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젊은시
김광선 외 지음 / 문학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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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랫분과는 생각이 다른 듯 하네요...

영풍에서 잠깐 이 책을 읽어보았었는데...

2002,2003,2004 여러 당선작들 중 상당수가  들어 있고...

...여러 시인들의 당선작을 합쳐놓은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매년 좋은 사람의 당선작을 모아본다는 의미는 좋지만...

당선작 말고 다른 문예지에 발표된 좋은 작품을 내거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이유로 해서 저는 신춘문예 당선시집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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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전집 1 - 시 김수영 전집 1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 민음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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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김수영의 시는 일반적으로 모더니즘적 시도라 말을 한다. 해방 직전의 ‘…이어라’ 식의 구투는 『김수영 전집』에 있는 시들에서는 잘 찾아보기 힘들다.

김수영의 시는 전체적으로 ‘생활’과 맞닿아 있다. 이 시를 보면 약간 그런 면이 있다.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장난을 한다


나는 발산할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反亂性일까

                          ― 「孔子의 생활난」(1947) 중에서


여기서 생활이 찾아보기 힘들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시에서 나는 ‘발산할 형상’, 즉 피어나려고 힘을 쓰지만,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렵다고 돌려 말하고 있다. 시인은 이 삶이 절대 살기 쉬운 것은 아니란 것은 안다. 그러나 먹기 쉬운 것을 찾는 것은 부인한다. 이러한 사고관은 그의 시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의 시를 이 관점에서 천천히 살펴보기로 하자.


2. 해방 직후의 시


웃음은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서러운 것일까

푸른 목

귀여운 눈동자

진정 나는 기계주의적 판단을 잊고 들어갑니다

[……]

이보다 더 추운 날처럼 나는 여기서 겨울을 맞이하다가

오랜 시간이 경과된 후에도

이 웃음만은 흔적을 남기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

시간에 달린 기이다란 시간을 보시오

내가 어리다고 한탄하지 마시오

                  ―「웃음」(1948) 중에서


웃음을 자기 스스로 짓는(작위적인) 일을 싫어하는 시인, 그런 웃음을 피한 그는 시련을 맞이한다는 것을 아나보다. 하지만, 웃음을 짓고 있어봤자 그런 웃음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신은 어리며 남은 긴 시간을 보라고 한다(그는 자신이 답답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나보다). 여기서 시인의 미래관은 비관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이 시인을 그리 만든 것일까?


아버지의 사진을 보지 않아도

비참은 일찍이 있었던 것

[……]


조바심도 습관이 되고

그의 얼굴도 습관이 되며

나의 無理하는 生에서

그의 사진도 무리가 아닐 수 없이


그의 사진은 이 맑고 넓은 아침에서

또 하나 나의 팔이 될 수 없을 비참이오

행길에 얼어붙은 유리창들같이

시계의 열두시같이

재차는 다시 보지 않을 편력의 역사……


나는 모든 사람을 피하여

그의 얼굴을 숨어보는 버릇이 있소

                  ―「아버지의 寫眞」(1953)중에서


시인의 삶이 아주 힘들었던 모양이다. 사진을 보지 않아도 그에게 ‘비참은 일찍이 있었던 것’ 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말이다. 그의 삶도 아버지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란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재차는 다시 보지 않을 편력의 역사’라고 말하지만, 맨 끝 행에서 그는 말을 번복한다. ‘그의 얼굴을 숨어보는 버릇’이 있다면서 말이다. 그는 힘들었던 과거(일제시대)를 무척이나 싫어하겠지만 과거를 보지 않고 현대를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꽃은 시련으로 피어나는 것처럼―

    

3. 전후의 시


이후의 시에서도 해방기의 생활에 대한 사고는 여전히 그의 시에서 지속되어 나타난다. 그의 삶은 해방 이후나 전쟁 이전이나 다 같은 시련이라서 그런 것일까? 이후에 나온 유일한 시집의 표제작인 「달나라의 장난」을 봐도 그렇다.


