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읽기를 권함 - 2004년 2월 이 달의 책 선정 (간행물윤리위원회)
야마무라 오사무 지음, 송태욱 옮김 / 샨티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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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든지 빨리빨리 효율적으로 해치우는 것이 우리사회의 미덕이 된지 오래다. 급변하는 사회에 보조를 맞추려면, 그래서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으려면 무엇이든 신속하게 해내야만 한다. 읽기의 영역도 예외는 아니다. 한 때 속독 광풍이 불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나보다 좀 윗세대의 일이라고 하는데, 온 동네에 속독학원이 난립했을 정도였다니 알만한 일이다. 예전만큼 속독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도 '속독'하면 '수능 언어영역에 무척 도움이 되는 것', '짧은 시간에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는 큰 능력'등 좋은 이미지를 떠올리며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거창하게 '속독'까지는 아니더라도 빨리 읽는 것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그러한 능력을 기르는 것을 권유하기도 한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많은 책을 소화해서 보고서를 쓰거나 기획안을 만들어 제출해야하는 상황이라면 책을 빨리 읽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것이 아닌 경우에도 많은 사람들이 책을 빨리 읽어야한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다. 그냥 획일적으로 모든 책을 빨리, 그래서 같은 시간에 더 많이 읽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극단으로 실현한 사람이 이 책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는, 그리고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다치바나 다카시일 것이다. 책은 문장 하나하나를 충실하게 읽는 것이 아니라 책 전체의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우선 그 흐름을 파악한다. 먼저 장 단위로 전체의 큰 흐름을 파악한 다음, 절 단위로 세세한 흐름을 파악해 간다. 속독으로 읽을 때에는 단락 단위로, 단락의 첫 문장만 차례로 읽어나간다. "이런 방법이라면 한 쪽을 읽는 데 1초, 좀 늦더라도 2,3초면 읽을 수 있따. 300쪽 책이라면 300초에서 900초, 그러니까 5분에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뭐 이런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많은 사람들이 속독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 읽고 싶은 시간은 많은데 시간이 없기 때문에 속독하는 경우도 있지만 빨리 읽는 것을 하나의 능력으로 간주하고 그러한 능력을 신장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빨리 읽도록 자신을 닦달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또는 읽는 것에 익숙하다보니 빠른 속도로 죽죽 읽어나가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 왜 빨리 읽으려고 하는가? 꼭 빨리 읽어야만 하는가? 빨리 읽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인생에서 독서의 의미는? 그리고 본인이 천천히 읽음으로써 맛볼 수 있었던 희열감을 묘사하면서 속독을 한다면 느낄 수 없을 중요한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야이로소이다>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무사태평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 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이 부분은 마지막 장의, 고양이 주인인 구샤미 선생 집에 메이테이, 간게쓰, 두쿠센, 도푸군 등 여러 친구가 모인 날의 일이다. 무료한 잡담 끝에 짧은 가을 해는 지고 손님들은 인사를 하고 뿔뿔이 현관을 나선다. 구샤미 선생은 서재에 틀어박히고, 아니는 바느질을 시작하며, 아이들은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잠이 든다. 그리고 하녀는 목욕을 하러 간다. 석양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집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진다. 소설도 조용해진다. 그 장면에서 앞의 한 문장이 턱 하니 나온다. 이렇게 고요한 야음의 광경이, 이렇게 적막한 말이 이 소설에 있었던가. 쓸쓸하고 절실한, 그래서 오히려 행복감마저 들게 하는 깊은 마음...... 몇 분인가 그런 기분을 맛보았다.

 빨리 읽어야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과연 이런 쾌감을 느낄 수 있을까? 여유 없이 다음 글자로 내처 눈동자를 달리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쾌감이 뒤따를 리 만무하다. "단 한가지, 속독을 실천하는 사람들만 맛볼 수 있는 행복이 있을 거라고 추측할 수 는 있다. 그것은 양과 속도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이다. 이번 달은 서른 권을 읽었다. 쉰 권을 읽었다. 백 권을 읽었다 하고 수첩에 적어 넣는 즐거움"뿐이다.

