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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살의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6
나카마치 신 지음, 현정수 옮김 / 비채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아! 기분
더럽다,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을 것이다. 짜증도 내고, 화도 내고, 때로는 욕도 사정없이 날렸을 것이다. 누가 나를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정도야 당연한 게 아닐까. 뭐, 보통의 경우였다면 그랬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미 눈치 챘을 테지만, 『천계살의』의 작가인 ‘나카마치 신 ’은 나를 가지고
놀았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놀아났다면 당연히 들어야할 이런저런 감정들이 들지는 않았다. 신기하게도 오히려 웃음부터 났다. 나를 가지고 놀았지만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좀 더 좋을까?! 어느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날 가지고 논 여자는 니가 처음이야. 그래서 니가 더
끌려!” 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면 그 느낌을 좀 더 쉽게 전달 할 수 있을까?! 『천계살의』가 그런 소설이었다. 날 가지고 놀았지만, 그래서
더 끌리는 소설…!!
잡지 <추리세계>의 편집부 소속인
'하나즈미 아스코'에게 작가 '야규 데루히코'가 연락해온다. 자신에게 곧 마무리되는 소설이 있는데 잡지에 실어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한때
잘나갔지만 완성도 낮은 작품을 계속해서 쏟아내 이제는 한물간 작가가 된 야규이기에 썩 내키지 않는 부탁이었지만, 야규가 '문제편'을 쓰고 또
다른 작가가 '해결편'을, 그리고 다시 야규가 '해결편'을 쓰는 독특한 구성의 릴레이 소설이라는 사실에 흥미를 보이게 된다. 일단 원고를 받아서
읽어본 아스코는 그의 소설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니나 다를까, 알고 보니 소설 속 이야기는 현실에서 있었던
-그것도 약 6개월 전에 일어난- 사건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피해자의 이름이나 지명까지 한 글자 한 구절도 틀리지 않고
똑같이 소설에 쓰였다. 야규는 왜 이런 소설을 쓴 것일까 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의문이 들었지만, 해결편의 원고도 며칠
내로 받기로 했으니까 의문은 곧 풀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야규와는 연락이 닿지 않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가 현실에 존재했던
사건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쓴 이유는 무엇이며, 그 소설, 아니 현실에서 존재했던 그 사건의 진상은
무엇일까. 야규가 남긴
소설과 아스코가 실제 사건을 직접 조사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독자들은 수많은 의문과 그 끝에 있을 진상을 파헤치기 위한 걸음을 함께하게
된다.
나 역시도 모든 의문점의 끝을 향해 나름의
걸음, 나름의 도전을 시작했다.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리라는 굳은 다짐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희미하게나마 들었던 의심을 그냥
지나친 것이 화근(?!)이었다. 이 약간의 방심(?!)이 결과적으로 나를 굳은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길로 걸어가게 만들어버렸으니까 말이다. 그
의심부분을 자세하게 이야기하면 이것도 일종의 스포가 되기에 여기서 밝힐 수 없음은 당연히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약간의 궁금증은 뒤로하고, 직접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나 약간이라도 의심스러운 것을 놓치지 않는다면 나의 경우와는
반대로 작가와의 두뇌 싸움에서 충분히 승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사소한 것부터 잘 챙겨보시길! 흠흠…) 솔직히 나는,
내가 그런 사소한 것쯤은 생각하지 않고서라도 문제를 잘 풀어 낼 수 있고, 또 잘 풀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나도 모르게 나는 작가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
작가의 의도대로 정확하게 움직이는 꼭두각시 같은 독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무슨 소설 속의 주인공도 아니면서 그 의도에 놀아나다니…. 앞서
언급했지만, 그래도 결코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확실히 하고 넘어가자. 오히려 즐거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어진다.
『천계살의』의 작가 ‘나카마치 신’이
서술트릭의 시조격이다보니 도대체 여기에는 어떤 트릭이 숨어있을까, 하는 것이 이 소설을 읽기 전에 가졌던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근데 책을
읽다보니 단순히 트릭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트릭을 빼고서라도 충분히 훌륭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추리/미스터리 장르에 익숙한 독자라면 쉽게 풀어낼 수도 있을 법한 살인사건이 중심에 있지만 그 흐름 속에서 작가가 훌륭한 밀당을 하면서 트릭이
있다는 자체를 잊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새로운 증거나 증언들을 통해서 활을 충분히 팽팽하게 당겼다가 어느 순간에는 휙~ 놔버리는 것만 같은
순간들을 반복해서 만들어 내고 있었다. 새로운 사실들을 하나씩하나씩 드러내놓지만, 결코 그것이 극적 반전을 위해 일부러 꽁꽁 감춰져 있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을 만큼의 한도 내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사실들은 소설을 읽는 내내 즐거운 요소로 자리잡았다. 어느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탐정들이 내내 뒷짐 지고 있다가 마지막에
자신만이 알고 있던 어떤 증거를 딱! 내놓으면서 그냥 문제를 해결해버리는 식의 짜증나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어서 즐거웠다는 말이다. 게다가 이
책이 출간되고 30년이라는 오랜 시간의 공백에서 느껴질 수 있는 어색함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도 분명 이 소설이 주는 즐거움에 한몫
했다고 생각된다.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가고, 또 독자의 뒤통수도 때리는 소설이지만, 결론적으로는 즐거움이 가득한 소설이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추리/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반응할만한 단어가 바로 ‘도전’이 아닐까 싶다. 독자는 작가가 내는 문제를 과연 풀어낼 수 있을 것인가. 반대로 작가는
어떤 문제로 독자들이 감히(?!) 덤비지 못하게 할 것인가. 작가와 독자가 서로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또 도전을 하게 된다.
‘30년 전,
천재작가 나카마치 신이 보내온 미스터리 팬들을 향한 도전장!’이라는 문구는 출판사 쪽에서 광고문구로 내민 것이 아닌가
추측해보지만,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 문구에 독자들이 움찔움찔하며 반응을 하게 되고, 그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의 경우에 있어서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도전의 끝에서 오히려 도전을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였으니 뭐…. 나뿐만이 아니라 이 소설을 읽는 많은 이들이 그들의 도전
결과가 어떻든 상관없이 도전 그 자체로 충분히 괜찮은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 도전이
『모방살의』와 『천계살의』를 지나서도 계속되기를 바라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다행스럽게도(?!) 『공백살의』, 『삼막살의』,
『추억살의』같은 ‘살의 시리즈’가 여전히 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왕이면 끝까지 다~ 출간되어서 누구나 기다리는 컬렉션으로, 그리고 누구에게나 멋진 컬렉션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