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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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渴望) ㅡ. 작가의 말에서, 《촐라체》와 《고산자》, 그리고 이 소설 《은교》를 작가 스스로가 ‘갈망의 삼부작’ 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갈망이라는 단어보다는 욕망이라는 단어를 보다 먼저 떠올렸다. 욕망이라는 것은 갈망에 비해 육체를 향한 것에 보다 잘 어울리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감각으로 빚어낸 사랑을 보며 욕망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떤 절망으로 옮겨가고 있는 ‘원함’에 한 단면만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갈망(渴望)이라는 한 단어로 다시 소설을 곱씹어본다 ㅡ.

  



고요하고 쓸쓸하다는 뜻을 가진 ‘적요(寂寥)’라는 이름-필명이다-을 가진 시인이 있다. 이십대는 사회주의 운동에 빠져 있었고, 삼심 대에는 그 영향으로 감옥에 있었다. 그리고 사십대에서 그의 생(生) 마지막까지는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변호사 Q는 시인 ‘이적요’의 1주기 즈음, 그의 유언에 따르기에 앞서 이적요의 마지막 노트를 펼쳐보게 된다. 그 노트를 읽은 변호사 Q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노트에는 어린 은교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와, 자신의 제자 서지우에 대한 살인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일흔이 다 되어가는 시인 ‘이적요’와 그의 제자 ‘서지우’, 그리고 그들의 중간으로 파고들어 새로운 관계-결국에는 사랑을 놓고 하는 삼각관계-를 가지게끔 하는 17살 소녀 ‘한은교’ ㅡ. 『은교』는그들의 관계 속에서 얽히고설키는 사랑과 증오, 그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인간 내면의 갈망을 이야기 한다 ㅡ.


『은교』는 함부로 꺼내놓기 힘든 인간의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가슴 아픈-그래! 아프다고밖에 표현 할 수 없으리라- 사랑을 이야기한다.

 
“나는 2009년 이른 봄에 죽었다.” - p7


『은교』의 첫 문장은 상당히 낯설다. 어떤 글의 어느 문장이라도 그 하나하나가 소중하지 않는 경우는 없지만, 그 영향력에 있어서만큼은 첫 문장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책의 질과 상관없이, 무수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 세상에서 글을 시작하는 첫 문장이 상당히 인상 깊게 다가온다면 더없이 좋으리라.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은교』의 시작은 그런 좋음을 뛰어넘어 엄청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단 한 문장으로 온몸에 퍼져있는 감각들을 한 곳으로 집중시킨다. 단 한 문장으로……. 그래서 더 낯설다.


“‘밤에만’ 쓴 소설이니, 독자들도 ‘밤에만’ 읽기는 바라고 있다.”
- 작가의 말 中에서…

 
그 무엇보다도 작가의 말에 충실하려고 애썼다. 밤에만 읽었다. 그러면 한 층 더 은교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은교와 이적요, 서지우 모두에게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페이지를 덮은 지금, 나는 과연 어디를 향해서 다가갔는지조차 모를 만큼 모든 것이 희미해져온다.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기에, 그저 인간이라는 그 근원에 한 걸음 다가갔기에 -아니 다가갔다기보다 한 발을 푹 빠뜨렸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뚜렷한 뭔가가 아니라 그저 희미하게 뭔가가 만져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희미한 뭔가, 그것은 갈망이었다. 깊은 정말에 뿌리를 둔, 간절함이었다.

 

“남자에게 연애는 감각으로부터 영혼으로 옮겨단다.”  - p202

 

이적요 시인은 사랑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다시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참된 연애라는 것은 영혼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믿었던 그가, 지금까지는 하나의 부수적인 것으로 여겼던 감각이라는 것을 통해 그 믿음을 다시 쓴다. 그동안의 생각들은 실체 없는 관념이었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고, 그만의 ‘사랑’이라는 새로운 고유명사를 탄생시킨다.

