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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잊혀진 약속들. 지키지 못한 채 사라져버린 약속들. - P269
나의 스무 살 ㅡ. 그때 어떤 꿈을 꾸며 살았는지, 나 스스로와는 어떤 약속을 했었는지, 그리고 내 곁에 있던 소중한 사람들과는 어떤 약속들을 했었는지 떠올려본다. 아쉬워해야 하는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적어도 책을 읽어야겠다거나 일주일에 시 한 편씩을 외운다거나, 어딘가를 하루에 두 시간 이상씩 걸어야 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누군가는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삶이 한 뼘씩 자라나고 있는 동안, 그때의 나는 뭘 했던가?! 그리고 지금은 잊혀진 그때의 약속들은 지금쯤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
출간과 동시에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책을 구입한다. 그 누구보다 빨리 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었나 보다. 하지만, 그의 책은 내방 여기저기 쌓여있는 책들 사이 어느 틈에 놓여진 채 애써 외면당한다. 책을 읽는 시간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 남겨질 잔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조심스러워진다고 해야 할까?! 시간이 지나면 뭔지 모를 두려움과 조심스러움 또한 조금씩 사라져갈 것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책을 방치해 두고 오랜 시간을 망설인다. 얼마쯤의 시간이 흘러, 책에 대한, 아니 신경숙이라는 작가의 글에 대한 많은 감정들이 무뎌졌을 거라고 생각 할 때 쯤 책을 펴고 한 페이지씩 읽어나간다. 이 역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그동안의 무뎌진 감정들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통해서 다시 큰 기지개를 켠다 ㅡ.
팔 년 만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 그 전화는 윤을 과거 속으로 옮겨놓는다. 스무 살, 스물한 살의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시절로… 청춘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라는 뜻을 가진 청춘(靑春)을 생각한다면, 윤이, 단이, 미루, 그리고 명서, 이 네 사람의 그 시절을 청춘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인생에서 누구나 겪기 마련인 자신과의 싸움만으로도 벅찬 시절에 세상과도 싸워야하는 그 시절의 배경이 그들을 온전히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 청춘 그대로의 공간에 놓아두지 않는다.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세상과의 싸움을 하고, 그 사이사이에 놓인 그들의 선택과 세상의 선택은 그들을 다시 자신과의 싸움으로 인도한다. 어떻게 보면 오롯이 개개인, 혼자만의 싸움으로 느껴지지만, 그래서 외롭게만 느껴지지만, 그들 사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되고자 손을 잡아주고 있기에 혼자가 아닌 혼자로 보인다. 혼자가 아닌 혼자라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로 받아들이며 세상을 살아가기도 하고, 상실 혹은 부재라는 이름으로 다시 혼자임을 느끼고 세상을 살아가며, 세상을 등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고, 그 슬픔을 감당하기 버거워 자꾸만 혼자가 되어가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을 지켜봐야만 하는 사람. 단순이 이런 모양이었으면 그저 한없이 슬프고, 안타깝다고만 할 것이다. 하지만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고, 맞잡은 손으로 서로의 마음까지 만져주는 네 사람의 모습들이 아픔을 아름다움으로, 상처를 치유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내는 힘찬 걸음이 나에게도 전해진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절망할 줄 모르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다만…… 그 절망에 자네들 영혼이 훼손되지 않기만을 바라네. - P341
어딘가 부딪히고,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을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부딪히지 않으려고, 넘어지거나 쓰러지지도 않으려고만 발버둥 친다. 그런 경험들이 자신을 한 층 더 자라나게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 등장하는 우리의 청춘들이, 우리의 크리스토프들이 대견하게만 느껴진다. 비록 그 마지막이자 시작인 현재의 모습은 다를지라도… 적어도 뭔가를 잃어버리지는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것들에 대해 절망을 하더라도 내 마음 깊은 곳의 그것만은 고이 간직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신경숙이라는 이름의 작가가 던져주는 가슴 저림이 책을 읽기 전부터 밀려오는 느낌을 받았고, 책을 읽고 난 지금에도 여전히 전해지는 느낌이다. 그 느낌은 시대와 구체적인 공간을 지워버리고자 의도한 그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거리를 걷고, 노트를 펼치고 글을 쓴다는 것이 낯설면서도 친숙하게 다가오는 느낌 같은 것 말이다. 걷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빠르게를 외치며, 펜을 들고 노트를 펼치는 것보다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이 더 익숙하기에 낯설게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 살아있어요!”라고 외치고 싶은 순간들에 거리로 뛰쳐나가 사람들 사이에 뒤섞여 꿈틀거리며 위안삼고, 누군가에게 차마 말로하지 못하는 가슴속의 이야기들을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노트에 끼적거리면서 스스로를 치유하는 나, 혹은 그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기에 친숙함을 느낀다. 반면에 그의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곧장 ‘여러 개의 종이 동시에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사랑 이야기’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대표되는 아픔과 상처를 관통하고서야 ‘언젠가’는 기억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로 돌아서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더 큰 파도가 지금까지 남겨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흐르는 세월을 모두 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을 수 있는 것들은 내려놓으며, 정확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가지고 살아가는 삶. 윤 교수가 남겼던 편지 속 내용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렇게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이자 최선의 과제가 아닐까?!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현재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하고 있는 일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 톨스토이
이런저런 삶의 시작도 끝도 결국에 돌아오는 것은 ‘현재’라는 시간이다. 팔 년 만에 걸려온 전화. 그 전화에서 전해오는 오랜 시간의 이야기.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지난 이야기들이 결국에는 지금 이 순간 현재가 되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우.리.는.숨.을.쉰.다 ㅡ. 숨을 쉬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앞과 저 높은 곳만을 바라보며 ‘지.금.뭘.하.고.있.는.거.야?’는 말로 지나치게 나를 떠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매 순간 나를 짓누르던 한쪽 손가락을 낙관 쪽으로 옮기며 이제는 ‘그거면 충분해’를 주문처럼 두세 번 반복하고는 나를 토닥여본다. 그렇게 나를 토닥이며, 지금까지 무수히 반복해왔던 ‘언젠가’라는 말을, 이제야 비로소 조금은 만져지는 듯 한 느낌을 가져본다. 그러고는 가만히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이 책을 현재의 내 마음 깊은 곳에 담아본다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