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모유키 - 제1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조두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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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 난 느낌은 바로 웰메이드, 였다. 그냥 이렇게 저렇게 예상되는 결말이 아닌, 무난하고 아름답게 끝나는 것. 작품 날개(책을 딱 펴면 왼쪽)의 작자 설명을 보니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 산 계기도 다름 아닌 '마일리지' 였다. 한겨레 문학상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절대적 기준도 아니었을 뿐더러, 유아독존에 빠져있던 K모 작가 이후로 신뢰가 조금 무너져 있어서 그게 나오면 나왔나보다... 했다. 아니, 문학 전반에 관심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한 1.5년동안 문학과 떨어져 있다보니, 문학을 어떻게 읽는가도 가물가물하다. 더더욱, 책을 읽어왔음에도 입원생활을 한 터라 센스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이 책은 입원 직전에 산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당연하게도' 책장으로 직행했다. 그 책을 다시 들여다 본건 퇴원 이후였다. 역시 병원을 다니면서 책을 살짝 보는 식이었다. 이 책은 그러나 작가는 이 작품에서 만만찮은 센스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력은 소설 한 두개 정도와 자신의 포부 정도였다. 더더군다나 신춘문예나 유명잡지로 등단한 것도 아니라서, 나에게는 비웃음 거리로 충분했다(자기도 등단 못한 주제에). 그러나 이 책을 읽고나니 그 생각이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 선생님도 등단 제도의 '무용론(無用論)'을 펴신다. 글만 잘 쓰면 인정이 되는데 등단 작가 위주로 기회가 가게 되어서 등단 전용 스타일이 나온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다.

조두진님은 지금까지는 무명이었을지 모르지만 필력이 상당하다, 주제를 구현하는 힘도 있었다. 내가 가장 소름끼치게 봤던 장면은 바로 왜군이 도망치기 위해 병든 사람의 목을 베어서 적장에게 선물하는 장면이었다. 나는 이 장면을 보고 병 걸린 사람, 즉 생활의 의에 좌절을 느끼고 괴로워 하기만 하는 사람에게 딱이라고 생각했다. 그 병든 상태로만 있으면, 다시 말해 이 생활에서 도피하고 싶기만 하고, 나는 이 생활에 적응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들은 먼저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들의 결과는 참혹한 죽음이다. 병든 사람(즉, 인생에 좌절하고 포기한 인생을 사는 사람)의 도피는 오직 죽음만을 부른다는 것, 그리고 그 뒤를 누구도 불쌍하게 여겨주지 않는다는 것으로 읽혔다. 그런 이후로, 나는 병에 걸려있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 내가 병에 든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도모유키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다. 말도 통하지 않지만, 그녀를 살리고 싶은 일념으로. 그녀가 어디에선가 살아준다면 그는 기쁠 것이다. 이 작품은 단지 한 시대에만 묶이는 것이 아닌, 이 시대의 고민과 해결법을 모색하고 있는 책으로 여겨진다. 뒤의 작품인 '능소화'는 그에 비해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아니, 이 책이 준 인상이 너무 큰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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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라, 서커스
천운영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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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좋다’와 ‘기분이 나쁘다’, 이 사이에 이도 저도 아닌 것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산다는 것은 정말이지 무료하다. 오늘은 WBC를 봤다. 한국과 미국의 대결. 그 뒤에는 승자의 환호가 있겠지만, 패자의 침통도 있다. 이 세상은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밟혀야 한다. 밟힌다는 것은 당하는 사람에겐 수치이자, 괴로움이다. 그것이 다만 자발적인가, 아니면 강제적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오발탄이라는 소설을 보고 남몰래 훌쩍훌쩍 운적이 있다. 나도 그렇지는 않았을까. 이런 세상에, 이런 시대에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왕따 1세대였다. 왕따가 공식 언어로 자리잡기도 이전에 나는 그런 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필름에 빛이 들어갔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그것이 어린 나이에 저지른, 이른바 ‘무심코 던진 돌’, 이른바 어린 나이의 실수가 될 수도 있겠다. 나는 그 돌에 맞았다. 그렇다고 내가 이렇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다. 나는 단지 질문 하나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돌에 맞았으니 돌에 안맞을 연구를 하는 수밖에,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의 생을 실수 투성이라 해본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인간이기에 실수 한 번 하지 않고 살수는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런 실수는 보통 상처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서커스 단원의 실수는 완벽한 묘기보다 더 흥이 난다. 서커스를 보는 사람들은 실수를 염두에 두는 법이다. 서커스를 보는 것도 환상적인 성공이 아니라 실수를 확인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난이도가 높을수록 관중들이 열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6P)


인터넷에서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후불제’ 결혼주선,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그런 사진에 대한 댓글은 보통 “사람이 물건이냐?” 정도였다. 그러나 농촌출신이나, 결혼하기 아주 힘든 조건의 사람의 경우 그것이 차선의 수단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여기서 필리핀 등에서 온 이른바 ‘팔려온 신부’들을 피해자로 할 경우, 그들의 상대, 즉, 우리나라 사람은 무조건 가해자라 볼 수 있을까, 그들을 알선하는 중개업자들은? 막상 우리는 그것을 너무 먼 곳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 앞에 놓고 보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이 소설의 중심은 중국동포와 장가가려고 여행 간 한국 사람의 이야기다. (우리 아랫집에도 중국동포가 살고 있다.) 이 소설의 작중인물은 모두 서커스와 그렇게 관련이 많은 사람들 같지는 않다. 제일 위험하고 피해자로 짐작되는 인물은 ‘해화’이다. 그는 이국땅으로 ‘돈’ 때문에 팔려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하고 못할 일을 한다. 해화는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발해의 무덤을 보며 그곳에 대해 끌림을 느낀다. 이 무덤을 통해 작가는 해화의 심리를 설명하는데 쓰고 있다.


‘정효공주는 발해의 제3대왕 대흠무의 넷째딸로서…… 벽화인물 형상은 분을 바른 얼굴에 입술은 붉고 낯은 둥글며 머리에 복두를 쓰고 발에는 삼신을 신었는데 짙은 당조 시기의 회화 풍격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붉은 입술의 여인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러나 붉은 기운만 떠오를 뿐 명확히 잡히는 것은 없었다.(35P)

붉은 입술, 그것은 그녀가 시집갈 때의 이야기다. 붉은 기운이 떠오르는 것은 그의 막연한 기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이 무덤의 이미지는 몇 번씩 변화를 거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형수 될 사람, 그 서커스 하던 여자랑 닮은 것 같아. 작고 예쁘고,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18P)


이것은 단지 인물의 외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여자는 서커스(이른바 희생)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에 적합하게 생겼다. 즉, 형을 만족시킬만한 외양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외양은 위험한 흉기다. 장미의 가시는 날카로운 법이다. (시에서 보면, 묘사는 단지 묘사는 아니다. 거기에서 말하는 바가 따로 있으며, 앞으로 나가는 바를 말하기도 한다. ‘소나기’의 외양묘사가 그들의 앞날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듯.) 해화만 해도 그런데 나머지는 얼마나 복잡한 관계를 말하고 있을까, 형도 서커스를 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제일 큰 피해자가 바로 형이다. 해화는 그에 비하면 가해자 같기도 하다. 주민증 하나만 받으면 도망칠 수도 있다.(다만 그렇진 않은 것 같다) 나의 대화는 그녀의 외양을 통해 복선을 말해주고 있다.


