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12
호빗을 읽다.
아직 어린 사촌동생들에게 줄 책들을 뽑아내면서
그런 책들을 읽는 요즈음.
호빗은 국민학교 시절 읽었던 책이었다.
그런 책을 초등학교 다니는 사촌동생에게 선물하려 한다.
오래도록 읽히는 책에는 이런 사람들의 추억도 켜켜이 쌓여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 녀석들은 책을 읽으면서 영화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겠지.
읽기나 할까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그건 그녀석들의 선택일 것이다.
당시 난 성당을 열심히 나가던 소년이었고,
성바오로출판사에서 운영하는 서점을 자주 갔었다.
어쩐 일인지 성바오로출판사에서는 판타지소설을 많이 번역해놓았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호빗과 나니아연대기 등등의 책들을 읽을 수 있었고,
특히 나니아연대기는 몇 번이고 다시 읽을 정도로 좋아했었다.
호빗이라는 책의 질감을 아직도 기억한다.
종이는 얇고 부드러웠으며, 펼칠때마다 기분좋은 내음이 스며들었다.
다만 책 안의 삽화에 그려진 호빗은 끔찍하게 못생겨서
아마 이 이야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던 큰 이유가 그 삽화 때문이었을 거라고
다시 읽으면서 생각했다.
삽화 없이 이번에 다시 읽을때는 무척이나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톨킨이 이야기를 펼쳐나갈때 강약중간약 리듬을 만들어내는 게 느껴져서
아아, 이 양반은 정말 이야기꾼이로구나,
무척이나 이야기라는 걸 듣고 말해주기를 좋아하던 양반이었을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유명한 언어학자답게
언어를 조물조물 가지고 노는 걸 굉장히 즐거워한다는 인상이었다.
수수께끼도 자주 나오고 많은 종족들이 틈만 나면
시를 만들어 노래하는 걸 즐긴다.
룬 언어까지 스스로 창조해낼 정도였다니
이 양반 1세대 오타쿠가 아니었을까.
가장 전율이 오던 지점은
골룸이 등장했을 때였다.
자신과 대화하는 이중적인 자아를 만든다는 상상은 어떻게 한거지.
축축하고 서늘하고 섬뜩한 동시에
빌보와 수수께끼로 대결한다는 건 또 흥미로운 지점.
읽는 동안 톨킨이 이 세계를 만들어내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가 전해져서
또다른 의미로 재미가 가득했던 책이었다.
아마 네 번째 읽는 책일텐데 다 커서 읽으니 색다른 재미가.
사촌동생들도 이런 재미를 느끼면 좋으련만 으흥.
좋았던 문장은 이런 것이었다.
참 이상하지만,
갖고 싶던 좋은 것들과 지내기에 쾌적하고 좋은 날들은 얘기할 것도 들을 것도 별로 없어서,
금방 이야기를 다 해 버리게 된다.
반면, 불안하고 가슴 두근거리고 심지어 무시무시한 것들은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어 어떻게든 길게 얘기하게 된다.
최근 너무 익숙한 것들에 둘러쌓여있단 생각을 종종 한다.
그것들이 내게 더 이상 느낌을 주지 않는단 사실이 슬플 때도 있지만
무서운 점은 스스로 그 안락함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점점 겁쟁이가 되어간다.
내 세계는 점점 더 좁아지고 감각은 퇴화하고 있다.
불평만 늘어가는 투덜이.
늘 투덜투덜거리면서 바꾸려고 하지는 않는다.
떠나는 걸 싫어하고 늘 그자리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호빗족처럼.
어릴 때 호빗에서 가장 이상했던 부분은
모든 모험을 끝내고 힘겹게 빌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때마침 집에서는 빌보가 죽었다고 여기고
그의 모든 물건들을 파는 경매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친척들은 빌보의 귀환에 기뻐하는 게 아니라
싸게 산 물건들을 돌려줘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탐탁찮아하던 점이었다.
더군다나 다른 세계에서는 전해지는 이야기로 남게 된 빌보가
오히려 자신의 마을에서는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져
사람들이 기피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이제는 이해가 간다.
톨킨의 그 날카로움에 감탄하게 됐다.
좁은 세계에 갇혀사는 사람은
넓은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빌보 친척들의 위치에 서게된 것은 아닐까
책을 덮고 그런 걸 자꾸 묻고 있다.
내 좁아터진 세계와 냉소적인 시선을 생각하며.
+
책을 읽는 일에 이유를 붙이기 시작하고,
평가하려 하기 시작했을때
어쩐지 독서가 재미없어지기 시작했다.
책에 대한 정보를 잘 정돈하고
어떤 것들이 좋고나빴는지를 쓰는 일은
아무래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잘 하고 있다.
그런 것들을 따라가기에는 나는 너무 뒤쳐져있어서
몇 번 해보고는 금방 내려놓는지도 모르겠다.
독후감이라면 나는 내게 일어난 '감'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그것은 아주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이야말로 내겐 더할나위없이 가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것들을 정돈해보고자 이런 서재도 시작할 것인데
다른 사람들의 서재를 읽다보면 그런 것들을 쉬이 잊곤 한다.
사적인 공간에서 나만을 위한 글쓰기를.
그것은 온전한 내 소박한 바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