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길 문학과지성 시인선 138
김광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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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의 특징이 깊이는 있지만 무지하게 평범하여서 묘한 습작시 보는 것 같은 기분 드는 것은 나뿐이 아닐 것이다. 표제작 「물길」을 보면,


물은

어김없이 찾아와

자기의 깊이를 주장하느니

여보게

억지로 막으려 하지 말게

                            ―「물길」 중에서



일단 그의 시에는 끔찍한 느낌과 함께, 이 시대의 밝음보다는 현실 속의 어둠을 캐치하려는 의지가 있다.


임종을 앞둔 환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바싹 마른 입술이 달싹거렸다.

상속에 관한 유언을 남기려는가. 아들딸들은 일제히 아버지의 얼굴 위로 귀를 모았다.

“……아, 안타라도 한 개……” 환자의 목소리는 들릴락 말락했다.

그때 타격음과 함께 야구공이 높다랗게 치솟아 펜스를 넘어갔다. 와아, 관중들의 환호가 침울한 병실을 가득 채웠다. 말하자면 역전의 순간이었다.

                            ―「펜스를 넘어」 중에서


시냇물 징검다리를 건너면

능금나무 과수원

걷다보면 갑자기 산이 막아서던

좁은 골짜기 아름다웠지


[……]


기억의 검은 터널로부터

매연을 뿜으며 화물 트럭과

버스 승용차들 앞다투어 달려나온다

추억을 단속하듯 곳곳에서

범칙금 딱지를 떼는 교통순경들

                            ―「세검정 길」 중에서


올라갈 때는 힘이 달리고

내려갈 때는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듣고

은회색 오토매틱 낡은 승용차

덜덜대며 달려가는 꼴이

영락없이 주인을 닮았구나

                            ―「고갯길」 중에서


이렇게 보듯이, 그의 시를 보면 시대의 부조리를 다룬 내용들이 많다.

「펜스를 넘어」에서 보면, “상속에 관한 유언”을 기다리는 자식들, 이들을 보는 시인의 눈빛은 아버지가 연명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라, ‘불효막심’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는) 생각을 하면서 “상속의 유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자본주의적 현실은 돈 말고는 살 수 없었던 것이기에, 돈 가방 들고 도로를 건너다 교통사고 당한 현장에서 ‘돈 가방에서 현금 추리기에 바쁜 사람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자식들의 눈빛과는 상관 없이 ‘안타라도 한 번…’ 쳐보고 싶다는 것은 그의 탈출의지일 것이다. 결국 4번 타자는 홈런을 터트린다. 그와 동시에 아버지는 죽어버린다. 이 시대의 암흑상이 죽음 말고는 탈출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비정한 것일까?

「세검정 길」은 추억을 그릴 새도 없는 현실을 그린다. 요즘 관점이 센티멘탈 어쩌고라는 평가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문예지에서 그런 작품들은 대개 ‘꽈당’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작품들이 현실을 뛰쳐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한 탓이다. 그런 반면 「세검정 길」은 동구 밖― 과수원길― 노래 부르는 듯한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현실에는 자본주의에 딱히 어울리는 ‘과속 범칙금’만 있는 것이 아니고(과속은 솔직히 말해 자본주의적이다), ‘최저속도 위반’, ‘신호위반’, 심지어 요즘은 ‘정지선 위반’ 도 생겼다.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무슨’ 범칙금 딱지를 뗀단 말인가? 북악터널에 최저속도가 있을까? 아니면 신호위반?(이 시에서 신호위반은 나오지 않았다)아니면 시인이 과속을 한 것일까? 앞 다투어 달려 나오는 사람들을? 아니! 이 시는 분명히 ‘추억을 단속하듯’ 딱지 떼는 교통순경들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자본주의의 터널 속에서 살고 있기에 추억을 상상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시대를 비판하는 것이다.

