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에 걸리다]

Felice Varinie

1952~

 

 

<바닥 쪽 모서리가 없는 노란색의 동심 직사각형들(Concentric Yellow Rectangles without Floor Corners)>

1997, 아크릴 물감, 스위스, 수글리오 루가노, 개인 소장

 

 

 

펠리체 바리니의 작품을 감상하고 싶은 사람은 산책자가 되어야 한다. 바리니가 했듯이 어떤 장소를 거닐면서 작품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리니는 건물 내부나 도시 풍경이 원래 가지고 있는 형태에 그림을 더해서, 사람들이 해당 장소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각하도록 유도한다.

 

그의 그림은 공간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작가의 출발점, 즉 작품이 기하학적인 형태를 드러내는 시점을 찾아 이동하도록 이끈다. 바리니는 시점을 자신의 눈높이에 따라 지면에서 정확히 162센티미터 되는 지점으로 정했다. 세상을 자기 기준에 맞추고, 관람객을 자신이 보는 광경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바리니는 자신의 시선을 구체화함으로써 우리가 세상을 직선과 곡선의 집합체, 무한히 많은 그림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바라보게 유도한다.

 

바리니의 작업은 배경으로 선택된 장소에 이미지를 투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형태에 따라 윤곽을 그리고 색을 더한다. 그는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와 원색, 흰색과 검은색을 사용한다. 트롱프뢰유를 그리려는 게 아니라 그림의 배경이 된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코로나 모양의 아치> (특정 시점을 벗어나서 봤을 때)

2004, 아크릴 물감, 스위스, 몬테카라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그림을 이루는 각각의 조각은 건축물의 세부를 새롭게 발견하게 해주고, 전체적인 그림은 도시와 건축물을 새로운 방식으로 읽게 해준다. 바리니는 이상한 형체가 우리 시야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의 작품은 3차원의 공간에 2차원의 그림이 펼쳐져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간을 평평하게 만들어 보여준다는 점에서 바리니의 그림은 사진처럼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바리니의 작품은 3차원의 공간에서 짧은 수명을 다한 뒤에는 사진을 통해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한다. 사진은 바리니의 작품이 만들어낸 그림을 충실히 보여주는 동시에, 이 그림이 함정임을 고발한다. 관람객이 현장에서 바리니의 작품을 알아보려면 그가 파놓은 시각적 함정에 걸려들어야 한다. 정확한 형태가 드러나는 초점을 찾아낸 순간 관람객은 큰 기쁨을 맛보게 되는데, 공간에 흩어져 있던 작품을 자신이 완성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각의 감상자가 만들어내는 무한히 많은 시점 역시 의미를 지니며, 이 모든 새로운 시각이 작품을 한없이 풍요롭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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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된 여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1503~1506년경, 캔버스에 유채, 77×53㎝,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아름다운 미소가 눈과 입에 머물며 몸속에 있던 숙녀의 영혼을 발코니로 불러낸다

 

숙녀는 베일에 싸인 듯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모나리자>를 둘러싼 그림의 주인공에 대한 미스터리는 사라졌다. <모나리자>의 주인공은 리사 게라르디니로 그녀는 1479년 6월 15일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문은 토스카나 지주로 오랜 권세를 누렸으나 가세가 점차 기울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1494년 3월 5일 리사는 비단 장사를 하며 신흥 지주로 떠오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와 결혼했다.

 

프란체스코와 친분이 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아버지 세르 피에로 다 빈치가 결혼의 증인이 되었고 죽기 2년 전인 1537년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거기에 '아내 모나리자를 향한 애정과 사랑을 담은 유언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항상 기품을 잃지 않으며 충실한 아내였던 모나리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남긴다'고 적었다.

 

리사는 임신한 상태로 초상화의 모델이 되었으며  그녀의 임신과 작품이 완성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다 빈치는 워낙 작업 속도가 느린 화가였고 살아 있는 동안 이 작품을 완성시키지 못했다.

 

사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피렌체의 평범한 부르주아 여성의 초상화가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작품이 되었느냐는 것이다. 이는 다 빈치가 보통의 초상화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초상화의 기본적인 기능을 넘어서게 했다는 점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모나리자>는 초상화라는 면에서만 봐도 매우 혁신적인 작품이다. 그림 속의 그녀는 상당히 높은 곳에 있는 발코니에 앉아 관객을 쳐다보며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이 미소는 그녀 이름의 상징인 '라 조콘다'(La Gioconda, 상냥한 사람)를 대변한다. 모나리자의 눈빛 역시 당대에 볼 수 없는 매우 무례하고 대담한 형태이다. 이러한 눈빛은 다 빈치가 그린 초기 초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아마도 <모나리자>는 사적인 작업이라서 이런 혁신적인 방식을 적용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나리자>가 가진 특별함은 형식의 새로움과 감정적 참신함을 초월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시에 등장하는 '사랑스러운 숙녀'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이 작품을 보고 단테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우리의 영혼은 크게 두 곳으로 이동한다.

이곳은 영혼의 세 가지 본성이 모이는 장소로 바로 눈과 입이다…….

