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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윌리엄의 이발사
웬델 베리 지음, 신현승 옮김 / 산해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에서 ‘주제’라는 걸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소송을 당할 것이다. 이 책에서 숨겨진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추방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을 설명 하거나 해석하거나 분석, 비평하거나 그 외의 어떤 방법으로든 ‘이해’하려 드는 사람은 이 책을 해석하려고 하는 다른 집단이 사는 불모의 섬으로 유배당하게 될 것이다.
위 문장은 Wendell Berry 의 장편소설 <포트윌리엄의 이발사> 책 앞장에 쓰여 있는 글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엔 김정란 시인의 해설이 추가 되어 있다. 해설을 제외하면 468 페이지짜리 두꺼운 소설이다. 요즘의 트렌드를 따랐다면 예쁘장한 양장본에 3 권으로 나누어져 발간되었을 법한 책이 텁텁한 황토색 표지에 한 권짜리 두꺼운 책으로 만들어 졌다. 사실 처음 집어들 때엔 두툼한 소설의 분량이 부담 되었지만 조금 읽어보고선 그것이 우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저자를 알지 못한다. 우연히 이 책이 서점에서 눈에 띄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번쩍 거리는 양장본 사이에 서 있는 황토색의 거친 표지가 맘에 들었고, 왠지 모르게 제목이 끌렸기 때문이다. 나는 ‘간판 없는 이발소’ 라는 이름이 붙은 첫 장을 열어 읽어 보았다. 첫 장엔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나는 이발소임을 알리는 간판이나 기둥, 표지 등을 달지 않았다. 심지어 가게 이름도 짓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이발소’였다. 언제부터 그렇게 불렸는지 아는 이 하나 없어도 사람들에게 이 건물은 내내 ‘이발소’였던 것이다. 포트윌리엄에는 기록으로 남은 역사가 거의 없다. 대대로 이어져온 사람들의 기억이 곧 마을의 역사다. 이 마을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이미 잊혀 졌고 언제 어떻게 끝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어쩌면 영원히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이 건물에 머무는 동안 이곳은 ‘제이버스 크로우’ 또는 간단히 ‘제이버스’라고만 불렸다.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제이버스에 다녀와야겠는걸,” 머릿속 기억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치 지도상의 한 지점을 말하듯 그렇게 말했다. 나는 전화기는커녕 변변한 장부도 마련하지 않고 있다. - p.13
문장이 맘에 들었다. 간결하고 무심한 것 같은 문장들. 소설 속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는 전체 이야기 중에서 어떤 부분만 단편적으로 말했다. 자신은 그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그는 상대방이 자신의 얘기를 듣고 있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마치 혼잣말하듯 얘기했다. (...중략) 에디의 이야기는 순서가 뒤죽박죽이었다. 어떤 사건에서 에디의 기억에 떠오르는 부분이 곧 그 이야기의 순서였다. - p.280'
저자 자신이 다른 인물의 특징을 빌어서 이야기 한 것처럼 이 소설은 연대기적 순서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이야기들은 주인공 J. 크로우의 시점에서 기억의 들숨과 날숨을 따라 느슨하게 이야기들은 나열된다. 이 책의 배경은 본격적인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미국의 작은 마을인 포트윌리엄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소재의 소설이 흔히 택하기 쉬운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시골 촌부들의 소박함을 통해 현대의 무엇을 계몽적으로 꾸짖으려 들지 않는다. 저자는 그냥 사람이 사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런 식의 우를 범하기에 저자는 지나치게 소박하고, 현명하다. 독자를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에게 독자는 그저 이야기 상대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마음속에는 향수의 상태 같은 울림이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공간에 대한 그리움을 뜻하는 향수로서가 아니라, 이제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시기, 어떤 삶의 공기 같은 것에 대한 그리움, 이제는 더 이상 불가능한 어떤 것에 대한 명료하고 안타까운 직시 같은 것이었다.
‘증오는 성공에 이른다. 이 세상은 증오에 충분한 수단을 제공한다. 증오는 언제나 명분을 찾아내어 시간을 파괴함으로써 시간 속에서 자신을 완벽하게 구현한다. 전쟁이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신성한 것으로 정당화되고, 온갖 세속적인 승리의 수단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 세상에 항상 존재하는 전쟁, 즉 지옥 그 자체는 끝없는 시간의 산물, 빛이나 희망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시간의 산물이다. - p.321
이 소설의 시기는 1 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1980 년대 이후까지를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포트윌리엄은 전통적이고 소박한 농촌공동체에서 근대화의 이빨에 모든 것이 낡고 오래된 것으로 폐기 되어버리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자는 포트윌리엄을 하나의 개체의 삶과 같이 묘사한다. 모든 오래된 것들은 잊혀지고, 상실 된다. 그것이 옳은지 어떤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오래되고 상실된 것들은 종종 그리움을 부른다. 그리고 그러한 그리움은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도록 한다. 집을 나서기 전 혹시 무엇을 빼 놓거나 잊은 것은 없는지 돌아보는 것처럼.
‘이 글은 내 삶을 사실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아니다. 나는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 삶을 몇 부분으로 나누었다. 서로 다른 감정과 생각이 동시에 밀려드는 상황에서도 이야기는 순서대로 진행해야 한다. 가장 슬픈 날에 가장 즐거운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따금 나는 슬픔의 와중에 행복을 느끼거나 행복의 와중에 슬픔을 느꼈다. 때로는 내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더없이 만족해하기도 했다.’ - p.456
저자는 마지막 장에 ‘이 책은 천국에 관한 책이다’라고 적어두었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 들은 누구 하나랄 것 없이 근대적 삶의 변방으로 밀려난 채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혹은 그러한 운명에 처한다. 포트윌리엄을 감싸고 있었던 당당하고 오래된 자연림들은 도로 확장의 명목으로 혹은 한 개인의 탐욕에 의해 모조리 파괴된다. 남은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그저 쓸쓸히 바라보거나 마음아파 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고집스럽게도 ‘이 책은 천국에 관한 책이다’라고 적는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해답들은 책속에, 그리고 우리들의 삶속에 꼼꼼히 새겨져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 혹은 그것을 느끼느냐, 느끼지 못하느냐의 문제다. 일독을 권한다. 누구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