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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138
김광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6월
평점 :
품절
이 시인의 특징이 깊이는 있지만 무지하게 평범하여서 묘한 습작시 보는 것 같은 기분 드는 것은 나뿐이 아닐 것이다. 표제작 「물길」을 보면,
물은
어김없이 찾아와
자기의 깊이를 주장하느니
여보게
억지로 막으려 하지 말게
―「물길」 중에서
일단 그의 시에는 끔찍한 느낌과 함께, 이 시대의 밝음보다는 현실 속의 어둠을 캐치하려는 의지가 있다.
임종을 앞둔 환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바싹 마른 입술이 달싹거렸다.
상속에 관한 유언을 남기려는가. 아들딸들은 일제히 아버지의 얼굴 위로 귀를 모았다.
“……아, 안타라도 한 개……” 환자의 목소리는 들릴락 말락했다.
그때 타격음과 함께 야구공이 높다랗게 치솟아 펜스를 넘어갔다. 와아, 관중들의 환호가 침울한 병실을 가득 채웠다. 말하자면 역전의 순간이었다.
―「펜스를 넘어」 중에서
시냇물 징검다리를 건너면
능금나무 과수원
걷다보면 갑자기 산이 막아서던
좁은 골짜기 아름다웠지
[……]
기억의 검은 터널로부터
매연을 뿜으며 화물 트럭과
버스 승용차들 앞다투어 달려나온다
추억을 단속하듯 곳곳에서
범칙금 딱지를 떼는 교통순경들
―「세검정 길」 중에서
올라갈 때는 힘이 달리고
내려갈 때는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듣고
은회색 오토매틱 낡은 승용차
덜덜대며 달려가는 꼴이
영락없이 주인을 닮았구나
―「고갯길」 중에서
이렇게 보듯이, 그의 시를 보면 시대의 부조리를 다룬 내용들이 많다.
「펜스를 넘어」에서 보면, “상속에 관한 유언”을 기다리는 자식들, 이들을 보는 시인의 눈빛은 아버지가 연명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라, ‘불효막심’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는) 생각을 하면서 “상속의 유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자본주의적 현실은 돈 말고는 살 수 없었던 것이기에, 돈 가방 들고 도로를 건너다 교통사고 당한 현장에서 ‘돈 가방에서 현금 추리기에 바쁜 사람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자식들의 눈빛과는 상관 없이 ‘안타라도 한 번…’ 쳐보고 싶다는 것은 그의 탈출의지일 것이다. 결국 4번 타자는 홈런을 터트린다. 그와 동시에 아버지는 죽어버린다. 이 시대의 암흑상이 죽음 말고는 탈출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비정한 것일까?
「세검정 길」은 추억을 그릴 새도 없는 현실을 그린다. 요즘 관점이 센티멘탈 어쩌고라는 평가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문예지에서 그런 작품들은 대개 ‘꽈당’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작품들이 현실을 뛰쳐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한 탓이다. 그런 반면 「세검정 길」은 동구 밖― 과수원길― 노래 부르는 듯한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현실에는 자본주의에 딱히 어울리는 ‘과속 범칙금’만 있는 것이 아니고(과속은 솔직히 말해 자본주의적이다), ‘최저속도 위반’, ‘신호위반’, 심지어 요즘은 ‘정지선 위반’ 도 생겼다.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무슨’ 범칙금 딱지를 뗀단 말인가? 북악터널에 최저속도가 있을까? 아니면 신호위반?(이 시에서 신호위반은 나오지 않았다)아니면 시인이 과속을 한 것일까? 앞 다투어 달려 나오는 사람들을? 아니! 이 시는 분명히 ‘추억을 단속하듯’ 딱지 떼는 교통순경들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자본주의의 터널 속에서 살고 있기에 추억을 상상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시대를 비판하는 것이다.
「고갯길」은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을 반성하고 있다. 털털대며 달려가는 꼴이 주인을 닮았다고 한다. 언덕길같이 피할 수 없는 것을 만나 넘어가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것도 반성할 거리에 들어갈까? 그것이 현실인데?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시인은 2단으로 차의 파워를 올리고 있다. (자동차엔 문외한이라 그것이 얼마정도인지 모르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래도 ‘제자리에서 헛바퀴 돌아’가는 시인의 차는 뒤차의 욕을 먹고 만다. 조금 속 터지는 상황이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나, 그렇게 시인은 불가항력인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 생각은 이 시에서 확연해진다.
자기를 낳아
길러준
어미까지 잡아먹었으면
그래도 무엇인가 되었어야 한다
아직도 그저 한 마리의
뱀이란 말이냐
어미를 잡아먹는
새끼를 또 낳겠단 말이냐
―「殺母蛇」전문
살모사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긴 하지만, 당연히 그것은 시인 자신의 반성과 닿아 있다. ‘자신을 낳아/ 길러준/어미까지 잡아먹었으면/그래도 무엇인가 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살모사가 ‘어미를 죽임’은 ‘사마귀가 남편을 뜯어먹는 것 같은’ 즉, 모든 개체의 본능과 맞닿아 있다고 봐야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은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부잣집 자제나, 어떤 사람이라도 처음엔 어머니를 뜯어먹고 자라온 것이다. (미혼모의 자식들이나 아동학대의 피해자 같은) 몇몇 사람 외에는 부인하기 힘든 내용이다. 결국 우리도 이처럼 뜯어 먹힐 운명이다. 요즘 임신거부, 낙태, 동성연애 등 부인하거나 쾌락을 좇으려고 하는 일들이 많지만(다 쓸데없는 짓이다― 몰라서 하는 얘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무조건 피한다거나 좋은 것만 받아들이는 것이 대안은 아닐 것이다), 인간으로서 당면하게 될 당연한 현실(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반성하는 것이 이 시집의 전체적인 느낌이다.
같이 공부하는 선생님 한 분이 이렇게 물어보셨다. 김광규 시집을 우연히 들쳐보게 된 것을 계기로 그의 시를 어떻게 생각 하냐고 물어보셨던 것이다. 깊이가 강하다. 무난하다 등등의 많은 사실을 공감하였으나, 딱 한 가지는 아니었다. ‘바로 재미가 있느냐?’ 하는 것인데, 나는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유는, 반전이 조금 싱거운 데가 많다.
내가 둔한 것인가, 이 시집에서는 도저히 재미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시인의 장점들은 단점들을 커버 하고도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