형이 착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람들 즐겁게 해줄 생각도 하지 말고, 바보처럼 당하지도 말고, 속 썩이지도 말고, 내가 언제까지나 형을 보살필 수는 없어. 그래, 정말 선녀 같잖아. 날개옷 같은 건 태워버려. 도망가지 못하게.(18P)


이렇게 독하게 사는 것이다. 악랄하고 우악하게 살면 그런 우스꽝스러운 일을 하지않아도 된다. 그런 반면에 있는 것이 바로 해화이다. 물론 잠시동안은 그에게 이른바 ‘서커스’를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기억나지 않게 되었고, 자신마저 잊어야 했기 때문이다.


부쩍 숱이 적어진 듯한 머리칼. 이것은 내 얼굴이 아니다. 내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넌 누구지?

나는 거울 속에 대고 물었다. 거울 속 낯선 여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물끄러미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중략)……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따뜻했다. 내 몸은 피가 흐르고 숨을 쉬는 육체였다. 묶이고 갇혀야 할 고깃덩어리가 아니었다.……(중략)……

나는 다시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거울 속 얼굴을 바라보며 이름을 불렀다.

“해화야!”

내 이름은 해화야. 림, 해, 화. 나는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119P)


여자로서 일생을 바쳐야 하는 나(해화), 그리고 형의 동생 나(해화가 아닌― 이 작품은 해화(1인칭 주인공)와 나(1인칭 관찰자)의 이중 시점이다.). 나는 남자로서 따이공의 생활을 배운다. 그의 길잡이인 상원은 이렇게 말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밟히기 전에 밟아야 한데이. 밟히기 전에……”(132P)


이것도 역시 서커스의 법칙이다. 서커스를 하지 않으려면 그 전에 서커스를 시켜야 한다. 그렇게 사는 인생은 엄청나게 지친다. 이것은 또 다른 서커스를 요구한다.


상원의 뒷모습을 보니 따이공들이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배에 오르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배에서 내리면 왜들 그렇게 불안해하는지, 잔뜩 허기진 얼굴로 여자에게로 술집으로 안마방으로 달려가는지…… (151P)


배는 잠시 도피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피하지 않으면 결국은 여자에게로 떠나간다. 그들은 그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밀무역을 해야 한다. 이것 역시 하나의 희극이다.


그들은 더 많고 더 위험한 짐을 지면서 자유를 완성했다. 무게제한을 넘기고, 금지물품을 숨기는 것. 그것은 강도를 높여야만 효과를 얻는 약물처럼, 수위를 높여야만 얻을 수 있는것이었다. 강도를 더할수록 불안과 위험이 높아지고, 불안과 위험만큼의 자유를 얻었다. (151P)

  

형은 동생에 이어, 잠시 동안의 아내에게도 서커스를 하게 되는 제일 처참한 인물이다. 동생에게 보여주는 서커스는 자기 목숨이라고는 아랑곳도 않는다.


형은 새처럼 날아올랐다. 비상은 잠시였다. 형은 땅바닥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그것은 형이 보여준 최고의 서커스였다. 혀를 빼물고 전선에 휘감긴 채 누운 형은 우스꽝스러웠다. 나는 그것이 형이 꾸민 묘기인 줄만 알고 폴짝폴짝 뛰며 즐거워했다.

목숨을 건진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형은 목숨을 건진 대신 목소리를 잃었다. 형은 목소리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나쁜 생각을 목소리와 함께 버린 것 같았다.(46P)


원래 그에게 목소리(자기를 위한 행동)가 있었는가? 목소리가 있었다면 서커스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목소리는 그에게 원래 없었다. 이미 그는 서커스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는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원인이 결과를 만든 것이다. 이미 내적으로는 그것이 완성되어있던 것이다. 다만 없어진 목소리의 결과로 그가 그렇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해화에게 강요되고 있었다.


나그네 손에 들린 검은 전선. 나는 아연하여 검은 전선만 바라보았다. 나그네는 내 손목에 전선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전선을 너무 세게 당겨 손목이 욱신거렸다. 나그네는 제 손목과 내 손목을 단단히 묶고 뒤로 벌렁 누웠다. 나는 전선에 손을 얽매인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113~114P)


‘전선’이라는 물건은 이 소설 전체에서 괴로움의 상징으로 쓰인다. 동생을 기뻐하게 하기 위해 쓰였던 이 전선은 다시 해화를 속박하는 도구가 된다. 형의 불안감도 한 몫을 했겠지만, 이 전선은 해화에게 무거운 짐으로 쓰이게 된다. 지금까지의 해화가 자유로운 해화였다면, 이것은 무거운 짐을 지고 서커스를 하고 있었던, 그의 삶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말하는 걸게다.

나(남자)는 우연히 발해왕조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여기서 무덤의 이야기를 듣는다.


“정효공주 무덤 말임까?”

“누군지는 모르겠고, 암튼 무덤이었어요. 뭐 조잡하게 그림도 그려놓고 관도 만들어놓고 그랬는데, 그다지 대단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모형일 뿐이었어요. 플라스틱으로 만든. 박물관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습니까, 엉성한 밀납인형에 옷이나 입혀놓고.”(158P)

그래요, 중국이 아니었죠. 그런데 말예요. 거기 벽화는 말예요. 아무리 봐도 고구려 사람들 같지가 않아요. 당나라 옷을 입고 당나라 머리를 하고 있거든요. 난 아직 확신할 수가 없어요. 발해에 대해서.”(159P)


이 무덤은 모형이 있다는 것이다. 해화는 눈 앞에 팻말을 보고 막연한 상상을 하고 떠오르는 것을 남기지만, 남자들이 들여다보고 온 것은 별것 아닌, 구색을 갖추기 위한 모형일 뿐이다. 남자들의 여자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정체성을 도저히 알 수 없는 인간. 형체도 없고 제대로 된 것이라고는 없는 것 같은, 안개 같은. 하지만 여자는 생각이 약간 다르다. 237페이지의 서술을 보노라면 무덤에 대한 그녀의 상상은 너무나 기대에 차있다.

그러나 하혈을 하는 장면에서 그녀는 자신이 이룬 것 하나 없다는 자괴감에 빠진다. 자신이 품은 욕심은 많았으나 욕심은 이루지 못했던, 남자의 아픔이 자신에게 전가되는 것을 참고 집에라도 남아있었으면 주민등록증이나마 받아 챙겼을 것을, 그러지도 못하고 여관 일을 하다 내쫓기고 제대로 한 것도 없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삶에 대한 한탄이 형상화된다.


그것은 어쩌면 내 속에서 잠시 살다 간 나그네의 분신인줄도 몰랐다. 아니면 한국에서의 행복한 생활을 꿈꾸었던 나의 다른 모습인지도 몰랐다. 정신이 혼몽해져갔다.(195P)

당금 사라진 그 붉은 피는 아무것도 아니다. 차올랐다가 이지러지는 달 같은 것이다. 아무 생명도 품지 못해 제 몸을 허무는 쓸모없는 핏덩이에 불과하다. 나는 욕실에서 이불 위로 기어가며 끊임없이 되뇌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195P)

  

그녀에게 삶에 대한 욕심은 모두 떠내려간다. 작가는 속박을 긍정하지 않는다. 여자가 만난 여자는 “생식력까지 통제당하는 국가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다.”(230P)고 했을까. 그러나 여자에겐, 아니 사람에겐 회귀본능이 있다.


