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이 키우는 나무 시작시인선 87
김완하 지음 / 천년의시작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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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체적이라기 보다는 부분적으로 이끌리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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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의 역사 창비시선 280
최금진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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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세태를 잘 찌르고 있는 책이다. 불신에 이르고 있는 것이 다소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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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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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야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 시작점이 된 책이다.

처음부터 이 책은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역시 노벨상 수상작이었던 '야만인을 기다리며'(쿳시)의 사색을 기대했던 탓인지 말이다. 점점 읽을 수록 스토리의 줄기가 그다지 잘 잡히지 않았다. 다만, 이 작품의 사색의 깊이는 기대 이상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그냥 넘길 수 있는 페이지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좋은 표현의 페이지를 살짝 접고 페이지를 넘어가자면, 책의 1.6~8배는 넓어졌을 것이다(이 책 자체를 그냥 접지 않고 둬도 될 정도였다). 그런데 곳곳의 의미가 잘 이해는 되지 않았다. 새로운 인생은 '사고'다. 그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어떻게 경험했는가에 대한 기록도 잘 보았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것이라서 실제와는 약간 차이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거의 중말반에 사랑에 대한 작가의 나름대로의 정의가 나오는데, 나는 그것에 별로 공감을 못느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소설은 어떻게 써야하는 가를 말해주는 듯 했다.

나의 독법을 말해보겠다. 한 문장의 주제를 찾는다. 그 주제에서 하나의 질문을 연상해본다. 거기에서 나온 주제를 뒷 문장과 접합해본다. 그것이 질문인지 아닌지 따져보고 그것에 대한 반응을 결정해 의미를 내놓는다. 그러면 질문과 대답, 대답의 질문, 이런 식으로 사색의 정도가 나온다. 이것은 사실상 시를 읽는 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문학은 결국 경계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라 시의 독법이 쓰인 것인지 모르겠다. 김연수 님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살짝 읽어본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도 그런 식으로 읽어보면 상당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느껴진다. '묘사'가 돋보이기 때문에 띄는 작품과 '캐치'를 잘 한 작품, '사색'이 도드라지는 작품. 이것은 자세히 읽어본다면 알 수 있다. '사색'을 잘했다면 '캐치'를 잘 해낸다. 그러나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은 '깊이'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이 작품의 묘사를 보노라면 '온다 리쿠'의 '흑과 다의 환상'과 같은 '색다르다' 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다소 진부해보이는 표현들도 몇 군데 있다! 그러나 사색의 깊이로서 이 점을 커버하고 있다. 얼마나 노력하면 익숙한 표현도 용서되는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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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안을 걷다 시작시인선 62
김병호 지음 / 천년의시작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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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대 시절의 은사님이다.

그분이 맨 처음 하시던 말씀은,
이 시간을 기다리면서 소화불량에 걸렸다고 하셨다.

는 말이 제일 기억난다.

이 분의 시를 감히 재기보단,
먼저 선생님이 내 시의 버팀목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별것 아닌 내 시를 잘봐주셔서 이렇게나마 살아있노라고.

거의 학기가 끝날즈음 선생님이 수업을 위한 카페를 닫으면서
놀러가게 되면 홍제쪽에서 자주 계시다 하니 전화도 한번 해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찾아가 본적은 한번도 없지만...

한번 뵙게 되면 무슨 말을 할지 한마디도 생각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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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문학동네 시집 41
박남준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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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가 도무지 써지지 않는다. 아니 시 쓸 의지가 부족하다. 그럴 때, 나는 내가 만든 말을 되씹어보려고 생각하는 중이다. “내 말로 얻은 사물들의 새 생명을 생각하라”는. 그것은 창조의 기쁨, 아니, 발견의 기쁨이다―발견을 또 하나의 창조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시라는 것의 목적도 어차피 감정 혹은 주제의 전달에 있는 것이다. 그런 관계로, 사랑을 그리는 시는 여타 일반 시보다 많이 뜰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허무한 것을 그리기가 쉬울까? 사랑할 때의 감정을 그리기가 쉬울까? 뭐라고 말하기 쉽지는 않겠지만 요즘 노래들의 가사를 보면 사랑이 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랑이 뭔지 쉽게 말하고 다니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에서 출발한 사랑은 대량생산되어 폐기처분되고 있다. 사랑이 흔하다고 여기는 시대야 말로 정말 찌든 세대다.