「고갯길」은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을 반성하고 있다. 털털대며 달려가는 꼴이 주인을 닮았다고 한다. 언덕길같이 피할 수 없는 것을 만나 넘어가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것도 반성할 거리에 들어갈까? 그것이 현실인데?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시인은 2단으로 차의 파워를 올리고 있다. (자동차엔 문외한이라 그것이 얼마정도인지 모르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래도 ‘제자리에서 헛바퀴 돌아’가는 시인의 차는 뒤차의 욕을 먹고 만다. 조금 속 터지는 상황이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나, 그렇게 시인은 불가항력인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 생각은 이 시에서 확연해진다.



자기를 낳아

길러준 

어미까지 잡아먹었으면

그래도 무엇인가 되었어야 한다

아직도 그저 한 마리의

뱀이란 말이냐

어미를 잡아먹는

새끼를 또 낳겠단 말이냐

                            ―「殺母蛇」전문


살모사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긴 하지만, 당연히 그것은 시인 자신의 반성과 닿아 있다. ‘자신을 낳아/ 길러준/어미까지 잡아먹었으면/그래도 무엇인가 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살모사가 ‘어미를 죽임’은 ‘사마귀가 남편을 뜯어먹는 것 같은’ 즉, 모든 개체의 본능과 맞닿아 있다고 봐야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은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부잣집 자제나, 어떤 사람이라도 처음엔 어머니를 뜯어먹고 자라온 것이다. (미혼모의 자식들이나 아동학대의 피해자 같은) 몇몇 사람 외에는 부인하기 힘든 내용이다. 결국 우리도 이처럼 뜯어 먹힐 운명이다. 요즘 임신거부, 낙태, 동성연애 등 부인하거나 쾌락을 좇으려고 하는 일들이 많지만(다 쓸데없는 짓이다― 몰라서 하는 얘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무조건 피한다거나 좋은 것만 받아들이는 것이 대안은 아닐 것이다), 인간으로서 당면하게 될 당연한 현실(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반성하는 것이 이 시집의 전체적인 느낌이다.


같이 공부하는 선생님 한 분이 이렇게 물어보셨다. 김광규 시집을 우연히 들쳐보게 된 것을 계기로 그의 시를 어떻게 생각 하냐고 물어보셨던 것이다. 깊이가 강하다. 무난하다 등등의 많은 사실을 공감하였으나, 딱 한 가지는 아니었다. ‘바로 재미가 있느냐?’ 하는 것인데, 나는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유는, 반전이 조금 싱거운 데가 많다.

내가 둔한 것인가, 이 시집에서는 도저히 재미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시인의 장점들은 단점들을 커버 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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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문학과지성 시인선 249
신대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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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에 관한 에피소드를 들었다. 작품집이 많지 않은 이유에 관해서였다. 지나친 겸손인지, 시인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그다지 좋지 않게 생각한다며 작품집 내기를 꺼리고 있었다.(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런 모습부터가 이 시를 아름답게 만드는 듯 했다.


산속에 들 때 지천에서

나란히 물길 거슬러 오르던 수달,

함께 거스르면 함께 살길 트이던 그 추운 날을 기억하고

산이든 사람 사이든

갈라진 물길에서 너를 기다린다,


수달, 수달,

살려고 외롭게 몸부림치는 네 가까이 있게 해다오.

                         ―「水刻畵 3」 중에서


이 시집의 자연친화적인 주제는 이 시 외의 여러 시에서 드러난다.

자연과 사람은 함께 살아왔다. 다만 인간들은 자연을 파괴하여 발전하였으며, 자연은 인간이 이용하라고 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시인은 그렇지 않다.‘나란히 물길 거슬러 오르던 수달’이 ‘함께 거스르면 함께 살길 트이던 그 추운 날’을 기억하고 ‘물길에서 너를 기다리’며, ‘네 가까이 있게 해달라는’시구에서 주제가 확연히 그려진다.

시인의 시는 누구의 시보다 아름답다. 철저한 파괴로 얼룩진(그것이 형식이건, 흉측한 모양이건 간에) 현대시에서 참 아름다운 충격을 던져준다.


입춘 지나, 사람과 봄이 겹쳐지는 날

나무와 동네 사이

우리는 큰 하늘에 지워진다.

