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구 - 4.19혁명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윤태호 지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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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알기까지 한 평생이 걸린 사람의 이야기

누구에게나 타인과 처음 만나는 순간이 있다. 일을 하기 위해 만나 명함을 건네는 사이, 훗날 연인이 될지 남남이 될지 모르는 채 카페에 앉아 수줍게 미소를 건네는 사이, 탄생의 기쁨으로 함께 우는 사이 등이 그렇다. 여기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사일구>에도 첫 만남이 그려진다. 바로 예비 사위와 예비 장인의 첫 만남이다.

정답은 없겠지만 흔히 있는 이런 첫 만남에는 어떤 대화가 오갈까? 피 한 방울 안 섞인 타인이고 아직 서로를 잘 모르지만 곧 가족이 될 이들에게는 첫인상이 중요할 듯하다. 인생이나 결혼, 부부에 대한 덕담이 오갈 수도 있고, 가족관계나 연봉 등 부담스러운 호구조사가 이어질 수도 있겠다.

큰 맥락에서 이해를 해보자면 그 모든 것은 딸이 안정된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일구>의 예비 장인은 예비 사위 석호와의 첫 만남에서 진보 정치인의 험담만 들려줬다. 석호가 전라도 출신이기 때문일까. 덕분에 좋은 첫인상을 남기기 위해 과장된 사교성을 보이려던 석호는 장인의 첫인상을 험담으로 남겼다.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혹은 나에게 이해를 바라기나 했을까…라는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했다.” 

대체 무엇이 이들의 첫 만남에 정치를 끼어들게 했을까? <사일구>는 독자에게 그런 의문을 건네주고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의 일대기를 따라가게 만든다.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현용 씨의 목소리로 말이다. 여기서 이야기의 주체가 사위 석호에서 장인인 현용으로 바뀌는 형식적 재미도 느낄 수 있다.

현용은 ‘의미도 모르는 해방을 맞이하고 의미도 모르는 갈등과 반목을 목격하다 지옥과도 같은 한국전쟁을 경험한다.’ 의미를 몰랐지만 지옥과도 같은 경험이 현용에게는 유년이었고 청년이었다. 현대의 사람들이 추억하면 아름답게만 미화되는 유년과 청년이 현용에게는 아니었던 것이다.

의미를 알았다면 달랐을까? 의미를 더듬더듬 알아갈 무렵, 현용은 어머니에게 호되게 혼나고 만다. 그 시대에 의미를 찾는 일은 투쟁과 죽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후 현용은 의미 찾기를 그만두고 자신을 ‘가장 안전한 재산’으로 지킨다. 죽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만 있으려고 애쓴다. 삶의 소소한 재미를 외면하고 부풀어 오르는 희망을 덮어두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수천번 사죄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일. 그때도 몰랐고 꽤 오랫동안 몰랐지. 그 희생을 왜 가치 있게 느끼지 못했는지. 너무나 당연한 것을 억압받다 해방되었을 때 얻게 되는 것들이 너무 당연하다보니 새삼스레 느끼기 어려웠던 거지. 공기, 바람, 물, 자유처럼.”

‘민주주의는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사일구> 기획의 말에 나오는 문장이다. 현용은 이 과정에서 전쟁에 참여해 총을 맞았으며 이 후유증으로 다리를 저는 신세가 됐다. 또 형제 같은 친구 석민의 죽음을 목격했고, 다친 동생 현석이를 업고 병원으로 달렸다. 그 외에도 많은 죽음과 공포를 느끼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현용은 겨우 겨우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거나 못 지킨 채 살면서 자신의 ‘가장 안전한 재산’을 지켰다. 그렇게 살았기에 그 재산의 가치는 알았어도 누군가의 희생을 가치 있게 느끼지는 못했다. 자신의 ‘가장 안전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추억 없는 유년과 청년, 삶의 소소한 재미를 외면하고 부풀어 오르는 희망을 희생한 것만이 안타까웠을 테니.

현용이 그가 떨어지는 기억력으로도 석호를 기억하는 것은 촛불집회에서 팻말을 든 석호를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현용은 투쟁의 바깥에서 그 안에 속한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말리느라 바빴다. 말릴 수 없었기에 석만은 죽고 현석은 다쳤다. 첫 만남에 진보정치인의 험담을 해도 말릴 수 없었던 석호. 그는 석만이자 현석이고, 이름 모를 그들이다.

“그러게… 어째서일까. 기억하실 만한,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걸까.”

역사의 4·19에서 우리는 강한 사람들의 이야기만 들어왔다. 그 모습이 누군가에는 용기를 주듯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책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사일구>는 그간 우리가 접했던 역사의 사람들보다는 오랫동안 망설인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의미를 알기까지 한 평생이 걸렸으나 시간이 오래 걸린다한들 그것이 무지하거나 비겁한 것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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