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리냐가 열린책들 세계문학 101
마이크 레스닉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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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케냐AA’로 커피 한잔을 준비해본다. 잘 볶은 원두를 핸드밀로 갈아서 드리퍼 안의 종이 필터에 고르게 담는다. 물을 끓이고, 그 물을 드립포트에 옮겨 담는다. 물론, 서버와 커피 잔의 예열도 빠뜨리지 않는다. 드립포트를 통해 커피가루를 골고루 적시고, 뜸들이기를 하고, 정성껏 한 잔의 커피를 내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한 잔의 커피를 만들기 위한 시간은 불과 5분도 걸리지 않는다. 이 짧은 시간을 통해 얻은 한 잔의 커피를 맛보며 그 시간이상의 즐거움으로, 가보지도 못한 케냐라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동물의 왕국에서나 봤을법한 그곳의 모습들을 말이다. 그런 좋은 상상도 잠시, 훌륭한 한 잔의 커피에서 느껴지는 좋은 기운들만이 상상 속에서 그려지면 좋을 텐데, 커피의 묵직함 만큼이나 무거운 느낌의 뭔가가 나를 짓누르기 시작한다. 상상이 아닌 현실에서 느껴지는 그 짓누름은 아마도 ‘키리냐가’의 시작이자 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책의 제목이기도한 ‘키리냐가’는 22세기를 배경으로 이야기되는 유토피아의 이름이다. 인구 과잉, 공해, 위험과 질병으로 들끓고, 심지어 동물조차 찾아보기 힘든 지구의 케냐에서 벗어나 키쿠유 부족은 자신들의 전통 문화를 지키기 위해 지구 밖 소행성으로 떠난다. 그 소행성의 이름이자, 그들의 유토피아가 될 곳이 바로 ‘키리냐가’인 것이다. 그 중심에 키쿠유 부족의 주술사, 문두무구가 되는 코리바가 있다. 그렇게 ‘키리냐가’의 시작부터 그 마지막이자 또 다른 시작이 되는 시점까지의 이야기를 10편의 연작소설로 담아낸 것이 이 책, 『키리냐가』이다. ‘22세기’혹은 ‘지구 밖 소행성’이라는 단어를 통해 이미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 이 소설은 SF소설이다. 참고로, 『키리냐가』는 SF 역사상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며, 이 소설의 저자 ‘마이크 레스닉’은 2009년 [로커스] 지가 선정한 [현재까지 존재했던 최고의 SF 단편 작가] 1위, [현재까지 존재했던 최고의 SF 작가] 4위에 오르기도 했다고 한다. 굳이 상의 권위를 빌려 말하지 않더라도, 멋진 작품이라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SF 소설이라고 하는데,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아프리카의 케냐가 등장하고, 그 속에 아프리카의 전통부족인 키쿠유 부족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어쩌면 신기하게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니 말이다. 어쩌면 단순한 신기함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성급한 결론인지도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느껴지던 신기함을 넘어선 어떤 괴리감 같은 것들이 다시 이 소설의 마지막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나 하면서 읽어나가면서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마지막에는 역시나라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고 해야 할까?! 

 

키쿠유 부족은 현실-그래도 결국은 22세기이다-인 케냐를 벗어나 ‘키리냐가’를 선택하고, 그들의 전통에 따라서 삶을 영위한다. 그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사람이 바로 코리바이다. 키쿠유족이 전통을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그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중심을 잡아준다. 처음에는 역시 키쿠유족의 문두무구라는 이름에 걸맞게 참으로 현명하게 그들을 이끌고, 키리냐가를 이끌어 나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동시에 또 다른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통이란 무엇이고, 결국 그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생각들 말이다. 그들의 존재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존재가 아닌 것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들 말이다.

전통과 정체는 서로 다른 거예요, 할아버지. 

만약 할아버지께서 전자의 이름으로 취향과 행동의 변화를 제약한다면  

단지 후자를 택하는 것일 뿐이에요.” - p237

 
단순히 전통과 정체 사이에서 오는 혼란이라고 해야 할까?! 문화와 문화 사이에서 오는 충돌이라고 해야 할까?! 혹은 식민지화라는 과거-혹은 현실이기도 한-의 크나큰 상처로 인한 방어 심리 때문일까?! 유럽식 문화를 거부하는 코리바. 그 행동양식을 키쿠유족에게도 제안하고 강요하는 코리바. 하지만 우스운 것은, 정작 그 자신은 그 행동양식들을 유럽식 문화를 사용해 이루어나간다는 것이다. 마치 영화 「트루먼쇼」에서 트루먼의 진짜 삶을 가로막는 트루먼쇼 제작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영화 속 그 인물처럼 상업성이 아닌 개인의 가치관 문제이기에 코리바를 나쁘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지 아쉬울 뿐이라고 해야 할까?!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느꼈다면,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그 사고에 유연성도 충분히 주어져야했던 것은 아닐까?! 이것은 전통이 아니니까 안 돼, 저것도 전통이 아니니까 안 돼. 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오히려 반대로 그 전통들은 과연 어떻게 형성되어 온 것일까를 생각해보면 정답은 쉽게 나올 텐데 말이다. 크게 봐서, 인류의 삶을 코리바의 방식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커녕, 인류의 존재 또한 불투명하지 않을까?!

유토피아에는 여러 가지 다른 정의가 있단다. 

키리냐가는 키쿠유족의 유토피아지.” - p188


같은 키쿠유족이라도 그 개개인의 정의마저 다를 수 있는데, 단지 한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유토피아는 더더욱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유토피아라는 그 자체가 결국에는 토머스 모어가 만들어냈을 때의 그 유래처럼 ‘어디에도 없는 나라’라는 뜻으로밖에 남겨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지금 당장의 현실이야 어떻든,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유토피아를 꿈꾼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꿈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아닐까?! 코리바가 꿈꾸던 ‘키리냐가’는 끝이 났지만, 또 다른 누군가의 ‘키리냐가’, 나아가 모두가 함께 꿈꾸는 ‘키리냐가’를 현실로 끌어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고 살아가지 않으며, 나와 다름을 인정-물론 처음부터 쉽지는 않을 것이다-하는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틀림없이 가능한 세상의 우리 모두의 ‘키리냐가’가 아닐까?! 

 

『키리냐가』는 ‘열린 책들 세계문학’의 101번째 책이다. ‘열린 책들 세계문학’이라는 이름을 통해, 우리가 꼭 접해야 할 고전 문학만을 생각했었는데, 여기에서 SF를 만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해보면 『키리냐가』만큼 열린 책들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책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열린 책들’을 통해 미처 생각지 못한 SF 를 접하고, 그로 인해 ‘열린 마음’으로 한 걸음 다가가면서 진짜 우리의 ‘키리냐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결코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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