사랑이 넘치고 넘쳐서 이 세상이 너무나 환하다. 그러나 정작 사랑은 그 빛의 따스함을 잃었다. 왜냐? 대량생산된 사랑―얼굴이 예쁘다, 혹은 느낌이 좋다, 돈이 많다, 혹은 단기간의 파트너, 그냥 쓸쓸해서 등등의 여러 가지 이유다―은 제대로 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이 전부는 아니지만 주류기도 하다. 지금처럼 얼짱 열풍이 부는 때가 없다. 돈 많고 개성적으로 생긴 연예인의 여자친구는 돈에 혹한 걸로 의심당한다. 하나도 진실한 사랑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무언가에 의한 거품이다. 금방 갈라질거다, 라는 식의 루머만 가득하다. 언론은 잘하면 띄워주고 못하면 지옥으로 떨어뜨린다. 현대 사회엔 격려라는 게 그리 많지 않다.

요즘 사랑은 무척 육체적인 사랑이 많다. 그저 관계만을 위한 사랑, 불륜이 뜨는 시대. 동거만 전제로 하는 여자. 섹시 컨셉이 지금만큼 불티나는 때가 없다. 그리고 요즘은 싱글맘도 하나의 스타일로 여겨진단다. 남자는 싫고 아이만 좋은.

남성 혹은 여성의 편향적인 주의가 나타난 것도 그렇게 대량생산된 사랑 때문은 아닐까.

내가 리뷰를 썼던 지미의 『달과 소년』이란 책을 읽어보시라. 그 책엔 대량생산된 것의 아픔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진정한 사랑은 꽉 붙들고 있는 것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질린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다. 시라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 혹은 관념에 집착하여 그 사물의 끝없는 가능성에 집착하여 많은 것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각설하고, 이 시인의 시를 보노라면, 사랑보다는 허무에 가깝다. 그런 것에 대한 반성이라고나 할까?


사랑이었지 가득 찬 마음으로 일어나는 사랑

그리하여 소나무는 자라나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바람을 타고 굽이치는 강물 소리 흐르게 하고

새들을 불러모아 노랫소리 들려주고


뒤돌아본다

산다는 일이 그런 것이라면

삶의 어느 굽이에 나, 풀꽃 한포기를 위해

몸의 한편 내어준 적 있었는가 피워본 적 있었던가

―「아름다운 관계」


시인은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갖고 있다. 또한 그렇게 살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있다. 이 시편의 나머지는 그렇게 살지 못했던 시인의 투쟁록이다.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혔던, 역경의 기록이다. 그래서 시인은 모든 열매들을 아픔으로 기록하고 있다. 시의 한 절씩을 따오면 한 가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어지럽다 타래난초 때문이다 안간힘으로 비틀어야만 꽃을 피울 수 있는가 비틀린 것만이 타래난초인가

        ―「타래난초와 한판 붙다」


단풍처럼 붉은 각혈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던가

        ―「무릎을 꺾는 사내」


꽃숭어리째 붉은 동백이 긴 봄밤을 끝내 참을 수 없다는 듯

땅바닥에 뚝뚝 목을 내놓는다

        ―「미황사」

                      

오호라, 시인의 성숙에 대한 생각이다. 성숙해진 것은 이리도 아프게 온다. 비틀어진 것만이 꽃을 피우는 ‘타래난초’, 나의 아픔으로 피를 쏟은 다음에야 성숙한 ‘단풍’, 성숙해서 떨어진 ‘동백’. 그렇게 열매를 맺은 것도 마찬가지로 아프다. 아픔의 열매는 아픔일 수밖에 없다.


선홍빛 수줍은 연지곤지 새색시로 피었습니다

흰 눈밭에 울컥 각혈을 하듯 가슴도 철렁 떨어졌습니다 그려

        ―「선운사 동백꽃」


여기서 ‘각혈’이란 표현에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각혈’은 심하게 고통스러워하다 토해진 피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동백꽃은 누가 뭐래도 아름다운 결실이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 그것은 아픔이다. 그 상태가 유지가 되지 않기 때문일까?


시인의 생에 대한 인식을 정리해 주는 표현이 있다.


생애를 걸어 단 한 번 피우고 죽는 꽃이 있다

꽃을 피웠다고 온통 몸이 잘리운 꽃밭이 있다

        ―「대밭 그 꽃밭」


상처는 상처이지만, 나대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생은 그 자체로 상처이니 너무 괴로워하지도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시 그 안타까움에 있는 것 같다. 사랑이 있다면 이렇게 힘들게 살아도 위안이 되었을 것을, 사랑을 위해, 사랑 때문에 조금도 비우지 못했던 나에 대한 아쉬움...

 

조금 손가는 대로 쓴 듯한 글도 있고 감상적이기도 한 듯한데… 표현도 좋고 힘이 있다. 좋은 시를 읽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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