                         ―「눈사진」 중에서


오늘은 잠시 갈 길을 버리고

자신이 선택한 나라에서 다시 자신을 선택하려고

지리산 소년과 마주앉아 암흑 속에서

따스한 논물 소리를 찰랑이며 귀기울이고 있습니다.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5」중에서


이런 아름다움은 자연 친화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 사이의 아름다움으로 지속된다. 「아이오와」연작에서 보여주는 인종을 넘어서는 아름다움들이나, 「비무장 지대 일기」연작이 그렇다.


죽어가는 흑인 노인이 건네준

지팡이 끌고 언덕에 올라와

그 지팡이로 눈 휩쓰는 바람 위에 글을 쓴다,


‘내 영혼은 지금 아프리카에서

그대에게 가고 있다’

                         ―「아이오와 4」 중에서


그건 다 지난 일, 매일 살아서 새날을 나눌 수 있는 일이 있어야겠지요, 서로 생활을 주고받는 방송이라도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여기서 함께 지내는 동안 같은 처지에 있는 생활인끼리 휴식 시간만이라도 심정적으로 마주보고 싶다면 믿어지지 않겠지요?

                         ―「비무장 지대 일기 2」 중에서


뭐,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읽힐 수 있는 시다. 용서의 아름다움, 같은 시의 ‘독약 사건은 사실이 아니겠지요?’라는 시구에 드러났듯이, 남북한은 참 깊은 악연을 가지고 있다. 참 오랜 세월을 반목해 왔다. 하지만 시인의 눈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아량으로 넘길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생활을 주고받는 방송이 아니라 선전방송 중단이라는 경우로 나타났다.)

시집 곳곳에서 Sam&Lee가 발견된다. 그의 정체는? 알래스카의 최북단 식당이라고 한다.



그 어디 북극점 가까이 하루 해를 다 넘겨도

빙평선 위에 그대로 남는 해,

지지 않으려고 서쪽에서 북쪽으로

다시 북쪽에서 동 틔울 곳을 향해

빙평선 위를 굴러가는 해,


[……]


꿈꾸며 선 채로 잠들어 외로움을 줄이는 곳

고통을 나눌수록 뜨거운 피를 받는 곳

혼 없이 돌아와도 언제나 한국인이 되는 곳


샘 앤 리 Sam & Lee, 유빙의 고향

                              ―「백야 2」중에서


고원선만 남기고

당신을 눈발로 여백 처리한 그림 엽서 하나


우체국으로 가는 당신 편에 부치고,


갈림길을 지나면서 Sam and Lee를 비껴나가는 당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6」중에서


극지에서 극지로 떠돌면서

눈과 빙하와 몽골 반점만 남아

Sam and Lee로 돌아왔습니다.


산청에서 온 요리사 송씨가

본토 어디서든 Sam, 혹은 Lee로 살아보려고

하루 2교대, 요리 책을 넘기며 밤일을 하고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5」중에서


그의 시에서 Sam&Lee는 무슨 역할을 하는 걸까? 그것은 알래스카 최북단에 있는 식당일  뿐인데, 놀라운 것은 시인의 눈이다. 어두침침한 그 곳을 「백야 2」에서는 ‘고통을 나눌수록 뜨거운 피를 받는 곳’이라고 말한다. 주목해 볼 구절은 백야의 윗부분(2연)이다. ‘빙평선 위를 굴러가는 해!’ 그렇다, 해는 어느 한곳에만 비추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백야라고 해서 몇 곳에서는 가끔 볼 수 없는 ‘서글픈’ 곳이 있지만, 해는 모든 곳에 비추는 것이다.

다음 말을 하기 전에  ‘여기 아닌 다른 곳에다 시선을 돌리고 그곳의 의미를 그려내는 것’이라는 이 시집의 전제를 말하고자 한다.