도회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別世界같이 보인다

                  ―「달나라의 장난」중에서


그는 속임 없이 사는 것이 정말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다’며 역설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요즘이나 옛날이나 솔직히 살면 뒤통수 맞는 세상이다. 뒷돈에 비자금, 뇌물 여러 가지로 시끄러운 세상이다. 맹렬히 돌아가는 것을 까맣게 서 있는 것으로 비유한 시인의 발상이 놀랍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맹렬히 돌아가면 세상에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으므로 문제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 팽이를 ‘別世界같이 보인’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별세계는 이데아, 즉 이상세계인 것이다. 꿈을 꾸는 듯 하지만 이 시에서는 시인의 반성도 들어가 있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 같은 시 중에서


시인은 반성을 하는 사람이다. ‘방심을 하여서는 안된다’는 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別世界의 別世界에 살기 위해 나 자신을 고쳐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현대인의 모양은 이 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람이란 사람이 모두 고민하고 있는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우매한 나라의 어린 詩人들이었다

헬리콥터가 풍선보다도 가벼웁게 상승하는 것을 보고

놀랄 수 있는 사람은 설움을 아는 사람이지만

또한 이것을 보고 놀라지 않는 것도 설움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의 말을 잊고

남의 말을 하여왔으며

그것도 간신히 떠듬는 목소리로밖에는 못해왔기 때문이다

설움이 설움을 먹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젊은 시절보다도 더 젊은 것이

헬리콥터의 영원한 生理이다

                  ― 「헬리콥터」(1955) 중에서


헬리콥터에서 현대인을 상징한다? 우선은 참 놀라운 상상력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렇게 대지를 흔들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것을 깨달은 것은 詩人이라고 그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헬리콥터가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 기체의 무거움이고, 정말 그것이 뜰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하지만 그 헬리콥터는 ‘풍선보다 가볍게’ 떠오른다. 시인은 이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도 놀라지 않는 사람도, 설움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 놀라는 사람은 자기의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에, 놀라지 않는 사람은 드디어 자신의 말을 찾아야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헬리콥터는 그런 젊음의 한 표현이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것도 시인이 아는 바이다.


자의식에 지친 내가 너를

막상 좋아한다손 치더라도

네가 나에게 보이고 있는 시간이란

네가 달아나는 시간밖에는 없다


평화와 조화를 원하는 것이

아닌 현실의 選手

[……]


연기의 정체는 없어지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필 꽃밭 넘어서

짓궂게 짖궂게 없어져 보려는

심술맞은 연기도 있는 것이다.

                  ―「연기」(1955) 중에서


연기는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 연기를 시인은 현실의 선수라고 말한다. 끝의 연에서 잠깐 변화를 시도하는 연기의 모습도 보이지만, 그것은 짓궂게 ‘없어져 보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인의 모습을 잘 그려놓은 것이라 하겠다. 다른 모양으로 돌파하려는 시도 나온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절벽」(1957) 중에서


폭포에 있는 물은, 어차피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런 폭포의 물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지는 물’이라고 말함과 동시에 ‘의미도 없이’, 그리고 ‘고매한 정신처럼’떨어진다고 말한다. 현대인은 폭포처럼 계속 나가떨어지며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또한 찬사를 받을 자격도 있는 것이다. 왜 찬사를 받아야 하는 걸까? 그 이유는 여기에서 드러난다.


나는 일손을 멈추고 잠시 무엇을 생각하게 된다

――살아 있는 보람이란 이것뿐이라고――

하루살이의 狂舞여


하루살이는 지금 나의 일을 방해한다

――나는 확실히 하루살이에게 졌다고 생각한다――

하루살이의 유희여

                  ―「하루살이」(1957) 중에서


보잘것 없는 하루살이의 삶을 보고 ‘살아 있는 보람’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하루살이는 그 하루를 미친듯이 뛰어다니기 때문이다. 그 모양을 보고 그것은 나의 일에 대한 방해이며, 그는 하루살이에게 졌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남짓해야 하루밖에 없는 그것의 삶에 비해, 그는 너무 풍족한 삶을 얻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삶을 한탄하며, 또한 찬사를 보낸다.