“그래도 말이다. 죽을 때가 되면 나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당이고 민족이고 조국이고가 다 뭐냐. 나고 자란 곳이 고향 아니겠니.”(230P)


힘들게 살아도 생은 생이다. 회귀본능, 남자의 형은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속박할 그 여자를 찾아 헤맨다. 그렇게 가다가 바다의 안개가 나와 형을 덮는다. 작가는 이런 서커스에 대해서 모든 것을 “덮음”으로 말한다. 모두가 제자리에 오게 되는 것이다. 안개 같은 그녀는 안개 속에서 재회하게 될 것이다.


형은 두 팔을 뻗고 전사처럼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어쩌면 형은 저 속에서 여자를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저 멀리 뗏목을 탄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아주 먼 바다로 항해를 떠나고 있는 중이리라. 나는 모두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잘 가라, 어디든지, 잘 가라.(248P)


이제 보니, 「바다와 나비」와 비슷한 소재이다. 『잘가라, 서커스』는 삶의 슬픔과 죽음에 이르는 기록이다. 사실 첫 부분의 내용이 이 ‘서커스’라는 것의 비유적 의미에 초점을 맞춰보면 이 제목이 말하는 바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란 것을 한 개의 이야기로 가볍게 보지 않아야 한다. 그렇기 위해, 나는 김연수 소설가가 말했듯, “목숨을 걸고”읽기 위해 노력해보고자 한다. (물론 빠르고 깊게 읽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보는 소설의 정의를 모두 적는다.

“소설은 한 주제와 한 사상을 그려내기 위해 어떤 사상을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 펼쳐놓고 연결고리 하나를 놓은 다음 끝까지 반복되는 일관되게 깔려있는 주제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를 가지고 돌지 않는다. 보통 사랑이라는 개념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무척 힘들다. 잠언식의 짧은 말 한 마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말이 필요하거나 거의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역시 생각이 무척 많던가, 거의 없던가, 그것도 아니면 불변의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누가 증명하겠는가? 그것을 길게 늘여, 아니, 독자들이 보는 현실로 만들어 와 닿게 증명하는 사람이 소설가다. 철학자가 이론을 아무리 써놓아도, 실생활에서 증명하지 못하면 공론(空論)이 되는 것이다. 이래서 작가가 화자를 통해 어떤 말을 한 다음에는 보통 작중 인물을 통해 화자의 말을 증명한다. 예를 들어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이다’라는 주제를 가진 소설이라면 그 뒤에 따라붙는 여러 말이 있다. 작품의 내용을 통해 단지 한 질문만 던지고 끝난다면, 그것이 세상에 충격파를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면 깊이 있는 서술이라고 보기는 조금 힘들 것이다. 시인은 모든 말을 직선적으로 툭 던지지 않는다. 비슷한 말을 한 후, 주제라는 문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선다. 그런 후, 문을 열기 위해 문이 어떤 문인지를 파악한다. (왜 시인일까? 요즘 소설은 詩적이기 때문이다.) 그 뒤에 뭐가 있을까를 짐작하고, 문을 열기 위해 노력한다. 그 다음에 조금씩 문을 연다. 그러나 활짝 여는 경우는 드물다. 요즘 소설은 이렇게 조심스럽다.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고 본다. 덤으로 붙여서, 배경묘사 역시 식사(소설)에서의 반찬이다. 밥이 아무리 좋아도 반찬이 안 좋으면 그것이 밥맛을 망친다. 배경묘사를 시시껄렁하게 볼 수는 없다. (사실 나는 왜 주제를 눈에 띄게 그렇게 배경까지 꽃단장을 해놓는 것일까, 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한마디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줄거리를 알면 다 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소설은   한 문장을 읽고 느끼는 것이지 줄거리를 좔좔 왼다고 장땡이 아니라고, 그 곳에서 해화와 형과 나를 만났으면 되었다고, 나와 비슷한 그를 발견하고 공감하면 되었다고, 다만, 그의 슬픔에 갇혀있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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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자서전
김인숙 지음 / 창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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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킬박사와 하이드」를 기억하는가? 서태지의 3집 Rock 노래. 그 당시에는 엄청 생소했다던, 처음에는 별 신경 안 쓰고 듣지도 않다가 요즘에야 대략의 의미를 알아챘다. 그는 분명 이렇게 말한다, “내 마음을 철저하게 숨기고 살아온 내 인생에/가슴깊이 존재했던 불만이 있어” 이 작품집 곳곳에는 도대체 어떤 마음을 숨기고 살아왔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Come Back Home」에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이 소설집에는 그 불만에 대한 형상화가 있다.


끝없는 내 마음의 갈증은 ― 문제의 시작

내 인생이 창창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행복한 꿈을 꾸고, 출세해서 결혼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낙을 끊임없이 채우면서, 하루만 지나, 자고 깨어나 열리는 하루가 기대로 가득차서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의 행복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듯 하루가 그렇게 설레일 때도 물론 있다. 「그 여자의 자서전」의 화자는 많은 기대를 하고 살아왔던 사람이다.


그때부터 이미 작가가 되고 싶었고, 내 책이 언젠가 아버지의 책장에 꽂히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16P)


그러나 이 기대는 여지없이 현실에서 어긋나고 있었다. 어느 국회의원의 “가짜” 자서전을 대필해주는 그녀는 더 이상 그녀 자신을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은 돈에 대해서는 철저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던 아버지와도 일치한다.


그는 자식들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고, 그렇게 되기 위해 평생 스스로 당신 자신을 속였다.(25P)

―아버지가 너희들한테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들도 이 안에는 있단 말이다.(34P)

                                              ― 이상「그 여자의 자서전」에서


이 세상의 어떤 부모님께서 거짓말 잘해야 산다. 세상엔 돈이 짱이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악착같이 살라고 자식들에게 가르치시는가? 안 그런 사람들도 약간 있지만,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대강 이렇게 말한다. 착하게 살아야한다, 성실하게 살면 언제든지 성공하게 되어있다, 노력해야 한다, 가끔은 인정도 베풀어야… 그러나 이렇게 손해보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 드물다. 대부분은? 가끔은 질서도 어기고, 거짓말도 하고, 돈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이 소설엔 넘쳐난다. 이 세상을 사는 모범은 따로 있는데 정작 세상 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추월을 당하고 나면 추월을 하고 싶은 심리, 나만 느리게 가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되는 거 말이다.

아무리 샘플자료를 가지고 자서전을 대필해준다고는 하나, 그 속에 내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볼품없는 고양이를 통해 자서전을 쓰고 있는 주인공이 그 속에 자신을 넣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참 기막힌 일이다. 그 조작한 자서전, 아니, 소설에 이호갑의 고통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이런 소극은 아버지와 나, 그리고 오빠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호갑 그 자신도 고통이 있었다고 호소한다. 이런 고통은 이 소설집 안에 가득하다. 이 소설집이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이 소설이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의 고통을 성찰하고 있다는 데 있겠다. 이 소설이 그런 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 소설의 가치는 그다지 높지 않을 것이다. 