 
 

“나는 그렇게, 나의 지옥으로 걸어 들어갔다.” - p151

사람들은 알면서도,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위험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반드시 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무서운 상상, 즉 의심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은밀한 욕구불만과 그 분출에서 시작된다. 스스로 지옥이라고 인식하는 사랑이라는 곳으로 걸어들어가게 되면서 시인의 은밀한 욕구와 그 분출이 시작된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랑, 의심, 질투 ㅡ. 이들의 서로를 쫓는 질투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 조차 애매하게 느껴진다. 서로를 은교에게 빼앗기고 싶은 않은 것이지, 아니면 은교를 서로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인지, 혹은 또 다른 질투인지… 이들 당사자들도 그렇고,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나마저도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다.


“‘아름다운 별’이라는 건 그의 생각이 아니라
세상이 그에게 주입한 생각이었다.
정말 무지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주입된 생각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맹신하는 자야말로 무지하다.” - p30

  

인식되는 것을 일방적으로 믿는 건 위험한 거야.
인식된 사물이 때로는 그 사물 자체와 얼마나 다른지
너도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어떤 낱말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천차만별이듯이.” - p95


사랑, 의심, 질투 그리고 근본적인 인간 욕망의 이야기는 다른 것들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우선, 문학이라는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 중에서 특히, 어떤 사물에 대한 생각은 인상 깊었다. 그것은 단지 문학에 대한 생각이 아닌 인간 그 자체에 대한 냉소적인 비웃음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것을 한 번에 뒤집을 만큼의 힘을 가진 것이기에 감히 반박하지도 못할 만큼의 차갑지만 정말 화끈한 비웃음 말이다.

 
“너희가 지금 누리는 달콤한 인생을 누가 주었느냐고,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고,
마음대로 너희들만 누릴 권리는…… 없다고.” - p135

 

또한, 나이 듦을 통해서도 그 이갸기는 나타나게 된다. 청춘들을 바라보면서 ‘나도 한 때 저랬었지’ 따위의 생각이 아닌, 뭔지 모를 억울함 같은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 억울함에 소리치고 싶은 욕망을 가슴 속으로 삼키면서 그것을 미친 상상에 불과했다고 자신을 다독이는 모습을 보며 차라리 소리쳐 토해내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은교』에는 수많은 시들이 인용되어있고, 그 것들 역시도 작가의 또다른 표현 방식이 아닌가 생각된다. 잘 몰라서, 그래서 나에게는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시(詩)이지만, 그런 시들이 중간 중간에 끼어들어 당사자들의 감정과 그때의 상황들을 적절히 담아냄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 어려우면서도 애매하고,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뭔가 느껴진다. 이해가 될 듯 말듯하면서도 머리로는 아니지만 가슴으로는 찌릿한 뭔가가 느껴지는 듯한 기분들이 나를 휩쓸고 지나간다고 해야 할까?! 그런 것들 중에서도 진정으로 나를 전율로 몰아넣으면서도 유쾌하게 했던 한 대목이 있었다. 바로 「헌화가」 가 나오던 그 부분 ㅡ. 헌화가의 주인공이라도 된다는 듯이 암벽을 타서 은교의 손거울을 주워오던 이적요의 모습에 이르러서야 정말 그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그의 사랑은 나에게 있어서 욕망이 아닌 갈망이 되었다.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  - p12
 



낯설게 시작해서, 단지 평범한 사랑-사랑은 나이와는 관계가 없다는- 진부한 이야기만을 늘여 놓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어떤 결말로 마무리되어질지 내심 궁금했었다. 수많은 생각만을 던져주고 희미하게 마무리 되는 것은 아닐지……. 다행스럽게도 모든 결론은 홀로 남겨진 은교가 내린다. 사랑, 질투, 그리고 한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갈망 ㅡ. 어쩌면 그 갈망도 마지막이었기에, 생의 마지막이었기에 가질 수 있었던 마지막 선물이 아닐까!? 그런 마지막선물을 자기 부정으로 마무리 지으려는 이적요에 대해, 은교는 이적요의 나머지 것들을 태워버린다. 그녀가 태운 것은 단지 아까운 몰스킨 노트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태우고 싶었던 것은 이적요 시인의 어리석은 -갈망을 넘어선-욕망이 아니었을까?! 시인 스스로는 느끼지 못했던 마지막 한줌의 사랑의 선물을 그녀는 타오르는 불꽃으로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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