4. 4 ․ 19 전후와 그 이후의 시


4․19가 그에게 미친 영향은 적지 않은 것 같다. 『김수영 전집』안에서 보면 4․19가 끝난 직후, 무슨 혁명시처럼 직설적인 화법이 나온 시들이, 다른 시기보다 더 많은 저작이 그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


이제야말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1960. 4. 26) 중에서


그 놈? 아마도 이승만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 시는 전의 시와는 달리 상당히 직설적인 화법을 보이고 있다. 예전의 현대인의 아픔을 말없이 그려낸 그전의 시와는 달리, 이 시기를 전후로 그의 시는 직설적인 화법을 보인다. 어투도 상당히 거칠어졌다. 예전의 자유당 통치 시절을 그는 지독히도 싫어했나보다. 이 시에서는 4.26(지금은 4.19혁명이라 부른다)혁명을 무슨 천국이 온 것처럼 보는 것 아닌가 싶은 냄새도 있는데, 조금만 지나면 그것은 여지없이 부인된다.


기성 육법전서를 기준으로 하고

혁명을 바라는 자는 바보다

혁명이란 

방법부터가 혁명적이어야 할 터인데

[……]

불쌍한 백성들아

불쌍한 것은 그대들뿐이다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는 그대들뿐이다

최소한도로

자유당이 감행한 정도의 불법을

혁명정부가 구육법전서를 떠나서

합법적으로 불법을 해도 될까 말까 한

혁명을――

                  ―「육법전서와 혁명」(1960. 5. 25) 중에서


혁명을 일으킨 다음, 민주당 정부가 웬만큼 못했던가? 당쟁이 없었다라고 했다면 5․16의 명분은 적어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그의 시각이 웬만큼 현실적으로 보게 되었다고나 할까? 한데, 이 어투는 어떤 계기로 인해 조금 얌전해진다. 그 계기는… 바로 5․16쿠데타다.


깨끗이 버리고

[……]

내가 정말 시인이 됐으니 시원하고

[……]

이건 진짜 시원하고

이 시원함은 진짜이고

자유다

                  ―「신귀거래 2」(1961.6.12) 중에서


5․16을 계기로 그는 다시 현실의 시로 되돌아간다. 그의 시가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네가 그렇고

내가 그렇고

네가 아니면 내가 그렇다

우스운 것이 사람의 죽음이다

                  ―「신귀거래 7」(1961.8.5) 중에서


5․16쿠데타는 미완의 혁명인 4․19를 실패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고, 시인은 이런 세상에 대해서 절망한 것 같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이 세상을 비웃거나, 시인은 둘 중 하나를 고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진짜일까? 시인은 더욱 진지한 태도로 세상을 논하고 있다. 빠져나가는 것[解脫]이 아니라 풍자를 고른 것이다.


누이야

나는 분명히 그의 앞에 절을 했노라

그의 앞에 엎드렸노라

모르는 것 앞에는 엎드리는 것이

모르는 것 앞에는 무조건하고 숭배하는 것이

나의 습관이니까

[……]

동생뿐이 아니라

그의 죽음뿐이 아니라

혹은 그의 실종뿐이 아니라

                  ― 위와 같은 시


시인은 이 시대에 순응했다는 것을 돌려서 ‘그의 앞에 절을 했다’고 말한다.  ‘무조건 숭배’ 하는 것이 습관이라고 말하는 그다. 하지만 그는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좋을지 나쁠지는 아직 살펴봐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아프다’고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먼 곳에서부터」(1961.9.30)


아픔이

아프지 않을 때는

그 무수한 골목이 없어질 때


[……]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나의 발은 절망의 소리

                  ―「아픈 몸이」(1961)


4․19의 아쉬움이 너무나 큰 것 같다. 혁명은 관두고 이 시대에 그냥 순응해 버려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도 생길 법 할 것이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가? 시인은 이런 시를 쓴다.