난 언제라도 꿈틀거릴 내 본성이 두려웠어 ― 인간의 본능

중국어로 하오펑여우는 정말로 친한 친구일 때가 아니면 쓰지 않는 말이라고, 화선은 말했었다. 화선은 그를 끌어안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 하오펑여우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샤오친은 그의 고객이기만 하면 누구든지 하오펑여우였다. 항상 돈이 두둑한 지갑을 갖고 있는 한국인 고객이라면 샤오친의 하오펑여우가 아닐 수 있는 방법은 없는 셈이었다.(113P)


인간에게는 이런 심리가 있기는 있는 걸까? 순간 나도 많이 속아오긴 했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을 아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까진 거의 없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깔고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니다, 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언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끼는, 혹은 지치면, 위험한 때가 되면 인간의 악한 본성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정신대와 731부대다.


규상은 이제까지 세 번쯤 여행객들과 함께 731부대를 관람했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제대로 보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처음 볼 때의 충격과 고통과 역겨움은 사라졌지만,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그대로 남았다. 살아 있음에 대한 냉소와 환멸, 그런 말을 했던 건 화선이었을 것이다. 그는 화선과 함께 처음으로 731부대를 관람했었다.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악해질 수 있고, 그 악에 대해 무감각해질 수 있을까.(117P)

사랑은, 연민은, 아픔은…… 살인은, 폭행은, 강간은…… 전부 사람이 하는 일이지.(117P)

                                                      ―「감옥의 뜰」에서


인간에게 이런 것이 원래 인간에게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나타나는 게 아닐까,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살면 살수록 인간이 끊임없이 더러워져 왔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라도 자신을 속이고 살아야 하는데 - 속이는 또는 속고 있는 인간

무슨 전화야? 당신 또 빵집 전화 착신해놨구나. 그렇지 말라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여자의 목소리. 생일케이크를 주문해놓고 안 찾아간 사람이 있어서요. 이름까지 새겨놨는데…… 근데 여보, 웃기지? 생일케이크 이름이 내 이름하고 똑같은 거 있지? 안 찾아가면 내 생일케이크로 써야겠어. 가만있자, 당신 생일이 며칠이더라? 당신, 내 생일도 잊었어요? 혹시 내 이름은 기억해요? 당신, 내 이름도 잊어버린 건 아니에요? (160P)


처음으로 나를 만족시키고 행복하게 할 수 있던 여자, 그러나 그녀는 문란한 성생활을 하는 여자였다. 빵집 여자에게 집요한 집착을 하는 나, 빵집 여자, 아니 빵집 여자였던 여자는 모르는 척 전화를 받는다. 그러나, 이 전화는 빵집 전화로 착신이 되어 있다. 본능적으로 나는 나의 정체를 속일 수가 없다. 빵집 여자로 일했던 사람은 빵집 여자였던거고, 한번 청소부 했으면 청소부였던 거다. 그런 적 없다, 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 순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작가는 알고 있다.


밤의 고속도로에서 나는 내 숨소리의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다. 내가 숨쉬고 있음을 잊는 것은, 극히 찰나의 순간 내가 정신을 놓았을 때 뿐이다. (137P)

                                                      ―「밤의 고속도로」에서


그 때가 나를 움직이는 것이다. 나를 움직이는 것 같지 않은 그 짧은 순간이,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별 시덥지 않은 순간으로 여긴다. 고속도로에서 한번 삐끗하면 죽음이다. 자살하려고 마음먹지 않은 바에야, 그런 상황에서 마음먹고 조는 사람이 있을까? 시간을 너무 아쉽지 않게 여긴다. 시간을 가장 아쉽게 여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라는 것을 자각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죽음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다만 세상의 어느 알 수 없는 곳에 속해 있는 사람이었다. ……(중략)…… 아버지는 늘 어딘가를 떠돌고, 늘 어떤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다. 그것이 어머니가 생각하는 아버지 죽음의 전부인 것 같았다.(174P)

                                                      ―「짧은 여행」에서

 

죽음이 그렇게 와닿지 않는다. 도대체 왜? 인간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고 있다는 것을 안 후에도 인간은 붙잡힌다. 왜? 속이는 사람도 속고 있고, 속는 사람도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돈을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그 돈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흔히들 하는 말로, “가진 돈 싸갖고 저 세상갈래?”라고 하지 않는가? 물론, 지금이야 먹고 살기 위해 약간은 갖고 살아야 하겠지만. 소유욕이라는 게 대부분 부질없는 거 아니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는 인간들은 아직도 무언가를 갖기 위해 뛰고 있다.


그는 자식들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고, 그렇게 되기 위해 평생 스스로 당신 자신을 속였다.

              ―「그 여자의 자서전」에서 (25P)


그렇게 속고 속이고, 상처입히고, 상처받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가? 그렇다면 이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생에 대한 이 욕망은 간절하게 남아있나 ― 이 생 속의 순환


오래간만에 들었지만, 「재킬박사와 하이드」 속에서 “생은 마약이다” 라는 비유를 떠올리고 난 후, 이 가수에 대해서 내심 여러 번 감탄했다. 이 소설에서도 역시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아픔에 대해서만 말하고 정작 그 어둠속에 갇혀 있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정말 간절하게 필요하다. 「짧은 여행」과「빨간 풍선」에서는 사랑과 관련되어 생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몸은 올라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내려가기를 또한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려갈 때는 계단이 아니라 허공이었다. 몸은 내게 ‘비상(飛上)’을 꼬드겼지만, 나는 절대로 속지 않았다. 실업자인 여자가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건물의 옥상에서 뛰어내린다면 그것은 비상이 아니라, 의심할 여지없이 추락이었다. 그랬음에도 나는 때때로 속고 싶었다. 물론 오래 전의 얘기다. (241P)

