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개인
이선옥 지음 / 필로소픽 / 2020년 3월
평점 :
품절


“우리는 좀 더 공정한 방식으로도 약자의 편에 설 수 있다”

- 이선옥, <단단한 개인>, p22.

작가가 선택한 ‘우리’라는 단어와 ‘~으로도‘로 이어지는 문장은 당신과 내가 놓치고 있었던, 어쩌면 모르는 척 넘기려 했던 가능성 한 가지를 더 일깨워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주 (2 Disc) - 아웃케이스 없음
박찬옥 감독, 서우 외 출연 / 이오스엔터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실의 장소

술 을 먹고 들어온 중식은 형에게 말 한다. 아마도, 은모가 준비한 모종의 '이벤트' 전날의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에서 비가 내렸다. 중식은 젖어있었고, 꽤 많이 취해있었다. 귀농을 위해 자신이 떠난 뒤 '이 곳'을 부탁하는 형의 제안에, 중식은 '해서는 안 되는 말, 할 수 없는 말'을 하기 때문에 자신은 자격이 없다한다. 그리고 중식은 자신의 방에 돌아와 눕는데, 이어지는 스승의 날 시퀀스는 마치 중식의 꿈처럼, 혹은 악몽처럼 연결된다. 아이들이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이 목덜미를 드러내고 '중식 씨, 사랑해요'라고 입을 맞추어 말한다. 중식은 놀라서 쓰러진다. 중식의 첫사랑의 기억은 재현된 악몽으로 귀환한다.

< 파주>는 말에 관한 영화이다. 세상의 어느 누가 적절한 말과 부적절한 말, 할 수 없는 말과 해도 되는 말을 선별 할 수 있을까? 말이 입 밖으로 던져진 바로 그 순간을 마주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말의 무게와 질감을, 그 생김새와 밀도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바로 그 순간 자신이 한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게 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진실은 (당신과 나사이의)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은 반드시 말을 한다는 행위를 통해서 선별된다. 정확히 그 순간. 깨닫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던져진 말은 누구도 거두어들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은 말하여질 수 없다. 진실은 침묵을 통해 남겨질 수 있는, 세상 마지막의 장소이다.

진실과 사실은 다르다. 은모의 혼란은 진실과 사실을 동일한 것으로 유추하기 때문이다. 은모가 ‘형부’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말하여 질 수 없는 ‘진실’ 이었다. 은모는 진실을 아는 것이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 진실이란 마음이 묶여있는, 마음이 정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진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은 거짓이라고 믿어도, 누군가의 마음은 그곳에 묶일 수 있다. 진실이 상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진실은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것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시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라는 중식의 말은 자신의 의지로 인해 말하여진 것이 아니라, 침묵을 지킬 것을 결심한 중식이 더 이상 꺼낼 말을 찾지 못해 수동적으로 은모에 의해 끄집어내어진 말이다. 은모가 진실을 알고 싶다고 할 때, 그것은 언니가 왜 죽었는지에 관해 알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자신이 언니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지 중식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식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 그의 마음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를 알려는 것이다. 은모는 사랑을 갈구한 것이 아니라 용서를 구한다.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귀의 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끈질긴 모색과 탐색.

은모의 요청에 중식은 엉뚱하게도 ‘단 한 시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은모의 절망은 사랑받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용서 받지 못함에 있다.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은모는 알고 있다. 이미 언니는 죽어버렸고 진실은 말하여질 수 없다. 말하여지는 순간 진실은 진실이 아닌 것, 듣는 이가 원하는 것, 혹은 말하는 이가 원하는 무엇이 된다. 중식은 침묵하고 (또는 진실을 감추기 위해 거짓을 말하거나, 그러니까 진실은 얼마나 연약한가. 거짓으로 감추어지는 진실은) 은모는 형부가 보험사기를 저질렀다는 (다른 이들 에게는 진실과 동의어인)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꺼내어진 거짓은 사실로 굳어진다. 딱딱하고 창백하게.

