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고모 생일이었고,
열살 터울인 고모는 고등학교 국어선생님.
제작년 고모는 내게 시사인 정기구독을 신청해줬었고,
나는 요리잡지 정기구독을 신청해줬었다.
올해도 해줄까 물었더니
책을 볼때는 의지 100%인데 실천력은 0%라며
다른 책을 선물해달라했다.
아, 문득 떠오른 책은 조정래 대하소설 시리즈

마침 그 책을 살 때를 놓쳤던 고모는
아주 좋아했고
묵직한 그 세트들을 오랫만에 책꽂이에서 빼내었다.
6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새 책이나 다름없다.
어쩐지 서글퍼졌다.
태백산맥 1권만 누군가 펴본 흔적이 희미하게 있고,
책등에는 고양이가 이빨로 몇 번 깨문 흔적만이 남아있다.
보내기전에 다시 읽어볼까 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대학 시절에 읽어본 것이 정말 다행이다 싶었지만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일생에서 대하소설을 읽을 기회는 날이 갈수록 희미해진다.
때문에 대학교때 꼭 읽어야할 권장도서로
그렇게 많이들 이야기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오래전 그 책들에 빠져 있던 방학기간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무턱대고 민주노동당에 가입했었고,
때때로 시위에 나갔으며,
엄청난 경험을 가진 어른들과 매일 술을 마시며
내 무지를 깨달았고, 모진 세상에 분개했고,
낮에는 가끔 이 책들에 빠져있곤 했다.
책을 읽을때의 어떤 전율 같은 것이 내 몸 어딘가에는 새겨져 있다.
동시에 이 책에는 그 당시의 기억이 얼룩처럼 번져있다.
그 시기는 잠깐이었지만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나는 어느 순간 슬그머니 발을 빼고 안전한 지대에 머물렀다.
나와 함께 들어갔던 친구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지금도 활동 중이고,
친구는 아주 가끔씩 연락을 해온다.
나는 많이 변해버렸다.
지금 다시 읽는다면 그 전율은 다시 느껴질까.
그러지 않을것 같아 아마 다시 이 책을 펴들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읽은 후
전국을 자전거로 여행하던 중
보성군에 위치한 태백산맥 문학관에 들렀던 적이 있다.
비가 오던 날이었고, 문학관에는 사람이 없었다.
손으로 쓴 원고지가 높이 쌓여있던 모습을 경탄하며 오래 바라보다
폐점시간이 다가왔다.
몹시도 가난했던 나는 당시 노숙을 하며 여행을 하고 있었고,
주로 초등학교에 몰래 들어가 조례대에서 자곤 했다.
근처 초등학교의 위치를 묻는 내게
관리하는 분은 뒷편 조그만 방에 묵고 가라며
내게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젊고 다정했던 관리인 아저씨에게 나중에 꼭 감사인사를 드리러 와야지
꿈처럼 하룻밤을 편히 묵은 나는 떠나며 그런 다짐을 했었다.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친절로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그곳을 다시 가지 못했다.
내게 이 전집을 둘러싼 기억은 결국 책 내용보다 이런 것들이다.
6년 동안 펴지지 않은 책은 고모 집으로 갈 것이다.
그 집에서도 아마 이 책들은 오래도록 펴지지 않을 것이다.
세 세트를 함께 담은 박스는 아주 묵직했다.
다시 읽지 못한 이 책의 무게는 내 허세의 무게와 닮아있었다.
그 묵직한 허세의 무게는 오직 택배아저씨가 짊어지겠지
어쩐지 죄송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