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 문학과지성 시인선 9
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7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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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시인의 시는 두 갈래의 윤곽을 드러내보이고 있는 것 같다. 몇 주 전 같이 공부하던 선생님의 얘기로는 시인은… 교수가 된 뒤로 퇴보하고 있다나…. 내 생각으로는 『길의 침묵』까지는 모든 시가 균질을 유지하고, 어떤 시인보다 안정감 있고 좋은 시를 써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문 시인 형님(형식상으로는 후배님)이 김명인 특집으로 토론할 때 말씀하시기를, 정반대의 말을 하고 계셨다.

앞의 세 개와 뒤의 꺼가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나… 아무튼 사상적으로 『동두천』(시집으로 토론할 때엔『물 건너는 사람』이 제외되었다.)은 ‘어둡다’에 속한다. 맨 마지막 시를 보자


은빛 빛살이 가득 담겨 와

아저씨의 고함 소리가 흥겹게 뱃전을 두드렸을 때


문득 바람이 일고 일시에

파도가 바다를 가로질러 곤두박질 쳐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우뢰 같은 주먹이 철썩

뱃전을 갈기고 황홀한 물보라가 갈라서


[……]

가슴에 섬뜩 와 닿는 까집힌 배의 밑창이

또 한번 솟구치면서 如反掌으로 뒤집혀 가고

                    ―「바다 및 일기」 중에서


정말 슬프게 하기 위해선 기쁨이 필요하다. 어부들은 힘차게 달려나가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물보라가 일고 배는 손바닥 뒤집히듯이 부수어진다. 이 자연재해야 요즘에 어쩔 수 없는 일로 생각한다고 해도, 그의 시는 곳곳에서 어둠이 그려졌다.


고래는 눈을 뜬 채 누워 있다 聖者처럼

옆구리에 부러진 작살을 꽂고

흰 가슴을 드러내고

잘린 지느러미 곁에 우리들이 무심히 보고 있는

피를 조금 내비치며

                    ―「고래 Ⅰ」 중에서


활강해야 할 고래는 작살에 꽂혀 누워 있다. 이 고래를 잡은 우리의 현실이 고래를 잡았으니 압도될 것이다 하면 그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멍한 눈빛이다.


사람들은 흩어지고

흩어지며 저녁 무덤인 우리들이

저렇게 자지러지는 파도 소리에 숨죽이는 동안

고래는 다시 묶여서 차에 실려 떠났다

그리고 우리들이 남아서

새로 낳은 아이들만 비겁하게

캄캄한 풍경 속으로 바칠 뿐

                    ― 위와 같은 시.


후후… 고래가 이렇게 험악하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에 놀랄 수도 있다. 하나, 정말 슬픈 것은 따로 있다. 「동두천」 연작과 「嶺東行脚」 연작이다.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 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


[……]


이 강변의 세상 헛된 강변만이

오로지 진실이고 너의 진실은

우리들이 매길 수도 없는 어느 채점표 밖에서

                    ―「東豆川 Ⅳ」 중에서


아버지, 밤이면 아메리카를 꿈꿔도 될까요?

                    ―「東豆川 Ⅸ」 중에서


(이것이 모두는 아니겠지만)이것에 의하면 슬픈 현실은 저 대단한 나라 ‘아메리카’ 때문이다. 이 시집이 나왔던 것이 79년임을 감안하면 그 사고가 엄청나게 대담한 것이었다. ‘양공주’, ‘주한미군’, ‘꿀꿀이죽’ 등등 여러 단어가 미국과 관련되어 나온 단어들이다. 현실에 안주하고 살더라도 이 현실은 아주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항상 당하고 힘들어하지만 끊임없이 동경함, 약한 마음 가운데서도 강해지고 싶은 것이 우리네 마음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기에 사람들은 슬퍼하고 있다.

현실절망이나 반항으로 끝났을 지도 모르나, 그는 ‘현실 안에서의 저항(혹은 순응)’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그런 ‘소극적’ 극복의지가 있기에 이 시는 더욱 서글퍼진다.


파도에 가려지는 순간마다 수없이

지우고 켜지고 또 지워지며

어둠에 묶인 어둠들이 떠오른다.

지난 여름 내내 달아 설치던

철없이 들뜬 친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嶺東行脚 Ⅵ」중에서


친구들은 철없이 들떠 있다. 시 뒤의 구를 보면 그들이 처한 현실이 그다지 맑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 아니면 달리 몸 부딪힐 곳 없어서

스스로 몸부림쳐 부서지는 물거품에 흩어지며

원양선을 탈까, 더러 낚시에 물린 물고기로 퍼득일까.

                    ― 같은 시.


그들의 미래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들떠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하지만 시인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이것은 무엇이 주는 것일까?


계절을 받고 또 계절을 내주고 섰는

산 속으로 들어서며

가을이 가고 있군 가을이

풀잎 위에 떨구는 산여치의 울음

바람음 개개울 위에 새 주렴을 펴고 있다

뒤따라가며 우리도 또한 흩어질 것이냐?

묵묵히 견디고 섰는

더 괴로운 물풀도 만나고 싶다

괴로움도 이제는 괴로움이 아니라고

친구여 맨살에 끊임없이 감기는 물소리

홀로 흐를 때

물소리는 한결같이 차갑게 스민다

                    ―「편지」 중에서


‘더 괴로운 물풀’, 최악의 상황인 이들에게 ‘더 괴로운’ 무언가를 찾아낼 여지가 있을까? 그들은 더 괴로운 무언가를 보고 힘을 얻는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조금만 괴로워도 짜증이 나는 사람들이다. 이 시집은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더 밝다. 더 바람직하다.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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