 저자는 앞서 말한 다치바나 다카시 뿐만 아니라 한 달에 최소 백 권은 읽고 있다는 후쿠다 가즈야의 독서술은 그들과 같이 책을 많이 읽어야만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나 해당하지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물론 모든 책을 속독해야한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소설같이 책 전체를 다 읽는 것이 기본인 책은 속독이 불가능하고 또 속독해서도 안 되고 다만 기본적으로 그렇게 '시간만 잡아먹어 어쩔 도리가 없는 책'은 거의 읽기를 포기했다고 한다. 이에 저자는 말한다. 나한테는 그런 읽기 방식이야말로 다치바나 다카시가 말하는 '시간만 잡아먹는'일, 즉 시간 낭비이다. 단순한 낭비가 아니라 인생의 낭비이다. 거듭 말하지만 다치바나 식, 후쿠다 식의 속독은 스스로 정보를 척척 섭취하고 배설하는 '정보 인간' 이 되려는, 그런 인생을 선택한 사람에게만 유효한 독서술이다. 저자는 에밀 파게, 엔도 류키치, 헨리 밀러와 같이 천천히 읽는 것을 가장 자연스럽고 행복한 독서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들을 인용하면서 천천히 읽기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천천히'라는 말은 참으로 모호한 말이다. '천천히'란 말에 기준이 있을까? 천천히 읽으라고 함은 과연 얼마만큼의 속도를 내어 읽으라는 말일까? 그냥 본인이 읽을 때 책에서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정도일까?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여기에 대해 저자는 말한다. 읽는다는 것이 인간의 행위 가운데 하나인 한, 걷는 것이나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체 리듬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시각이나 지각의 미묘한 작용처럼 관련되어 있을 테고, 또 깊숙한 곳에서는 호흡의 상태 같은 것과도 관련되어 있으리라. 저자는 코끼리와 생쥐의 예를 들면서 생체 리듬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속독을 하는 것은 살아가는 리듬의 해체라고까지 말한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자꾸 책장을 넘기는 동안은 숨을 죽인다거나 가쁘게 쉰다거나 해서 호흡도 상당히 흐트러진다. 저자는 서정적인 글을 인용하면서 그러한 정경을 섬세하게 마음속으로 그려낼 수 있는 정도로 책을 읽을 때가 알맞은 속도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단지 책 읽는 속독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독서철학을 엿볼 수 있다. 독서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생활의 일부일 뿐이다. 책읽기가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 해도 생활 전체에서 보면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독서를 인생에서 가장 우위에 놓는 사람들, 일명 '책벌레'들이 있다. 하지만 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의 생각은 난센스이다. 사실 그렇다. 독서를 왜 하는가? 독서는 삶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삶 없는 독서는 무의미하다. 책은 삶을 닮았고 삶의 일부이기도 하며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실재인 '삶'을 뒷전에 두고 독서를 우선시 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 아닌가. 독서 외에도 중요한 것은 많다. 생활에는 독서 외에도 밥 먹는 것, 씻는 것, 걷는 것, 겨울 아침, 고엽을 물처럼 씻고 있는 아침 햇살을 보고 있는 것, 죽어버린 개를 묻어주는 일도 있다. 저자가 인용한 말이 그의 독서철학을 명료하게 보여주므로 재인용해본다. 식사를 하면서 책을 읽고 신문을 보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지만, 사실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된 책을 읽을 수도 없고 또 평생 감자가 익었는지 어땠는지도 모를 만큼 세상 물정에 어두운 채로 끝나버린다. 식사 시간에는 차분한 마음으로 식사를 하고, 밥이 된지 무른지, 국이 짠지 싱거운지 알맞게 된 건지, 무슨 생선을 조렸는지, 신선한지 묵은 건지 상해 가는지, 그런 일들이 모두 명약관화하게 마음에 비치듯 온 마음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좋다.(고다 로한의 <노력론>에서 나오는 한 구절)