시간이 나비모양으로 이 줄에서 저 줄로

춤을 추고

그 사이로

4월의 햇빛이 떨어졌다

[……]


어깨를 아프게 하는 것은

老朽의 미덕은 시간이 아니다

내가 나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


―그러나 혼색(混色)은 흑색이라는 걸 경고해 준 것은

소학교 때 선생님……

                  ―「백지에서부터」(1962.3.18)


4월의 햇빛은 더 말할 것 없이 4월 혁명을 말할 것이다. 이 시에서는 통증의 이유도 해명이 된다. 내가 쿠데타정부에 섞이려 하기 때문에, 나를 잊는 것이야 말로 아픔이기에 그것은 혼색은 흑색이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시인은 그 현실에 눈을 돌리고 현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혁명정부가 좋긴 좋은 건가보다….” 하는 보통 사람들과 섞이지 않기 위해서이다. 「만용에게」등의 시가 그렇다.


오늘은 기름진 피아노가

덩덩 덩덩덩 울리면서

나의 고갈한 비참을 달랜다

[……]

또 그 비참대로

값비싼 피아노가 값비싸게 울린다

돈이 울린다 돈이 울린다

                  ―「피아노」(1963.3.1) 중에서


피아노는 당시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피아노를 잘 다룬다는 것은, 현실을 잘 다룬다는 이야기와 상통할 것이다. 그 앞부분을 보자.


나의 새끼는 피아노 앞에서는 노예

둘째 새끼는 왕자다


피아노―즉 현실―를 모르는 사람은 노예가 되고, 아는 사람은 왕자가 된다. 이것은? 현실에 적응하는 사람은 잘 사는 사람이라는 결론이 남는다. 산업화가 진행되기 시작했던 60년대가 이 모양이었건만 70년대는 어떨꼬? 말 할 것도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나는 비참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삭막한 집의 삭막한 방에 놓인 피아노

그 방은 바로 어제 내가 혁명을 기념한 방

                  

자식들이 미래를 상징한 것이라고 하면, 지금의 나는 정신적인 세계를 상징한다. 지금의 나가 ‘거지’가 된 이유는 바로, 실패로 돌아간 혁명의 정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누군들 어때, 잘 먹고 잘살게 해주면 좋지―” 라는 식의 말이 통해먹는, 정신세계의 피폐화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정말 올곧은 사람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 보니!


절망은 나의 목뼈는 못 자른다 겨우 손마디뼈를

새벽이면 하프처럼 분질러놓고 간다

나의 아들이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다

[……]


마당에 서리가 내린 것은 나에게 상상을 그치라는 신호다

그 대신 새벽의 꿈은 구체적이고 선명하다

꿈은 상상이 아니지만 꿈을 그리는 것은 상상이다

[……]

오늘부터는 상상이 나를 상상한다


이제는 선생이 무섭지 않다

모두가 거꾸로다

                  ―「우리들의 웃음」(1963.10.11) 중에서


그래도 시인은 꿈을 버리지 않는다.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고 말하는 「절망」도 그렇다. 그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실망하지 않는 것일까?


거위의 울음소리는

[……]

웃는 얼굴을 더 웃게 하고

죽은 사람을 되살아나게 한다

                  ―「거위 소리」(1964.3) 중에서


거위 소리는? 그냥 꽥꽥이다. 누가 듣든 말든 그냥 내지르는 소리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리는 웃는 얼굴을 더 웃게 하고 죽은 사람마저 살린다고 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어떻게든 좋아지겠지, 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은 더러운 것을 씹은 표정일 수밖에 없다.


네 얼굴은 진리에 도달했다

어저께 진리에 도달했다

어저께 환희를 잃었기 때문이다

                  ― 「네 얼굴은」(1966.12.22) 중에서


환희를 잃은 네 얼굴이 진리에 도달했다고 한다. 기뻐하지 않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반성도 시작된다.