은모는 계속해서 정주할 곳을 찾지 못하고 길 위로 떠난다. 살아있는 자는 누구도 은모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은모는 (다른 사람의) 어떠한 말도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떠돌 수밖에 없는 은모의 운명은 우리들 대다수의 운명과, 혹은 시간들과 영화 바깥에서 (필연적으로) 겹쳐진다. 영화 <파주>의 지독한 농담. 혹은 벗어날 길 없는 결정론.


말을 하지 않는 것. 침묵의 주식.

영 화 속에서 말들은 누군가의 입김과 함께 공기 중에 떠돌거나, 벽에 걸린 걸개위에서 펄럭이거나, 거칠게 그은 낙서로 벽 위에 남겨진다. 벽과 그 위의 말들은 시간이 지나 부서지거나 무너질 것이다. 그 위로 새로운 집과 건물과 도시가 세워질 것이다. 철대위, 이 절박한 이들이 내뱉은 말들. 그 말들은 아무것도 지켜낼 수 없(었)다. 오직 이 영화 속에서, 절박한 자들만이 말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아무도 듣지 않는 말들은 하릴없이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말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폐허와 침묵뿐이다. 희망과 절망마저도 사라져버린 명백하고 단단한 현실의 거죽들 뿐.

이경영이 연기한 나이트클럽 사장은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말은 오직 '전언'의 형태로만 육화된다. 침묵함으로써 권력은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을 소유한다. 부재함으로써 권력은 편재한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 설치된 CCTV의 눈초리가 상정하는, 그 뒤의 모든 감시의 체계들. 은모가 망연하고도 집요하게 응시하는 복도,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은모가 본 것은 말의 흔적이 아니라, 침묵이 단단히 현존하는 공간이다. 침묵은 어떠한 말들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다. 기형도는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있다고 노래했다. 그러나 불행이도 침묵의 주식은 누구나 가지지 못한다. (매주 '라듸오'에서 정례 방송을 하던 이명박은 마치 복화술사처럼 정운찬을 내세운다. '너무 말이 많았던' 이명박은 <올드보이>의 이진우에게 혀가 잘리기 전에 교활하게도 침묵의 주식을 사들이는 것을 선택했다. 이 기묘한 영화와 현실의 참조.)

 

철거용역들의 포크레인 공격을 막기 위해 화염병 사용을 제안하는 중식은 자신이 ‘책임을 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책임을 지지 못한다. 은모가 푸념했듯, (말은) '힘이 없'다. 중식은 자신이 '현역'이던 시절 그대로, 화염병으로 경찰이 올 때까지 용역들의 접근을 막고, 경찰이 몰려오면, 그 때 (시위 전력이 있는) 자신만 구속하는 조건으로 투쟁을 접으면 승산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더 이상 중식은 경찰이 구속하고 싶을 정도로 중요인물이 아니다. 다가오는 철거 용역들을 향해 중식이 외치는 '주거는 기본적인 인권이다'라는 구호는, 집이 주거 공간 보다는 (남들보다 빠르게 선점하고 되파는 것으로) 개인의 재화를 기형적으로 증식하기 위한 용도로 쓰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시대에, 뒤늦게 도착해버린 건조한 외침이다.

 

‘이 일을 왜 하는 거에요? 이 일이 형부에게 무슨 보람이 되죠?’ 라는 은모의 말에, 그리고 의외로 솔직하고 담담했던 중식의 대답을 들어버린 우리가 그를 더 이상 지금까지와 같은 눈으로 볼 수 없었음을 기억하자. ‘처음에는 멋져 보여서 시작했던 것 같은데, 그 다음에는 내가 갚을게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지금은 잘 모르겠어. 그냥 내가 할 일이 생기는 것 같아. 끝이 안나.’ 중식의 이 말은 충분히 그 뜻을 인식 할 수 있기도 전에 창 밖에서 뿜어져 들어온 물줄기에 의해 중단된다. 그리고 물과 (쉼표) 불.

