으로 보내려 했는데, 그게 곧 ‘왕자들의 반란’이라는 묘한 봉기의 빌미가 되었다.

공신들은 막내를 계승자로 삼아 왕권을 더 제한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이성계의 의도와 일치했으므로1392년8월에 드디어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 불씨에 불을 댕긴 것은 어리고 힘없는 막내를 세자로 삼아 조선을 일찌감치 사대부 국가로 만들려 한 정도전이었다.

8월26일 밤, 이방원은 휘하 병사들을 거느리고 남은의 첩실 집에 있던 정도전과 남은을 살해하고 간단히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조선의 모든 권리를 누렸음에도 뭐가 부족해서 이런 악행을 저지른 거요?" 조선의 기획자인 정도전이 악행을 저질렀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으나, 왕자의 관점에서는 엄연한 ‘왕국’을 때 이르게 사대부 국가로 만들려 한 것이 악행이라면 악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이 꿈꾼 사대부 국가는 100여 년 뒤에 현실화된다.

왕위 계승은 왕자들의 몫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정몽주와 정도전을 살해한 방원을 추대했다. 그러나 아직 전면에 나설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방원은 짐짓 서열을 운위하면서 둘째 이방과
李芳果(1357~1419)에게 양보했다

(이성계도 고려를 무너뜨릴 때 그랬듯이, 원래 쿠데타의 실세는 허수아비를 먼저 내세운 다음에 집권하는 절차를 밟는 법이다).

배다른 형들은 냉혹했다. 폐위된 어린 세자 이방석은 유배 조치를 받고 도성을 나가자마자 살해되었고, 곧이어 그의 형인 이방번도 같은 길을 걸었다.

한반도의 경우는 중국보다 시기적으로 한 왕조씩 뒤처진다. 즉 통일신라는 중국의 한 제국처럼 유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채택했고,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당 제국처럼 과거제를 도입했으면서도 귀족과 호족 들이 중앙 정치를 주물렀다. 그렇다면 조선은 중국의 송과 비교할 수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실제로 건국 초기를 넘어서면서 조선은 본격적인 사대부 왕국으로 탈바꿈해 송 대처럼 망국적인 당쟁에 시달리게 된다

쿠데타로 집권한 경우 늘 그렇듯이, 맨 먼저 할 일은 두 번 다시 그런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태종은 정치와 군사를 확실히 분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몽골 지배기 초에 설치된 귀족들의 의결기구인 도평의사사
都評議使司
를 의정부
議政府
로 개편하고, 지휘권이 제각기 다른 사병 조직들을 흡수해 삼군부
三軍府
를 설치

왕권 강화를 위한 태종의 노력은 비정하다 할 만큼 철저했다. 그의 쿠데타에 일등공신으로 기여한 처남 민무구
閔無咎
의4형제를 죽인 일이나 심복인 이숙번
李叔蕃
을 유배 보낸 것은 단순한 토사구팽의 차원을 넘어 명백한 숙청이었다. 그 덕분에 재위 몇 년 만에 그의 권위와 권력에 도전할 만한 사대부나 관료 세력은 씨가 말라버렸다. 이제 사대부는 국왕의 충실한 관료가 되거나 순수한 사림
士林

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사림이라는 말은 고려 말에 처음 사용되었는데, 조선 초까지는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라는 의미였다. 즉 관리로 임용되지 않았거나 그럴 의사가 없는 유학자인데, 지금으로 치면 순수한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이 본격적인 사대부 국가가 되는 16세기부터 사림은 제도권 바깥에 있으면서(즉 신분상으로는 관리가 아니면서) 현실 정치에 개입하는 세력을 가리키는 용어가 된다.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기존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해야 하므로 왕조 교체가 필수적이다.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에서 왕조 교체가 일정한 유형처럼 반복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 건국된 왕조는 새 토지제도가 효력을 발휘하는 시기까지는 대체로 잘나간다. 그러나 그 제도가 수명을 다하는 중기 무렵부터 제도의 모순이 노출되면서 경제가 붕괴한다.

전시과에는 현직 관리가 죽어도 봉급으로 받은 토지가 국가에 반납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 결과로 고려는 중대에 접어들면서 국가 재정이 파탄 날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지주들이 토지 겸병에 나서면서 백성들의 삶도 피폐해졌다.

