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차일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3-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3
존 하트 지음, 박산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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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끔씩 친구들과 만나면 어릴 적의 추억을 이야기하고는 한다. …… 우리 어릴 적에 기억 나냐?!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도롱뇽, 하다못해 도롱뇽 알이라도 잡으려고 설치고 다녔는데 말야… 좁은 아파트 놀이터에서 야구하다가 유리창을 몇 번이나 깨먹고 도망치고, 또 자수(?!)하기도 했었지… 그것도 기억 나냐?! 몇 십 원, 몇 백 원 들고 떡볶이 사먹고, 뽑기도 하고, 모여 앉아서 프로레슬링도 보던… 난 워리어 팬이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조금 지나서는 비비탄 총도 유행했었지… 어, 나도 기억나. 누구누구는 M16같은 큰 비비탄 총 가지고 자랑하고 나도 부러워 엄마한테 사달라고 며칠을 졸라대고는 했었는데 말야… 어쩌고저쩌고 ……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에게 들려줄법한 그런 오래된 옛 추억은 아니지만, 나름 아련하면서도 신나는 기운도 깃들어있는 그 시절의 추억들을 서로 앞 다투어 내놓고는 했다. 그리 특별나지도, 그렇다고 그렇게 평범하지도 않았던 나의 어릴 적. 적당히 추억하고, 적당히 그리워하고, 가끔씩은 다시 돌아가고픈 어린 시절을…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런 삶을 살아오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아니, 특별히 그런 생각을 했다기보다는 내 주변의 대부분이 그러했기에, 더 큰 세상-내가 알던 더 큰 세상도 사실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한 것이었지만…-도 그러할 것이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왔던 것 같다.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고 할 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그런 당연하지 않은 사실(?!)도 생각하지 않으며 살아왔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다. 나름 내 주변을 돌아보며, 현재 나의 상황보다도 못한 상황에 놓여있는 이들에게 작게나마 관심을 가지며 살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나에게 뭔가 직접적으로 다가온 적은 없었기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한 권의 소설로 뭔가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냐고 묻는다면, 직접적으로 뭔가를 경험했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적어도 뭔가를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는 직접적 계기는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흔한 일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도 아니며, 더군다나 소설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야기를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는 하느님보다 더 오래된 신들이 필요했다. -P155

 

 독수리의 깃털 하나를 구하기 위해서 길을 나서는 소년이 있다. 버스를 타고, 아스팔트 도로를 걷고, 자갈길을 걸으며 헤매던 그는 결국 높은 나무 위에 있는 독수리 둥지를 하나 찾아낸다. 많은 것도 아닌, 그저 깨끗하고 흰 꼬리 깃털이나 날개에서 나온 거대한 갈색 깃털 하나를 원하는 소년. 그는 조심스럽게 둥지를 향해 나무에 오르기 시작했고, 둥지에 다다를 때쯤에는 뜻하지 않게 그 속에 있던 두 마리의 독수리 새끼를 발견하게 된다. 그 순간 어디선가 독수리가 달려들어 날카로운 발톱이 소년의 살에 박히고, 그와 동시에 소년은 독수리와 함께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 옷이 찢겨지고 여기저기 상처도 난 채,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버스를 탄다. 마법을 위해 필요하다던 독수리의 깃털은 구한 듯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오히려 어둠 속에서 소년은 몸을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자신 때문에 홀로 남겨질 두 마리의 새끼 새들을 생각하며… 그리고 겹쳐지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가슴 먹먹한 이야기의 시작. 과연 이게 내가 원했던 장르의 소설이 맞는가, 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 책의 장르로 봐서는 이렇게 시작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정신없이 이야기에 빠져들다가 겨우 빠져나올 때쯤이면 처음에 했던 생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오히려 그 시작에서 아무런 감동이나 아픔을 느끼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으니 말이다.

