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트위터를 하다가 ‘지정 화면의 문자를 실시간으로 번역하여 텍스트 위에 바로 번역 텍스트를 입히는 프로그램의 자발적 구독권‘ 에 대한 텀블벅 프로젝트를 홍보하는 트윗을 봤다. 그 개발자는 한글화가 되지 않은 해외 게임 화면을 번역하는 데 목적을 두고 만들었다고 했다. 이제 그 프로그램이 상용화되면 유저들은 NPC가 뭘 가져오라고 시키는건지, 스토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대략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지난 주말에는 영화 ‘컨택트‘를 감상했다. 언어와 사고가 객체에 미치는 영향, 아니 그보다는 지배적 구조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겠다. 여하간에 그런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영화였다.
번역 서비스의 속도와 정확성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걸 실생활에서 직접 목격하는 와중에, ‘이렇게 가다간 은유법이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몰라‘ 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한때 시인을 꿈꿨던 80년대생의 언어적 수준은 한 5년만 지나도 노쇠한 것으로 취급되어 그때가 되면 손 쓸 틈도 없이 지식 계급의 가장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게 아닐까. 아마도 이런 공포를 느낀 사람 중 하나가 ‘컨택트‘ 를 썼을 것이다. 나는 ‘은유의 소멸‘을, 그는 ‘언어 개념의 소멸‘을 두려워하는 거지. 외계인이 아닌 인간으로서.
딥러닝의 가능성은 어디까지를 포함할까. 인간이 기능적으로 소통하는 것 외에 한숨의 높낮이, 웃음의 장단, 눈썹의 시각적 우울 뭐 그런 것들에도 관심이 있을까?
구시대적 인간이 되어간다는 건 실감하고 싶지 않은데, TV와 인터넷이 도무지 날 내버려두려 하지 않는다.
P15 변치 않는 진실은, 말이든 글이든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에 따라 그 형태가 선택된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의미‘를 어떤 ‘목적‘에 따라 어떤 ‘대상‘에게 전달하고자 하느냐에 따라 말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선택하는 어휘가 달라진다. 좋은 번역 역시 이 기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번역은 기존에 작성된 글(원문)에서 의미와 목적과 대상을 파악해내, 그것을 새로운 대상을 향해 의미와 목적을 전달해야 하는 다소 복잡하고 난해한 임무까지 수행해내야 한다는 측면에서 특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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