물과 불, 그리고 안개

< 파주>의 안개는 말하여진 말들, 입 바깥으로 나왔으나 육체를 얻지 못했던 말들의 형상이다. 안개는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떠돈다. 당신과 나 우리 모두는 안개의 말을 해독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이 안개의 형상, 말의 형상은 기화된 물이다. 물은 불을 끈다. 우리 여기에 있다. 여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 창문이 없는 창밖으로 던져진 화염병의 불길을 덮어버리는 차가운 물. 그 물이 기화되어 안개가 된다. 그것이 말이 되고 거꾸로 산자들의 말을 덮어버린다. 이것은 선한 말과 악한 말의 대립이 아닌, 그러니까 물과 불의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역학이다. 물과 불이 엮여 안개가 되고, 무거워진 안개는 물로 다시 지상에 내린다. 이 모든 외침들, 의지와 욕망과 엇갈린 시선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젖어들듯 켜켜이 쌓여버린 땅. 그곳은 파주다. 당신과 내가 살아가는 모든 장소이다.

결국 <파주>의 이야기는 땅으로 귀결된다. 토지대장에 올라가는 몇 번지 몇 호. 같은 기호가 아닌, 가장 물질적이면서 가장 근본적이고, 동시에 가장 첨예하게 정치적인 땅. 그 땅에 누가 머물 것인가, 어떻게 머물 것인가, 언제까지 머물 것인가. 그러니까 주인은 누가 될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주인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의 문제. 진실이 묶여 있는 곳, 진실이 정주할 수 있는 땅을, 정말로, 마지막에는 발견할 수 있는가의 문제, 그곳에 결국엔 머물 수 있는가의 문제. 그렇다면 <파주>는 사나운 질문들만 남겨두고 등을 돌려버리는 영화인가. 아니다. 당신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 질문들의 해답을. 그러니까 이제 남는 것은 이 해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 혹은 당신은 은모처럼 철조망을 내 오른쪽 혹은 등 뒤에 둔 채로 길 위를 (언제까지나, 영원히) 떠돌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절대로 그 너머로 넘어가지 못 한 채로, 그 안에서만 떠돌게 될 때, 그것을 용납할 수, 혹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의 황홀 - 보이는 것의 매혹, 그 탄생과 변주
마쓰다 유키마사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시각문화에 관심이 많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각 체계의 형성에 대한 기원과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다. 이 책이 그런 궁금증에 대한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기대를 크게 했다. 물론 감각적인 책 표지도 한 몫했고, 책을 구입하기 전에 반드시 목차를 읽어보는 편인데, 목차를 봤을때는 꽤 흥미가 동했다. 그래서 만만찮은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구입을 결정했다.

다 읽고 난 지금은. 역자의 의욕이 과했던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의 기대가 과했던 것인지 좀 헷갈리긴 하지만, 여하튼 기대치에는 많이 못 미치는 책이라고 결론 짓기로 했다.

책 자체는 마치 잡학사전처럼 다양한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주제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어떤 연관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목차만으로 판단해 본다면 상당한 연관성들이 있는 주제들 인데도 불구하고, 저자는 그저 이런 것들이 있었다 정도로 그치고 있다. 생각나는 대로 메모 해 둔 것을 그냥 책으로 옮긴 느낌이랄까. 시각 역사와 문화의 성립과 발전에대한 인문학적이고 통사적인 접근을 기대했는데, 한 마디로 굉장히 매력적인 주제들임에도 불구하고 심도가 낮다는 것이다. 다 읽었던 그 날 수첩 한 켠에 이 책에 대해 한 마디 소회를 적었다. '블로그에 쓴 글을 책으로 편집한 것 같다.' 라고.

조금 시간이 지나 다시 냉정하게 생각을 해 보아도, 그 결론은 변함이 없다.