 

 앞서 독수리의 깃털을 구하러 다니던 소년의 이름은 ‘조니’이다. 그에게는 그와 쌍둥이인 여동생 ‘앨리사’가 있다. 아니, 있었다. 이제는 과거형이 되어버린 앨리사. 그녀가 실종된 것은 1년 전으로, 누군가에게 납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 누구보다도 특별한 감정을 공유했던 남매였지만, 여동생 앨리사가 사라지면서 그런 감정들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실종으로 아빠는 집을 나가게 되고, 엄마는 마약에 빠지게 되면서 지금은 한 남자에 발목 잡혀 비참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조니만이 그의 나이답지 않은 강인한 모습으로 여전히 여동생을 찾으러 납치범을 조사하고 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다리에서 오토바이와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데, 조니는 그 남자를 통해서 “내가 그녀를 찾았어.”… “그 유괴된 여자아이”… 라는 놀라운 말을 듣게 된다. 조니는 그가 말하는 그 여자아이가 앨리사라는 생각에 희망을 찾게 되지만, 그날 또 다른 유괴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면서 이야기는 정신없이, 하지만 결코 정신을 놓을 수 없는 순간들로 흘러간다.

 

 쌍둥이 여동생을 잃은 열세 살짜리 소년. 세상의 좋은 것들보다 나쁜 것들을 더 먼저, 그것도 아주 명확하게 겪으며 세상을 깨우쳤다는 이 소년. 세상에 안전한 곳은 결코 없으며, 그를 보호해줄 사람도 없다고 믿는 소년. 신이라는 존재는 적어도 어린아이들의 고통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리고 정의나 인과응보, 지역공동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소년. 심지어 결코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냉정함과 침착함을 만들어낼 수 있는 소년. 무엇이 이 소년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안타깝게도 이 소년이 겪을 일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래도 결국에는 어쩔 수 없는 아이이기도 한 소년에 불과한데 말이다….

 

“아무리 기도해도 앨리사가 집에 오지도 않았고, 아빠도 오지 않았어요. 아무리 기도해도 집이 따뜻해지지도 않았고, 켄이 와서 엄마를 다치게 하는 걸 막아주지도 않았어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등을 돌렸어요. 엄마가 내게 그렇게 말했잖아요. 기억나요?” -P247

 

 특별히 믿는 신은 없지만, 곤란한 상황에 놓였을 때라면 아무 신이나 찾으며 기도를 하게 된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 그리고 하늘과 땅에 존재하는 모든 신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한다. 적어도 그 수많은 신들을 불러내는 동안, 그리고 간절히 소망하는 것을 기도하는 그 순간의 절실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특별히 믿는 신도 없는 나조차도 어느 순간-특히나 인간이라는 이름이 무기력하게만 느껴지는 순간…-에는 신에게 기대게 되는데, 평소 하느님을 믿고 따라온 어린 아이의 경우라면 오죽할까. 기도한다. 그것도 터무니없는 소원이 아닌 어린 아이가 충분히 원할 수 있는, 아니 충분히 그래야만 하는 소원을… 하지만 그토록 절실하게 기도하고 기도했지만, 그가 믿는 하느님은 아무런 대답도 없다. 그가 원하는 것들 중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의 반복 속에서 소년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보통의 아이라면 그저 주저앉고야 말 순간에도 이 소년은 자신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당장 그 소년이 내 앞에 있다면, 대견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줘야 할 것 같지만, 그 머리에 얹을 내 손이 먼저 슬픔에 울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는 그저 먹먹하다, 슬프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고 또 부족할 수밖에 없으리라. 부당하고, 비극적이고,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일이 넘쳐나는 게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공간 속에서 세상을 깨우쳤다고 말할 수 있는 소년의 삶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이 소년의 삶이 이렇게 된 것 누가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가족만을 생각하는 사람들. 물론 그런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나, 그리고 나와 친밀하게 연관된 사람들만 소중하다는 생각은 결국에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크나큰 슬픔, 분노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실은 왜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아갈까?! 이것을 그저 -내가 아닌- 냉혹하고 비열한 다른 사람들과 그들에 물들어버린 세상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는 것일까?!

 

 조니가 그래도 끝까지 여동생은 살아있다고 믿으며 그녀를 찾아 헤매는 모습을 통해서, 힘든 시간 속에서도 뭔가 작은 희망이라도 찾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단순한 생각이며, 너무나도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조니와 같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그들의 어린 시절이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차 상처로 남겨진 ‘악몽 같은 기억’이 아닌, 언제든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그 무엇보다도, 모든 아이들이 어린 시전을 ‘추억’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기위한 많은 것들을 생각해보고, 또 행동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나와 내 주변의 몇몇 사람만을 위한 세상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하는 세상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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