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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ㅣ 창비시선 247
박형준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평점 :
-저는 지금 출근해서 일하다 밥을 먹으러 골목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 골목에서 카센터 하나를 보았고, 벽에 붙은 거울을 힐끔 쳐다보고 있습니다. 저는 저 거울처럼 뭔가를 채웠다가 비워가고, 비워갔다 채워가는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박형준 산문집 저녁의 무늬. 현대문학.39쪽
시인의 시선은 화려하고 행복한 이들의 모습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초라하고 서글픈 이들의 모습에 고정되어있다. 섬을 쓰는 허리 굽은 늙은 청소부(어스름 새벽-21쪽), 누더기 입고 눈보라 치는 밤에 정신없이 유리창을 보는 노인,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고 얼굴 근육에 마비가 때문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식이 삼촌(비료푸대 발-32쪽)같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시에 비워가는 것을 채우려는 것 같다-기억속에 어머이의 모습'멍',
멍
어머니는 젊은 날 동백을 보지 못하셨다
땡볕에 잘 말린 고추를 빻아
섬으로 장사 떠나셨던 어머니
함지박에 고춧가루를 이고
여름에 떠났던 어머니는 가을이 되어 돌아오셨다
월남치마에서 파도소리가 서걱거렸다
우리는 옴팍집에서 기와집으로 이사를 갔다
해당화 한 그루가 마당 한쪽에 자리잡은 건 그 무렵이었다
어머니가 섬으로 떠나고 해당화 꽃은 가을까지
꽃이 말라비틀어진 자리에 빨간 멍을 간직했다
나는 공동우물가에서 저녁 해가 지고
한참을 떠 있는 장관 속에서 서성거렸다
어머니는 고춧가루를 다 팔고 빈 함지박에
달무리 지는 밤길을 이고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이제 팔순이 되셨다
어느 날 새벽에 소녀처럼 들떠서 전화를 하셨다
사흘이 지나 활짝 핀 해당화 옆에서
웃고 있는 어머니 사진이 도착했다
어머니는 한 번도 동백을 보지 못하셨다
심장이 고춧가루처럼 타버려
소닷가루 아홉 말을 잡수신 어머니
목을 뚝뚝 부러뜨리며 지는 그런 삶을 몰랐다
밑뿌리부터 환하게 핀 해당화 꽃으로
언제나 지고 나서도 빨간 멍 자국을 간직했다
어머니는 기다림을 내게 물려주셨다 『춤』54-55쪽
* 시를 참 잘 쓴다. 세번째 시집부터, 그리고 네번째 시집인 '춤'이 더, 점점 더 잘 쓴다. 그동안의 발표한 시가 이미 다섯 번째 시집을 곧 묶을 것 같다. 다섯번 째 시집도 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