                                                      ―「빨간 풍선」에서


「빨간 풍선」의 여자는 전업 히트 CF, 그러나 기억하는 사람 하나 없는 성우이다. 이 소설의 ‘나’의 직업들은 묘한 상징성을 가진다. 성우 바깥에는 대부분 연예인이나, 만화, 즉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 등장한다. 그것들의 모양에 나를 맞춰나가야 하며, 어긋나면 어색한 연기로 즉시 퇴출되는, 철저하게 나를 속여야 하는 것의 전형이다. 그러나, 그녀는 냉장고CF 하나만 성공한 후, 나를 속이는 것에 실패한다. 그가 성공하는 이유인 대사, 즉, “나도 갖고 싶어요.”는 상징성이 매우 많다. 왜 “도”일까, “는”이 아니고? 이것은 인간의 보편적 욕구를 말한다. “갖고 싶어요.” 역시 인간의 보편적 욕구일 뿐이고, 이렇게 따지고 보면 그녀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나만 할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남도 할 수 있는 말을 좀 더 잘해서 남의 공감을 사는 것, 그것 하나였던 것이다. 그래가지고 어디 성공하겠나? 말하자면, 이 소설에서의 나는 아주 모범적으로 살려고 했던, 이전의 소설들이 전부 평범하지 않고, 약간씩 나를 속이는 밉살스럽고, 때로는 불쌍한 사람이었다면, 이 소설의 나는 “평범한 나”이다. 그런 결과로 ‘나’는 성우자리에서 쫓겨나 베이비시터로 간다. 표면적으로 볼 때, 베이비시터는 사랑이 많이 필요한 직업이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마음에 안 들면 막 패주고, 괴롭히는 일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되는데, 그렇게 사건을 내서 사람들의 불신(不信)을 샀다. 보일 때만 사랑하고, 보이지 않으면 장난감으로 전락시키는 사람들의 최악의 본능이다. 이것이야말로 신망을 잃은 “사랑”의 아픔이다. 이것이 ‘연애’에서 변용되어 사용되면, 사랑은 그야말로 환멸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 지금의 “사랑”이다. 드러나는 몇 마디 말이, 혹은 스킨쉽이 사랑과 이퀄이라고 믿는 것은, 사랑이 겉으로 드러내기만 하고 뒷감당이 안 되는 가짜 사랑이다. 커플이 그렇게 잘 생기고, 잘 깨지고 이혼이 늘어나는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작품집의 소설은 무척 좋다. 그러나 이 작품집이 다소 아쉬움을 남기는 것은 이 생에 대한 해결책이 부족하다는데 있다. 정말 없을까….


「짧은 여행」에서 이 생이 너무 길면 다른 괴로움이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체념하는 것도……

“늙지도 않고 시들지도 않고, 낙엽도 안 만들면서 천년을 산다면, 에그, 징그럽기도 하지.”(184P) 「짧은 여행」중


「그 여자의 자서전」에서 이호갑이 “나도 정말 힘들게 살아왔소.” 라고 말하는 대목, 나는 다소 아쉬웠다. 주제를 말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항목이긴 하지만, 다소 싱거운 끝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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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이 책을 왜 샀을까? 별로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아니면 그림체가 마음에 들어서일까? 사실, 처음 살 때는 오로지 마케팅의 승리였다. 문체가 내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고전 얘기를 많이 하는 것을 보니 갑갑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풍에 가보니 이런 문구가 하나 눈에 띄지 않는가. “밀도 높은 문체”, 우리 선생님께서, 시의 첫 줄은 삐끼라고, 그러셨다. 내가 그 삐끼에 끌려들어간 꼴이다. (밀도 얘기를 처음하신 분은 다른 시 선생님이셨다) 그냥 몇 장 읽어보고 시켰다. 그러나 잘 끌리질 않았다.

그래서 당분간은 그냥 어디 있는지 모르게 놓아두었다. 『웬즈데이』와 『800』등등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리뷰를 쓸 만한 적절한 꺼리, 즉 화제가 생기질 않았었던 것 같다. 웬즈데이는 처음의 와일드한 느낌이 그냥 식는 게, 조금씩 질리는 게 싫어서 중간에 멈추었던 반면, 800은 시적인 느낌은 좋았지만 중심소재가 뭔지 모르겠다는, 다 읽긴 했지만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소리를 하게 만드는 그런 작품이었다. 내가 너무 눈을 이상한 데 뒀나?

그래서 결국 같이 샀던 『그 여자의 자서전』과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찾게 되었다. 내가 보고 배울 것은 역시 그 곳에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찾으려고 하니까 또 쉽게 나오지 않았다. 평소에 놔두던 책장 옆의 책 쌓아놓는 곳은 열심히 뒤졌다. 결국은 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가장 찾기 어려웠던 컴퓨터 아래 있었다. 결국 나의 문학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데 못 찾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 책을 내 나름대로 읽다보니, 아주 놀라웠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화제와 대략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이 책 속의 소설들은 ‘반소설’적이다. 이런 얘기를 들어봤자 무엇하느냐는 식이다.


그게 바로 지금 자네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이 아닌가? 그런 책 따위는 다 던져버리게나. 내 손보다도 못한 그 따위 책일랑은.(70P)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내가 전쟁에 나가기 싫어서 스스로 이 손가락을 잘랐다고 생각하나? 좋을 대로 생각하게나. 이런 얘기는 소설에 써먹을 수 있겠지(73P)「이상 뿌넝숴(不能說) 中」

댁에는 쓰레기통이 없나요? 다 찼습니다. 워낙 쓰레기 같은 원고가 많아서. 어쨌든 지금은 쓰레기통을 다 비웠으니까 돌려주십시오. 자, 들어보세요. (130P)「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中」

그렇지만 히스테리에 관해서 이런 얘기는 있어. 히스테리성의 소질을 가진 사람과 공상 잘하고 감정의 변화가 많은 사람은 말이네, 될 수 있는 대로 정신의 과로를 피하고 감정이 흥분될 소설이나 연극을 보지 않아야만 한다는 거지.”

“지금 내 얘기 하는 건가?”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거지. 히스테리, 조심하게나.(214P)(연애인 것을 깨닫자 마자 中)


이전에 ‘북새통’이라는 무료배포 되는 책을 읽어보니 이렇게 쓸 데 없는 소설을 쓴다는 그는 도리어 “소설은 목숨을 걸고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뭔가 앞뒤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역설은 완전 꽝 아니면 뭔가 많은 생각이 있는 것이다, 싶어서 구미가 당겼다. 그래서 나는 목숨을 걸기까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이해될 때까지 읽었다. 그냥 쓴 이야기 같은 이 이야기들이 내 시각으로 읽으니 전혀 단순하지가 않다. 나는 이 소설들이 관통하고 있는 비유와 그 의미를 대략 이렇게 봤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이 많다. 머리가 아프다….


1, 농담 같은 인생, 그리고 사랑(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2, 주석의 하찮음, 혹은 내 주관의 덧없음. (다시 한달을 가서…, 남원고사에 관한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

3, 체험의 중요성(뿌넝숴,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4, 이 세상을 움직였던 우연(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

5, 상상이 지배하는 인생(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거짓된 마음의 역사, 다시 한달을 가서…)

6, 인생의 통찰(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당연히, 모두 합치면 1+2+3+4+5=6이 되겠지만.

사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봤던 소설은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하 설산)」이다. 산에는 사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산은 “여러 가지 고비”등의 뜻으로 쓰인다. 산에는 많은 고사가 있다. “믿음만 있다면 너희가 산을 옮기리라(성경)”, ‘우공이산(愚公移山)’등등, 그렇다면 내가 읽은 고비란 무엇인가? 인생, 그 자체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 부문에서 그것을 시사하고 있다.

「설산」은 자기의 난관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리 알려지지도 않았고, 가장 험하기로 소문난 산을 오기로 넘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에베레스트는 이미 누군가 그 투자를 따내서 더 이상 가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낭가파르바트’라고 불리는 이 산은 에베레스트보다는 낮지만 험하기는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악명이 높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넘기란 힘들고, 남은 투자금은 많지 않다. 이것을 실패하면 더 이상 투자금을 기대하기는 힘든 형편이다. 그러나 환경이 받쳐주지 않는다. 주변 환경은 험악하고 고소 증세(이른바 산지대의 잠수병: 산의 높이에 따른 환경변화에 적응을 못함)때문에 계속 왔다갔다만 하고 있는 형편이다.