다만, 독특한 책, 정성스럽게 만든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소장해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편집된 서체도 보기 좋고, 읽기에도 좋다. 책 날개의 이미지는 양 방향으로 보기에 따라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 깔끔하고 산뜻한 노란색의 표지도 좋다. 이렇게 멋진 책의 내용도 좋았다면 그야말로 화룡점정 이었을 텐데, 그게 정말 아쉽니다.
 


결론 : 표지 빨에 혹하지 말자. 두 번 세 번 확인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트윌리엄의 이발사
웬델 베리 지음, 신현승 옮김 / 산해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에서 ‘주제’라는 걸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소송을 당할 것이다. 이 책에서 숨겨진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추방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을 설명 하거나 해석하거나 분석, 비평하거나 그 외의 어떤 방법으로든 ‘이해’하려 드는 사람은 이 책을 해석하려고 하는 다른 집단이 사는 불모의 섬으로 유배당하게 될 것이다.

  위 문장은 Wendell Berry 의 장편소설 <포트윌리엄의 이발사> 책 앞장에 쓰여 있는 글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엔 김정란 시인의 해설이 추가 되어 있다. 해설을 제외하면 468 페이지짜리 두꺼운 소설이다. 요즘의 트렌드를 따랐다면 예쁘장한 양장본에 3 권으로 나누어져 발간되었을 법한 책이 텁텁한 황토색 표지에 한 권짜리 두꺼운 책으로 만들어 졌다. 사실 처음 집어들 때엔 두툼한 소설의 분량이 부담 되었지만 조금 읽어보고선 그것이 우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저자를 알지 못한다. 우연히 이 책이 서점에서 눈에 띄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번쩍 거리는 양장본 사이에 서 있는 황토색의 거친 표지가 맘에 들었고, 왠지 모르게 제목이 끌렸기 때문이다. 나는 ‘간판 없는 이발소’ 라는 이름이 붙은 첫 장을 열어 읽어 보았다. 첫 장엔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나는 이발소임을 알리는 간판이나 기둥, 표지 등을 달지 않았다. 심지어 가게 이름도 짓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이발소’였다. 언제부터 그렇게 불렸는지 아는 이 하나 없어도 사람들에게 이 건물은 내내 ‘이발소’였던 것이다. 포트윌리엄에는 기록으로 남은 역사가 거의 없다. 대대로 이어져온 사람들의 기억이 곧 마을의 역사다. 이 마을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이미 잊혀 졌고 언제 어떻게 끝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어쩌면 영원히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이 건물에 머무는 동안 이곳은 ‘제이버스 크로우’ 또는 간단히 ‘제이버스’라고만 불렸다.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제이버스에 다녀와야겠는걸,” 머릿속 기억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치 지도상의 한 지점을 말하듯 그렇게 말했다. 나는 전화기는커녕 변변한 장부도 마련하지 않고 있다. - p.13

  문장이 맘에 들었다. 간결하고 무심한 것 같은 문장들. 소설 속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는 전체 이야기 중에서 어떤 부분만 단편적으로 말했다. 자신은 그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그는 상대방이 자신의 얘기를 듣고 있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마치 혼잣말하듯 얘기했다. (...중략) 에디의 이야기는 순서가 뒤죽박죽이었다. 어떤 사건에서 에디의 기억에 떠오르는 부분이 곧 그 이야기의 순서였다. - p.280'

  저자 자신이 다른 인물의 특징을 빌어서 이야기 한 것처럼 이 소설은 연대기적 순서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이야기들은 주인공 J. 크로우의 시점에서 기억의 들숨과 날숨을 따라 느슨하게 이야기들은 나열된다. 이 책의 배경은 본격적인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미국의 작은 마을인 포트윌리엄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소재의 소설이 흔히 택하기 쉬운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시골 촌부들의 소박함을 통해 현대의 무엇을 계몽적으로 꾸짖으려 들지 않는다. 저자는 그냥 사람이 사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런 식의 우를 범하기에 저자는 지나치게 소박하고, 현명하다. 독자를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에게 독자는 그저 이야기 상대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마음속에는 향수의 상태 같은 울림이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공간에 대한 그리움을 뜻하는 향수로서가 아니라, 이제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시기, 어떤 삶의 공기 같은 것에 대한 그리움, 이제는 더 이상 불가능한 어떤 것에 대한 명료하고 안타까운 직시 같은 것이었다.

