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품절


엄마가 죽었을 때, 내게서 평범한 세계는 사라졌다.
그 대신 지금까지 커튼 너머에 있던 어떤 굉장한 것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이란 정말 죽는 거네, 아주 평범했던 하루하루가 순식간에 달라질 수도 있는 거네. 그 지지부진하고 따분했던 감정들이 모두 착각이었어.
깊은 슬픔 속에서도 매일, 신선한 발견이 있었다.-7쪽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그 집.
마음으로 몇 번이나 열다 보니, 문이 그리는 선이 가슴에 예쁜 잔상으로 남았다.-58쪽

그 무렵에는 이 녀석도 지금처럼 뚱뚱하지도 징그럽지도 않은, 눈치 바르고 사근사근한 아이였던 것 같은데.
이 옷에 휘감긴 투실투실한 몸속 어딘가에 아직도 그 시절 그대로인 아이가 남아 있을 텐데, 두 번 다시 만날 수는 없을 테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나 역시 많이 변해 있으리라.
-65쪽

"말이지, 여자를 볼 때는, 괜히 아랫도리 사용하면 안 돼, 그럼 인기 없어."
유리 씨가 불쑥 끼어들었다.
"내가 그렇게 노골적인가요?"
"그렇지도 하지만,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정말 소중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거야. 아랫도리는 정말 소중한 사람을 찾을 때는 사용하지 말 것, 그리고 정말 소중한 사람에게만 사용할 것,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우리 어머니가 늘 그렇게 말씀하셨어."-70쪽

"정말 아름다운 여자는, 보고 또 봐도 어떤 얼굴인지 기억할 수 없는 법이지.
매일 보는데도 도통 종잡을 수가 없고, 어떤 얼굴인지 잘 모르겠다. 얼굴 주위에 뭐랄까..."
아빠는 얼굴께에서 두 손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아른아른한, 예쁜 천 같은 것이 살랑살랑거리고, 그 너머는 확실하게 보이지가 않아."
"엄마는? 엄마도 그랬어?"
"글쎄, 처음에는 그랬지.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짜증스럽도록 또렷하게 보이는 거야. 그게 부부란 거겠지."-75쪽

나는 부끄러워서 유리 씨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따스한 등으로 나지막하고 부드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뛰는 심장의 소리가 들렸다. 내게 마지막 말을 선사하듯, 분명하고 부드러운 소리.
그 소리는 아직도 내 귓가에 자장가처럼 남아 있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처럼.-78쪽

조금 안정이 되면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다양한 카페를 돌아보면서 내가 할 일을 내 안에 충분히 뿌리내리게 한 후에, 아바의 일터였던 곳을 수리하여 자그마한 찻집을 열려고 한다. 아빠에게 그곳에다 알록달록한 모자이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다.
이 인생에서, 나는 나를 위한 유적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83쪽

동생에게 받은 것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 없던 사람이 어떤 인연으로 이 세상에 찾아와 나를 좋아해 준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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