 그러므로 당연히 독서는 생활의 방식에 따라야한다. 독서하고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갖고 있지 않는 한 아침이면 출근 준비를 해야 하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루에 독서를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고 독서를 우위에 두고 직장생활을 소홀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그러한 일은 저자의 인생관에도 맞지 않다. 그러다보니 저자는 대략 일주일에 한 권 꼴로 책을 읽게 된다고 한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입장에서 본다면 독서를 안 하는 수준일 것이고 독서광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꽤 적은 분량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저자는 무리해서 책을 더 많이 읽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주기에 맞게 읽고 있고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기 위해 주말의 모든 시간을 독서에 할애하는 저자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월요일 아침, 새로운 한 주를 새로운 책과 함께 시작하면, 지난주와 일종의 구분을 지었다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요일이 되풀이됨에 따라 책 속의 새로운 사람들이나 새로운 풍경은, 그 보이는 방식이 바뀌기도 하고 때로 심오함이 드러나 보이기도 한다.

 일요일에는 가능하면 바깥바람을 쐬고 싶다. 개를 데리고 공원을 산책하면, 공원의 넓은 연못에는 보트가 떠 있고 잉어가 헤엄치며 자라가 일광욕을 한다. 연못 위에는 붉은 부리갈매기가 날고 있따. 공원에 붙어 있는 잡목림에는, 올 때마다 나뭇잎이나 숲 속 그늘의 잡초 색깔도 조금씩 바뀌어 있다. 바람 냄새도 바뀌어 있다.

 이 책은 많이, 그리고 빨리 읽어야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던 나에게 단비와도 같은 책이었다. 그리고 내가 왜 책을 읽고 있나 그리고 책이 내 인생에서 얼마만큼의 의미를 가지는 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주었다. 중간 중간 인용문들 중 낯선 것들도 있고(특히 무명 유카타 부분) 인용들이 많아 좀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러한 부족한 부분을 상쇄할 만큼 좋은 생각을 담고 있는 글이라 생각한다. 빨리 읽기에만 미쳐있는 '눈동자가 흐트러진' 사람들에게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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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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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호모~'의 제목을 가진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그러한 시류를 탄 것인지 그린비 출판사에서 '~달인, 호모~' 시리즈 4권을 냈다. 그 중의 한 권이 고미숙이 지은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이다. 전에 읽었던 두 권의 책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사유의 경계가 무너지는 듯한 쾌감을 느꼈던 터라 그녀의 새 책 출간 소식은 나를 설레게 했다. 특히나 공부에 관한 책이라서 더욱 기대가 컸다. 당장 코 앞에 있는 시험공부가 아닌, 삶에 대한 성찰을 수반하는 공부(그게 철학, 수학, 과학,


명상, 춤 등 그 어떤 형태든 간에)에 대한 조언이 필요했다. 너무나도 고지식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해버린 내가 스스로 일어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고 주변에 이런 나를 격려하고 고무시켜줄 스승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내가 기대고 도움을 구할 곳은 책밖에 없었다. 그 때마침 이 책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의 딱딱한 사유를 경쾌하게 무너뜨리는 그녀의 필력. 그녀의 글에 취해 있노라면 어느새 나는 내공이 충만한 고수처럼 자유롭게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무협소설의 고수와 하나 됨을 느낄 때의 자유와 흡사한 자유로움이 책 읽는 내내 내 무거운 몸과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을 덮고 났을 때의 그 헛헛함이 무협소설을 덮었을 때의 허망함과도 좀 닮은 것 같다.