Sam과 Lee라는 식당은, 내 가정에 의하면, 알래스카 북단처럼 차가운 세상이다. 하지만 차가운 세상이라도 해가 일 년에 하루도 뜨지 않는 곳이 어디 있는가?  ‘그 어디 북극점 가까이 하루 해를 다 넘겨도 빙평선 위에 그대로 남는 해’라고 말하는 시, 그렇다. 희망은 어디에도 있고, 해는 어디에든 뜨는 것이다.

그가 그리는 곳은 현실의 대척점이지만, 결코 대척점이 아닌 곳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시집이 자주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가 너무 좋은 작품을 쓰기 때문이 아닐까? 자연친화 이외에도 그가 좋아질 이유는 곳곳에 있다. 좋아하는 시인을 댄다면 신대철이라고 쉽게 말할 자신까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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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265
김명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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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나는 이 말에 호기심을 가지지 않았다. 해설에 나온 말 그대로, (아니 인생 자체가 설명하듯, 모든 생에(아니 무생물조차도) 허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뭔가 다른 방식의 허무를 그릴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내 예상을 저버리지 않고, 시집 자체는 불멸보다는 허무에 가깝다.

농협 공판장 앞 차부엔 사람이 안 보이고
무대리 오르는 마을버스는 텅텅 비었다
오래전 문 닫은 정미소집
[ ……]

누군가 미끄러진 물웅덩이에
나 또한 기어코 발 헛딛고 미끄러진다

빗줄기가 휘어잡은 고요의 뿌리가
거듭 파헤쳐진 물웅덩이가

길고 긴 고랑을 이루면서 흘러내린다

                                     ―「강물이 시작하는 곳」 중에서

「홍유릉 日氣 」연작 등 많은 작품들 에서도 그 말은 유효하다.  그의 시는 쓸쓸하며, 서정적이다.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 「목련」등 일부 작품에서는 활기차기도 한 방향으로 그려지고 있기도 하다. 표제작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는 곤충들의 꾸준한 노동에서 불멸의 샘을 추출하고 있다.

앗!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은둔하는 하루살이들이 개미 떼들이
바위 속을 온통 하얗게 누비고 있다
그들의 하루 일과는 바위 속으로
널찍한 신작로를 내는 일
봄이 다 가기 전에 그들의 대지에
널찍한 신작로를 내는 일
봄이 다 가기 전에 그들의 대지에
또 한 그루 망개나무를 심는 일
해 넘어가기 전에 불멸의 식탁을 마련하는 일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중에서

해 넘어가기 전을 준비하고, 봄이 가기 전을 준비하는 그들의 마음을 불멸의 샘이라 한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은 '불멸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들의 행동엔 언제든 '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곤충들의 행동을 보자면 '愚公移山' 이라는 느낌이다. 뚜정뚜정 순리대로 살아가는 곤충과 식물들, 하지만 이것은 거시적으로 보면 불멸이 아닌 것이 된다. 무엇이 끝나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게다가 사람들이 그냥 보자면, 너무나 '모범적'인 생활방식으로 여겨지며, 싱겁기도 하다. 하지만 시인은 그렇게 타이트한 인생을 말하고 있지도 않다. 그가 이겨내는 방안은 바로 사랑이다.

꽃바람 드센 어느 해 봄날
절집의 뒤꼍에서
아무도 모르게 어린 내 입으로
떠넘겨주시던, 할머니의 肉饍!
그토록 질긴 사랑의 힘으로 나 지금 여기 서 있다
어떤 거센 바람도 절명의 사랑 속으로는
몰아치지 못한다 
                                     ―「淸明」
중에서

그 사랑의 힘과, 끝이 있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더 치열하게 불타오르는 인생의 굵기 모르는 테이프들의 접붙임으로, 불멸이 된다고 나는 이 시집을 한마디로 정의하고 싶다. 전체적으로 시는 좋다. 어렵기는 하지만... 마지막으로 마음에 든 시 하나...

