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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양장)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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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을 한번도 가져본 적 없다. 그래서 우연히 마주하는 스노볼 앞에 더 오래 머무를 수 있다. 한번 뒤집어지면 더 아름다워지는 세상, 한번 뒤집었는데도 고요한 세상, 조용하고 완벽한 세상, 그 안에 행복하게 미소 짓는 모형이라도 있으면 괴기하다 느껴질 때가 있다. 아마도 나는 복잡하고 시끄럽고 아름답지 않고 완벽하지 않은 현실을 아직 더 좋아하나보다.

"겨울 평균 기온이 영하 41도로 꽁꽁 얼어붙은 세계에서 스노볼은 유일하게 따듯함을 유지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 따뜻함을 유지하기 위해 거대한 유리 천장이 돔처럼 둘렸고, 그 모습이 장난감 스노볼과 똑같이 생겼다고 해서 스노볼로 불리게 됐다." p.11

<스노볼>의 박소영 작가는 나와 다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이 현실은 너무 복잡하고 시끄럽고 아름답지 않고 완벽하지 않아서 '스노볼 같은 세상이 있다면..'하고 즐거운 상상을 한 것 같다. 추운 겨울날, 따뜻해보이는 누군가의 집에서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가족들을 바라보고 있는 성냥팔이 소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에게 <스노볼>의 이야기는 성냥팔이 소녀식 들여다봄이었을까, 짐작해본다. 그런 들여다봄으로 완성된 이야기는 현실이 제법 살만하다고 느끼는 나도 성냥팔이 소녀처럼 들여다보고 상상하게 한다.

"다이아몬드 팔찌를 차고 있는 해리를 보면서 푸세식 화장실 얘기를 듣고 있자니 딴 세상 이야기 같다. 물론 우리 집에도 옛 푸세식 화장실 터가 아직 남아 있다. 내가 살아갈 삶은 다이아몬드 팔찌보다 옛 푸세식 화장실에 훨씬 가깝다. p. 25-26

'액터'라고 불리며 드라마로 편집된 삶을 만천하에 방송하는 스노볼 사람들, 초밤은 그 중에서 자신과 닮은 해리를 좋아한다. 해리는 액터들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액터만 할 수 있다는 기상 캐스터에 낙점되며 '최연소 기상 캐스터'라는 기록을 만든 인물이다. 또 초밤은 그런 액터들의 드라마를 만드는 스노볼의 디렉터가 되고 싶어 최고 교육 기관인 필름 스쿨에 매년 지원하지만 올해도 떨어졌다.

"필름 스쿨 담당자께서 전초밤 씨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p. 45

그러던 어느 날, 반들반들한 털로 만들어진 긴 망토를 두르고 있고, 그 안으로는 고급스러운 검은 정장 차림을 한 처음 보는 남자가 초밤을 찾아온다. 그날 초밤은 거절할 수 없는 은밀한 제안을 받아 가족들도 속이고 스노볼로 가게 된다. 그 제안의 내용은 무엇일까? 스노볼로 가게 된 초밤은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설계가 잘 되어 빈틈 없는 상상력이 놀라웠고, 익숙해질만하면 새로워지는 내용이 흥미로웠다.