  ‘증오는 성공에 이른다. 이 세상은 증오에 충분한 수단을 제공한다. 증오는 언제나 명분을 찾아내어 시간을 파괴함으로써 시간 속에서 자신을 완벽하게 구현한다. 전쟁이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신성한 것으로 정당화되고, 온갖 세속적인 승리의 수단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 세상에 항상 존재하는 전쟁, 즉 지옥 그 자체는 끝없는 시간의 산물, 빛이나 희망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시간의 산물이다. - p.321

  이 소설의 시기는 1 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1980 년대 이후까지를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포트윌리엄은 전통적이고 소박한 농촌공동체에서 근대화의 이빨에 모든 것이 낡고 오래된 것으로 폐기 되어버리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자는 포트윌리엄을 하나의 개체의 삶과 같이 묘사한다. 모든 오래된 것들은 잊혀지고, 상실 된다. 그것이 옳은지 어떤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오래되고 상실된 것들은 종종 그리움을 부른다. 그리고 그러한 그리움은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도록 한다. 집을 나서기 전 혹시 무엇을 빼 놓거나 잊은 것은 없는지 돌아보는 것처럼.

  ‘이 글은 내 삶을 사실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아니다. 나는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 삶을 몇 부분으로 나누었다. 서로 다른 감정과 생각이 동시에 밀려드는 상황에서도 이야기는 순서대로 진행해야 한다. 가장 슬픈 날에 가장 즐거운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따금 나는 슬픔의 와중에 행복을 느끼거나 행복의 와중에 슬픔을 느꼈다. 때로는 내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더없이 만족해하기도 했다.’ - p.456

  저자는 마지막 장에 ‘이 책은 천국에 관한 책이다’라고 적어두었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 들은 누구 하나랄 것 없이 근대적 삶의 변방으로 밀려난 채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혹은 그러한 운명에 처한다. 포트윌리엄을 감싸고 있었던 당당하고 오래된 자연림들은 도로 확장의 명목으로 혹은 한 개인의 탐욕에 의해 모조리 파괴된다. 남은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그저 쓸쓸히 바라보거나 마음아파 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고집스럽게도 ‘이 책은 천국에 관한 책이다’라고 적는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해답들은 책속에, 그리고 우리들의 삶속에 꼼꼼히 새겨져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 혹은 그것을 느끼느냐, 느끼지 못하느냐의 문제다. 일독을 권한다. 누구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수들의 밤
오시이 마모루 지음, 황상훈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Blood : The Last Vampire - 야수들의 밤

■ 흡혈귀의 출몰

  국내에 영화 'Avalon'과 '공각기동대'로 잘 알려진 오시이 마모루의 소설 '야수들의 밤'은 그가 속해 있는 Production IG 에서 제작하고 웹에서 '개봉'한 동명의 디지털 애니메이션의 '원작' 이라고 소개 되어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예전의 LAIN(Serial Experiment L.A.I.N)의 경우처럼, 소설과 애니메이션, 그리고 콘솔용 게임, Comics 이렇게 4 가지 미디어로 공개 되었다.