터진 피부에 스며오는 저 얇은 북소리
보일 듯 보이지 않는
한 생애의 마지막 굽이가 쳐들어가서
얼어붙은 강물의 잔잔한 속주름을
마저 부풀리는 사이
우리들 양껏 먹고도 남은,
졸아붙은 찌개냄비 속의 이 묘한 비릿한 냄새
뼈마디 앙상한 미루나무 속엣가지를 부러뜨리며
잘못 들은 귀울음인 듯
북소리 차츰 멀어져가고
한 사람의 주검을 사무치게 떠받치려는
오 아직 여기까지는 몰려오지 않는 저 희미한 눈발
                                     ―「팔당」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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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104
유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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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박정희 논란으로 뜨겁다. 이 시집을 읽으면 제일 먼저 읽었던 시가 미란타 연작이다. 우선 통쾌했었는데...

오랜 위통처럼 만인을 괴롭히다 죽은 사람이 떡하니 나타나
아무런 미안타는 기색도 없이 미란타를 권하는 이 현실을,
이따금 재발하는 위염의 쓰린 기운처럼 곰곰이 씹어대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 고리짝 철 지난 약 선전을 오늘에 되살리고 있었어

그래도 보릿고개 때 생긴 위장병을 잡은 분이 바로 그 분 아니오                                       
                                                 - 「미란타」 부분 

  그때로서도 뒷담에 가까웠다. 독재자는 필요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플라톤식의 철인 독재가 아닌 이상) 난 아니다. 많은 사람도 그럴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시집은 많은 점수를 땄다고 할까? 이 시와 더불어 이 시집엔 좋은 시가 많았다. 1부와 2부 일부였다. 3부도 그렇다.
   나도 남들이 다 한 뒷담 한 마디 해야겠다. 유하 시인은 현실비판도 하고 있지만, 키치예찬을 하고 있었지않나... 하는 말들이 많았다. 
『천일마화』 라는 시집을 한번 읽고나서 그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이 시집에서는 이런 시의 예를 들겠다. 

해서, 세속도시의 즐거움에 동참하고 싶은 자들 압구정동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는구나

투입구의 좁은 문으로 몸을 막 우겨넣는구나 글쟁이들과 관능적으로 쫙 빠진 무용수들과의 심리적 거리는, 인사동과 압구정동과의 실제 거리에 비례한다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오, 욕망과 유혹의 삼투압이여

                                - 「바람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 부분 

처음 읽을 때는 반어를 쓰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점점 그 사회에 끌려들어가는 사람중의 하나로서, 받아들여야 할 이야기기도 하다. 현실 수긍. 우리가 사회에 살고 있지만 살아가지 않고 부정하는 방법이 있겠는가?

어느새 남자의 미래는 책임감과 무거운 중압감

하지만 햇살은 저 높은 곳에

각자의 이상을 위해 모두 바쁘네

자랑스런 나의 친구들아 나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단다.

우린 일, 사랑, 사회가 이슈 하지만 인간적일 뿐인

실수는 모두 겪어야지 너무 재수없는

직장상사 얘기 별수없이 아저씨 되는게 뭐가 대수

                                 -조피디 [친구여] 일부

이 노래도 그런 사회 사람들이 이겨나가는 이야기다. 술을 먹는 이야기도 끼어있지만, 이런 사회를 이겨나가고 있는 수단으로서 쓰여지고 있기에 조금 낫다고 할까? 유하 시인의 이야기는 요즘 만평에 자주 등장하는 술먹고 이 시름 이겨보자꾸나...라는 식과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은 나만 드는 생각일까? 그것은 현실도피다. 현실 도피는 현실을 이겨나가는 방법으로서 적합하지 않다. 노력으로서의 변화가 옳은 선택임은 당연하다. 하나,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좌절이 그런 사회를 자꾸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천일마화』 에서도 등장하듯, 그의 시가 자꾸 다루는 키치 이야기는 일부 고위층의 이야기로 경마나, 쾌락에 빠져 세상시름 잊어보고, 어느 때는 사랑에 빠져보고, 대박의 꿈에 불타오르고... 하는 식의 도피에 지나지 않는 듯 했다. 2부에 유난히 그런 시가 많았다. 표제이기도 하지만 거기서 점수를 까먹고 간다고나 할까? 하나대가 약간의 보완은 할 수 있었지만, 뭔가 모자란다는 느낌이다. 