 학교는 동일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동일한 장소에 몰아놓고 같은 내용을 주입시켜 평균적이고 상식적인 존재들을 양산하는 '근대'의 산물이다. 그녀는 이반 일리히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학교가 삶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독점하고 삶 자체가 공부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게 함은 물론이거니와 공부에 대한 생각을 모두 "학교식으로" 재편하고 그 결과 전 사회를 "학교화" 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극단으로 실현한 형태가 사교육이다.) 학교가 그렇게 "공부에 대한 이미지와 표상들을 몽땅 흡인해버림으로써" 학교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난 모든 공부들을 소외시켜버리고 삶과 공부 사이의 괴리를 낳으며 그와 관련된 거짓말을 유포시킨다. 그 거짓말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공부엔 때가 있어"라는 말이다. 그것은 학교의 연령별 균질화와 공부를 학벌과 자격증 혹은 취미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과 맞물려 생겨나게 된 편견이라고 한다. 공부하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것이 '학교와 관련된, 학교식 공부'이다. 학교가 잠식해버린 '공부'란 것 외의 다른 것을 떠올릴 수 있는 상상력이 없다. 그런 공부는 '학교에서', '나이에 맞게' 하는 것이라 여겨지고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진짜 공부'라 여겨지지 않는다. 이러한 공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은 학벌이다. 학벌이 공부의 종착역이 되어버린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 학벌을 지향하지 않는 공부에는 취미를 위한 공부가 있는데, 그러한 공부의 영역마저 아주 좁은 범위에 몰아넣음으로써(예를 들어 학교공부와 유사한 형태의 교양공부를 들 수 있다.) '공부에 다 때가 있어'라는 거짓말을 견고하게 만들어버린다고 한다.

