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문학과지성 시인선 249
신대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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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에 관한 에피소드를 들었다. 작품집이 많지 않은 이유에 관해서였다. 지나친 겸손인지, 시인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그다지 좋지 않게 생각한다며 작품집 내기를 꺼리고 있었다.(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런 모습부터가 이 시를 아름답게 만드는 듯 했다.


산속에 들 때 지천에서

나란히 물길 거슬러 오르던 수달,

함께 거스르면 함께 살길 트이던 그 추운 날을 기억하고

산이든 사람 사이든

갈라진 물길에서 너를 기다린다,


수달, 수달,

살려고 외롭게 몸부림치는 네 가까이 있게 해다오.

                         ―「水刻畵 3」 중에서


이 시집의 자연친화적인 주제는 이 시 외의 여러 시에서 드러난다.

자연과 사람은 함께 살아왔다. 다만 인간들은 자연을 파괴하여 발전하였으며, 자연은 인간이 이용하라고 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시인은 그렇지 않다.‘나란히 물길 거슬러 오르던 수달’이 ‘함께 거스르면 함께 살길 트이던 그 추운 날’을 기억하고 ‘물길에서 너를 기다리’며, ‘네 가까이 있게 해달라는’시구에서 주제가 확연히 그려진다.

시인의 시는 누구의 시보다 아름답다. 철저한 파괴로 얼룩진(그것이 형식이건, 흉측한 모양이건 간에) 현대시에서 참 아름다운 충격을 던져준다.


입춘 지나, 사람과 봄이 겹쳐지는 날

나무와 동네 사이

우리는 큰 하늘에 지워진다.

                         ―「눈사진」 중에서


오늘은 잠시 갈 길을 버리고

자신이 선택한 나라에서 다시 자신을 선택하려고

지리산 소년과 마주앉아 암흑 속에서

따스한 논물 소리를 찰랑이며 귀기울이고 있습니다.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5」중에서


이런 아름다움은 자연 친화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 사이의 아름다움으로 지속된다. 「아이오와」연작에서 보여주는 인종을 넘어서는 아름다움들이나, 「비무장 지대 일기」연작이 그렇다.


죽어가는 흑인 노인이 건네준

지팡이 끌고 언덕에 올라와

그 지팡이로 눈 휩쓰는 바람 위에 글을 쓴다,


‘내 영혼은 지금 아프리카에서

그대에게 가고 있다’

                         ―「아이오와 4」 중에서


그건 다 지난 일, 매일 살아서 새날을 나눌 수 있는 일이 있어야겠지요, 서로 생활을 주고받는 방송이라도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여기서 함께 지내는 동안 같은 처지에 있는 생활인끼리 휴식 시간만이라도 심정적으로 마주보고 싶다면 믿어지지 않겠지요?

                         ―「비무장 지대 일기 2」 중에서


뭐,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읽힐 수 있는 시다. 용서의 아름다움, 같은 시의 ‘독약 사건은 사실이 아니겠지요?’라는 시구에 드러났듯이, 남북한은 참 깊은 악연을 가지고 있다. 참 오랜 세월을 반목해 왔다. 하지만 시인의 눈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아량으로 넘길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생활을 주고받는 방송이 아니라 선전방송 중단이라는 경우로 나타났다.)

시집 곳곳에서 Sam&Lee가 발견된다. 그의 정체는? 알래스카의 최북단 식당이라고 한다.



그 어디 북극점 가까이 하루 해를 다 넘겨도

빙평선 위에 그대로 남는 해,

지지 않으려고 서쪽에서 북쪽으로

다시 북쪽에서 동 틔울 곳을 향해

빙평선 위를 굴러가는 해,


[……]


꿈꾸며 선 채로 잠들어 외로움을 줄이는 곳

고통을 나눌수록 뜨거운 피를 받는 곳

혼 없이 돌아와도 언제나 한국인이 되는 곳


샘 앤 리 Sam & Lee, 유빙의 고향

                              ―「백야 2」중에서


고원선만 남기고

당신을 눈발로 여백 처리한 그림 엽서 하나


우체국으로 가는 당신 편에 부치고,


갈림길을 지나면서 Sam and Lee를 비껴나가는 당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6」중에서


극지에서 극지로 떠돌면서

눈과 빙하와 몽골 반점만 남아

Sam and Lee로 돌아왔습니다.


산청에서 온 요리사 송씨가

본토 어디서든 Sam, 혹은 Lee로 살아보려고

하루 2교대, 요리 책을 넘기며 밤일을 하고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5」중에서


그의 시에서 Sam&Lee는 무슨 역할을 하는 걸까? 그것은 알래스카 최북단에 있는 식당일  뿐인데, 놀라운 것은 시인의 눈이다. 어두침침한 그 곳을 「백야 2」에서는 ‘고통을 나눌수록 뜨거운 피를 받는 곳’이라고 말한다. 주목해 볼 구절은 백야의 윗부분(2연)이다. ‘빙평선 위를 굴러가는 해!’ 그렇다, 해는 어느 한곳에만 비추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백야라고 해서 몇 곳에서는 가끔 볼 수 없는 ‘서글픈’ 곳이 있지만, 해는 모든 곳에 비추는 것이다.

다음 말을 하기 전에  ‘여기 아닌 다른 곳에다 시선을 돌리고 그곳의 의미를 그려내는 것’이라는 이 시집의 전제를 말하고자 한다.

Sam과 Lee라는 식당은, 내 가정에 의하면, 알래스카 북단처럼 차가운 세상이다. 하지만 차가운 세상이라도 해가 일 년에 하루도 뜨지 않는 곳이 어디 있는가?  ‘그 어디 북극점 가까이 하루 해를 다 넘겨도 빙평선 위에 그대로 남는 해’라고 말하는 시, 그렇다. 희망은 어디에도 있고, 해는 어디에든 뜨는 것이다.

그가 그리는 곳은 현실의 대척점이지만, 결코 대척점이 아닌 곳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시집이 자주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가 너무 좋은 작품을 쓰기 때문이 아닐까? 자연친화 이외에도 그가 좋아질 이유는 곳곳에 있다. 좋아하는 시인을 댄다면 신대철이라고 쉽게 말할 자신까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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