내가 이 “산”을 진짜 인생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탐구로 본 이유는 이렇다. 대부분의 종교는 “산”이 나오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절도 “산”에 있으며, 기독교 성인인 “예수님과 모세”는 산에서 ‘내려왔고(예수님은 산 위에서 가르치셨고, 모세는 산 위에서 법을 받아 내려왔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도 어떤 산 속 동굴에서 천사에게 진리를 전수받았다, 고 한다. “도가”도 남이 없는 곳, 역시 산에서 진리를 생각했겠고. 그래서 산은 ‘진리를 구하는 사람의 무대’이다. 그 속에서 행복을 찾으며 괴로워도 견디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이므로. 이들이야말로 “진리탐구자”의 모습을 닮아 있는 것이다. 물론 ‘죽음 앞의 두려움’을 가진 대원들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들에게 투자비가 떨어져간다. 재산은 무엇인가? Quality가 있는 메마르지 않은 人生이다. 그들에게 그것이 없다면 인생은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상징이 자살한 ‘여자친구’다. 그녀가 자살하기 전에 줄을 쳤던 혜초의 책 중 이 부분은 “여자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상징성을 지니는 것으로 보여진다.


“풍속이 지극히 고약해서 혼인을 막 뒤섞어서 하는바, 어머니나 자매를 아내로 삼기까지 한다, 파사국에서도 어머니를 아내로 삼는다.(128P)


이 문장을 딱 보자면 엄청나게 타락한 세계를 말하고 있다. 사람은 여러가지가 있다. 인생의 참 의미를 알고 제대로 알아가는 사람, 아니면 인생의 참 의미를 모르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 인생의 참 의미를 알았으나 그것을 실천할 수 없는 사람, 인생의 참 의미를 모르고, 그것을 찾을 생각도 없는 사람, 자기 인생이 참이라 믿지만 제일 큰 함정은 자기 자신인 사람…. 요즘 참 말세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세상이 참 끔찍하다. 그런 일은 매일 보도되는데도 지금은 전율보다는, 그래, 그런가보다. 식으로 듣는다. 지금보다 몇 십 배 끔찍한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사람들은 놀랄 것이다. 유신이나 전, 노통 시대가 낫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지만, 성적인 타락과 인간관계의 삭막함과 광기는 누구도 아니다 할 수 없는 진실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10여 년 전만 해도 드라마에서 상스러운 욕과 섹시 컨셉은 꿈도 못 꿀 이야기였다. 텔레비전 심의위원회의 커트라인은 무척 단호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지난 10여 년 동안의 변화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성적 타락은 인간관계의 사랑이 식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모든 사람이 생각하듯, 성관계 자체는 사랑이 아니고 최대의 사랑이 전제가 된 사랑이어야 되는데, 욕심이 그것을 거꾸로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가분수가 되어버렸다. 똑바로 서 있을 수 없고, 너무 무거운 몸이라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그것은 인간의 만족을 모르는 끝없는 갈증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인간은 더 높은 곳에 올라가기를 원한다. 돈에 물들어, 인간은 끝없는 욕심 때문에 만족이 되지 않는다. 이 소설에 나오는 등반대의 대장과 죽어버린 여자 친구는 그것을 말 하는 것 같다.


“없었습니다”라는 존칭에서 “후회는 없어”라는 비칭 사이의 거대한 틈 때문이었다. 그는 이 거대한 틈 사이에 많은 의미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없었습니다”까지 쓰고 그 다음에 “후회는 없어”라고 쓰기까지 여자친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자신의 죽음에 대해 그에게 설명하고 있었을까? (143P)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中」


후회가 없다고 했다. 용기 있게 사는 것보다, 죽는 쪽이 편하다, 라고 한다. 죽을 용기는 없는데, 살 용기는 더더욱 없다? 그 앞 본문에 의하면 이렇게 힘들고 지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와 있었다. 내가 만들고 싶은 세상은 있었지만, 욕심에 지쳐버린 것이다. 그러나 진정할 방법이 없다, 아니 없는 것 같다. 이것을 치료할 최고의 약은, 사랑이다. 그냥 사랑이 아니고, 진정한 사랑. 그러나 근 100년 동안에도 그것은 쉽지 않았나보다. 이 사랑은 이 소설 곳곳에서 멍들어있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은 이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지금은 만신창이다. 그러나 옛날까지도 이렇지는 않았다. 이 구절을 보면 말이다. 그들의 과거를 짐작케 해준다.


그리고 며칠 동안, 나는 그녀가 꿨다던 꿈에 대해서 생각했다. 같이 살던 시절에도 그녀는 꿈을 꾸면 늘 내게 얘기했다. 꿈을 얘기할 때, 그녀의 눈빛은 때로 기대에 부풀기도 하고 때로 불안해하기도 했다. 나는 꿈 따위는 조간신문을 들여다보는 순간 다 잊어버리는 종류의 사람이었다.(14P)


‘옛날에’ 같이 있었던 아내는 기대와 불안 두 가지가 공존하는 꿈이다. 아직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희망을 갖고 그것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지극히 현대적인 인간형인 ‘나’는 조간신문, 눈앞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순간 다 잊어버린다. 이것은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울어버린 곳은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지도를 들여다봤지만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나는 생각했다. 이 행로에도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 대답을 구하기 위해 지도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나는 그다지 논리적이랄 수 없는 결론에 이르렀다. (16P)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의 행로 한가운데 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는 사실. 나는 장마 내내 선을 그어놓은 지도를 벽에 붙여놓고 틈날 때마다 들여다 봤다. “저게 도대체 다 뭐야?” “나도 잘 몰라서 바라보는 중이야.”(16P)


나도 잘 알 수 없는 것, 그들은 나무를 좇고 있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진다고 이렇게 머리를 썩일까?


나도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한번 버텨보기로 했으니까. 육백살이 넘은 천연기념물과 이제 고작 서른네살이 된 따분한 인간, 둘 중 누구의 농담이 더 웃긴가 따져보기로 했으니까.(28P) 이상「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中」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재밌지 않은 농담, 혹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람”이다. 여기서 ‘말’은 나무나 인간이나 그들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분출하던 것을 뜻한다. ‘농담’은 그들을 웃기던 것이다. 즉, 우리가 행복하게 살 이유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괴로워하지 않으면서 살 수는 없지만, 괴로워하려고 살지는 않잖은가? 그래서, 여기서 이 “농담”은 삶의 이유이자, 행복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인식한 순간 농담 정도가 되어버렸다. 서로서로 남에게 소중한 것을 무시한다. 나는 아내의 꿈을 무시하고 아내는 나의 혼잣말을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긴다.

「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에서도 역시 사랑은 정상적인 사랑으로 쓰이지 않는다. 무엇의 수단이 된 것이 사랑이다. 작가는 이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개념적으로만 알고 있으면서 실천하지 않는 사랑이 최대의 병이다.


아아, 이제야 깨달았도다. 쿠리야가와가 관동대지진으로 죽으면서 사회를 개조할 수 있는 연애 역시 죽었다는 사실을. 각급 학교의 학도들이 아침마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듯이 그저 나도 쿠리야가와를, 콜론타이를 외웠다는 것을. 자유연애가, 그리고 그 부산물인 화류병이 아니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이 신념 자체가 바로 박래품이라는 것을.(225P)


돌아선 내 등뒤로 이 친구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이거 과연 끝나기는 할 전쟁인가?”