 두 번째 거짓말은 "독서와 공부는 별개다"라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독서는 그저 고상한 취미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편에서 기형적인 독서열풍이 일고 있긴 하다 '영어와 논술'을 위한 독서가 그것이다. 바람직한 독서형태는 아니지만 그것 외에는 독서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된 가장 근원적인 요인은 "학교에서 공부와 독서를 분리시켜왔기 때문"이다. 독서는 그저 개인의 취미생활의 영역일 뿐이고 그 와 달리 공부는 실용적인 지식을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이런 대화가 기억이 난다. "애, 너 뭐하니? 공부하니?" "아니, 책 읽어." 독서와 공부는 별개의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깔려있는 사례이다. 독서와 공부의 이분법적인 사고에 철저히 지배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세 번째 거짓말. "창의성만 있으면 만사 OK?" 주어진 일을 맡아 소임을 다 하는 것을 넘어서서 주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하는 시대가 도래 했다. 이런 시대에 강하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 바로 '창의성'이다. 위 거짓말이 무슨 뜻이냐면, 창의성을 모토로 창의성을 기르기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벌이고 있는데, 그 방법이 전혀 창의성을 길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의성을 기른답시고 좋은 시설, 일명 창의성을 증진시킨다는 시설들을 개발하고 있으나 오히려 그러한 노력이 제도적 서비스의 노예를 양산한다고 한다. 그런 서비스, 시설 등이 갖춰지면 자연히 창의성이 이끌어진다는 발상 하에 더 좋은 서비스, 시설만을 요구할 뿐이다. 서비스는 서비스일 뿐이고 시설은 시설이다. 좋은 시설이 있다면 그것과 어우러져 창의적인 발상을 이끌어내는 노력을 수반해야지 시설이 저절로 창의성을 이끌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함으로써 창의성을 계발한답시고 아이들을 무작정 풀어놓는 경우가 있다. 아주 큰일 날 일이다. "눈만 뜨면 광고 인터넷, 각종 동영상에서 욕망을 자극하느라 시각적 폭격을 해대는데, 웬만한 내공이 아니고는 그것들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저 풀어놓는 자유가 자유인 것은 아니다. " 카프카가 말했듯이, 추상적인 자유란 없다. 다만 지금 나의 자유를 가로막고 있는 문턱이 있을 뿐, 그 문턱을 넘어설 때 비로소 그만큼의 자유의 공간이 열리는 법이다. 가령, 지금 10대들은 게임과 포르노에 전면 노출되어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치명적 중독성에 있다. 한 번 거기에 붙들리면 헤어나기가 어렵다는 것. 그게 바로 억압이다. 그렇다면, 그 때 자유란 '그 억압에 얼마만큼 저항할 수 있는가.', ''그에 맞서 얼마나 능동적으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또 하나는 체험학습과 토론이다. 요즘 농촌체험이니 박물관체험이니 하면서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계발해준다는 프로그램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고, 꼭 창의력뿐만 아니라 기타 여러 능력을 기른다는 이유로 학생들을 토론에 참여시키려는 노력들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저자에 의하면 "토론이건 체험학습이건 그것이 강도 높은 학습의 과정이 되려면 고도의 훈련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토론을 통해 자기 생각을 바꾸겠다는 치열한 의지도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아주 유치한 수준에서 헛바퀴만 돌 따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거짓말들을 넘어서는 방법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자는 고전 읽기를 제시한다. "고전이란 시대의 통념과 억압을 뚫고 삶과 사유의 눈부신 비전을 탐색한 전위적 텍스트를 말한다. 고전이 시대마다 서로 다른 의미망을 구성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전위적 열정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전이야말로 진정, '미-래(아직 오지 않았지만[未], 곧 도래할[來])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유년기, 청년기 등으로 나누어진 연령별 학습제도가 아닌 "스승, 도반, 청정한 도량으로 이루어진 앎의 코뮌"에 접속하라고 한다. "코뮌이란 기성의 권력과 습속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유롭고 창발적인 집합체 혹은 네트워크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코뮌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은 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 공동체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자기가 선 자리를 그러한 배움터로 전환해야 한다. 저자는 그러한 배움터에서 인생역전을 한 자신의 사례(여기서 인생역전이 금전과 맞물린 그런 뉘앙스가 전혀 없다.)를 들려준다. 독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4학년 때 들었던 고전문학시간에 '스승'을 만났고 그 스승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무모한(?) 열망 하나로 대학원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한다.(그녀의 저서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와 중복되는 이야기가 꽤 많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는 스승과 도반, 자신의 근기를 빌어 지식에 대한 열망을 마음껏 분출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암송과 구술, 글쓰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자 한다.

 나는 암송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암송은 그냥 눈으로 읽는 것을 소리를 내어 읽어 외우는 것뿐이라는 아주 단순한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암송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나에게는 참으로 신선한 발상이었다. "그것은 소리를 통해 몸의 안과 밖이 연결된다는 점에서 근원적으로 집합적이다. 즉, 혼자서 할 때조차 그것은 외부와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 지식의 사적 소유와 독점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는 저자는 이러한 '소통을 전제하는' 암송의 방식에서 문제의 실마리를 얻고 있다.   그리고 낭송을 하다보면 신장의 기운이 튼실해지고, 소리를 내려면 턱관절을 유연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이 운동은 특히 뇌를 자극하는데 아주 효과적이라고 한다. "요컨대, 암송은 신장에서 뇌까지 신체의 전 기관을 역동적으로 회통시켜주는 기막힌 공부법에 속한다." 몸과 정신이 따로 놀지 않는 좋은 공부법이라 할 수 있다.
 