그대의 길은 잘못된 길이다

―세계일주를 하고 온 길은 잘못된 길이다

―세계일주를 떠났다는 것이 잘못된 길이다

너무나 먼 잘못된 길이다

너무나 많은 잘못된 나라다

                  ―「세계일주」(1967. 9.26) 중에서


세계일주? 꿈꾸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나, 김수영도 성공했다면 세계일주한 것처럼 들뜬 혁명의 꿈을 꾼 사람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하게 될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꾼 것은 ‘잘못된’ 것임을 그는 각성한다. 그는 생각 자체를 잘못했다고 말한다. 세상을 그리는 시를 쓰고, 심지어 「원효대사」가 등장하지만 이것을 깨는 것은 바로 죽기 전의 작품인 「풀」이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풀」(1968.5.29) 중에서


학창시절 때 심심치 않게 들은 시의 주제처럼, 그는 ‘각성한’ 민중의 힘을 알아버린 것이다. 이제 그런 민중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마지막 작품을 써놓고 무슨 극본처럼 떠났다….

 

선생님 말씀에, 시의 맛을 안 사람이라야 이 시를 제대로 읽을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시는 시 읽는 사람 가운데는 '중급자' 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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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의 생각 세계사 시인선 124
이규리 지음 / 세계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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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저 여자 내 생을 설명하는 거라면

누군가 그 아래 의자를 놓아주지 않을까


[……]

서서 죽는 꿈

어찌해도 저 生은

의자가 없었다

비명조차 잘라먹은,

                    ―「마네킹」 중에서


이 시집에서는 욕구와 같은 주체가 많이 발견된다. 마네킹은 그런 시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이 생은 사회에 원인이 있는 것인가? 시인 자신에 대한 문제의식도 그렇다 치겠지만, 이렇게 되어버린 것은 사랑의 변질에도 원인이 있는 듯하다.


한데 쏟아 넣고 보글보글 끓이면 농심라면이다

퉁퉁 불어터진 면발과

식은 국물로

허기를 채우던 밤은 이제 가라

[……]

복제된 사랑 안에서 오늘 누가 울고 있나

추억도 나날이 소비되는 것

[……] 

쇼핑백 속 훌쩍거리는 비애덩어리들

[……]

대량 생산된 코카콜라처럼 마셨던

여름이 있을 뿐

                      ―「앤디 워홀의 생각」


「앤디 워홀의 생각」은 사랑에 대한 단상을 늘어놓고 있다. 과학문명이 이 사회를 발전시키기도 했지만, ‘대량 생산’ 된 코카콜라와 농심라면은 불어터져―즉 붓기와 허세만 가득한―이 세상이 사랑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현대문명을 말하고 있다. 그런 곳에서 추억은 나날이 소비된다. 이런 세상에서 일그러지거나 불량이 되어버린 추억이 없을 리 만무하다. 우리는 허기를 채우려고 라면을 먹지만, 밤에 먹는 라면은 얼굴을 붓게 만든다.


아주 조금씩 울고 가는 아이도 있다

저쪽은 이제 내가 잊어야 하는 곳

내 몸은 너무 커서 자전거 바퀴나 유리지붕으로 들어갈 수 없다

내가 하는 놀이는 그림자를 옮기는 일

                    ―「그림자 놀이」중에서


그의 추억은 불량이다. ‘아주 조금씩 울고 가야 하는 아이’에서 보듯, 이 세상은 울고 싶은 것을 다 울어버리자면 그 울음이 그칠 날이 없다. 그의 사랑은 성숙하여서 ‘자전거 바퀴’나 ‘유리지붕’으로 들어가는 등, 천진성을 상실하고 있다. 무거워져서 그 흔한 ‘그림자를 옮기는 것’이 그의 놀이의 전부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무거워진 시인은 아직도 울고 있다.