- 이 중에 Comics 버전은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인 테라다 카즈야가 담당했다. 국내판 소설책엔 제외 되어 있는 오토나시 사야의 일러스트를 그린 사람. -

4 가지 버전 모두, 주인공격인 '의문의 전학생' 오토나시 사야(音無小夜)라는 소녀와 뱀파이어라는 모티브는 같지만, 내용과 형식은 모두 다른 구성을 가지고 있다. 마치, 4 가지 미디어에 걸쳐 출몰하는 '사야'라는 소녀에 얽힌 사건들의 단서를 무심히 던져 주는것처럼. 부제인 the Last Vampire 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뱀파이어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뱀파이어' 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십자가와 마늘, 나무 말뚝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포소설을 빙자한 성장 소설에 가깝다. 일본 문학을 잘 아는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옮기자면, 일본인들은 대체적으로 조직사회 안에서 속으로 삭히는 것에 익숙한 처지라, 어떤 개인적인 문제라던가 하는 것들을 내적인 해결을 통해 어떻게든 풀어 나가는 내용의 소설 - 그러니까, 개인의 성장소설이 많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하루키의 소설 대부분이 한 사람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였다.

책을 펼치게 되면 일본의 60 년대의 일상처럼 벌어지던 가두투쟁의 현장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또 그 만큼이나 처절하게 묘사되는 이른바 '고교생 활동가'들의 어처구니 없이 궁색맞은 일상생활이 두 축을 이루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 흡혈귀의 태생학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흡혈귀가 적은 숫자이지만 당당히 생존하면서 우리들의 곁에 실존 한다는 것을 유전학적 '가설'을 들어서 장황하게 설명을 하며, 결국은 그 지난하고도 집요한 과정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의 '정당성'에 대해 애매하지만 피할 수 없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는 점이다.

결국 오시이 본인이 노렸던 것은 흡혈귀라는 지상 최고의 영장류(소설 속에선 '츠랍테린' 이라는 학명으로 명명된다) 를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과 탐욕이 인간의 본질적인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광포하면서도 무분별하게 배양되고 그로인해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소설속에서 최후의 결전에서 패하고 죽어가는 흡혈귀를 묘사하는 장면은 이상한 비장미와 그 대단한 생명체의 소멸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가득차 있다.

소설 속에서 흡혈귀와 그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밝혀지는 것은 후반의 장황설을 빼놓고 본다면 거의 모두가 덜떨어지고 모든게 아직은 어설픈 고교생 활동가들을 통해서이다. 그것역시 오시이의 고약한 유머라고 볼 수 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혹은 알면서도 모른척하고 있었던)세상에서 가장 덜 떨어진 인간들의 입을 통해 발설 되는것이다.  물론, 소설 속에서 그러한 덜떨어짐은 오히려 그들의 강점이며, 그 모습을 상당 부분 즐겁고 건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 멍청하고 제멋대로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사악하지는 않은 것이다. - 그가 평소 말버릇 처럼 '인간에 대한 기대는 전혀 없다' 라고 말하는것은 아마도, 기성세대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것 뿐이지, 새로운 세대에 대해서는 그도 어쩔 수 없는 기대를 걸고 있는것인지도 모른다.

오시이의 짖궂은 농담이 정점에 달하는 부분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고기집에서 '생등심'을 탐욕스럽게 입속에 우겨넣는 등장 인물들의 면면이 묘사되면서 그들이 시체 매장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풀어가는 부분이다. 결국 그들은 남은 고기를 집에 싸가서는 술과 함께 진창 마시고, 새벽에 먹었던 것들을 모조리 구토로 쏟아 낸다.

■ 보는 것과 아는 것

  소설은 주인공 미와 레이(아마도 저자 자신임이 분명한)가 거리투쟁의 와중에 경찰들을 피해서 도망을 가던 중 어느 골목에서 '그 존재'를 목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곳에는 피칠갑을 한 벽을 등뒤로 둔채 (인간의 눈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은 눈을 가진)한 소녀가 날카로운 일본도를 들고 서있었고, 주인공은 그녀가 자신을 죽일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그녀의 눈에서 참을 수 없는 공포감과함께 강력한 존재가 가지는 불가사의한 아름다움, 혹은 슬픈 무엇을 느끼게 된다. 그녀의 눈은 인간이 아닌 '야수'의 푸른 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음날 아침 피투성이가 된채로, 그러나 아무런 상처도 없이 발견이 되고 형식상의 조사만 거치고 경찰서에서 풀려나게 된다.