어떤 상상력은 현실 어딘가에 있다고 믿게 된다. 스노볼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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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배우는 시간 -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슬기롭게 죽는 법
김현아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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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마무리하는 2020년 여름,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죽음에 대해 평소처럼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죽음의 일상성을 말하며 누구나 죽음을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해왔지만 전세계 수많은 사람이 유행병으로 사망하는 '비일상' 앞에서야 죽음을 배우는 시간을 갖게 된 것 같다. 사람들은 코로나19가 바꾸어 놓을 인류의 미래를 앞다투어 예측하지만, 정작 바뀌지 않을 것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 혼란의 시기에 우리가 주지해야 할 것은 유행병의 위협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있어왔던 일이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치 못 고칠 병이 없는 것처럼 허풍을 떨던 현대의학에게 자연은 그것이 망상이었음을 혹독하게 교육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코로나,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라는 표어처럼, 많은 사람들은 코로나19를 유발한 바로 그 현대 문명이 죽음을 물리쳐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자연은 싸워 이겨야 하는 상대가 아니다.우리의 삶의 어떤 순간에도 죽음은 찾아온다는 것, 그것이 『죽음을 배우는 시간』의 가장 첫 메시지다.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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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가장 새로운 인식이 담겨있다고 느낀 책이다. 이게 내가 고작 6 페이지를 읽고 직관한 생각이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죽음에 '인식'을 더하는 것이 평면적이었다. 인식보다는 '경험'이 이 복잡하고 우여곡절인 죽음에 어울렸다. 뉴스 기사에 숫자로만 접하는 죽음, 그 숫자가 전부 사람이라고 바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도 경험의 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미래에 두는 일은 낙관적인 삶의 방식이었고, 이제 죽음은 누구나의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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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학년 제일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피부과, 성형외과와 같이 노동량 대비 수입이 만족스럽거나 아니면 영상의학과처럼 환자를 직접 대면하지 않는 과들을 선택한다. 나도 머지 않은 장래에 환자가 될 것을 생각하면 그런 현실이 두려워서 가끔 몸서리 쳐진다. p. 16

많은 환자와 그 가족들이 죽음에 준비되지 않았던 의사들에게 거꾸로 죽음을 가르쳐준다. 죽음이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즉 어떤 이에게만 벌어지는 특별한 비극이나 천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렇게 나는 의사로서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을 점차 배워갔다. p.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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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죽음으로 사람은 성장한다. 부모가 나이 들어갈수록 자식은 성장한다.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도 성장도 필요하다. 특히 의사에게는 무수한 환자와 그들의 죽음, 자기반성이 뼈 아프게 반복된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그렇게 그들은 사람을 살리는 유능함을 괴롭게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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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때 승압제를 올리거나 심폐소생술을 했더라면 며칠, 아니 몇 시간은 더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은 것이 환자나 그 가족을 위해 내가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의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스스로 죽음에 준비된 의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좋은 의사는 최선을 다할 때와 이제 그만 놓아야 할 때를 분별할 줄 알고, 가족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p.75

죽음이 병원으로 떠넘겨진 다음 수순은 당연히 죽음이 치료해야하는 질병으로 둔갑하는 거예요. 요즘은 한술 더 떠서 노화조차도 치료가 필요한 병으로 치부되고 있지요.자본주의 사회를 죽음과 노화를 병원의 일로 만들고 가족들이 그 시간에 노동을 하고 재화를 축적하도록 작동해왔고요. 여러분이 중견 의사로 활동하는 시기에는 환자들의 평균 연령이 지금보다도 높을 것이고 그런 현실도 더 심해질 거예요. 여러분들이 의사 개인으로서 이 거대한 흐름에 거역한다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최소한 죽음을 앞둔 환자의 입장에서 무엇이 좋은 죽음일지를 한번 고민해보기를 바랍니다.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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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와 위로를 위해 이성과 감성을 극대화해야 하는 직업이 '의사'라고 느꼈다. 죽음과 노화를 질병으로 둔갑시키고 그에 대한 재화를 위해 가족들이 노동하는 시스템을 만든 병원과 자본주의의 민낯은 고발에 가까웠다. 누구나 질병과 죽음과 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서운데, 그 자유가 개인이 죽고 사는 문제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이 속한 집단이 죽고 사는 문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진실이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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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구 - 4.19혁명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윤태호 지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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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알기까지 한 평생이 걸린 사람의 이야기

누구에게나 타인과 처음 만나는 순간이 있다. 일을 하기 위해 만나 명함을 건네는 사이, 훗날 연인이 될지 남남이 될지 모르는 채 카페에 앉아 수줍게 미소를 건네는 사이, 탄생의 기쁨으로 함께 우는 사이 등이 그렇다. 여기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사일구>에도 첫 만남이 그려진다. 바로 예비 사위와 예비 장인의 첫 만남이다.