꽉 조인 하루가 있어요 그대는 내게 소화불량이거나 체지방이에요 [……] 그리움이 막 조여와요 그건 썩지 않는다 말하지 말아요 허연 콜레스테롤 같은 시간 도려내고, 내 흰 뼈와 살들만 남길 거예요

                      ―「코르셋」 중에서


시인은 다 자란 사람이다. 꽉 조이는 코르셋 같은 세상에서 탈출을 꿈꾼다. 그의 하루는 꽉 조여 있으며, 그것은 소화불량이라고 느끼며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움은 썩지 않는 것을 안다. 시인은 그것을 벗겨 내려고 용을 쓰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것인가? 벗겨 내려면 일단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추억은 껌 같아서 무조건 긁개를 들고 눈을 감고 죽어라 긁어내면 긁히지 않는 것이다.


상처는 아물어 갈 때 자꾸 가렵다고 한다

[……]

나는 저 상처의 무게를 안다

다른 사람의 삶에 간섭했던 허세를 안다

어디가 가려운 것은 부끄러움을 보는

다른 증세이다

[……]

긁어 덧나지 않게 나를 견디는 일

                      ―「가려움증」 중에서


시인은 이 통증이 ‘가려움’ 이라는 것을 안다.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간섭해서 생긴 상처일 수도 있고, 부끄러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인은 애초에 뭐라고 했던가? ‘상처는 아물어 갈 때 가렵다’고 했다. 이미 시인은 아픔에 대한 고찰이 끝나있다. 다만 이것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아문 상처를 뚫고 나오는 연둣빛 잎사귀

망설이던 등을 낯선 시간이 밀어주었다

                      ― 위와 같은 시


이미 시인은 기나긴 시간에 의해 치유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뚫고 나갈 자신은 없고, 주저주저― 시인은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인 듯하다. 이 시도 똑같은 맥락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일찍부터 공허를 품고 다닌 게 아닐까.


[……] 빈틈으로 보이는 안과 밖, 어쩌면 나는 오래 전에 분홍빛 꽃이었는지 모른다.

                      ― 「재촉하다」 중에서



이미 꽃이 되어 있는 자신을 각성하지만, 나는 일찍부터 공허를 품고 있었다. 그 공허를 버리기 위한 노력이 절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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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문학과지성 시인선 9
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7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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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시인의 시는 두 갈래의 윤곽을 드러내보이고 있는 것 같다. 몇 주 전 같이 공부하던 선생님의 얘기로는 시인은… 교수가 된 뒤로 퇴보하고 있다나…. 내 생각으로는 『길의 침묵』까지는 모든 시가 균질을 유지하고, 어떤 시인보다 안정감 있고 좋은 시를 써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문 시인 형님(형식상으로는 후배님)이 김명인 특집으로 토론할 때 말씀하시기를, 정반대의 말을 하고 계셨다.

앞의 세 개와 뒤의 꺼가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나… 아무튼 사상적으로 『동두천』(시집으로 토론할 때엔『물 건너는 사람』이 제외되었다.)은 ‘어둡다’에 속한다. 맨 마지막 시를 보자


은빛 빛살이 가득 담겨 와

아저씨의 고함 소리가 흥겹게 뱃전을 두드렸을 때


문득 바람이 일고 일시에

파도가 바다를 가로질러 곤두박질 쳐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우뢰 같은 주먹이 철썩

뱃전을 갈기고 황홀한 물보라가 갈라서


[……]

가슴에 섬뜩 와 닿는 까집힌 배의 밑창이

또 한번 솟구치면서 如反掌으로 뒤집혀 가고

                    ―「바다 및 일기」 중에서


정말 슬프게 하기 위해선 기쁨이 필요하다. 어부들은 힘차게 달려나가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물보라가 일고 배는 손바닥 뒤집히듯이 부수어진다. 이 자연재해야 요즘에 어쩔 수 없는 일로 생각한다고 해도, 그의 시는 곳곳에서 어둠이 그려졌다.


