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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참치여자 ㅣ NFF (New Face of Fiction)
사비나 베르만 지음, 엄지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고등학교 때 우리학교 문과반이 한 과목에 있어서만큼은 전국 최고의 성적이었다. 그 과목은 화학이었고, 이과도 아닌 문과반이, 다른 과목도 아닌 화학에서 최고의 성적을 낼 수 있었다는 것이 뭔가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실이니까… 아무튼! 그 놀라운 사실(?!)의 중심에는 화학과목 담당 선생님이 있었다. 그저 쉽지 않은 과목이라 생각했는데, 그걸 완전 쉽게, 그래서 성적이 하위권인 아이들도 화학만큼은 재미있고 쉬운 과목으로 만들어 버린 장본인이었다. 갑자기 왜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절거리는가 싶을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어렵게 느껴지는 뭔가를 쉽게 다가가게 하면서 그만큼의 성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란 게 결코 쉽지 않지만 필요하다는 사실과 그렇게 하기위해서 뭔가를 설명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것을 나의 경험을 토대로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 참치여자』가 나에게 고등학교 시절 화학을, 그리고 이 책의 작가 ‘사비나 베르만’이 그 시절의 화학 선생님을 떠올리게 했다. 다가가기 쉽지 않을 것만 같은 주제를 가지고 그 핵심을 빠뜨리지 않으며 쉽게 다가서게 하는 책이 바로 『나, 참치여자』이며, 그 작가가 ‘사비나 베르만’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사비나 베르만’이라는 작가는 『나, 참치여자』에서 ‘카렌’을 통해서 나에게 그 시절 화학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의 주인공 ‘카렌’은 어느 지하실에서 살아가던 여자아이, 아니 짐승 그 자체였다.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던 그녀에게 참치회사를 유산으로 물려받게 된 이모가 찾아오게 되면서 그녀는 점차 인간의 모습, 그리고 남들과 다르지만 매력이 가득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사실 그녀는 자폐증으로 인해 말도 할 줄 모르는 수준이었지만 이모의 보살핌을 통해서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시작으로, 책도 읽게 되고, 대학까지 가게 되며, 참치 여자(?!)로 태어나게 된다. 그래도 여전히 그녀에게 있던 자폐증은 그녀를 “스탠더드한 사람들”의 무리에 들어가게 하지는 못했다. 아니 그들 속에 들어갈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그녀가 그녀만의 독특한 생각과 방식으로 참치회사의 경영에 참여해 나가면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일들이 『나, 참치여자』에 담겨있다.
사실, 『나, 참치여자』라는 제목만 단순히 놓고는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쉽사리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처음 한 아이가 바다를 바라보며 ‘나’라는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모습이나, 이 책의 원제가 《세상의 중심으로 잠수해 들어간 여자(La mujer que buceó dentro del corazón del mundo)》라는 사실, 혹은 프랑스어판 제목이 《나(Moi)》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왜 카렌이 그토록 ‘나’를 찾기 시작하는지, 왜 그래야만 하는지를 어느 정도는 짐작하며 이야기를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 과정 속에서, 짐승 같은, 결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의 한 아이가 점차 인간으로서, 그리고 오히려 스탠더드한 사람의 대부분은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나’를 고민하고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카렌의 ‘나’가 아닌 진짜‘나’ 자신을 돌아보고, 더불어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세상에 물들었다는, 그리고 여전히 그렇게 되어간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물들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울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그때의 내 마음과 다르게 웃고 말하는 모습들… 그런 모습들을 시원하게 깨뜨리는 것이 ‘카렌’이라는 인물이다. 『나, 참치여자』라는 책 자체는 ‘카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고, 상상을 하지 않는, 그래서 쓸데없는 걱정 따윈 없는 그녀. 알고 있는 것만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에 대한 지극히 스탠더드한 생각을 깨고, “나는 존재한다, 고로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가 오히려 더 사실에 가깝다고 믿는 그녀. 그리고 이런 행동과 생각들을 더듬더듬 말하지만, 정확하게 이야기할 줄 아는 그녀. 흠… 표현이 부족해서인지 ‘카렌’의 매력을 제대로 이야기 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절대 나의 표현력에만 머무르는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단순히 내용만을 보면, 어떤 영화에서 그려졌던, 자폐증을 가졌지만 전채적인 두뇌를 지닌 사람의 사회생활 적응기로 보여 딱딱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뭐, 적어도 나는 조금 그렇게 생각했다. 또한 세계 문학계의 새로운 작가들의 색다른 소설을 소개하는 시공사의 ‘New Face Fiction’시리즈라 살짝 긴장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NFF시리즈 내용이야 괜찮지만 그 풀이의 과정이 정말 색달라 쉽사리 적응하기 힘들었으니까 말이다. 책을 읽기 전 생각이야 어쨌든 지금에 와서 다시 돌아보는 이 책은 걱정할 것이 하나 없으며, 놀라울 만큼의 매력을 가진 작품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을 탄생시킨, 놀라운 모습의 작가 ‘사비나 베르만’은 ‘멕시코 희곡상’ 4회, ‘후안 루이스 알라르콘 문학상’ 4회, ‘멕시코 언론상’ 2회 수상에 빛나는 화려한 경력의 작가라고 한다. 그런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라서 그런가?! 아니, 반대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기에 그런 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어쩌면 당연한 생각을 하게 된다.
‘나’라는 사람이 나를 제일 잘 알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나이기에 나 자신을 가장 모른다고 할 수도 있는 법이다. 『나, 참치여자』는 인간의 모습에서 바라보는 인간이 아닌, 인간이지만 다른 모습을 볼 줄 아는 누군가가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인간이지만 보통의 인간-즉 스탠더드한 인간-과는 거리가 먼 모습의 인간이 바라보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나’를 심각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멋진 기회를 가져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