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꽃 문학과지성 시인선 87
최두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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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보통 시를 말할 때, 사람들은 스타트를 보는 편이다.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일단 시를 보다가 스타트가 상투적인 다음에는, 내용이 이상하다 싶으면 책을 닫아버린다. 스타트에서 모든 것이 드러나면 완전히 망가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를 보면,


여린 새순 쪼아먹던 닭이 없으니 울밑 구기자 제멋대로 웃자라 휘늘어지고 호박벌 몇 마리 마당의 배추꽃과 장독대의 무우꽃 사이에서 오락가락 분주하였다. 추녀 밑 제비집은 거미줄에 둘러싸여 더 이상 보금자리 아니라고 말하고 안방 벽에 걸린 지난해 달력의 억새가 바람에 숨죽인 울음 소리 날렸다. 헛간에는 농사꾼의 손을 떠난 지게 쟁기 작두 덕석 등이 깊은 잠에 빠져 만져도 깨어날 줄 모르는데 부엌에서는 젊은 어머니가 홀연 파뿌리 할머니가 되어 불붙은 부지깽이를 손에 쥔 채 어디론가 핑 달려나갔다. 불러도 대답도 없이 귓가에는 호박벌 날갯짓 소리만 오래 웅웅거렸다.

― 「빈집」 전문


전혀 스타트가 내용을 알아챌 수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보통, 그렇게 나와서 성공한 격의 시도 없고, 그런 시는 ‘대개’ 시집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하이틴 시집이면 모를까)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묘사도 보통이 아니다. ‘새순 쪼아먹던 닭이 없으니 울밑 구기자 제멋대로 웃자라……’ 얼마나 감각적인지 말로 다 못하겠다.

일단 그의 시는 『대꽃』에서 본 것처럼 한 인물에서 사람 전체의 모습을 보는 경향의 시가 많다. 한 인물을 그릴 뿐이지만, 그의 시선은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해 있다.


동네 사람들은 기어이 부자가 되어 동네를 뜰 거라고 벼른다. 왜냐하면 동네가 호랑이의 배에 해당되기에. 그렇지만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동네가 철거될 거라고 한단다. 특히 비행기 항로 아래이기에. 그는 이 사회가 분명히 잘못된 것 같다고 말했다. 부모가 맞벌이로 죽도록 일하지만 산동네 꼭대기집의 셋방살이를 못 면하니까. 그는 또한 말했다. 아버지는 사관학교나 경찰대학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하신다고.

― 「김기섭」 부분


분명, 80년대 말의 분위기를 연상할 수 있는 시다.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동네가 철거된다는 것은, 분명 미학적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했을 것이고(지금도, 분위기가 도시 조경을 해하면 마을 일부가 헐리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는 ‘이 사회가 분명히 잘못된 것’을 안다. ‘맞벌이로 죽도록 일해도’ 산동네 꼭대기집의 셋방살이를 못면하는 것은 분명 국가의 책임이다. (그 당시 저가 임금 정책을 취했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하필 사관학교나 경찰대학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이것이 모순이다. 국가가 그를 망쳐놓았음에도, 그는 국가에 봉사하길 원한다. “출세”라는 미명으로.

분명, 지금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생각하지 않는가?

최두석 시인의 시는 한때 내가 좋지 않게 봤었다. (해설에 있었다. ‘미식가들에겐 실망을 시키기 충분하다’라고- 한 때 내가 그런 ‘언어적 미식’을 했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보고, 인물의 실체와 깊이를 본다면 최두석 시인은 분명 좋은 시인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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