이 친구, 어쩐지 쉽게 돌아갈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렇게 비를 많이 맞았는데도. 아주 골치아프게 됐다. (226P) 이상「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 中」


전쟁을 빈정거렸지만, 이것 역시도 마찬가지의 이야기라는 생각이다. 전까지 했던 이야기는 사랑에 대한 논쟁이었지, 전쟁에 대한 논쟁은 아니었다. ‘전쟁’이라는 당시의 화두를 사랑에 맞추어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것 역시 다른 비유적 의미로 “넘지 못한 산”으로 여겨진다. 역시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에서도 그렇게 이용하는, 혹은 이용당하는 여자 하나가 그의 운명을 바꿔놓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거짓된 마음의 역사」에서는 조선의 평양을 완전 황금도시로 말하는 중국인들에 대해서 볼 수 있다. 미국인들 역시 그런 상상을 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소설을 비롯해 이 소설집에 나오는 소설들 중 몇 편 중 말반에서는 정말 이럴까요? 하고 뒤집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게 뭐란 말인가? 라는 의구심(내지 허탈감)을 불러일으킨다. 「뿌넝숴」에서 이것을 말했듯, 소설을 정말 믿지 않는 것이 좋다고, 믿을 건 정말 현장의 느낌 말고는 없다고, 그러나, 정말 그런가? 작가는 정말 그런 것을 말하고 있을까?


확실한 것은 없었다. 『왕오천축국전』의 원문을 상상하면서 주석을 다는 나나 내 일상을 상상하면서 괴로워하는 그나 서로 목숨을 의지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짐작만 할 뿐인 원정대원들이 그런 점에서는 모두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그저 서로를 짐작할 뿐이었다.(143P)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中」

내게 보낸 편지에다가 그는 언젠가 그 축대를 기어올라간 적이 있었다고 썼다. 제가 워낙 높은 곳만 보면 올라가고 싶어하는 성격이어서, 그 축대 너머에는 뭐가 있는지 궁금하더군요. 평소에 갈고 닦은 실력이 있으니까 조그만 크랙과 홀드만 있다면 그 어떤 벽이라도 넘어갈 수 있답니다. 막상 올라가보니 힘이 빠지더군요.(150P)「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中」


그러나 이것은 짐작에서 멈춘다. 사랑이 단절되었기 때문에.「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은 꿈, 즉 사랑이 많이 식어버린 현실만 보는 그런 현실 속의 암울한 상상력만 풍선처럼 부푼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런 상상력은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당신은 우리를 알아보지 못할 거라”는「거짓된 마음의 역사」에서도 이야기한다. 어떻게 상상하든 진실은 다른 것이라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사이를 원래 그대로 틈으로 남겨두고 살아가는 일 뿐이었다. 결국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친구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를 생각했거나, 혹은 죽는 순간에도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 (143P)「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中」


이 문장을 읽을 때, 짐작, 즉 인간의 상상력 하나가 결과를 어떻게 바꿔놓았는가를 알 수 있다. 짐작과 사랑의 간극은 너무나 크다. 현실과 사랑은 다르다. 사랑이 현실을 감싸주지만 현실은 사랑이 감싸주는 그런 현실이 아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다가 지치면, 일견 정신차리고 콩깍지 씌인 사람이 제 시선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즉 ‘축대를 넘으면’ 그것은 너무 어이없기 짝이 없다.

 올라가려고 했지만 올라갈 수 없었던, 하지만 올라가면 별 볼 일 없는, 그런 사랑. 현대인은 그런 사랑을 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은 분명 있는데 그것이 없는 것 같다는 의심마저 든다. 축대를 넘으면 높은 산을 넘은 것에 비해 별 볼일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인간이 너무 별 볼일 없는 사랑을 한다고 하기 보단, 인간의 눈이 너무 높아져 있는 것은 아닐까? 분명 직관은 축대와는 비교도 안되는 설산을 빨리 넘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내 인생이 축대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선 나도 사람들을, 정말 상대하기싫은 사람들의 삶 마저도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진짜는 너무나 힘들다. 정작 되고 보면 별게 아닌 게 되는 인간의 욕심. 이 커트라인을 낮추는 것이 제일 먼저 병을 고치는 방법이 아닐까. 아직 내가 가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그래서 이 문단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라는 문장은 70행에서 71행에 걸쳐 있다. ‘우일월정과성산(又一月程過雪山).’ 그 다음에는 ‘동유일소국(東有一小國)’이 이어진다. 혜초는 자신이 가본 나라를 다룰 때는 예외없이 종(從), 행(行), 일(日), 지(至) 등의 글자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우종남천북행양월(又從南天北行兩月) 지서천국왕주성(至西天國王住城)’, 이런 식이다. 그러므로 ‘又一月程過雪山 東有一小國’이라고 말했을 때는 혜초가 실제로 가보지 않고 들은 얘기가 나온다는 뜻이다.(152P)「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中」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다 아는 것 같으면서도 “내가 저 사람을 다 안다”고 해서 상대를 막 대하지 않는다. 그 때는 이미 ‘축대’를 넘었다. 인간이 인생을 괴롭게 살지 않기 위해 넘어야 할 것은 ‘축대’가 아니라, 설산이다. 한파와 보이지 않는 크레바스가 사람의 한 걸음도  걸어가기 두렵게 만드는 “설산”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내 주관과 감정이 제멋대로 나를 지배하는 사람 아닌가? 그래서 나도 아직 “道를 아십니까?”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이것처럼, 나도 이 소설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도 없다. 어긋난 것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아는 것도 전부가 아니고, 나의 상상력 속에서 잘못 읽은 것도 있고, 더더우기 작가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어 놓았으므로. 즉, 이렇게 말했으므로.


이 세계는 상상하는 대로 구성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1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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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이 태어난 것은, 그저 괴로움을 당하기 위해서라고


세상의 사람들에게 괴롭히고 서로가 이용을 당하며


고생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후대의 사람을 위해 희생하다,


저 세상으로 멀찌감치 사라져가는 것이라고


얼마 전에 『라셀라스』를 읽었다. 그 안에서는 피라미드에 대한 소개가 잠시 있다. 피라미드가 견고한 것은 “위로 가늘어져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다. 피라미드의 모양만 보면, 그들의 모양은 수많은 희생을 기반으로 조금의 벽돌이 위에 있는 것이다. 지금의 사회의 모양임을 부인할 수 없다. 왜, 이 사회가 그런 모양을 띄게 되었는가? 위정자가 그런 악한 마음을 애초에 품어서? 유감이지만, 원래 나쁜 놈은 이 세상에는 없다. 속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죄는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윤수는 그런 억울한 형태의 죄인이다. 그는 나쁜 계부를 만나 괴롭힘을 당한다. 고아원과 소년원을 전전한다. 앵벌이도 하고,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은 딱 두 사람이 있었다. 동생 은수와 미용실 여자, 그러나 그의 사랑들은 멀리 멀리 떠나간다, 죽음으로, 그를 사랑했던 사람에게,


세상은 너무나 잔인했다, 가장 격하지만 가장 많은 노가다를 해도 하루 먹을 돈과 약간의 저축 외에는 벌 수 없는 사회, 그러나 전혀 쉴 틈을 주지 않는 사회. 결국 나의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회, 떼어주지 않는 사회, 매정한 사회. 나에게 가짜 사랑을 요구하는 사회, 돈을, 외모를 요구하는 사회. 두들겨 맞는 사람을 신고하고도 늦장 출동한 경찰이 되려 화를 내는 사회, 아니, 그렇게 죄짓는 일이 너무 많은 사회. 맞는 놈이 죄인이 되는 사회.