고래는 눈을 뜬 채 누워 있다 聖者처럼

옆구리에 부러진 작살을 꽂고

흰 가슴을 드러내고

잘린 지느러미 곁에 우리들이 무심히 보고 있는

피를 조금 내비치며

                    ―「고래 Ⅰ」 중에서


활강해야 할 고래는 작살에 꽂혀 누워 있다. 이 고래를 잡은 우리의 현실이 고래를 잡았으니 압도될 것이다 하면 그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멍한 눈빛이다.


사람들은 흩어지고

흩어지며 저녁 무덤인 우리들이

저렇게 자지러지는 파도 소리에 숨죽이는 동안

고래는 다시 묶여서 차에 실려 떠났다

그리고 우리들이 남아서

새로 낳은 아이들만 비겁하게

캄캄한 풍경 속으로 바칠 뿐

                    ― 위와 같은 시.


후후… 고래가 이렇게 험악하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에 놀랄 수도 있다. 하나, 정말 슬픈 것은 따로 있다. 「동두천」 연작과 「嶺東行脚」 연작이다.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 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


[……]


이 강변의 세상 헛된 강변만이

오로지 진실이고 너의 진실은

우리들이 매길 수도 없는 어느 채점표 밖에서

                    ―「東豆川 Ⅳ」 중에서


아버지, 밤이면 아메리카를 꿈꿔도 될까요?

                    ―「東豆川 Ⅸ」 중에서


(이것이 모두는 아니겠지만)이것에 의하면 슬픈 현실은 저 대단한 나라 ‘아메리카’ 때문이다. 이 시집이 나왔던 것이 79년임을 감안하면 그 사고가 엄청나게 대담한 것이었다. ‘양공주’, ‘주한미군’, ‘꿀꿀이죽’ 등등 여러 단어가 미국과 관련되어 나온 단어들이다. 현실에 안주하고 살더라도 이 현실은 아주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항상 당하고 힘들어하지만 끊임없이 동경함, 약한 마음 가운데서도 강해지고 싶은 것이 우리네 마음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기에 사람들은 슬퍼하고 있다.

현실절망이나 반항으로 끝났을 지도 모르나, 그는 ‘현실 안에서의 저항(혹은 순응)’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그런 ‘소극적’ 극복의지가 있기에 이 시는 더욱 서글퍼진다.


파도에 가려지는 순간마다 수없이

지우고 켜지고 또 지워지며

어둠에 묶인 어둠들이 떠오른다.

지난 여름 내내 달아 설치던

철없이 들뜬 친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嶺東行脚 Ⅵ」중에서


친구들은 철없이 들떠 있다. 시 뒤의 구를 보면 그들이 처한 현실이 그다지 맑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 아니면 달리 몸 부딪힐 곳 없어서

스스로 몸부림쳐 부서지는 물거품에 흩어지며

원양선을 탈까, 더러 낚시에 물린 물고기로 퍼득일까.

                    ― 같은 시.


그들의 미래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들떠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하지만 시인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이것은 무엇이 주는 것일까?


계절을 받고 또 계절을 내주고 섰는

산 속으로 들어서며

가을이 가고 있군 가을이

풀잎 위에 떨구는 산여치의 울음

바람음 개개울 위에 새 주렴을 펴고 있다

뒤따라가며 우리도 또한 흩어질 것이냐?