이 만남을 시작으로 주인공은 자신이 '아는 것'과 '눈으로 본것'에 대한 새로운 혼돈에 빠지게 된다.  그가 진작에 알고 있던것과 밤사이 '눈으로 보게된' 세계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식론에 있어서 '아는 것'과 '보는 것'은 등치의 관계를 가지며, 그 역도 가능한 것으로 상정되어 지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 그러므로 해서 공포를 자아내는 -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로 인해 '아는 것'을 '본것'이라고 착각해 버릴때 벌어지는 어리석음과 그 탐욕스러움을 우회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경시청의 형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고토다'를 위시해서 주인공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모두항상 같은 질문을 집요하게 던진다  - '너는 그날 밤 무엇을 봤지 ?'  결국, '그날 밤'은 주인공과 독자 모두에게 인식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현기증나는 균열을 열어 보이는 밤이며 그것은 곧, 세계와 나라는 존재 사이의 불화에 대한 기묘하고도 매혹적인 열병에 빠져들게 되는 밤이다.

■ 어떻게 해서 나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야수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지배하는 주된 정서는 바로 '인간에 대한 불신과 환멸'이다.  어떻게 해서 작가가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것을 자세히 알길은 없지만, 소설에서 그려지는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고 메꾸기 위해 끊임없이 - 의도적으로 - 잘못을 저지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잘못을 뉘우칠줄 모르고 계속해서 자신의 행위에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강박적으로 덧칠해해 나가는, 본질적으로 '돌아설 구석'이 없는 존재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흡혈귀, 정확히는 '비행영장류'이며 그것은 인간의 잔혹함과 무자비함, 인류가 취할 수 도 있었던 생물학적 가능성에 대한 해답으로서 소설에 그려진다.  그들은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다른 생명을 취함에 있어서는 상당히 신중한 태도를 취하며, 그 만큼 한 생명을 취하는 순간에는 한계를 모르는 무자비함을 마음껏 드러낸다. 결국 그것은 한계 상황이면 여지없이 모습을 감추고 마는 자랑스러운 인류의 이성과 논리란 것의 허구성이며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나약한 한계다.  오시이는 어쩌면 인류의 생물학적 미래의 해답 이었을 수도 있는 흡혈귀라는 존재를 통해 인류가 마땅히 취했어야할 어떤 태도 (Attitude)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어디선가 개처럼 죽겠지.

  소설은 중년이 된 주인공 레이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 마치 애니메이션의 도입부 처럼 - 우연히 사야를 마주치는 것으로 끝난다. 그는 세월의 풍상이 고스란히 남겨진 모습으로 사야를 바라보지만, 사야는 그가 처음 만났을때의 바로 그 모습으로 무심하게 그를 바라본다.

  무엇 하나 바뀌지 않은 소녀였다.  바뀐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눈에 비친 레이의 모습뿐이었다.  항상 무언가에 쫒기듯이 안절부절못하면서 화내고 소리 지르기만 하던 고교생이 많은 것을 포기하고, 또 받아들임으로써 변해 버린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변화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소녀의 눈에는, 지금 레이의 모습이 어떻게 비쳤을까.  레이는 그날 밤 사야가 자신을 베지 않았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과 그 한계를 뛰어넘은 불멸의 존재가 마주보면서 끝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은, 제목인 Last Vampire - 위협적이고, 한계를 모르는 잔인성의 총합인 - 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다시한번 되돌아 보게 만든다. 


- 사야의 정체에 대해선,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가렸다.  그것은 이 책의 제목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2004. 7. 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