 암송과 더불어 중요한 공부법 중 하나가 구술이란다. "구술이란 어떤 상황이나 문맥을 서사적으로 재현하는 능력이다. 달리 말하면, 대상을 장악하는 힘, 대상과 교호하여 새로운 국면을 연출하는 테크닉이기도 하다." 요즘 학생들은 이러한 능력이 현저히 부족하다. 나 또한 마찬가지 이다. 어떤 상황을 대했을 때 그것의 맥락을 짚기는커녕 파편적인 단어를 나열하는데 그칠 뿐이다. 이러한 능력부족은 디지털 시대가 도래 하면서 더 심해졌다고 한다. "시각의 폭주에 휘둘리다 보면 아주 짧은 단위로 명멸하는 스펙터클에만 길들여져 버린다. 그와 더불어 장면들을 연결하는 내러티브의 능력은 점차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술 능력은 "상황을 언어화하는 능력"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리더십과도 연결된다고 한다.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통찰은 내 앎의 지평을 확장시켜 주었다. "지식인에게 있어 글이란 자신의 신체 혹은 삶의 특이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표현형식이다." 글과 신체는 연결되어있다. 글쓰기가 신체를 단련시키기도 한다. "글이란 그저 막연하게 '자알 '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잘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나 결단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검객이 무술의 초식을 익히듯, 악공이 악기를 다루듯, 한 수 한 수 터득해가는 장인적 과정의 산물이다. 당연히 체질과 근기에 따라 수많은 학습 경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절차탁마하는 과정 속에서 신체가 전혀 다른 조성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신체적 조성을 바꿀 수 없다면, 담론을 생산할 수도, 코뮌의 리더도 될 수 없다." 저자는 자신이 어떻게 변화하게 되었는지를 통해 우리의 변화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거기서 나는 많은 영감을 얻었다. 글쓰기가 단순히 '글쓰기'가 아니라 치열한 산고 끝에 신체의 변화를 수반하는 결실의 산물인 것이다. 몸과 글(또는 지식)의 분리라는 이분법적인 사유에서 탈피한 신선한 발상이었다.



 지식과 삶, 아니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해주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저자처럼 삶을 마음껏 유영하는 호모 쿵푸스가 될 수 있을까? 신체의 구성까지 변화시키는 글쓰기. 말은 쉽지만 얼마나 치열한 고민이 수반되어야하는지 잘 상상이 가질 않는다. 앞으로 좀 더 부지런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족함이 너무나도 많은 나인지라 갈 길이 멀다. 조금씩, 조금씩 내공을 쌓아서 어느새 고수가 된 나 자신의 충일함을 느끼게 될 날이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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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3-30 17:07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나, 제왕의 생애 (반양장)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아고라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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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나이에 섭국(燮國)의 제왕자리에 오르게 된 죽은 제왕의 오자(五子) 단백. 그는 조정으로 나아가 관료들을 접견하고 그들이 올리는 상소를 비준하는 것보다 무릎 위에 올려둔 귀뚜라미 통에서 울리는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 것을 더 좋아하는 철없기만 한 아이일 뿐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제왕을 대신하여 실권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 그들이 바로 그의 할머니 황보 부인과 어머니 맹 부인이었다. 제왕은 그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력이 있는 제왕임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없는 현실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그러한 감정을 어린아이의 무지하고도 폭력적인 방식으로 분출하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서쪽 변경 순행 와중에 내시 연랑과의 미복 나들이에서 줄 타는 광대를 보게 된다. 그것은 그에게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는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제왕의 삶보다 줄 위에서 한없는 자유를 취하는 광대의 인생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어린 제왕의 마음에 광대의 삶을 동경하는 마음이 자리 잡는다.