 

허퉁하게 그 빈집을 떠나간다... 떠나간다... 떠나간다...는 것 때문에...

(요즘 자살 뭐시기 하는 것이 자꾸 연상된다.)

 

(이렇게 쓰고 나서도 후회가...남는다. 괜히 길기만 하고 스트라이크는 한번도 못친듯한 느낌. 내가 캐치 못한 무언가가 있기는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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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꽃 문학과지성 시인선 87
최두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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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시를 말할 때, 사람들은 스타트를 보는 편이다.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일단 시를 보다가 스타트가 상투적인 다음에는, 내용이 이상하다 싶으면 책을 닫아버린다. 스타트에서 모든 것이 드러나면 완전히 망가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를 보면,


여린 새순 쪼아먹던 닭이 없으니 울밑 구기자 제멋대로 웃자라 휘늘어지고 호박벌 몇 마리 마당의 배추꽃과 장독대의 무우꽃 사이에서 오락가락 분주하였다. 추녀 밑 제비집은 거미줄에 둘러싸여 더 이상 보금자리 아니라고 말하고 안방 벽에 걸린 지난해 달력의 억새가 바람에 숨죽인 울음 소리 날렸다. 헛간에는 농사꾼의 손을 떠난 지게 쟁기 작두 덕석 등이 깊은 잠에 빠져 만져도 깨어날 줄 모르는데 부엌에서는 젊은 어머니가 홀연 파뿌리 할머니가 되어 불붙은 부지깽이를 손에 쥔 채 어디론가 핑 달려나갔다. 불러도 대답도 없이 귓가에는 호박벌 날갯짓 소리만 오래 웅웅거렸다.

― 「빈집」 전문


전혀 스타트가 내용을 알아챌 수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보통, 그렇게 나와서 성공한 격의 시도 없고, 그런 시는 ‘대개’ 시집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하이틴 시집이면 모를까)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묘사도 보통이 아니다. ‘새순 쪼아먹던 닭이 없으니 울밑 구기자 제멋대로 웃자라……’ 얼마나 감각적인지 말로 다 못하겠다.

일단 그의 시는 『대꽃』에서 본 것처럼 한 인물에서 사람 전체의 모습을 보는 경향의 시가 많다. 한 인물을 그릴 뿐이지만, 그의 시선은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해 있다.


동네 사람들은 기어이 부자가 되어 동네를 뜰 거라고 벼른다. 왜냐하면 동네가 호랑이의 배에 해당되기에. 그렇지만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동네가 철거될 거라고 한단다. 특히 비행기 항로 아래이기에. 그는 이 사회가 분명히 잘못된 것 같다고 말했다. 부모가 맞벌이로 죽도록 일하지만 산동네 꼭대기집의 셋방살이를 못 면하니까. 그는 또한 말했다. 아버지는 사관학교나 경찰대학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하신다고.

― 「김기섭」 부분


분명, 80년대 말의 분위기를 연상할 수 있는 시다.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동네가 철거된다는 것은, 분명 미학적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했을 것이고(지금도, 분위기가 도시 조경을 해하면 마을 일부가 헐리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는 ‘이 사회가 분명히 잘못된 것’을 안다. ‘맞벌이로 죽도록 일해도’ 산동네 꼭대기집의 셋방살이를 못면하는 것은 분명 국가의 책임이다. (그 당시 저가 임금 정책을 취했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하필 사관학교나 경찰대학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이것이 모순이다. 국가가 그를 망쳐놓았음에도, 그는 국가에 봉사하길 원한다. “출세”라는 미명으로.

분명, 지금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생각하지 않는가?

최두석 시인의 시는 한때 내가 좋지 않게 봤었다. (해설에 있었다. ‘미식가들에겐 실망을 시키기 충분하다’라고- 한 때 내가 그런 ‘언어적 미식’을 했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보고, 인물의 실체와 깊이를 본다면 최두석 시인은 분명 좋은 시인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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