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와 비밀의 부채
리사 시 지음, 양선아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 

오늘 설화와 나리는 진실만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결속을 맹세합니다. 

우리는 천 리를 가는 동안 하나의 강으로 합쳐지는 두 개의 개울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는 천 년 동안 한 정원에 피어 있는 두 송이 꽃과 같을 것입니다.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우리 사이에 모진 말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단짝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P79

 
 ‘전족’으로 제대로 걷기도 힘들어하는 통코우 마을의 ‘설화’와 푸웨이 마을의 ‘나리’가 만나서 맹세한다. 그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는, ‘라오통’이라는 두 마음의 결합을…. 평생 지켜나가야 할 이 약속을 시작으로, 설화와 나리는 그들의 기억을 부채에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누슈’라는 여인들만의 비밀 문자로 말이다…. 하지만 작은 오해로 그들의 ‘우정과 사랑’은 시험에 들게 되고, 결국 그들은 서로에게 ‘후회와 아픔’으로, 그리고 또다시 ‘우정과 사랑’으로 남겨진다. 손에 만져질 듯 생생하게 다가오는 ‘전족’, ‘누슈’, ‘라오통’, ‘후회와 아픔’, ‘우정과 사랑’ 이라는 몇 개의 이미지로 이 소설, 『설화와 비밀의 부채』를 정리해본다. 이 몇 개의 단어들이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이렇게 정리해도 전혀 모자람은 없어 보인다. 어떻게 보면 너무 뻔 한 이야기, 단순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할 수도 있겠지만, ‘전족’, ‘누슈’, ‘라오통’ 으로 대표되는 19세기 중국 후난성의 여인들을 만나게 된다면 절대 그런 이야기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인 복종과 순종을 강요당하며, 다락방의 작은 창 하나가 세상의 전부가 되는 삶을 살아가는 19세기 중국 후난성의 여인들. 어린 시절, 그녀들 각자가 앞으로 짊어지어야 할 삶을 대변하는 ‘전족’을 시작으로 그녀들의 고달픈 삶은 시작된다. ‘전족’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여인들의 발 자체를 지금의 하이힐로 바꾼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겠다, 더 궁금하다, 고 한다면 검색이라는 유용한 방법이 있음을 알려드린다- 묘사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한, 그래서 내 발가락이 하나하나 부서지고, 새롭게 조각되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드는, 그 ‘전족’을 그 당시의 여인들이라면 누구나가 해야 하는 것이었고, 실제로 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들에게는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감싸안아줄 수 있는 ‘의자매’가 있었고, 그와는 약간 다른 개념의 ‘라오통’이 있었다. ‘라오통’은 ‘다른 마을에 사는 두 소녀가 평생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P34)’을 말하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인 ‘설화’와 ‘나리’가 맺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보다 돈독하게 해주는 것이, 여자들 사이에서만 은밀하게 전해져 내려온 비밀의 문자 ‘누슈’였다. 남자들은 그 존재 자체도 알아서도 안 되는… 이런 요소들 덕분에, 여자들만의 우정, 그리고 사랑이 이렇게 절절할 수 있다는, 지금까지 미처 알지도, 그리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비록 그 새로움이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은밀하고도 아름다워서 오히려 더 슬프게 다가오게 되지만 말이다. 

  이렇게 나에게 여전히 낯설게만 느껴지는 여인들만의 세상을 알려주는 『설화와 비밀의 부채』를 이야기하면서, 작가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 ‘리사 시’의 소개 글에, 그녀는 분명 파리에서 태어나고 LA 에서 자랐다고 적혀있었다. 글과 함께 있던 사진을 통해 만난 그녀의 얼굴도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약간의 당혹스러움과 함께, 이 책에 가지고 있던 기대의 딱! 절반이 우려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분명 『설화와 비밀의 부채』는 중국 어느 작은 마을의 여인들 이야기를 다룬다고 했었는데, 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는 중국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에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사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책을 조금씩 읽어나가면서-사실 많은 페이지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이 글을 쓴 작가가 누구며, 그 작가의 출생이 어디인가, 따위는 이미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아니,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어쩜 그렇게 그 시절 중국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담아내는지… 전족이나 라오통을 비롯해 결혼 예식이나 장례 의식 등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놓치지 않는 점에 있어서 더더욱 말이다.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그래서 현실과 다른 어느 정도의 실수(?!)가 설사 있었다고 하더라도, 쉽사리 나오기 힘든 동양의 정서는 나의 기대 이상이었다. 뭐,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리사 시’는 중국계 미국 작가라고 한다. 물론 그녀의 몸에 흐르는 피가 그녀의 글에 전혀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놀라움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뜬금없지만, 지금 당신의 곁에는 이런 사람이 있는가!?, 묻고 싶어진다. 겉은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그 속만큼은 전혀 다르지 않은 사람 말이다. 다른 곳에서 태어나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나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 그래서 그 어느 순간이후로는 나와 같은 색의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나와 같은 영혼의 울림을 가졌다고 믿게 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어쩌면 ‘소울 메이트’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상대가 이성이냐 동성이냐 따위는 상관없다. 그저 남자든 여자든 정신적인 교감을 나눌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없이 행복한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나리’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비록 단 한순간의 실수로 인생의 반을 후회와 아픔으로 보내야 했지만, 그마저도 아직 그런 상대를 만나지 못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한없이 아름답고 행복하게 비춰질 수 있지 않을까!? 아, 나도 모르게 ‘나리’를 토닥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녀가 가졌던 우정, 사랑이 어떤 것이었기에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를 토닥이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렇다. 궁금하다면 이제 당신이 『설화와 비밀의 부채』를 만나볼 시간이다. 

  아, 그전에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리’는 마지막에 ‘제발 내 말을 들어주오. 부디 나를 용서해주오.’라는 말을 남긴다. 만약 지금 당신 곁에 ‘소울 메이트’가 함께 한다면 -반대로 지금 당신 곁에 ‘소울 메이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선 그 존재부터 찾아나서야 할 것이다-, 훗날 대답조차 들을 수 없는 ‘미안하다’는 말보다, 지금 이 순간 ‘사랑한다. 그리고 미안할 짓은 하지 않겠다.’ 는 따뜻한(?!) 말 한마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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