정답은 없겠지만 흔히 있는 이런 첫 만남에는 어떤 대화가 오갈까? 피 한 방울 안 섞인 타인이고 아직 서로를 잘 모르지만 곧 가족이 될 이들에게는 첫인상이 중요할 듯하다. 인생이나 결혼, 부부에 대한 덕담이 오갈 수도 있고, 가족관계나 연봉 등 부담스러운 호구조사가 이어질 수도 있겠다.

큰 맥락에서 이해를 해보자면 그 모든 것은 딸이 안정된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일구>의 예비 장인은 예비 사위 석호와의 첫 만남에서 진보 정치인의 험담만 들려줬다. 석호가 전라도 출신이기 때문일까. 덕분에 좋은 첫인상을 남기기 위해 과장된 사교성을 보이려던 석호는 장인의 첫인상을 험담으로 남겼다.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혹은 나에게 이해를 바라기나 했을까…라는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했다.” 

대체 무엇이 이들의 첫 만남에 정치를 끼어들게 했을까? <사일구>는 독자에게 그런 의문을 건네주고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의 일대기를 따라가게 만든다.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현용 씨의 목소리로 말이다. 여기서 이야기의 주체가 사위 석호에서 장인인 현용으로 바뀌는 형식적 재미도 느낄 수 있다.

현용은 ‘의미도 모르는 해방을 맞이하고 의미도 모르는 갈등과 반목을 목격하다 지옥과도 같은 한국전쟁을 경험한다.’ 의미를 몰랐지만 지옥과도 같은 경험이 현용에게는 유년이었고 청년이었다. 현대의 사람들이 추억하면 아름답게만 미화되는 유년과 청년이 현용에게는 아니었던 것이다.

의미를 알았다면 달랐을까? 의미를 더듬더듬 알아갈 무렵, 현용은 어머니에게 호되게 혼나고 만다. 그 시대에 의미를 찾는 일은 투쟁과 죽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후 현용은 의미 찾기를 그만두고 자신을 ‘가장 안전한 재산’으로 지킨다. 죽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만 있으려고 애쓴다. 삶의 소소한 재미를 외면하고 부풀어 오르는 희망을 덮어두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수천번 사죄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일. 그때도 몰랐고 꽤 오랫동안 몰랐지. 그 희생을 왜 가치 있게 느끼지 못했는지. 너무나 당연한 것을 억압받다 해방되었을 때 얻게 되는 것들이 너무 당연하다보니 새삼스레 느끼기 어려웠던 거지. 공기, 바람, 물, 자유처럼.”

‘민주주의는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사일구> 기획의 말에 나오는 문장이다. 현용은 이 과정에서 전쟁에 참여해 총을 맞았으며 이 후유증으로 다리를 저는 신세가 됐다. 또 형제 같은 친구 석민의 죽음을 목격했고, 다친 동생 현석이를 업고 병원으로 달렸다. 그 외에도 많은 죽음과 공포를 느끼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현용은 겨우 겨우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거나 못 지킨 채 살면서 자신의 ‘가장 안전한 재산’을 지켰다. 그렇게 살았기에 그 재산의 가치는 알았어도 누군가의 희생을 가치 있게 느끼지는 못했다. 자신의 ‘가장 안전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추억 없는 유년과 청년, 삶의 소소한 재미를 외면하고 부풀어 오르는 희망을 희생한 것만이 안타까웠을 테니.

현용이 그가 떨어지는 기억력으로도 석호를 기억하는 것은 촛불집회에서 팻말을 든 석호를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현용은 투쟁의 바깥에서 그 안에 속한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말리느라 바빴다. 말릴 수 없었기에 석만은 죽고 현석은 다쳤다. 첫 만남에 진보정치인의 험담을 해도 말릴 수 없었던 석호. 그는 석만이자 현석이고, 이름 모를 그들이다.

“그러게… 어째서일까. 기억하실 만한,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걸까.”

역사의 4·19에서 우리는 강한 사람들의 이야기만 들어왔다. 그 모습이 누군가에는 용기를 주듯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책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사일구>는 그간 우리가 접했던 역사의 사람들보다는 오랫동안 망설인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의미를 알기까지 한 평생이 걸렸으나 시간이 오래 걸린다한들 그것이 무지하거나 비겁한 것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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