묵묵히 견디고 섰는

더 괴로운 물풀도 만나고 싶다

괴로움도 이제는 괴로움이 아니라고

친구여 맨살에 끊임없이 감기는 물소리

홀로 흐를 때

물소리는 한결같이 차갑게 스민다

                    ―「편지」 중에서


‘더 괴로운 물풀’, 최악의 상황인 이들에게 ‘더 괴로운’ 무언가를 찾아낼 여지가 있을까? 그들은 더 괴로운 무언가를 보고 힘을 얻는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조금만 괴로워도 짜증이 나는 사람들이다. 이 시집은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더 밝다. 더 바람직하다.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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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 아래 잠들다 창비시선 229
김선우 지음 / 창비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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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못 그의 시를 봤을 때(『내 혀가 입 속에 있기를 거부한다면』)는 정말, 당황했다. 너무나 표현이 성적인 묘사를 쓰면서도 그런 마음에 참, 다가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문단에서 주목받던 시인이었으나, 표현도 눈엔 그럭저럭(그 시절 나는 눈에 튀는 상상력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 시집이 그냥 야한 이야기로 보였음에는 너무나 당연하다.)이라, 한참동안을 덮어둘 수밖에 없었다. 시안이 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나 보다. 『도화 아래 잠들다』를 샀는데, 역시 같은 이유로 덮어버렸다. 그녀가 현대문학상을 받고, 올해의 좋은 시까지 올라오는 수준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 반면 한참동안 어리둥절한 표현으로 엄청난 폄하를 받고 충격을 받고 있었다. 요즘 나의 시는 일견 괴팍한 상상력을 벗어나, 큰 테두리에서의 기교을 시도하고 있는데, 상당수의 경우가 부모님의 사랑이나, 가족의 사랑이다. 지금까지 시를 쓰면서 그 시를 좋게 생각한 적은 없다. 오히려 ‘사기’라고 폄하하면서, 웃어넘긴 것이 사실이다. 내 마음이 내가 만든 시를 받아들일 만큼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두어 달 전쯤에 그의 시집을 다시 꺼내 읽게 되었다. 그때서야 이 시가 눈에 보였다. 첫 시 「민둥산」을 보자마자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민둥산의 모습을 온갖 자연물들의 관계함으로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그저 관계로써만이 아니라, 그것이 아름답게까지 보이기 시작하였다. 올해의 좋은 시로 올라왔지만 시큰둥했던 「능소화」역시, 꽃에서 자궁을 보게 되는 색다른 체험이었다. 단지 야한 시어를 쓰는 시인이 아니라, 어느 평론가의 표현대로 모성의 시인*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보인 시선의 차이는 사랑을 모르고 알고의 차이 같다.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은 초기 시집이지만,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만한 충격과 힘과 ‘낯설게 하기’적인 표현을 가진다. (백미혜의 『에로스의 반지』라는 시집에서도 여자의 몸을 묘사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시집은 사람들이 낯 뜨겁게 보는 그런 모습을 제거하였다.)문단의 주목을 받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낭중지추(囊中之錐)이기 때문이다. (최영미 시인의『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주목을 받은 것과 비슷한 경우다.)

『도화 아래 잠들다』는 큰 테두리에서는 웬만한 상상력을 능가한다. 꽃도 여자의 몸이요, 민둥산도, 바다도, 정말 시의 세계는 끝없고 넓다. 처음 본 사람들은 그의 시가 야해 보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단편적인 표현으로 보자면 ‘젖꼭지’, ‘항문’, ‘오줌’, 전체적인 스토리로 봐서는 관계를 하는 장면, 월경, 소변을 보거나, 옷을 벗는 등, 보기 낯 뜨거운 장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시적 의미로 풀이하면, 단지 외설로 보기 보다는 항상 진실된 고통을 봐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석남 시인의 강연회에 간 적이 있다. 장석남 시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시는 감정의 현현(顯現)이다. 감각적으로 그 대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예를 들어 ‘사랑’이 아니다. 객관적이고 남들도 알아볼 수 있는 것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그냥 그의 시적인 이미지만 보자면 그가 그리고 있는 것은 몸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주제 없는 시가 있을 수 없다면, 주제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도화 아래 잠들다」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날 도화 아래’ 같은 표현처럼 여성들이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딛고 목적을 끝내 이뤄낸 한 마디로 ‘위대한 여성’ 들의 아픔과 위대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 『페넬로페의 옷감짜기-우리시대 여성시인』- 김용희의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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