아름다운 미소가 눈과 입에 머물며 몸속에 있던 숙녀의 영혼을 발코니로 불러낸다.

숙녀는 베일에 싸인 듯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다빈치는 색과 색, 형체와 형체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구분 짓지 않고 부드럽게 변해 가도록 처리하는 회화 기법인 스푸마토를 도입했다. 극적인 결과를 창출한 스푸마토 덕분에 모나리자의 미소는 신비롭고 부드럽다.

 

 

 

 

 대부분의 초상화가 그렇듯이 모나리자의 눈 또한 감상자를 곧장 돌아보고는 움직이는 감상자를 줄곧 뒤쫓는 듯하다. 다빈치는 왼쪽 눈은 감상자를 정면으로 향하고 오른쪽 눈은 한쪽으로 살짝 치우치게 함으로써 이런 환영을 만들어 냈다.

 

 

 

단테가 묘사한 것처럼 베일에 가려진 영혼의 초상화는 다 빈치가 정확히 의도한 것이다. 그는 염료로 섬세한 층을 만들었고 그 위에 유약을 덧발라 베일에 싸인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림의 선명한 윤곽을 찾으려 하다가 모나리자의 은은한 미소와 표정에 상상 속으로 빠져든다. 그래서 우리는 이전 세대와 마찬가지로 <모나리자>가 바라는 대로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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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va La Vida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캔버스의 유채, 260×325㎝, 파리 루브르 박물관

 

20세기 말이 되면서 들라크루아의 작품 속 자유의 여신과 마리안느는 프랑스의 상징으로 150년 동안 널리 알려졌으며 이 그림은 프랑스와 다른 나라에서 공화당의 상징이 되었다.

 

 

1830년 7월 27일에서 29일까지 3일 동안 파리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켜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리고 오를레앙의 젊을 공작을 새 왕으로 즉위시켰다. 7월 공화국은 부르봉 왕조의 흰 국기 대신에 혁명과 공화국을 상징하는 삼색을 사용해서 샤를 10세가 의도했던 1789년 이전의 프랑스로 회기하지 않고 새로운 통치자가 혁명과 제국에 등장했다는 것을 입증했다.

 

들라크루아는 작품에 '7월 28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왕의 최종 결정을 받아내 국민회의를 해산하고 자유를 얻으려는 목적뿐 아니라 부르봉 전제정치를 폐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3일 간의 폭동을 다룬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파리 시민들의 폭동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의 전형적인 주택과 오른쪽에 노트르담 성당이 어렴풋이 보이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주요 인물의 복장을 통해 폭동에 가담한 시민들이 특정한 계층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휘장을 빼앗아 두르고 있는 남자는 공장 노동자이고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은 부르주아(학생 혹은 장인 또는 공장 간부)이며 무릎을 꿇고 삼색기를 든 남자는 시골에서 온 일용직 인부로 추정된다. 배경에는 폭동을 의미하는 수탉 모양의 모자를 쓴 이공계 대학생 무리가 보인다. 전경에 죽어 있는 병사 두 명은 왕실 연대의 군복을 입고 있는 스위스 근위병과 기병이다. 이 작품이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보다 20년이나 일찍 그려졌는데도 그림 속 소년『레미제라블』 속 인물이라고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중앙에 있는 반나체의 여이다. 당대 평단에서는 실제 폭도를 모델로 삼은 것이라고 여겼다. 비평가들은 그녀를 거친 노동계급의 여성으로 보았고 심지어 매춘부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들라크루아는 천재적인 붓놀림으로 인물을 전쟁이라는 설정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했다. 그래서 알레고리의 시각적 특성인 나체를 주요 인물(이 그림 속 유일한 여성)을 통해 부각시켰다.

 

 

 

 

외젠 들라크루아 <미솔롱기 폐허의 그리스>

1826년, 캔서스에 유채, 209×147㎝,보르도 미술관

 

들라크루아는 1826년 <미솔롱기 폐허의 그리스>를 통해서 이미 사실주의와 알레고리를 결합시켰다. 이 작품에서는 전통의상을 입은 그리스 여인이 손을 활짝 편 상태로 헐벗은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터키 압제자에 대항하는 그리스를 상징하는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당시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었던 <밀로의 비너스>를 보고 자유의 여신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이 작품 속 여성이 풍기는 고전적 특성이 이를 분명하게 암시한다. 자유의 여신의 손에 들려 있는 삼색기와 머리에 두른 붉은 휘장은 각각 고대 그리스(그리고 프랑스 혁명)와 노예해방을 상징하기도 한다.

 

가장 지적이고 뛰어난 비평가였던 테오필 토레가 1837년에 쓴 글에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중앙의 인물이 가지는 이중적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림 속 여인은 젊은 여성인가? 자유의 정신인가? 원한다면 둘 다 될 수 있다.

자유가 젊은 여성으로 구현된 것이다.

진정한 알레고리는 존재의 특성을 소유함과 동시에 살아 있는 형태이자 상징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죽은 형태를 보이는 기존의 낡은 알레고리와 다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들라크루아의 가장 보편적이고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그의 이력과 예술에서 반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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