 독살의 위험에 빠졌다가 자리에서 털고 일어난 어느 날, 태의의 제안으로 후궁의 숲으로 나가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게 된다. 그 날부터 새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된다.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에 대한 동경을 기투한 존재인 새. 새의 삶은 광대의 삶과도 닮았다. 줄 위에서 세상을 굽어보며 자유를 '타는' 광대의 삶은 새의 그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소설의 초반에서부터 미친 궁인인 손신은 끊임없이 "~머지않아 섭국의 재난이 닥칠 것이 옵니다"라는 말을 내뱉는다. 제왕은 이렇게 '재수 없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는 궁인을 멀리하거나 내치지 않고 오히려 그를 가까이하고, 가끔씩 그의 말투를 따라하곤 한다. 이 어구가 소설 중간 중간 계속 되풀이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섭국의 앞날을 짐작케 한다. 이런 운명론적인 어구에서 비롯된 정서가 제왕의 생을 비롯해서 소설 전반의 정서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자유로울 것 같은 왕이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운명은 고사하고 사랑하는 여자 한 명조차 지키지 못하는 나약하고 부자유스러운 삶을 살아갈 뿐이다. 할머니인 황보 부인이 죽기 직전에 내놓은 향낭에 담긴 제왕의 유서는 제왕의 삶이 한 편의 희극이었음을 보여준다. ' 장자 단문을 세워 섭국의 군주 자리를 잇게 하라.' 제왕의 삶이나 장자 단문, 그러니까 원래 제왕의 삶 모두 한 여자의 권력놀음에 철저히 이용당한 셈이었다. "이건 내가 너희 사내 놈들과 즐긴 한바탕의 농담이니라. 나는 가짜 섭왕을 만들었다. 너를 조종하는 게 더 쉬웠기 때문이지."

 그러다 결국 제왕의 자리는 원래의 제왕인 단문에게로, 아버지를 닮아 더 제왕의 모습에 가까웠던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간다. 운명의 손이 그를(단백을) 그 자리에서 밀어낸 것이다. 단백은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단백은 단 한번도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 원한 적도 없는데 제왕이 되었고 텅 빈 인형처럼 제왕의 자리에 앉았다가 다시 밀려나게 되었고, 그리고 평민이 되었다.

 줄타는 광대. 진실로 자유로운 허공의 새. 단백은 당연히 광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광대를 향한 길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걷고 뛰고 재주를 넘었다. 단단히 매어져 있는 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그 줄 위에서 무엇을 보았던가? 진실한 내 그림자가 향현의 저녁 빛 속에서 점점 커지는 모습을, 아름다운 흰 새가 내 영혼의 깊은 곳으로부터 날개를 펴고 자유롭고 오만하게 세상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날아오르는 것을, 저 푸르고 끝없는 하늘 위로 멀리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줄타기 왕이다. 나는새다." 광대가 됨으로써 담백은 진정한 왕이 된다. 그가 바라마지 않았던 새가 된다.

 팽국이 섭국을 함락하고 담백이 옛 스승이 있었던 고죽사에서 줄 타며 살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권력의 소용돌이 그 한가운데에서 저잣거리, 외줄로 옮겨 온 삶. 그 파란만장한 삶을 작가는 "저잣거리의 다관에 나앉은 늙은 손님처럼 세상의 모든 일과 살아있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흘러가는 세우러을 모두 내 눈으로 지켜볼 수 있기를 바랐다" 는 작가의 말처럼 타인의 삶을 관조하듯 참으로 담담하게 서술했다. "나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인생이란 불과 물, 독과 꿀처럼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들이 한데 어우러진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말대로라면 제왕의 삶도 완벽하게 아름다운 인생인 셈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제왕의 삶은 좀 정도가 더 할 뿐 불과 물, 독과 꿀처럼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들이 한데 어우러진 우리네 삶과 다를 것이 없다. 삶이란 것이 언제나 물과 꿀로만 이루어질 수 없고 그러한 삶이 있다 하더라도 인생의 참된 맛을 느낄 수 없으리라. 그러한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삶이 운명의 손아귀에 의해 원치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더라도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들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작가는 자신이 창조해낸 삶을 그렇게 관조하면서 또 한번 꿈꾸듯 살아낸 것 같다. 우리도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을 그렇게 작가처럼 창조를 통해서, 또는 창조된 삶을 통해서 또 한 번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저잣거리의 다관에 나앉은 늙은 손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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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az1011 2007-07-02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멋진 소설 같습니다.

소설의 느낌을 잘 전달해주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