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던 이를 떠나보낸 후 

나는 이상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무언가 남기기 위해 애썼던 그와는 정반대로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다. 


그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들을 줄여나가기 시작했고,

아무것도 쓰지 않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조금씩이라도 쓰기를 멈추지 않았었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하기도 했다. 


더 잘 쓰고 싶다는 마음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그 마음은 언제나 강렬한 질투와 슬픈 자책을 가져다주었고,

끈질기게 들러붙는 허망함은 깊은 밤마다 늘 고여있었다. 

그런 것들이 사라진 세계는 너무나 고요했고,

평온했다. 

생각해보지 못한 이 세계가 나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런 시간이 5년 가까이 흘렀고 23년이 되었다. 

여전히 이 생활은 만족스럽다. 


아침이었다가 어느새 자, 이제 저녁이군 해도 

나는 기억할 만한 어떤 일도 해내지 못했다. 

새처럼 노래하는 대신,

나는 나의 끝없는 행운에 살며시 미소지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이런 생활은 분명히 순전한 게으름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새와 꽃이 그들의 기준으로 나를 판단한다면

내게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 <도시인의 월든, 박혜윤> 에서 재인용

월든에서 읽은 이 문장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그 미소가 어떤 것인지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아마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을,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느낌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족과는 정반대로

나 자신이 텅 비어가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수가 없다.

40대 중반이니 무엇 하나에는 전문가가 되었을만한 시기임에도

나는 정반대로 가진 것조차 지워버리는 사람이 되고 있다. 

내가 바랬던 것이었고, 덤덤히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조금은 변화하고 싶다는 마음이 올해부터는 일렁이고 있다. 


하루 한 페이지만이라도 읽고, 

하루 한 문장만이라도 쓰자. 


올해의 새해 결심같은 거였는데,

너무 오랫동안 쓰기를 멈추다보니

한 문장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알수 없었다.

내 안에 무언가 나올게 있을까 싶기도 해서

이 문장들을 시작하는데에만 한 달 가까이가 걸렸다

막상 쓰기 시작하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문장들을

너무나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책이란 매체를 둘러싸고 누군가 하는 이야기를 읽고,

나도 읽으면서 드는 생각들을 남겨두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 원인은 장정일과 한영인 두 사람이 쓴 책 때문이었다. 
















장정일이 데뷔한 해에 태어난 한영인 평론가. 

22년이라는 나이차에도 장정일은 한영인 형이라 부르며

서로를 귀히 여기며 문학에 대해 자유롭게 나누는 이야기들이

무척이나 즐거웠고, 

무엇보다 부러웠다. 


그러고보니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즐겨읽던 시절부터

그처럼 매일 독서일기를 쓰고 싶어했는데,

아직도 안 쓰고 있다니...

지금이라도 하지 않으면

또 십년이 지난 뒤에 아, 예전에 그랬었는데 하며

아쉬워하고 있겠지. 


그러고보니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이제는 없어졌구나,

바깥양반은 책을 멀리한지 이미 오래고,

지인들을 만날때 늘 책 한권씩을 선물하긴 하는데,

안 읽을꺼라는건 서로 잘 알고 있다.

그래도 흥미있을 만한 책을 골라 선물하는건 

언젠가 읽어보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책꽂이를 비우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서로 책 이야기를 나눌 일은 없다. 

뭐 사는게 그런거지 싶었는데,

이 상황을 글로 쓰고 있으니 쓸쓸해지는건 왜일까.


그러다 오랜만에 알라딘 서재에 와보니

예전부터 봐오던 분들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계속해서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으며 

즐겁게 진지하게 때로는 아프게 

이야기를 나누는 글들을 읽고 있으니 

느낌이 이상하다. 아주 멀리 떨어져버린 듯한 느낌. 


깊고 진한 질문을 던지며 답을 하려 애쓰는 현자들 사이에

놀랄 눈을 한 어린아이가 되어 낯선 세계에 던져진듯한 느낌이랄까. 

책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새로운 세상에 

다시 한발자국 들이밀며 여행온 듯한 느낌이기도 하다. 

아, 이런 세계가 있구나 

놀랍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다. 

이 세계에 잠시라도 조금씩 머물러 있으면

그 온기가 조금씩 스며들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올해는 독서일기가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책을 읽는것도 일상이 되었으면,

욕심 부리지 말고,

하루 한 페이지 만이라도

하루 한 문장 만이라도.

 

그거면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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