과전법을 만든 고려 말의 신진 사대부는 그간의 오랜 관행으로 사실상 사유화된 토지를 다시 수조권만 재분배하는 것으로 바꾸려 했을 뿐이다

전시과는 기본적으로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면서 관리에게는 토지의 생산물을 수취할 권리, 즉 수조권
收租權
만을 허용하는 제도

따라서 과전법도 전시과의 결함을 그대로 노출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전시과나 과전법에서 모두 세습을 인정한 토지는 공신전(功臣田)이다. 호족들의 지원으로 통일을 이룬 왕건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성계 역시 적지 않은 개국공신들(그의 아들들도 포함된다)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그들에게는 상당한 정도의 특권을 부여해야 했다. 그래서 공신전은 수조권과 무관하게 사전으로 취급되어 세습될 수 있었다. 이런 예외 조항이 있는 한 아무리 엄격한 토지제도라도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다. 태종은 원래 면세의 특혜까지 누렸던 공신전에서 세금을 거두는 방식으로 전환했지만 공신전의 세습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 재정의 목표는 국가가 재산을 그러모으는 데 있지 않다. 국가는 거두어들인 재정 수입에 맞게 재정 지출을 해야 한다. 지금처럼 사회 간접 시설이 많지 않던 시절이므로 국가의 재정 지출 가운데 으뜸은 단연 관리들의 봉급이었다

태종의 최대 업적은 바로 후계자를 잘 골랐다는 것이다.

셋째 아들을 후계자로 선정하고 자신의 생전에 왕위를 물려준 것

양녕은 왕위에 관심이 없어 아버지에게 세자 자리를 사양하고 싶다고 청했다가 거부된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의 본심이 어땠든 간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무백관’이 세자의 교체까지 건의하고 그 뜻을 관철시킬 만큼 발언권이 강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개인적 역량도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여건 또한 최적이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즉위하던 때와 달리 왕위 계승과 관련된 잡음이 전혀 없는 상태로 출발했다는 게 최대의 강점이었다(여기에는 아버지와 형이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게 큰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개국공신이 없다는 것도 좋은 환경이었다. 정도전을 위시해 조준, 권근 등 조선 건국에 이바지한(따라서 발언권이 큰)공신들은 제거되거나 죽었다. 그래서 세종은 태종이 즉위 초에 권력 안정으로 부심했던 것과는 달리 처음부터 본연의 업무인 통치행위에 집중할 수 있었으며, 그것도 그 자신이 직접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왕이라 해도 모든 일을 혼자 도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집현전
集賢殿
을 활성화시킨 것은 그 때문이다

세종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에게 다른 일은 하지 말고 오로지 공부만 하라는 뜻으로 휴가를 주기도 했는데, 그것은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제도로 자리 잡았다.

그런 실용서까지도 유학자들이 편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서 말하는 유학이란 특정한 ‘학문 분과’가 아니었다. 유학은 학문의 특정한 과목이 아니라 학문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서양에 비유하면 중세의 신학이 모든 학문의 근원이었던 것과 비슷하다.

농사법과 의학, 약학은 어느 분야보다도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야 하는 실용적 학문

동양의 전통에 따르면 원래 서적이란 일반 백성이 보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인쇄술이 개발되어도 ‘장서용’ 역사서나 찍어서 서고에 보관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전통에 맞서 세종은, 비록 농서나 의약서 같은 실용서에 국한되었지만 서적을 민간에 널리 보급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혁신적인 군주였다.

이 점에서 서양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세종의 시대, 그러니까 15세기 중반 유럽에서는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술을 발명한 지 50년도 못 되어 유럽 전역에 출판사, ­인쇄소가 생기고 서적이 널리 보급되었다. 그 결과 일반 민중이 성서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종교개혁가들의 공통적인 모토는 바로 ‘성서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인쇄술과 함께 이른바 동양의 4대 발명품으로 불리는 종이, 나침반, 화약 등도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는 발명되는 데 그쳤으나 서양에서는 발명되거나 도입되자마자 순식간에 민간에 널리 퍼져 실생활에 이용되었다.

1446년9월에 세종은 훈민정음
訓民正音
을 발표하면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우리 문자 시대’의 문을 열었다.

말은 전통적인 우리말을 쓰면서 글은 중국의 한자를 가져다 쓰는 것이니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알다시피 언어학적으로도 우리말은 교착어이고 중국어는 굴절어다(쉽게 구분하면, 교착어는 어근에 접두사나 접미사 같은 게 자유롭게 붙어서 이루어지는 말이며, 굴절어는 각 낱말의 의미가 고정되고 분리된 성격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문법에서도 차이가 있거니와 무엇보다 글을 통해 완벽한 의사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게 큰 문제였다.

흔히 훈민정음은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로 창제되었다고 알려졌는데, 한자의 ‘발음기호’도 창제 목적의 하나였을 것이다. 한자가 도입된 삼국시대 초기 이래 1000여 년이 지나면서 한자의 발음이 중국과 많이 달라진 것을 바로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문자는 원래 그림에서 출발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추상화되어 기호가 되고 그 기호가 최종적으로 정리된 결과로서 탄생한다. 이집트의 상형문자, 중국의 한자, 알파벳의 원조가 된 페니키아 문자 등이 모두 그렇다. 즉 문자는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지배 집단이 일정한 기간 동안 연구해 문자 체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고 또 그 문자가 오늘날까지 쓰이는 경우는 역사상 처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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