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천 정사 화장 시리즈 1
렌조 미키히코 지음, 정미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어둠이 스민 거리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걷고 있다. 그곳은 갑자기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습한 느낌의 거리이다. 아니, 어쩌면 나를 어둠으로 안내하는 그 무엇인가는 벌써 펼쳐져 있었던 듯하다. 그로 인해 나의 마음이 조마조마해진 것이다. 하지만 이내 습하게만 느껴졌던 거리가 젼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어느덧 나는 이름 모를 어떤 꽃의 향기에 취한 채, 낯선 거리를 나풀나풀 걷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누군가 다가와-전혀 놀라지 않는다- 조용히 속삭인다. 이 거리와 이 거리에 닿아있는 마을에 얽힌, 그리고 앞에서 펼쳐져 있었던 그 조마조마함에 대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그 순간, 내뿜는 숨결 하나하나에 어느 꽃의 향기가 스며있다. 마냥 행복해지는 그런 향기는 아니다. 뭔지 모를 슬픔이 담겨있는, 그래서 더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그런 향기이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그 향기에 취해만 간다. 『회귀천 정사』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읽어나가는 그 모든 순간들이 나에겐 이런 느낌의 반복이었다. 

 

 『회귀천 정사』(혹시, 정사라고 해서 19금의 그 정사를 떠올리는가?! 그렇다면 미안한데 어쩌나. 여기서의 정사(情死)는 ‘사랑을 이루지 못한 남녀의 동반 자살’을 이르는 말인데 말이다. 하긴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는 제목에 ‘정사’라는 단어가 포함됐다는 이유만으로 검색 시 성인 인증을 해야 했다고 하니 충분히 그럴 수도…)에는 표제작인 《회귀천 정사》를 비롯해 《등나무 향기》, 《도라지꽃 피는 집》, 《오동나무 관(棺)》, 《흰 연꽃 사찰》까지 총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모두‘화장(花葬, 꽃으로 장사 지내다) 시리즈’라고 불리는 시리즈의 일부이다. 시리즈라고 하지만 그 내용은 각기 다르다. 단지, 사랑이 담긴 미스터리한 이야기라는 것과 꽃이 그 주인공이라는 정도의 공통점이 있을 뿐이다. 아, 그리고 또 하나. 『회귀천 정사』에 있는 다섯 편의 이야기가 전체적인 큰 틀은 비슷하게 유지된다는 것이다. 어떤 의문 가득한 사건이 터지게 되고, 그 사건을 하나씩 풀어헤쳐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 의문에 대한 해답 이상의 뭔가를 찾아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걷을 수밖에 없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것은 어떤 경험일수도 있고,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의 희미한 느낌일수도 있고, 누군가의 노래 속 내용일 수도 있다. 그런 이야기들이 해결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모습의 꽃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꽃’이라는 -이제는 너무나도 흔하게만 생각되는- 하나의 단어가, 생명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꽃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던지는 사랑의 꽃이 되기도 하며, 사랑이었지만 피어날 수 없었던 꽃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누군가의 기억-그것이 좋든, 나쁘든-으로 새겨진 꽃으로, 혹은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는 꽃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저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단편적인 꽃이 아닌 다양한 순간과 다양한 트릭 속에서 피고 지는 꽃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각각의 이야기들은 꽃을 통해서 조마조마한 마음을 아름답지만 슬픈 향기로 채워놓는다. 

 

 형사가 주인공인 《도라지꽃 피는 집》을 보면… 사창가 뒷골목에서 시체가 발견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시체가 된 사내의 꼭 쥔 주먹에는 새하얀 모습의 도라지꽃이 남아있다. 이 사내는 왜 이 곳에서 죽었으며, 도라지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이기에 그렇게 꼭 쥔 채로 죽어있을까, 라는 의문도 잠시, 또 하나의 비슷한 사건-또 누군가가 도라지꽃을 손에 꼭 쥔 채로 죽어있는…-이 발생하게 된다. 이는 -작품에서 자주 표현되는- ‘붉은 등불이 스며든 피부’를 가진 여자들과 얽혀 도라지꽃과 살인 사건에 대한 보다 큰 궁금증을 유발하게끔 한다. 이야기는 해결을 향해 점점 다가가고, 결국에는 해결을 하게 되지만, 그 이면에 남겨진 사연은 이 이야기를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닌 사랑이 담긴, 그래서 단순히 누군가를 비난할 수도 없는 그런 이야기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한 줄로 정의한다는 것이 머쓱하지만- 한편의 슬픔이 담겨있는, 그래서 더 아름답다고 느껴지는-그럼에도 분명 인간으로써 경계해야 할 사항들이 담긴- 그런 이야기들로 태어나는 것이다.
 

 


한번 말라 시들어버린 꽃은
그저 모든 것이 시들어 떨어질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P85 



 저자는 말한다, ‘어디까지나 주인공은 꽃’이라고. 주인공이 꽃이라고 그저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꽃에게도 그저 아름답게 피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시드는 순간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 피고 지는 각각의 순간들이 저마다 다른 모습이긴 하겠지만, 특히나 꽃이 그저 시들기만을 조용히 바랄 수밖에 없는 순간들을 과연 아름답다고만 할 수 있을까?! 당연하게도, 『회귀천 정사』에서는 꽃을 통해 인간의 어둠-앞서 경계해야 할 사항이라고 표현한-을 그대로 나타내고, 그에 대한 냉소적인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전체적으로 보면 희미한 느낌이 깔려있는 이야기들임에도 불구하고, 간직하고 싶고 지켜내고픈 한 송이의 꽃을 저마다의 가슴에 품고 살아가기 때문일까, 꽃이라는 것이 때때로는 그 자신의 선명함을 숨기지 않는다. 다시 시들기 위해-그것이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피는 꽃과 같이 세상의 모든 생이 사를 향해 달려가지만, 결국에는 우리 가슴속에 여전히 살아 숨쉬는, 저마다 꿈꾸는 한 송이 꽃이 있기에, 혹은 그런 추억과 기억이 있기에 우리는 지금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 생과 사에서 우리가 간직하고, 또 지켜내고픈 꽃은 어떤 꽃이며, 그 꽃은 어떤 향기의 간직하면서 우리의 가슴속에서 피고 지는 것일까?! 

 

 어떤 작품에 대해 장르를 구분 짓는 것이 그리 현명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 작품은 미스터리라는 장르로도, 그냥 일본 문학이라는 장르로도, 혹은 연애 소설이라는 장르로도, 그 어느 곳에 구분해서 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다양한 빛깔을 내고 있다. 아니, 그냥 아무 빛깔도 없는 흰색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마다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느끼는 그대로의 빛깔을 나타나는 하얀 색의 작품 말이다. 당신에게는 과연 어떤 빛깔, 어떤 향기의 작품일까?! 궁금하다면 역시 직접 만나볼 수밖에… 

 

 ‘화장(花葬) 시리즈’는 모두 8편이 있고, 그 중 5편이 이 책, 『회귀천 정사』에 실려 있다. 그리고 남은 3작품은 『저녁 싸리 정사』라는 이름의 책에 실려 있다고 한다. 그 『저녁 싸리 정사』도 조만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펼쳐질지, 어떤 향기가 느껴지는 책이 될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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