그는 마지막 인질극을 벌일 때, 불쌍하게 죽어가던 자신의 동생, 은수 같은 어린 아이를 본다. 그는 이미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은 Circle을 도는 것인가?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살아가려고 하는 의지는 사회에서는 범죄로 취급받고, 그들이 살아날 기회라고는 부정한 수단뿐, 그러나 윤수가 칼을 겨누고 있는 것은 다시 또 다른 “은수”이다. 자기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런 악몽 같은 세상에서 윤수는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차라리 깨어보면 이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이것은 꿈이 아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현실이고,


이 순간 보통의 실존소설은 ‘멍’ 해진다. 내가 이런 상황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그것이 인간의 마지막 상황에서의 탈출구다, 그러나 공상 속의 세계는 현실의 나를 OFF시킬 수 없다.

이런 세상이 ㅈㄹ 같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런 마음으로 그는 남의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수가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죽이지도 않았던 사람의 어머니에게, 엄청난 괴로움을 당한다. 남의 고통을 업고 가는 것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는 죄를 해방시킬 사명이라도 있었지만, 인간 정윤수에게는 그런 것은 없다. 단지 한 사람의 죄를 대신 업고 가는 것뿐이다. 그저 억울하게 죽는 사람일 뿐이기에, 이 사회는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마라. 다르게 생각하면 하루하루 죽어가는 사형수는, 나의 죄를 지고 가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하루, 하루 무시하고 나도 모르게 괴롭혔던 사람들… 원한들, 그 상처를 모두 업고,

그는 피라미드의 맨 아래층에서, 이 사회의 죄를 업고 가는 것이다. 그들을 기억한다면, 내가 사는 것이 이렇게 나태하고 추잡하지 않을 것이다.


정윤수는 사형수가 되었다. 이 때, 그에게 하루를 사는 것이 고통이었을까― 아니면 하루 빨리 죽는 것이 고통이었을까.

그런데 오늘 내일 죽을까 하는 사형수와 정신적 파탄자 문유정은 동일점이 많다.


상대적으로 문유정은 부자, 정윤수는 빈자다. 이 세상에서는 빈자도, 부자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다는 것이다. 이 두 명의 공통점은 사랑에 목마르지만, 그런 사랑은 이루어 질 수 없었고, 죽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모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었다.


그들에겐 똑같이 빼앗긴 것이 있었다. 윤수는 부모, 유정은 부모의 사랑과 자신의 순결. 그들은 그것을 잃고 살 의지를 잃어버렸다. 윤수는 처음 잃어버린 것 때문에 연쇄반응으로 고아원, 앵벌이, 소년원. 나쁜 곳만 지나다닌다. 그래서 나쁜 놈이 되어버린다. 상대적으로, 유정은 잃어버린 것이 적지만, 그녀 역시 점점 세월을 지나며 잃어버린 것이 점점 많아진다. 사실, 잃은 것은 마찬가지다. 한 번 등진 그의 삶이 그를 외면하고 있을 때, 유정은 평안하지만, 더 많은 것을 떨어뜨린다. 교수 노릇도 하고, 가수 노릇도 했지만, 그 모든 것이 그를 채울 수 없었다. 더 많은 것이 그의 품에 있을 때에 더 많은 괴로움을 당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없는 사람은 배부른 소리라면서 빈정댈지도 모른다. 없는 사람에게 차곡차곡 쌓아나가서 성공의 희망을 보여줄 수 있게 해준다면, 이 세상에서 원망하는 소리는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Les Miserables』의 스토리를 따라 갈 것이기 때문이다.


“형, 우리 나라 좋은 나라지, 나는 이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왠지 우리가 훌륭한 사람이 된 거 같애…….”

이 사회의 비행청소년 계도프로그램이 엉터리로 만들어진 것도 그들에게는 禍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들이 유일하게 배운 노래는 애국가 하나다. 그것을 부르면서 그들은 위안을 갖는다.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던, 그들의 원수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그들에게는 앞으로 나갈 힘이다.

그래서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보다 복 받은 사람이다. 있는 사람은 대부분 가치를 모른다, 그래서 타락해간다. 그에 비해 없는 사람은 아주 조그만 것을 받았어도 이 세상 천근만근보다 더 큰, 귀한 것을 가진 것처럼, 어떤 것을 가졌어도 그 가치를 아는 축복을 받았으므로.

다만 그들에게 희망의 빛이 주어졌다면, 장 발장처럼 희망을 써나갈 수도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이 둘은 그 빛이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세상은 참 빛을 많이 잃었다. 땅 투기나, 고액과외 경쟁이나 하는, 그들은 정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자신과 자식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지만 자식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문유정처럼, 뭔가 가득― 찬 세상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물질이란 것이, 정신이란 것이, 가지면 가질수록 만족이 안 된다.

부끄럽지만 노숙자나 걸인들을 외면할 때가 나도 많다. 반성을 하지 않는다거나, 앵벌이를 하고 있을거란 괜히 되도 않는 의심이나 하고. 나도 윤수와 같은 살인자를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장발장은 사랑을 알고 변한 다음, 이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일을 했다. 그러나 정윤수는 그가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갔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바꿀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이 소설이 남의 얘기인가? 나는 이 소설을 남의 이야기로 봐주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대통령마저도 사형수였다는 말은 현실을 뛰어넘어 말하는 바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문유정, 혹은 정윤수 그 중 어느 하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대통령이 사형수의 고통을 가지고 있었던 자기 자신을 잊고 사형을 집행한다, 는 것도 우리의 현실과 일치한다.

맨 마지막의 치매 노인, 그들을 양산했던 어머니, 비유적으로 살펴본다면, 그들을 만든 어머니는 바로 사회다. 그들에게 사회를 등지게 만들었고, 상처 주었고, 죄 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그러나 우리 사회가 그를 죽이고도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녀와 같이 매일 까먹는 병증을 우리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다시 또 하나의 윤수가 처형을 당하러 들어간다. 그녀는 윤수와 은수. 딱 중간쯤으로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문유정의 편견과 일치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편견과 너무 맞다. 딱 절반에서, 거기서 빗나갔다고 나쁜 놈 취급을 하고, 거기서 더 잘 살아갔다고 성실하다고, 그렇게 우리는 성실하다는 것을, 나쁘다는 것을 내세울 수 없는 상황에 있는 것이다.

강인하고 착했지만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선 강했던 윤수. 피해자였지만 세상을 미친듯이 미워했지만 마지막에 사랑을 했었던 그가

맨 밑에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에겐 빛만이 절실하게 필요했을 뿐이다. 다만 그것이 뵈지 않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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